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전쟁 시절 린뱌오가 국민당군에 대승한 첫 번째 전투인 ‘시우수이허 전역’ 승리를 자축하는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전신). |
문혁 초기 쉬샹첸(왼쪽 둘째), 류보청(오른쪽 둘째), 녜룽전(오른쪽 첫째) 등 개국 원수(元帥)들에게 뭔가 지시하는 린뱌오(가운데). 왼쪽 첫째 얼굴은 중공원로 둥비우. |
신중국 초기, 린뱌오(林彪·임표)의 지위는 동급인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나 허룽(賀龍·하룡) 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중국(華中局) 서기와 중남국(中南局) 서기, 중남 군정위원회 주석 겸 군구 사령관, 허난(河南)·후베이(湖北)·후난(湖南)·광둥(廣東)·광시(廣西)·장시(江西) 등 6개 성(省)의 당·정·군을 장악한 남중국(南中國)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동북 3성의 기반도 단단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심리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50년대 초, 마오가 군구를 해체시키자 외부와 접촉을 끊고 두문불출했다. 6·25전쟁 참전을 반대하고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함께 소련으로 갔다. 그래도 참전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귀국하는 저우언라이에게 “당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귀국해 한반도에 나가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에게 린뱌오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린뱌오가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단정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린뱌오가 중국군을 지휘했더라면 미군은 참패했다. 중국에 원자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비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한국전 종전 후에도 린뱌오는 병서(兵書)와 지도(地圖)를 벗 삼으며 은인자중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고 걸지도 않았다. 55년 4월, 린뱌오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함께 정치국에 진입했다. 마오쩌둥은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4년 후, 당 부주석에 선임됐지만 여전히 할 일은 없었다. 루산(廬山)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에게 직격탄을 맞은 마오는 린뱌오를 불렀다. 산에 오른 린뱌오는 펑더화이를 몰아붙이고 국방부장을 꿰찼다. 60년대 초, 중국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28일간 전국의 당·정·군 간부 7000여 명이 베이징에 집결했다. 대회 첫날,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마오쩌둥의 야심작인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 덩샤오핑도 딴소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천윈(陳雲·진운)은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보다 더 얄미웠다. 긴장한 마오쩌둥은 비장의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국방부장 린뱌오에게 한마디 할 것을 권했다.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 방파제 역할을 해줄 사람은 린뱌오 외엔 없었다. 2주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린뱌오는 보고문 작성에 매달렸다. 중간에 아버지 린밍칭(林明卿·임명경)이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잠시 병원을 다녀온 것 외에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장례는 마오의 지시로 중앙조직부가 주관했다. 탈고를 마친 린뱌오는 비서를 불렀다. “부친이 병원에 있는 동안 의사와 간호사들의 노고가 컸다. 나 대신 간단한 저녁을 대접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고작이다.” 1월 29일,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몇 마디로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그간 우리는 마오 주석의 지시를 준수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지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주석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석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침묵하자 마오가 정적을 깼다. “하오(好)”를 외치며 박수를 치자 다들 기립했다. “하오”와 박수소리에 천장이 무너질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제거를 결심했다. 그간 마오는 덩샤오핑을 당 중앙 비서장과 총서기로 중용했다. 이유는 류사오치 견제였다. 견제는커녕 류사오치와 한통속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두꺼비처럼 생긴 놈이 생각만 해도 괘씸했다. 마오는 새로운 혁명을 구상했다. 린뱌오의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린뱌오가 싫어하는 간부들을 솎아냈다. 마오에게 충성심 강한 고위 간부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서 밀려났다. 4년 후, 문혁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축출과 린뱌오 등용을 동시에 추진했다. 8월에 열린 전국대표자대회를 앞두고 저우언라이에게 지시했다. “린뱌오를 꼭 참석시켜라.” 저우언라이는 마오가 린뱌오를 후계자로 선정했다고 직감했다. 다롄(大連)에서 요양 중이던 린뱌오는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일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었다. 병을 핑계로 참석을 거부했다. “주석에게 내 말을 전해라. 노승(老僧)이 자리를 비우면 사방이 허공이다.” 린뱌오의 불참을 확인한 마오쩌둥은 이틀간 휴회를 선언했다. 비서와 공군 사령관을 다롄으로 보냈다. 베이징에 온 린뱌오는 간청했다. “온몸이 병투성이입니다. 새로운 직무를 감당하기 힘듭니다. 뜻을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마오는 화가 났다. “네가 명(明)나라 세종(世宗)이냐? 네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가짜다.” 명나라 세종은 경건한 도교신자였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건 수양에만 열중했다. 마오쩌둥의 판단은 정확했다. 후계자 자리를 굳힌 린뱌오도 마오를 믿지 않았다. 광둥성 서기 타오주(陶鑄·도주)와 연명으로, 홍콩에 있는 황푸군관학교 동기생을 통해, 타이완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린뱌오 사망 후 장제스가 통곡을 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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