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생전(楮生傳)-가전체
이첨
<줄거리>
생(生)의 성은 저(楮)다. 저란 닥으로 종이의 원료다. 그의 이름은 백(白)이다. 백이란 희다는 뜻이다.
자는 무점(無 )이다. 아무런 티가 없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그는 회계(會稽) 사람으로서 한나라 중상
시(中常侍) 상방령(尙方令) 채륜(蔡倫)의 후손이다.
그는 태어날 때 난초 탕에 목욕하고, 흰 구슬 희롱하고 흰 띠로 꾸렸기 때문에 깨끗하고 희다. 그의
아우는 모두 19명(종이는 한 권이 20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나 된다. 이들은 저생과 동복
들로 서로 화목하여 잠시도 서로 떨어지거나 차서를 잃는 법이 없다.
이들은 성질이 정결하고 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사들만 사귀어 놀았다. 그 중에서도 모
학사(毛學士)가 가까운 친구다. 모학사란 곧 붓이다. 둘이서는 마냥 친하여 모학사가 저생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더럽혀도 씻지 않는다.
천지·음양의 이치에 널리 통하고, 학문의 근원까지 훤하다. 제자백가의 글과 이단 불교에 이르기까
지도 모조리 써서 연구하고 보고 있었다. 한나라에서 선비를 뽑는데 책을 지어 재주를 시험했다. 이
때 저생은 방정과(方正科)에 응시하여 임금께 말했다.
"모두 글을 댓조각이나 흰 비단에 씁니다. 이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 비록 두텁지는 못하오
나 진심으로 댓조각이나 비단을 대신하려 하옵니다. 만일 효력이 없거든 신의 몸에 먹칠을 하시옵소
서."
화제(和帝)는 사람을 시켜 시험해보라 했다. 과연 편리하여 댓조각이나 비단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
에 저생을 포상하여 저국공(楮國公) 백주자사(白州刺史)의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만자군(萬字軍)을
통솔케 하고, 봉읍으로 그의 씨(氏)를 삼았다.
이것을 보고 나무 껍질, 삼, 고기 그물 등이 자기들도 써주기를 청했는데 시험 결과 완전하지 못하여
파면되고 말았다. 이들은 마침내 오래 사는 술법을 배워, 비나 바람이 그 몸에 침입하지 못하고 좀
도 먹어 들어가지 못했다.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의 필적을 본받아 해자(楷字)로 쓴 글씨가 천하에서 제일 묘했다. 저생은 다
시 양(梁)나라 태자 통(統)을 섬겨 함께 고문선(古文選)을 편찬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임금의 명령을
받고 위수(魏收)와 함께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사서는 위수가 칭찬하고 깎아 내리는
것을 공정하게 하지 못한 까닭에 예사(穢史)로 취급되었다.
이에 저생은 자진 사직하고 소작(蘇綽)과 함께 장부나 상고하겠다고 청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자
지출은 붉은 글씨로 쓰고, 수입은 먹으로 써서 분명하게 장부를 꾸몄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그 뒤 진(陳) 후주(後主)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의 행신(倖臣) 안학사 무리들과 함께 항상 임춘각
(臨春閣)에서 시를 지었다. 이때 수(隋)나라 군사가 경구(京口)를 지나자 진(陳)나라 장수가 비밀리에
임금에게 이를 고급(告急)했다. 그러나 저생은 이를 숨기고 봉한 것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
에 진나라는 수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대업(大業)연간, 저생은 왕주, 설도형과 함께 양제(煬帝)를 섬겨, 그들과 같이 정초·연니의 글귀를 읊
었다. 그러나 양제는 딴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싫어해서 저생을 돌보지 않았다. 저생은 마침내
소박당하는 몸이 되어 뚤뚤 말려 품속에 품고 대궐을 나오고 말았다.
당(唐)나라 때 홍문관을 설치하니, 저생은 본관으로 학사를 겸해서 저수량(楮遂良), 구양순(歐陽詢)
등과 함께 역사를 강론하고 모든 정사를 상고하여 처리했다. 이리하여 '정관(貞觀)의 좋은 정치'를
이룩했다. 또 송나라가 일어나자 정주학(程朱學)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문명(文明)의 좋은 정치를
이룩하기도 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저생이 박식하고 아담하다 해서 늘 옆에 두고 물어서
썼다. 그때 마침 왕안석은 권세를 부려『춘추』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안석은『춘추』를 가리켜
다 찢어진 신문이라고 평했다. 저생은 이를 옳지 못한 의론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배척 당하
고 쓰이지 못했다.
원나라 초년이 되자 저생은 본업에 힘쓰지 않고 오직 장사만을 좋아했다. 몸에 돈궤를 두르고 신대
전관(身帶錢貫) 찻집이나 술집을 드나들면서 한 푼 한 리의 이익만을 도모했다. 세상 사람들은 간혹
이를 비루 하게 여겼다.
원나라가 망하자 저생은 다시 명(明)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사랑을 받았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
여 대대로 역사를 맡아 쓰는 사씨(史氏)가 되기도 하고, 시가(詩家)의 일가를 이루기도 했고 선록(禪
錄)을 초봉(草封)하기도 했다. 발탁되어 관직에 있는 자는 돈과 곡식의 수효를 알게 되었고, 군무(軍
務)에 종사하는 자는 군대의 공로를 기록했다. 맡은 직업에 귀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제자리를 비
운다고 해도 비난을 받지 않았다. 대부(大夫)가 된 뒤에는 거의 다 흰 띠를 두르기 시작했다.
무왕이 은(殷)을 이기니, 아우 숙도(叔度)를 봉하여 은나라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주공(周公)이 이
를 도왔다. 이때 채숙(蔡叔)이 나라 안에 유언(流言)을 퍼뜨리자 주공은 그를 귀양보냈다. 그 아들 호
(胡)는 과거의 행동을 고쳐서 덕을 닦았다. 이에 주공은 그를 천거하여 높은 벼슬에 썼다. 성왕은 다
시 호를 신채(新蔡)에 봉했으니 그가 곧 채중(蔡仲)이다.
그 뒤 초나라 공왕(共王)은 애후(哀侯)를 잡아 돌아왔다. 식부인(息夫人)을 공경하지 않은 까닭이었
다. 이에 채(蔡)땅 사람들은 그 아들 힐을 세웠다. 그가 바로 무후(繆侯)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齊)의
환공(桓公)이 그가 채땅의 여인과 헤어지지 않은 채 다시 딴 곳에 장가갔다 해서 무후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무후가 죽자 그 아들 갑오(甲午)가 섰다. 그러나 초(楚)의 영왕(靈王)이 영후(靈侯) 아비의 원수를 갚
으려고 군사를 매복하고 술을 먹여 죽였다. 그리고 채땅을 포위하고 멸한 다음 경후(景侯)의 소자(少
子) 여(廬)를 구하여 세웠다. 그가 바로 평후(平侯)다. 이들은 그로부터 하채(下蔡)로 옮겨 살았다. 그
후 초의 혜왕(惠王)이 다시 채땅의 제후들을 멸해서 마침내 쇠미해졌다.
아아! 왕자(王者)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쌓은 두터운 덕으로 해서 국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으로 변해갔다.
채(蔡)는 본래 주(周)와 동성이었다. 이 나라는 양쪽 강국 사이에 끼여 공연한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
면서도 길이 그 자손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한(漢)의 말년에 이르러 드디어 봉읍을 받고 그 성을
바꾸게 되었다.
나라가 변해서 사사로운 집이 되고, 집이 커져서 그 자손이 천하에 가득해지는 것을, 나는 오직 채씨
의 후손에게서 볼 수 있다.
<작가와 작품>
이첨(李詹, 1345∼1405)은 고려 충목왕 때의 문장가이다. 관인문학(官人文學)의 담당자로서 극심한
문학사적인 변환기에 살다 간 신흥 사대부 출신으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비교적 화려한
관직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저생전」은 종이를 의인화하여 자서전 식으로 써나간 것으로, 신하들의
직간(直諫)을 테마로 하여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고, 나아가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하는
교훈이 담긴 작품이다. 종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고사 인용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