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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ː신
▶ ‘사’ 와 관련된 한자
社 모일, 事 일, 思 생각할, 査 사실, 史 역사,
使 부릴, 四 넉, 士 선비, 師 스승, 死 죽을,
絲 실, 射 쏠, 私 사사로울, 司 맡을, 沙 모래,
寫 배낄, 飼 먹일, 辭 말씀, 寺 절, 謝 사례할,
斜 바낄, 舍 집, 泗 내 이름, 仕 벼슬할, 似 같을,
砂 모래, 祀 제사, 斯 이, 詐 속일, 赦 용서할,
捨 버릴, 奢 사치할, 蛇 뱀, 邪 간사할, 嗣 이을,
紗 모래, 徙 옮길, 獅 사자, 祠 사당, 瀉 쏟을,
唆 부추길, 賜 줄, 巳 뱀, 娑 춤출, 些 적을,
篩 스승, 蓑 도롱이(짚,띠), 乍 잠깐, 伺 엿볼, 麝 사향노루,
裟 가사, 渣 찌끼, 莎 향부자(사초), 肆 방자할, 僿 잘게 부술,
梭 북, 駟 사마, 俟 기다릴,柶 수저, 詞 말씀,..
▶ ‘신’ 과 관련된 한자
新 새, 申 펼, 信 믿을, 神 귀신(神靈,靈魂), 身 몸,
辛 매울, 愼 삼갈, 伸 펼, 臣 신하, 迅 빠를
腎 콩팥, 娠 아이 밸, 薪 섶나무, 紳 큰 띠, 呻 끙끙거릴,
莘 긴 모양, 晨 새벽, 燼 깜부기불, 蜃 무명조개, 訊 물을,
宸 집, 辰 날, 藎 조개풀, 侁 걷는 모양,..
* 천ː사
▶ ‘천’ 관련된 한자
川 내, 天 하늘, 踐 밟을, 泉 샘, 遷 옮길,
賤 천할, 薦 천거할, 穿 뚫을, 淺 얕을, 闡 열,
喘 헐떡거릴, 仟 일천, 阡 두렁, 擅 멋대로, 舛 어그러질,
釧 팔찌, 韆 그네, 玔 옥고리,..
▶ ‘사’ 관련된 한자:
윗(上) ‘신’ 한자와 동일
□ 말말말(혀,言辭,靈魂,心)-- 성경 역사(歷史)속의 말말말(善ː義/惡ː罪).....
□ 옛적에 선지자들로(사도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口,言)하신
하나님의 신(영)이(사신,사자,Messengers)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무릇 하나님의 영(신)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子女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말씀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아들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合;사신 ;사자 ;사도 ;성도)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함에 이르는(올리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생각을,사상을) 따르지(추구하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거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낮과밤,나날이,찬찬히) 묵상하는 자로다
□ 거만한 사람은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지만 총명한 사람은 쉽게 지식을 얻는니라
오만하고 거만한 자 곧 미련한 사람을 멀리 하라 그런 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느니라
□ 가난한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부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르느니라
자기 이웃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자이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복 있는 자이다
악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되지만 선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사랑과 신의를 얻는다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게 보여도 하나님 여호와는 마음을(心靈을) 감찰 하시느니라
공의(공도)와 정의를 실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여기시느니라
□ 공의와 인자(인애,친절,배려,긍휼,자비,사랑)의 길을 추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성벽을) 허느니라
입(言)과 혀(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오만한 자,거만한 자)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말함이니라,言行)
□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口,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버림으로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그러므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하나님 나의(여호와의,야훼의) 말이니라
□ 지혜자는 눈은 밝거니와 우매자의 눈은 어두움에 다니나니
이는 그들의 당하는 일이 다 일반(一般)인 줄을 내가 깨닫고
또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이(잊혀지게) 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나 우매자의 죽음이나 다(南女老小) ‘일반’ (一般)이로다(같도다)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하늘로부터,靈)
빛들의 아버지께로서(창조주ː창조자: 예수님,Yeshua) 내려오나니(말씀되었나니,經,聖經冊)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신들의,영들의) 증거니(증언이니,말씀이니)
옛(신구약), 선진들이(사도들이,선견자들이,선지자들이,예언자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오바댜의 뜻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종’ 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
또는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 이다. [하나님 사자(천사)의 말(言,계시)을 받아 적은 오바댜]
이 선지자의 생업이나 혈통, 사회적 신분은 알려진 바 없으며, 남왕국의 유다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친척관계나 부친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왕족이나 제사장 신분은 아닐 것이며,
다만 하나님의 암시를 받은 선지자‘라는 사실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오바댜서에는 시대적인 배경을 나타내는 언급이 없어,
저작 연대나 시대의 배경은 여호람이 유다를 통치하던 중 블레셋이 침공하던 시기로 보고 있다.(추측하고 있다)
따라서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를 산 사람일 것이며, 요엘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활동했을 것이다.
오바댜는 전 1장으로 된, 구약에서는 가장 짧은 책에 속함에도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전체적인 구조는 에돔의 멸망(1:1~9), 에돔의 죄(1:10~14), 열방에 대한 심판(1:15~16),
시온에서의 구원(1:17~18) 이렇게 넷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굳이 앞의 부분을 둘로 나누지 않더라도 2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묶어 에돔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에돔의 멸망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라는 구절로 2절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 원인이 교만된 말에(言,언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을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보충해주고 있다.
“(3절)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된 말이 너를 속였도다
(4절)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하나님 여호와 말씀이느니라”
에돔이 아무리 견고한 나라로 설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가.
여기서는 에돔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능력이 달 대조되어 있다.
오바댜는 에돔의 멸망을 5절에서 9절까지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선 5절과 6절에서
부의 약탈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다음으로 7철과 8절에서는 지혜와 자각의 상실로 나타나며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9절에서는 군사력의 상실 순으로 기록되었다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육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경제적 안녕과 현명한 통치와 군사 안보와 같은 사회 구조가 와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절부터 14절은 에돔의 죄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에돔을 심판하는 까닭이기도 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그것이 첫 단락인 10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10절)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그리고 그 뒤인 11절에서 보충하여 서술하고 있다.
“(11절)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이는 이스라엘 민족, 곧 형제 야곱이 당하는 고난을 에돔 족속이 방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11절에는 에돔 사람들의 무정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외국인·이방인”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다.
형제의 민족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다른 이방 민족보다 훨씬 더 컸던 것은 아닐까.
에돔 민족의 악행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야곱의 후손인 그 형제들에게 포학하며 말(言行)했다.
형제들이 당하는 재난을 방관하고
유다의 패망을 기뻐하며 유다의 재물에 손을 대며 유다 자손의 도망하는 자를 막으며 남은 자를 대적의 손에 넘기는
불의를 자행한다.
또한 유다의 연약함을 보고 기뻐하는 저속한 성격을 가졌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유다의 슬픔을 이용하는 탐욕을 가졌다. 그들은 기회적인 특성을 지녔다.
여기서 다시 1절로 돌아가 보자.
1절에서는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찌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란 오바댜 혹은 유다 민족이라 생각하면 알맞을 것이며, ‘소식’이란 이방 민족들을 동원하여
에돔을 치라는 명령인 것이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
하지만 오바댜의 예언지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歷史적 사실)
후반부의 내용은 한데 묶어(1:15~21) 하나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15절과 16절은 열방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날에는 에돔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심판받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구원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원수의 멸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과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18절에서 야곱 족속은 불, 요셉 족속은 불꽃, 에돔 족속은 초개라 비유한 것도
에돔 족속의 철저한 멸망을 드러낸 표현이다.
초개란 쭉정이를 뜻하는 말이다.
“(18절)…그들이 그의 위에 불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라는
직접적인 묘사로 내용은 구체화된다.
19절부터 21절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나타내고 있다.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이다.
결국 오바댜 예언의 핵심이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공의적,공도적)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며,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를(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敬畏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방관적인 태도를) 나타냄은
곧 하나님 사자의 열국 심판이 행한 대로 임할 것임을 오바댜 서는 오늘날까지도 ‘경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오바댜 서,
1. 명칭 본서의 히브리어 명칭은 ‘오바디야’ 로서 ‘하나님 야훼(나의,내)의 종’
또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하나님 야훼 말씀을 순복하는 자’의 의미이다.
이 명칭은 히브리인의 관습에 따라 표제(1절)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헬라어 역본인 70인역(LXX)은 이 명칭을 ‘오브디우’로 음역했고 라틴어 역본인 ‘벌게이트’(Vulgate)에서는
‘아브디아스’로 음역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 본서의 명칭은 ‘오바댜’이다.
2. 저자 및 기록연대
본서의 저자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수세기 동안 본서의 저자를 오바댜라고 생각해 왔다.
오바댜는 남유다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친척이나 부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족이나 제사장 계열의 신분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오바댜라는 이름이 구약성경에 12회나 기록되어 있으나
(왕상 18:3-6, 대상 3:21, 7:3, 8:38, 9:16, 12:9, 27:19, 대하 17:7, 34:12. 스 8:9, 느 10:5, 12:25 참조)
그 중 본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오바댜에 관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라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연대에 대해 우리는 본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요점은 1장 11절을 어떻게 보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전통적인 입장의 학자들은 1장 10-14절에 묘사된 사건들을
여호람 통치시대에 침입했던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에 의한 예루살렘 탈취사건(B.C 844년)과
동일시한다(왕하 8:20, 대하 21:16,17 참조).
그렇다면 본서는 분명히 포로전의 기록일 것이다.
히브리 성경의 편집자들도 ‘오바댜’서를 소선지서 첫머리 부분인 ‘아모스’서 다음에 둔 것을 보면
본서의 시대와 아모스의 시대가 비슷한 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 다른 많은 학자들은 1장 11절의 본문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던(B.C 586년)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본서는 포로이후의 기록이 된다. 그러나 본서의 기록이 B.C 586년 이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서의 기록에서 바벨론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 성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서에는 아람어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물론 변개해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므로 본서의 기록연대는 B.C 844년경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보는 추측이다.
3. 기록목적
본서의 기록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의 윤리성을(도덕성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혈통을 같이 하는 에돔의 그 형제 이스라엘에 대한 잔인함을 심판하셨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마땅히 받을 것이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는 에돔의 악한 마음과 행동 역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에돔의 유다에 대한 형제적 우애가(인애가,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심판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4. 내용전개
1) 에돔에 대한 심판(1:1-9) - 난공불락의 에돔은 야훼의 심판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될 것이다.
2) 심판의 정당성(1:10-14) - 이스라엘에 행한 악행(言行) 때문이다.
3) 하나님 여호와의 날(1:15-21) - 열방에 대한 심판과 함께 영원한 메시아 왕국이 선포된다.
□ 의인 오바댜(왕상18:1-6절)
[왕상] 18:1~6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하나님 사자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서론)
1. 구약 성경에 가장 짧은 성경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모스서 다음에 있는 ‘오바댜서’입니다.
오늘은 이 오바댜서를 쓴 저자의(천사들과 선진들,영성) 삶을 잠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본론)
1. 오바댜가 살던 시대
여러분! 열왕기의 많은 왕들 가운데 아합이 통치했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가장 하나님을 멀리하였던 세속적인 시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합은 자신의 통치 이념을 풍요로운 나라 건설로 잡았습니다.
잘 살아보세!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그 물질적 풍요를 주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라고 신앙고백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 종교로 바알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명목상으로 이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 나라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우상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충성(忠性)된 종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사악한 권력의 심층부에서 살다
3절에서 궁내대신 오바댜가 등장합니다.
그는 엘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의 ‘궁내 대신’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미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나 사르밧 과부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갈멜 산상에서 바알 종교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며 그 상에서 먹는 400명 합해서, 850대 1의 처절한 믿음의 진검 승부에서 대승을 거둔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야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오바댜라는 사람은 주일학교에서도 잘 가르쳐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도들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저도…
물론 엘리야는 참 드라마틱하게 사역하다가 하나님께 들림 받은 믿음의 영웅입니다.
이 분은 등장할 때부터 그냥 디셉 사람 엘리야라고 말 할 뿐, 그가 어디서 어떻게 믿음생활을 했는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이 주목하셨고 사용할 만큼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댜는 그의 구체적인 환경이 소개되고, 직업이 소개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18장의 주인공은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를 이야기하는 46절 가운데 무려 13개의 절이 오바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한 왕, 아합이 통치하는 그 어두운 시대에도, 바로 아합의 턱 밑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오바댜가 왜 존귀한 사람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여러분! 노아 이야기를 아시지요?
창6: 11절을 보면 노아가 살던 시대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부패)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패괴했다’는 말은, 그때 노아가 살던 시대에,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는(물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를 가리켜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즉 하나님과 ‘동행’(同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변질의 길을 가지 않고 당세에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을 온 몸으로 감당하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한편 후에 선지자가 된 사무엘은 젖 떼고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어떤 곳이었는가 하면, 엘리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예배하러 오는 여자들을 유혹하여
동침하고, 헌물을 가로채는 도적놈들의 소굴이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무엘은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그런 곳에서 자랐지만,
‘이스라엘의 등불’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세 왕의 시대를 거쳐, 심지어는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셋째 치리자를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핑계하는 환경이라는 것이 꼭 사람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어떤 사람입니까?
3절에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오바댜의 직업이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권력의 최 상층부에 속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바댜는 당연히 돈도 권력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합 정부의 최고 관료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에는 가장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정책적으로 그는 바알 종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 보니 잃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진정한 신앙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는(저자는)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거침없이 소개합니다.
아! 이 어두운 시대에 왕궁, 그것도 아합의 최 측근에 모든 정책을 자문하고 모든 정책이 시행될 때
가장 먼저 그 정보를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오바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온통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성적으로는 문란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의 중심부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오바댜가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공공연히 예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드러내 놓고 찬양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 편하게 통성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점점 더 문란해져 가는데,
오바댜는 그 속에서 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에게 말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홀로 말씀보고 혼자 예배하며 혼자 하나님 앞에 살아야 했습니다.
세상이 다 음란하고 세상이 다 하나님을 버린 그 시대에 그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더라 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오바댜가 이런 믿음으로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본문에서 오바댜가 어떻게 믿음을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구절의 힌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어떻게 신앙을 유지했겠습니까? 저는 개인 경건 생활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바댜가 엘리야를 보자 스스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힌트입니다. 오바댜의 신앙은 뿌리가 깊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아합 정권의 최고 브레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어려운 시대에도 타협하지 않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오바댜!
그의 신앙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요.
그러니까 두 가지 측면에서 오바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측면은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교육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측면은 커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릴 때부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생활이 장성해서도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힘인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육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일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심층부에서 그렇게 곡예를 하듯 살면서도
의인을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존귀하고 놀랍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세벨이 하나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했습니다.
여러분!
백 명을 숨겨서 먹이려면 하루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이며 그 수고가 얼마입니까?
날마다 그 불안하기는 또 얼마나 하였을까요? 그러다가 발각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자신의 믿음 하나 지키기에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선지자들을 백 명이나 먹이고 입히고 돌아보았던 그 오바댜! 얼마나 멋진 분입니까?
오바댜에게 있어서 이 일은, 온 가족이 능지처참?을 당할 일이요,생명과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냥 100명을 먹여 살리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두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한 몸 잘 살겠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바댜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도 아닙니다.
목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닙니다. 그냥 성도입니다. 그것도 세상 죄악의 한 복판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엘리야처럼 역시 엄청나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오바댜와 같은 신실한 성도가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그들이 있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 하나님 나라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아합이 오바댜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했습니다. 악한 아합 조차도 신뢰를 보냈던 사람이 오바댜 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닉네임이 ‘까마귀 모매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왜 까마귀 모매님이신가 하면,
같은 기숙사에 있는 어떤 신학생에게 반찬을 자주 해다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반찬들을 돈 없고 후원자들도 없는 가난하고 배고픈 다른 신학생들도 맛있게 종종 얻어 먹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분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셨는데 그리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까마귀 모매님’이라 불렀습니다.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던 까미귀 처럼 우리는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엘리야의 까마귀의 역할을 감당해 보면 어떨런지요.
"돈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했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값진 일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값진 일은 그 생명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오바댜가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바댜와 여러분의 공통점은?
1. 같은 평신도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 특별한 소명의 사람이 아닙니다.
2. 그리고 불신의 세계, 이익만이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혹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죄악이 관영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도, 왕을 속여가면서 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암울한 아합 왕의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등불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전부 선교사가 되고 순교자가 되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 역시 존귀한(진귀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인정받는 일꾼이 되십시요.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요.
지금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을 가지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요.
시대를 탓하고 환경만을 탓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합 왕 시대의 어두운 상황에서, 권력의 최 정점에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오바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심령에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믿음으로 꼭 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해 보이겠노라고,
다시 한번 결심하고 다짐하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환상 중에 나타난 인물이 누구?
예수께서 누구누구와 함께 얘기를 나누었나? (모세, 엘리야)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국부(나라의 아버지)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인가? 왜 변화산 환상 중에 엘리야가 등장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두가지 통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였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강령(핵심 내용)을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던 것이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자신을 아끼지 않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준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방의 작은 마을 디셉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출생이나 신상명세에 대해
성경의 저자는 소상히 밝히지 않는다.
성경은 엘리야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엘은 하나님 이시다’, ‘나의 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이다.
●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은 남북왕국으로 분열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솔로몬의 부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북이스라엘 백성이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신전을 세우고 두 마리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게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행위였다.
그후 북왕국에는 선정을 베푸는 왕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끊임없는 반역과 살해로 이어지는
혼돈과 불신앙의 시대가 계속된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왕은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으로, 그의 치세는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였다.
비록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경제적으로도 번영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극도로 타락한 시대였다.
아합왕은 주변국가와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이방국의 우상숭배를 강요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정통적인 하나님의 신앙이 멸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고 쓰여 있다. 그 배후에는 미모의 아내 이세벨이 있었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면서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종교를 끌어들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였다.
왕실에서부터 우상종교를 장려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므로 온 나라가 영적으로 패역하였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나 있을 정도였다.
궁궐에 머무르는 우상종교의 선지자가 이렇게 많았다면
모든 예식이나 의식이나 궐내 행사에 이들의 활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와 내정까지도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대항하고 이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몸둘 곳을 잃고 굴속에 숨어들어 간신히 연맹해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 명이나 있어도 자기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없어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 이러한 때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나님의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였다. 엘리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왕상 17장이다.
그는 과감히 아합왕의 가증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한다.
“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살아가던 시절, 이 얼마나 용감하고 통쾌한 선포인가! 이런 외침만으로도 엘리야는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가 이렇게 용감하게 선포하긴 하였지만,
당시 아합과 이세벨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하였든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얼른 피신시키신다.
그리고 때가 올때까지 기다리게 하신다.
엘리야는 한편으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아합왕에게 징계를 선포하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힘 한번 쓰지도 못하고 도망을 가야한다니!” 하지만 엘리야는 전적으로 하나님 천사의(사자의) 명령에
순종한다.(순복한다)
엘리야는 얼마간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이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한다.
그리고 시냇물이 마르자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를 통해 공궤받게 하신다.
엘리야가 이같은 고난의 피신 생활 가운데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온전한 믿음과 순종이었을 것이다.
시돈은 이세벨왕비의 고국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신세를 져야 할 자는 이방인 과부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 굳게 믿고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다. 하나님은 무진장의 공급원이시다.
그러나 다만 신앙의 눈을 가진자 만이 이것을 볼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역경에서도 태연할 수 있다.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의 손길에(음성에,말씀에,말에) 이끌려 움직였다.
그렇게 삼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엘리야에게 명령하신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아합과 이세벨은 새끼를 빼앗긴 사자처럼 살기가 등등하여 엘리야를 찾고 있었다.
이런 아합 앞에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험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엘리야에게는 아합 왕 따위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때마침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의 곤궁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산과 들의 곡식과 초목은 말라 죽고 백성들은 기갈에 시달리다 못해 잇따라 쓰러져갔다.
그러나 아합왕은 백성들의 이런 참상은 도외시하고 오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말과 노새 먹일 풀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기 가축이지 백성이 아니었다. 그가 찾는 것은 풀이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이러한 참상을 지적하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이게 하여
자기가 섬기는(순복하는) 하나님 여호와와 바알신 중 어느 쪽이 진짜 신인지(靈인지) 결판을 낼 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갈멜산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었다.
엘리야가 제안한 결판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바알의 지지자들은 줄을 지어 입장했다.
기갈에 허덕여 비쩍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기심 가득찬 눈초리로 떼를 지어 운집했다.
엘리야는 고독한(혈혈단신) 선지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편에 계심을 확신했다. 그는 큰 소리로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무릇, 하나님이 그이면 그를 쫓고 무릇,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
이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야가,
“너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라고 말했다.
바알교는 원래 태양을 섬기는 종교이므로, 불의 신이 불로 응답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바알선지자들과 백성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찬동했다.
하나님의 역사에 사람이 잔재주를 부리는 것은 금물이다. 지상의 것은 일체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말씀에만) 의지해야 한다.
모든 것에 절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지해야 한다.
모든 것에 절망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우러러 볼 때 비로소 산 신앙이 약동하게 된다.
하루종일 바알선지자들이 자신의 신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백성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신앙의 열심도 회복될 찰라였다.
그 자리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제 비로소 축복의 비를 내릴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이 관영한 곳에 축복을 내릴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깨끗이 청산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바알교는 분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되돌아오고,
아합왕도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가라앉고 축복의 단비가 전국을 촉촉이 적셨다.
엘리야는 마음 속으로 개가를 부르고, 긴장이 풀리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
러나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승리했을 때이다. 긴장이 풀리면 적은 그것을 노려 역습해 온다.
● 아합왕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다.
그는 맛좋은 음식을 먹고, 자기 말과 노새가 살지고, 욕구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백성이 하나님을 믿건 바알을 섬기건 조금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이세벨은 신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열심히 바알을 섬겼다.
그녀는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칼로 찔러 죽인 것을 알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녀는 즉시 사자를(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협박했다.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그렇치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만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본래의 위치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세벨이 보낸 사신달의 말에 반발하여 단호히 대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엘리야게게 뜻하지 않은 역습이었다. 허를 찔린 그는 당황했다.
그리하여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그 형편을(백성들의 상황을) 보고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한 하룻길쯤 행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갈멜산에서 사자처럼 분연히 일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찌 이같이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엘리야로 하여금 엘리야이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엘리야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버리면 그는 마른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엘리야 본래의 모습이었다.
용사는 쓰러졌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쓰러진 종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는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엘리야는 지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하나님의 천사는 밤이 새도록 그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옆에는 빵과 물이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처럼 달게 먹고 마셨다.
그는 식곤증으로 다시 누워 사르르 잠들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깨워 다시 빵을 먹였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실의에 빠졌을 때, 실족했을 때, 또는 일에 실패했을 때,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하고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그러나 주께서 로마 병정에게 잡히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어떤 역경에서도 변치 않고 주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평강’으로 찾아 오셨고,
실의에 빠진 베드로에게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엘리야도 실의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다.
엘리야의 몸과 마음은 음식과 깊은 잠에 의해 다시 상쾌해졌다.
그는 더욱 큰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40주야를 겅러서 호랩산(시나이 산)으로 갔다.
그는 그 산속 동굴에 들어가 묵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엘리야가 대답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하나님의 단을 헐며 칼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숨겨 두신 군사가 있었다.
바알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가 아직도 7천명이나 남아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외로운 영적 전투를 할 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하나님이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라.
● 엘리야는 동굴에서 나와 산 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하게 되었다. 산을 찢고 바위를 깨는 폭풍, 땅을 뒤흔드는 지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것들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표시로 생각해 왔으나,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후로, 가느다란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음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조용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숨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3년 반에 걸친 큰 가뭄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칠 수 없었다.
갈멜 산상에서 기도하여 불이 내리게 해도, 적을 멸절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위세가 있는 외적인 현상에만 기대하고 있던 엘리야는 위기에 몰리자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곳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네 길을 돌이켜”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어떤 현상만을(기적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나는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며 절망의 자리에 엎드려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던 영적 추억에 잠겨, 오늘 이 순간 방심하고(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동행하는 길이 아니라,
내 생각, 내 경험, 나의 자존심과 감정에 이끌려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소란한 세상의 소리, 내 안의 소리들을 죽이고,
심령 가운데 속삭이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말씀을,성경책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세례 요한은 스타였다.
온 이스라엘의 관심과 이목이 온통 그에게 쏠려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
개인 블로그나 홈피도 없었고 팬클럽도 없었지만 그의 인기는 사그러들 줄 몰랐다.
성격이 불같아서 불의를 보거나 비리를 보면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가식적인 종교 지도자, 힘깨나 쓰는 군인들, 피도 눈물도 없이 돈을 긁어모으는 세리 등
심지어 당시 최고의 권력자 헤롯왕에 이르기까지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신랄하게 죄를 비판했다.
그는 집도 없이 광야에서 살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
지금 보면 초특급 웰빙 자연식이지만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의 초라하고 궁색한 식사였다.
돈이나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요단강에는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왔다가 진탕 욕만 먹고 반성문 쓰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기는 이스라엘의 스타가 아니라 진짜 스타는 따로 있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였다.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불의 남종 엘리야가 딱 맞다고
온 이스라엘이 부푼 기대감으로 술렁거렸다.
그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함에도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눌림에서 구해내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여론만 더 커졌다.
요한에 대한 기대치가 폭발적인 인기로 온 이스라엘을 강타하고 있을 때
나사렛 촌사람 예수님이 혜성같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분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난 사촌 동생인데 스타일은 요한과 다르지만
강력한 끌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으러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스승을 버리고 간 제자들까지 나타났다.
그의 인기와 명성을 빼앗아가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사실 그가 자기는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아니고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 주장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인기를 잃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까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스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맡은 배역에 너무 충실하다.
육신적으로 사촌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혈육에 따른 위계질서를 강조하거나 선임자로서 시기하기는커녕
도리어 요단강에 세례 받으러 온 그의 라이벌 앞에서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여론 조사의 판도가 날이 다르게 라이벌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자기 배역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초지일관했다.
입버릇처럼 자기가 망해야 주인공이 산다고 하더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예초부터 주인공이 아니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주인공에게 집중되도록 나설 때는 나서고
뒤로 물러설 때는 완전히 사라지는 역할을 확실히 감당했다.
특별한 출생에서 남다른 사역과 청빈한 삶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죽음.
그의 삶은 굴곡이 넘치는 평범 이상의 삶이었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그만큼 배역을 잘 소화해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짧지만 굵게 그는 말씀에 기록된 대로 확실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토를 달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1,14)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작은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유업,기업)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