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이 여의주 희롱하는 존귀한 명당


▲ 대대로 명당을 잘 쓴 청송심시 심온 묘(윗쪽). 하지만 묘 뒤편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맥을 끊었다(아래쪽).
세종대왕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9) 선생의 묘는 수원 영통구 이의동 산12-10에 있다.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IC 근처 광교역사공원 내에 있어 찾기가 쉽다.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 4명, 대과급제 196명, 무과급제 350명을 배출했다. 정승 수는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에 이어 네 번째다. 이중 심온의 후손에서 정승 9명, 왕비 2명, 대제학 2명, 부마 1명이 배출됐다.
청송 심씨는 대대로 명당 잘 쓰기로 유명하다. 시조인 심홍부의 묘는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 산33에 있고, 2세 심연의 묘는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산64-1, 3세 심용의 묘는 경기도 안성시 당왕동 산19-6, 4세인 심덕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이미리 산110에 있다. 모두 이름 난 명당이다. 고려 때 영남에서 호남, 경기로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당을 쓰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했던 것 같다. 오늘날 선산이 멀다는 이유로 조상 묘를 파묘해서 화장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송 심씨 계보는 크게 둘로 갈린다. 심용에게는 덕부와 원부 두 아들이 있었다. 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고 좌의정에 올랐다. 반면에 원부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손들에게 조선의 녹을 먹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다. 원부의 자손들은 대대로 ‘선훈불사(先訓不仕)’의 유훈을 지켜 벼슬을 멀리했다. 그러나 덕부의 아들 7형제와 그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살았다. 특히 넷째인 징(인수부윤군)과 다섯째인 온(안효공)의 후손들이 번창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에서 파격적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나이 44세 때였다. 그러나 태종의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음에도 병권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철저히 배격했다.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민무홀·민무회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심온도 훗날 외척이 될 수 있으므로 미리 제거하려는 의중이 있었던 것 같다.
심온이 사은사로 명나라로 떠나고 한 달 뒤쯤 이른바 ‘강상인의 불경사건’이 일어났다. 태종은 자기를 제쳐놓고 세종에게 직보한 강상인에게 배후를 대라고 국문했다. 압슬형을 견디지 못한 강상인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왕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하는데 두 곳에서 나온다고 말했는데, 이를 병조판서 박습과 영의정 심온이 동조하였다고 자백하였다. 박습과 심정은 곧바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했다. 심온도 귀국길에 압록강을 넘자 수원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한 후 태종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좌의정 박은의 음모가 있었다.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남길 말이 없냐고 묻자 “나의 자손은 대대로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후손들의 불문율이 되었다. 심온이 죽자 태종은 수원부에 명하여 장례를 후하게 지내주라 이르고 지관 이양을 파견하여 장지를 택하게 했다.
심온 묘의 주산은 한남정맥의 응봉(237m)이다. 응봉에서 내려오는 용맥은 용서고속도로 갈마재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향해 온다. 그리고 여천을 앞에 두고 멈추었다. 산맥은 많은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오는데 힘이 있다는 증거다. 아쉬운 것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면서 맥이 끊겼다. 산맥이 끊기면 땅의 생기는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 또한 맥을 따라오는 수맥도 끊기게 된다. 심온 묘가 광교역사공원의 중심 역할을 하려면 끊긴 맥을 연결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묘가 있는 혈장에 오르면 땅이 밝고 단단하다. 땅이 밝다는 것은 기가 좋다는 뜻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기가 뭉쳐 있다는 뜻이다. 묘 뒤의 볼록하게 생긴 입수도두가 세 개로 되어 있다. 입수도두는 지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핸드폰에 비유하자면 배터리가 3개가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발복이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혈장 아래 경사면을 하수사라고 하는데 그 곳에 돌이 박혀있다. 혈의 생기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곳이 대혈임을 의미한다.
광교신도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청룡백호가 감싸주고 물이 환포하였다. 여천 옆에는 여의주처럼 생긴 동그란 독산도 하나 있었다. 전체 모습이 황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는 모양 같았다. 이를 황룡농주형(黃龍弄珠形)이라고 하는데 존귀함을 뜻한다. 기운이 부족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 30분 정도 앉아 있으면 기운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곧 발복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