|
무대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歌人이었던 그에게도 남 모르는 숨은 고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크고 작은 한계적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는 고독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다. 살을 붙이고 사는 가족일지라도 그것을 나누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변할 수 없는 實存이다. 오죽하면 한 여름 나무그늘에서 베짱이 우는 걸 두고 사람들은 우화를 만들어 놓고서 게으르고 노는 것만을 좋아한다고 했을까! 그가 家長으로 살아내야 했던 작은 세계는 그에게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남의 家庭事이기에 함부로 무어라 속단해서 말하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이다. 그의 아리송한 死後 루머도 그렇고, 발달장애를 앓았던 외동딸도 그의 여린 감수성을 짓누르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죽음에 까지 이르렀던 그의 아픔을 이 세상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든 막다른 고독한 절망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은 인간이란 강한 듯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에게만 유별난 사연은 아니다.
이렇듯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그의 노랫말은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TV에 얼굴을 팔지 않고서도 김광석은 1,000회가 넘는 콘서트를 통해서 스타가 되었고 팬들과 교감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기록이며 고집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시인 정호승과의 멋진 작업을 시도했지만, 유작으로 남겨야 했던 노래가〈부치지 않은 편지〉였다.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풀잎은 스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다 속으로 무덤도 없이
새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다 속으로 무덤도 없이
새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그대 잘 가라
그대 잘 가라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시려면 상단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서른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 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워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워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또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上)
시대의 감성을 일깨운 우울의 미학
해맑은 미소로 기억될 '거리에서'
수줍은 듯한 미소가 근사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그는 사실 스타가 될만한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TV 등 주류 무대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았지만 발표하는 앨범마다 소리 없이 20~30만장이 팔려나간 언더그라운드 인기 가수였다. ‘너무 우울하다’는 이유로 한 때는 방송 금지 되었던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1980년대 이후에 군대에 다녀온 젊은 청춘은 한번쯤은 노래했던 그의 대표곡이다. 그는 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첫 가수이다.
이등병의 편지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한국교원노조연합회)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5살 때인 68년에 서울로 올라와 창신 초등학교를 다녔다. 왜소한 체격이라 ‘반토막’, ‘파김치’란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IQ 130의 영특한 아이였다. 76년 경희중학교에 입학해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를 읽게 되었다. 79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 합창단원이 되었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면서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민중 가요집 ‘젊은 예수’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이란 노래를 부르다가 울었다. “당시 우연히 접한 한돌, 김민기씨 등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고 노래 서클에 발을 들여 놓았다."
못생긴 얼굴
그래서 3학년이 된 84년 서울지역대학생의 노래연합서클인 ‘연합메아리’의 멤버가 되어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김민기의 주도로 대학가 노래 운동의 주역들이 규합하여 만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창단 멤버가 되어 1집 앨범에 참여했다. 민중 가수가 된 것이다. 이후 85년 1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큰 형이 사망해 6개월 복무를 하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는 노래 인생을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이처럼 투쟁성을 앞세운 민중 노래 운동에 열심이던 그에게 본격적인 대중 가수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찾아왔다.
녹두꽃
1987년 여름, 음악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 없이 녹음한 습작들을 록 그룹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이 듣고 음반 제작을 주선해 주었다. 그 음반이 바로 1988년에 발매된 ‘동물원’의 1집이다.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고 생각했다”는 김광석의 말처럼 아무 기대를 않고 세상에 던져진 그의 노래 ‘거리에서'와 ‘변해가네'가 빅히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어리둥절했던 그와 동물원 멤버들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거리에서’와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이후 동물원의 일원으로 많은 공연에 참여했다.
변해가네
용기를 얻은 김광석은 89년 10월, 솔로가수로 독립하여 기성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자작 곡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첫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그리고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1년 간 연애를 해 오던 서혜순과 1990년 결혼을 했다. 이후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발표했다. 92년엔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프로의 DJ가 되어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때 외설 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 마광수교수가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징계를 먹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받았다. 이 사건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사랑했지만
주류 가수 활동이 아닌 콘서트와 음반을 통해서 인기 가수로 성공한 그는 “얼떨떨하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노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보다 노래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다소 약화돼 가는 것을 느낀다.”며 성공적 변신의 달콤함을 스스로 경계했다. 그는 특유의 소탈하고 진솔한 무대 매너로 관객들과 거리감을 없애는 성숙한 공연 문화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93년 7월,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열었다. 또한 나중에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부르기 1집’이 그 징표다.
광야에서
이어 94년에는 비관주의적 몸부림을 담은 ‘ 서른 즈음에’와 ‘일어나’를 수록, 그의 음반 중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4집을 발표하며 비로소 자신만의 음악 색깔을 찾아갔다. 1994년 9월엔 EBS FM에서 ‘음악의 세계’ 진행을 맡았다. 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흐름을 하나의 앨범으로 계보를 정리한 '다시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히트를 터트렸다. 또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자리 매김을 있게 해 준 명반이었다.
일어나
[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下)
소극장 라이브 문화 부활에 혼신
홀연히 세상 등진 후 더욱 빚나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다.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 11월에는 미국 팬실베니아 대학 ,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은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들어 항상 만원을 이뤘던 흥행보증 수표였다. 그로 인해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음반과 공연 수입으로 홍대 앞에 4층짜리 건물을 소유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19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 또 자살 가요계 충격'이란 기사가 눈에 박혔다. 팬들은 경악했다. 새벽 4시 30분께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그는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부인 서씨는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맥주 4병을 나눠 마신 뒤 혼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16계단 중 8번째 계단에서 굵은 전기 줄에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팬들의 가슴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심어놓고 그는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캐나다 유학문제 고민, 음악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발생한 조울증, 여자 문제, 심지어는 타살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날들
더욱이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 서진원에 이어 김광석의 죽음과 ' 서태지의 아이들'의 돌연 은퇴 선언 등이 줄을 이어 벌어지자 조직폭력과 연관설까지 불거져 나왔다. 이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김광석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이 이루어졌고 경찰 전담반이 긴급 편성이 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들은 급격하게 비대해진 대중문화 속에서 연예인의 자기관리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노래패 ' 노래 마을'의 대표 백창우는 조시를 낭송했다. 벽제에서 화장을 마친 후 팥알 크기의 대형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었던 그의 유골은 서울 서초구 수안사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부활이었다. 49제 날엔 60명의 가수가 참여해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모콘서트가 열렸고 9월엔 팬클럽 '둥근 소리'를 중심으로 그의 유작라이브 CD 앨범 '인생 이야기'와 '노래 이야기' 등 2장이 발매되는 등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살 전날 밤늦게까지 함께 음악을 이야기했던 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 곡 '부치지 않는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를 했다. 이 음반은 음악적인 지평을 넓히고 싶었던 김광석이 노래마을의 리더 백창우와 시인 정호승등과 함께 시와 노래와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담긴 '노래로 만나는 시' 앨범을 위해 녹음한 최후의 음원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때 이른 죽음을 예견한 듯 한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 음반은 10만장이 팔려 나가며 각종 방송 차트에 올라 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1998년 말, 김민기를 회장으로 하여 선후배 50여명이 모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대학로에 추모비 건립과 신인 포크 가요제 개최를 논의했다. 그 결과 99년 3주기 때는 30여 팀이 참가해 '김광석 다시 만나기 - 99포크 페스티벌'을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개최했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삽입되어 다시 한번 그를 추억하게 했다. 이 노래는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공식 주제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는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가족 혹은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파고들었다. 2000년 12월에 발매된 추모 음반 '김광석 앤솔로지1-다시 꽃씨 되어'. 거칠고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희망의 불씨처럼 아련함이 살아 있었다.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와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소라, 김건모, 강산에, 권진원 등 그의 음악 동료와 후배 가수들의 참여로 더빙 제작된 이 음원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2001년엔 미발표 곡 '틈', '외로운 밤', 애창곡 '먼지가 되어' 등을 수록한 2장의 앨범이 '김광석 클래식'으로 발표가 되어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요절가수 김광석은 1990년대에 이르러 힘없이 주저 않은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 문화에 소생의 기름진 자양분을 공급했던 아티스트였다.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던 생전의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와 발라드음악에 밀려 고사상태에 빠졌던 모던 포크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음악활동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외롭게 벌였던 그의 음악 독립 전쟁은 요절로 인해 완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는다. 쇠로 만든 '도브로'라는 기타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요절 포크가수 김광석. 헤어질 때면 누구에게나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겨주었던 아름다운 심정만큼이나 그의 노래들은 팬들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글 :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2004년 7월 6월 <주간한국>
지식채널 e - 여백의 가수 김광석
첫댓글 잊혀졌던 반가운 가수 김광석을 만나게 해주어 구포에게 깉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내친구중에 유독 김광석을 좋아하던 한시인이 불현듯생각난다.얼굴모습그리고 심성까지 비슷했던 김광석의광팬이었는데 이젠 이세상에 없는 그친구가 이노래를 왜그리좋아했는지 .......
茶咸 ...
아직도 중국인가?
그 녀석 군칠이가 김광석 광팬이었다고!
1973년 7월군번으로 5대 불순지역이라는 광주31사에서 뺑이치던 때가 생각나는군.
그 녀석 원주까지 가서 자대배치도 같이 받고는
전봇대 오르는 훈련을 받으면서 어찌나 고문관 노릇을 하던지...
군대는 참 개같은 곳이야! 시인이고 뭐고가 없었으니 말일세.
어제왔네,그친구가 구워준 주옥같은 김광석의 CD를 차에서 듣고 있으면 누군가는 왜 자꾸 우울한 노래만 듣냐고 타박도 하였지.억지로 쥐어짜지않고 인기에 영합하여 어린(?)팬들에게 아부하지않으며 버티던 멌진 가수였는데 왜그리 일찍 가야했는지 가끔씩 서른즈음에를 듣고 있는 자신에게 쓴 웃음도 흘려 보내곤 했는데말야, 아무튼 구포 고마우이 우리를 위해 이처럼 좋은자료를 모아서 빈 까페의 공간을 힘들게 메워주고....tks much.
하늘은 심술이 나면 材德있는 사람을 일찍 데려가고
貴人은 평생을 고독하고 험하게 다룬다고 했소.
그러니 인간 생명의 長短을 어찌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만 가늠할 수 있으리오.
가야할만 하니 가는 것이고,
쓰리고 아픈 세상을 더 살아내야 허며는 그리 되는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