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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철학사상
1. 윌리엄 오캄 생애와 그의 철학·사상 개관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오캄의 윌리엄, 또는 윌리엄 오브 오캄이라고도 부름)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서 서양 중세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윌리엄 오컴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더불어 후기 중세 철학 Big3에 포함된다. 그는 현직 교수가 되지 못하고 시작하는 자(Inceptor, 초보자)에 머물렀는데. ‘공경하올 창시자’(Inceptor venerablis)라고 오캄주의자들이 변형시켜 추앙하기도 했다. 그가 현직 교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루터렐(Lutterell)이 그가 맡을 만한 교수직에 있었기 때문일텐데, 토마스주의자인 루터렐이 오캄을 이단으로 몰아세움으로써 그는 교황청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이 때 오캄이 속한 프란체스코회와 교황청은 심한 대립가운데 있었는데, 프란체스코회가 청빈이 본래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황청의 사치에 반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빈 논쟁이다. 오캄은 수도회의 총장인 미카엘과 함께 ‘청빈 논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종교 세력에 대하여 정치세력을 극대화하려는 바바리아의 루트비히 황제에게 가서 교황을 반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상황을 두고 나오는 말이, ‘오 황제여, 당신의 칼로 나를 지켜주신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나의 펜으로 지켜드리겠나이다’라고 하는 오캄의 고백이다. 그러나 오캄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미카엘의 죽음이후 오캄은 교황에 다시 복종하는 변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마 흑사병의 희생양이 되어 곧 죽게 되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나타나는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유명론자라는 평가이며, 둘째는 근대적 방법(via moderna)를 개척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그가 유명론자라는 것은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유명한 그의 사유 경제 원리 즉, “더 적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한다면 헛된 일이다.”라는 주장 속에 잘 담겨 있다. 그는 필연성 없이 실재를 증가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근대적 방법의 개척자라는 것은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경험주의의 문을 여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스콜라 철학의 자연 신학에서 근대 실증 신학으로 넘어가는 가교를 제공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2.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철학사에서 ‘오캄’이라는 인물이 다뤄지기보다는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그의 철학적 원리가 더욱 많이 다뤄진다. 오캄의 철학이 방대하고 난해하면서도 또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고 그가 견지한 철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유명해진 이유는, 이 방법이 그의 철학의 근본을 이루며, 근대 이후의 사유 방식을 열어주는 핵심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근대 이후의 사유란 ‘기존의 근거 없는 가정들을 비판하고 넘어서’, ‘더 적은 전제로’ 등의 구호로 표현해볼 수 있으며, 기존의 형이상학적 믿음들을 무너뜨리고 점점 경험주의적으로(근대 초기 경험주의부터 논리 실증주의 그리고 현대의 유물론적 경험주의까지) 흘러가는 사유 경향을 말한다.
오캄의 면도날을 나타내는 오캄 자신의 목소리는 이렇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복수성은 필연성 없이 가정될 수 없다), ‘Frustra fit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더 적은 것을 가정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정하여 설명한다면 헛된 일이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실재는 필연성 없이 증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명제들은 오캄이 따른 격률 중 ‘우리는 자명하거나 계시에 의거하거나 또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계시된 진리나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격률과 관련시켜보면서 그의 사유의 경제원리라고 할 수 있는 ‘면도날’을 이해할 수 있다.
분석해보면, 일단 가정은 가능한 한 적을수록 좋다. 그리고 실재를 필연성 없이 상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정이나 실재가 상정되려면 위의 제시된 격률에 따라 확증되거나 존재한다고 주장될 수 있어야 한다.
3. 유명론(경험론적인 철학)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한 학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더 아리스토텔레스다운 학자였다. 즉 그는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인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에 의하면 스코투스와 토마스는 개별 인간을 마치 하나의 실재적이고 보편적인 본성(본질)을 서술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보편적 본성이 이차적으로 질료를 통해 개별화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캄의 입장으로는 모든 존재는 이미 개별적이고 단일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개별화되는 것은 없다. 현실적인 것은 그 자체로 개별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단일한 존재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단일한 개별자와 구별되므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이 만약 여러 개라면 그것은 개별자의 묶음일 뿐이지 하나의 보편자는 아니다. 즉 ‘인간성’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인간이 실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명칭에 어떤 보편적인 것이 상응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보편적인 것에 대한 명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이를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보편적 표현이 어떻게 개별적 사물로 환원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개별 사물의 인식이 출발점이라 할 때, 그 개별 사물에서 추상해가는 길을 비판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그 길에서 불필요한 해명 근거들을 나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이론이 ‘경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추상된 인식은 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바탕으로 나온 지식들로 정신 속에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캄에게는 더욱 경제적인 일이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보편자들이 ‘사물들에 앞서’ 하나님의 정신 속에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다만 공통 본성이 있다고 했지만, 오캄은 더 나아가 보편자들이 ‘사물들 속에’ 있다는 것조차 부인한 것이다. 보편자들은 오로지 ‘사물들이 있은 뒤에’ 관념으로서 정신 속에 있을 따름이다. 관념이 보편적으로 될수록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은 더욱 많아지고 이 대상들을 더더욱 막연하게 지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 명제는 다수의 단일한 사실들에 관한 부분적 지식을 조잡하게 요약한 것이고 단일한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일반 명제에 의존하는 한은 우리의 지식은 단일한 사실들에 대해서 적절한 것이 못 된다. 보편자의 개념은 단 하나가 아니라 많은 비슷한 개별자들을 표상하기 위하여 다른 비슷한 추상적 인식들과 결합하는 방법들을 통해 일반화 된다. 보편성은 그래서 충분히 일반화된 추상적 인식이 술어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만 정신 속에서 논리적인 존재만 갖는다.
그러나 루터렐은 이러한 ‘유명론’을 비판하는데, 그는 모든 명칭은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를 나타낸다는 토미즘의 입장을 반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를 언급하는데, 전자는 개별 사물이지만, 후자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후자가 실재적이지 않다면 왜 실체라는 말을 붙였겠는가? 그러나 오캄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적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추구했다. 그에게는 보편적인 실재라는 것은 경험적으로나 무엇으로나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정할 수 없는 것이다.
4. 이성과 신앙
철학적 사유에 의해서 밝혀질 수 있는 신학이 있다고 한 도미니크회 출신 토마스 아퀴나스의 반대자이자, 프란체스코회 출신의 둔스 스코투스의 반대인 옥캄은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신에 관해서, 또한 시의 존재에 관해서까지도 전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성이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개연적인 것들뿐이다. 하늘과 땅을 존재한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개연적일 뿐이다. 영혼의 불멸에 관한 것도 그렇다. 이들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철학에서 전혀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그는 신 존재에 대해서 ‘명백한 논증’을 포기하고 ‘설득적이고 개연적인 논증’을 시도한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가 소박한 확신을 가지고 언어의 형식을 사물의 형식으로 간주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우리 앎에 등장하는 것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개념뿐이다. 우리가 신에 대해 어떤 서술을 한다면, 결국 그 문장의 주어는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사유 형식은 사물의 구조가 아니며, 우리의 윤리적 법칙이 신의 의지와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에 신은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개념으로 형성된 신은 ‘최고선’의 신이고 그 신이 증오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수 있다. 우리의 ‘올바른 이성’과 ‘올바른 의지’라는 개념 결합으로부터 사실적인 신의 결정을 결론내릴 수 없다. 우리의 개념 속에서 모순되는 것이라고 해서 현실적 신이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개념의 존재론화를 비판했다.
K. 플라시는 신이 이렇게 말했다면 오캄의 주장이 신앙에 대한 폭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들의 개념 척도를 신성의 바다로 끌고 가는 것을 포기하라. 절대적 단순성이 지배하는 곳에 너희들의 구분이 깃들일 곳은 없다. 감각적 세계에 열중하라. 너희는 거기에 관계된다. 너희는 거기서 자신을 정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는 그렇게 하도록 갖추어져 있다. 신성의 본질에 관한 사변은 그냥 둘지어다. 너희는 세계에 열중하라.” 이 말이 오캄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오캄에 있어서의 이성과 신앙 혹은 신학적 지식의 관계에 대한 일면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윌리엄 오캄의 윤리학 이론
오캄은 성서에서 규범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론의 개념적 도구를 받아들인 도덕철학의 전통 안에 있다. 오캄은 이 두 가지를 재료로 하여 독창적이고도 강력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오캄은 행위(act)의 올바름과 그릇됨은 행위 자체의 어떤 특징이나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의도와 성격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의지의 선함 또는 악함은, 일차적으로는 올바른 이성의 지시(dictate)에 대한 일치 여부에 의존하며, 궁극적으로는 신의 의지에 대한 일치 여부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1. 도덕성의 본성
도덕성은 우리의 통제 하에 있는 인간적 행위들, 더 정확히 말해 의지의 힘에 종속되어 있는 행위들과 관련되어 있다. 도덕성이 이성과 의지의 사안이라는 조건은 오로지 천사와 인간만이 충족시킨다. 이성과 의지가 도덕적 행위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상론하기에 앞서,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도덕성이라는 것은 과연 이성적인 기획(rational enterprise)인가? ‘도덕적 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만일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임의토론문제 II. q.14에서 오캄은 ‘도덕성과 관련하여 증명적 앎이 존재할 수 있는가(Utrum de moralibus possit esse scientia demonstrativa)’를 묻는다. 그는 여기서 윤리학 이론에 포함되는 두 부분, 즉 (I) 실증적인 도덕 지식(scientia moralis positiva)과 (II) 비실증적인 도덕 지식(scientia moralis non positiva)을 구분한다. 후자는 다시, (1) 그 자체로 알려지는 것과 (2) 경험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구분되며, (1)에는 (i) 추상적 개념의 차원에서 알려지는 원리들과 (ii) 행위의 종류를 분류하는 원리들이 포함된다.
(I) positive moral knowledge. 상위 입법자에 의해 금지되었거나 명령되었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선을 추구하거나 악을 피하라는 의무를 부과하는 인정법 혹은 신법. 논리와 이성에 의해 규제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자명하게 인식될 필요는 없는 실증적 법이나 명령에 기초.
- 신적 명령으로 구성된 실증적 도덕성은 인간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내용을 분명하게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의 인식가능성은 신이 자신의 명령을 우리에게 알려주는(inform) 데에 있다.1)
(II) nonpositive moral knowledge. 상위자에 의한 명령(preceptum) 없이 인간의 행위를 인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알 수 있는(자명한) 원리이거나 그로부터 도출되는(따라서 증명의 형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결론들에 해당한다.
(1) principia per se nota
(i) 어떤 원리들은 윤리학의 근본 개념들을 추상적 차원에서 연결시킨다. ex. ‘올바른 것은 추구해야 하고 잘못된 것은 피해야 한다.’ ‘의지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이성에 일치시켜야(conform) 한다.’ etc.
(ii) 어떤 원리들은 잘못된 행위들의 종류를 분류한다. 명제집주해 II, q.15에서 오캄은 도둑질, 간통, 살인 등은 정의상(by definition)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름은 구체적인 특정 행위를 단적으로 집어내는(pick out)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신적 계명에 의해 반대의 행위를 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함축할(connote) 뿐이다. 예컨대 살인은 잘못된 죽임이다. 따라서 ‘살인은 잘못이다’나 ‘도둑질은 잘못이다’와 같은 원리는 그 자체로 인식 가능하다. - 이렇게 비실증적 도덕성은 분석적으로 참인 원리들(사람은 옳은 것을 행하고 잘못된 것을 피해야 한다,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은 이성이 알 수 있기는 하지만, 과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또는 특정한 죽임의 예가 살인인지 아닌지 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덕적 내용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2) principia nota per experientiam
행위자가 개별적 경험을 기초로 고안해낸, 행위 대상에 대한 개별적 명제들. 이런 명제들이 보편적 명제로 일반화될 수 있다. 오캄의 예: “분노한 사람은 좋은 말로써 진정되어야 한다(iste iracundus est leniendus per pulchra verba).” (이것이 일반적으로 “prudentia”라고 불린다).2)
2. 행위의 도덕적 중립성
오캄은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3). 이에 대한 오캄의 두 가지가 논거(Quodl. I. q.20).
(1) 첫 번째 논거: 동일한 하나의 행위가 어떤 의도와 결합되면 선하고 다른 의도와 결합되면 악하다. ex) 신을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교회로 출발한 사람이 어떤 순간부터 과시욕 때문에 걸어가는 경우. 자살을 범하려 벼랑에서 몸을 던진 사람이 중간부터 진실하게 뉘우치기 시작한 경우. 이런 경우 의지의 상이한 활동이 동일한 행위의 도덕적 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중립적이고 무차별적이다.” 어떤 행위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위자의 의도 때문이며,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로지 행위자의 의도만이 선하거나 악하다. 그 의도에 대응하는 행위는 다만 외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명명될(extrinsically denominated) 수 있을 뿐이다.
(2) 두 번째 논거: 어떤 행위의 이행(performance) 혹은 미이행은 도덕적 가치평가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적 운(moral luck) 개념에 반대하는 논거다. 어떤 두 사람이 덕스러운 행위를 원하고 똑같이 시도했지만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실패했을 때, 우리는 이 두 사람 모두 도덕적으로 동등하게 선하다고 말한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성은, 일어날 수 있었던 일에서 얻을 수도 있었던 성과(counterfactual purchases)를 모두 잃어버리며, 결과적으로 도덕적 요인과 비도덕적 요인을 구분할 수 없다. 가능한 것,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참작은 도덕적 가치의 결정에서 꼭 필요하다.
오캄은 이상의 논거에서 또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즉, 선한 의도 혹은 악한 의도에 대응하는 행위의 어떤 공통적 특징(feature)은 없다는 것이다. 행위와 도덕적 선악의 의도 사이에 유형별 대응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행위자의 의도를 지시하지 않고서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행위나 허용 불가능한 행위를 집어낼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성서의 규범적 원리에 대한 당대의 합의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성서의 규범 원리는 특정 행위의 이행 혹은 미이행에 대한 절대적 금지로 이해되었다. 예컨대 살인, 거짓 증언, 남의 것에 대한 탐욕 등. 이러한 전통적-일반적 사고방식에서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 오캄은 어떻게 응답하는가? (1) 행위의 이행은 애초의 의도를 더 강화시킴으로써[오로지 그런 의미에서만] 더 죄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2) 십계명에서는 행위와 의도가 함께 금지되고 있으며, 행위의 이행만이 문제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오해이다. 성서의 금지사항들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사실 그런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의도에 적용된다.
오캄은 외적 행위가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indifferent)이라는 자신의 명제가 직관에 어긋나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예컨대, 행위의 중립성에 대한 명제는, 신이 악을 원한다는 주장이 글자 그대로 참이라는 주장을 무력하게 인정하고 마는 것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신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기를 원하며, 요한은 허영심에서 자선 행위를 한다. 요한의 행위는 악하다. 따라서 신은 악을 원한다. 옥캄은 자신이 이러한 주장을 단지 하나의 가능한 관점으로 고찰했을 뿐, 실제로는 이러한 주장이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옥캄이 말하고자 하는 바, 문제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3. 의지
외적 행위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옥캄의 부정적 명제는, 의지의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의 담지자라는 긍정적 명제와 대응한다. 정확히 말하면, 옥캄은 “필연적, 본질적으로 훌륭한(necessarily and intrinsically virtuous) 내적 행위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거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1) 본질적으로 훌륭한 내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어떤 내적 행위가 훌륭하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훌륭하거나 우연적으로 훌륭할 것이다. 만일 우연적으로 훌륭하다면 그것은 다른 행위와의 일치 때문에 그러할 것인데, 이는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행위에 대한 우연적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한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한다.
(2) 그러한 내적 행위는 의지의 행위여야 한다. 오로지 행위자의 의도만이 칭찬, 책망의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행위자의 의도만이 의지의 직접적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행위자의 의지의 힘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선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감정이나 지성의 활동 같은 다른 내적 행위들은 의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통제되는 능력들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지만, 의지의 행위만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통제 안에 있다.
(3) 본질적으로 훌륭한 의지의 행위는 신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신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사랑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선하며, 행위자의 의지 안에 훌륭한 습성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행위는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선하며, 다른 행위들(의지의 다른 행위들 및 외적 행위들)의 선성이 의존하는 본질적 선이다.
4. 도덕적 행위의 단계들
De connexione virtutum에서 오캄은 모든 도덕적 덕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1) 첫째 단계: 올바른 이성과 일치하여 행위하기를 원하는 것.
즉, 특정 상황(때와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올바른 이성의 지시를 따라 의지가 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도덕성이지만, 오캄은 이것이 불완전한 도덕성이라고 생각한다.
(2) 둘째 단계: 올바른 이성과 일치하여 행위하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이 도덕성을 행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올바른 이성에 합치하는 것을 올바른 이성에 반하는 그 어떤 것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행위자의 진지하고 결연한 의도. 도덕성은 이 의도의 진지성 때문에 인간의 삶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의 (적법하지만 궁극적이지는 않은) 관심사들과 구분된다.
(3) 셋째 단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따라야 한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행위하는 것.
즉,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동기들을 일체 배제하고, 순전히 도덕적 동기에 의해서만 행위하는 것.
(4) 넷째 단계: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행위하는 것.
즉,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일을 하라는 이성의 지시를 따르는 것, 바로 그것이 완전한 도덕적 덕이고 성인들이 말하는 덕이다. 중요한 것은 신 사랑을 발로로 한 행위의 의도가 있다 해도, 신학적 덕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도덕적 덕(의 높은 단계)이 문제된다는 점이다. 넷째 단계의 행위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본래적인) 도덕성의 영역에 속한다.
(5) 다섯째 단계: 공덕이나 초인적 인내(supererogation or heroic perseverance)에 의해 보통의 인간적 조건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
비도덕적 행위를 할 바에야 불 속에 몸을 던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예. 보통 사람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을 만한 행위. 이 단계는 셋째 단계 위에 형성될 수도 있고 다섯째 단계 위에 형성될 수도 있음.
5. 신과 올바른 이성
중요한 물음은 네 번째 단계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세 번째 단계 행위의 도덕적 진전인가라는 문제이다.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신 사랑은 순전히 도덕적 동인에 의한 행위에 과연 무엇을 더 덧붙이는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옥캄은 Dialogus 1. 6. 77에서 도덕적 행위의 단계들에 대한 좀 더 단순한 구분을 제시한다. (1) 신을 위해서 하는 행위 (2) 올바른 이성의 지시에 따르는 행위, (3) 유익선이나 쾌락선을 얻기 위한 행위. 세 번째가 어떠한 도덕적 동인도 될 수 없는 경우를 설명하기 위한 예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앞의 넷째 단계]와 둘째[앞의 셋째 단계] 행위이다.
옥캄은 신을 위해 하는 행위를 완전한 덕의 계기로, 올바른 이성의 지시에 따른 행위를 참된 덕의 계기로 본다. 예컨대 어떤 목격자가 진실을 증언할 때, “신을 위해서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 올바른 이성이 지시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 하느님이 올바른 이성보다 더 완전하다.” 신이 올바른 이성보다 더 완전하기 때문에, 경건한 신자가 말한 진실이 정직한 비신자가 말한 진실보다 더 완전하다. 그러나 오캄의 요점은 경건한 신자가 정직한 비신자보다 더 정직하다(veracious)는 것이 아니다. [정직이라는 점에서는] 둘 다 훌륭하다. 신이나 올바른 이성 모두 진실을 말하라고 하므로 결과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진실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는 차이가 있다.
이성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인식능력이다. 마치 시각이 개인적인 지각능력이듯이. 오캄이 ‘올바른’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의미는 무질서하지 않다는 것이다. 올바른 이성을 신뢰하는 것은 결코 잘못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유한한 제한적 인식능력은 다만 그것이 닿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작용한다. 자명하지 않은 진리들과 일치하려는(converge) 경향을 인간의 이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인식능력의 한계가 우리의 한계는 아니다. 프란치스칸 전통의 사고방식을 따라, 오캄 역시 의지가 지성보다 더 멀리 닿을 수 있으며 의지가 지성을 인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더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신앙이 이성의 폭을 확장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캄에 따르면, 우리가 최종 목적을 위해서 초자연적 습성(신앙이나 애덕과 같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연적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다. 신앙은 이성을 보완하거나 확장시킬 수 있지만, 이성에 의해 강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 행위의 넷째 단계가 셋째 단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오캄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아야 한다. [넷째 단계에서] 행위자는 어떤 행위를 올바른 이성이 명령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행하는 것이다. 즉, 그는 올바른 이성의 지시에 일치하여 행위함으로써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넷째 단계에서 덧붙여지는 특징은, 도덕적 행위 자체를 신 사랑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도덕 개념을 심화시키는 것이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6. 의지의 종속
도덕적 행위의 가장 높은 단계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신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기서 도덕적 행위는 어떤 구조를 지니고 있을까? 이미 3장에서 암시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그것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모든 것(whatever God wants to be loved)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모든 것(all that God wants to be loved)을 사랑한다.” 간단히 말해, 의지는 종속의 관계(subordination)로써 자신을 신에게 구속시킨다. 우리는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이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신을 사랑한다. 오캄에게 윤리학의 핵심은 신 사랑이며, 신 사랑이란 어떤 이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이다.
명제집주해 I d.48, q.1에서 ‘모든 창조된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에 스스로를 일치시켜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오캄은 ‘우리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종속시킨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 중요한 일련의 구분을 도입한다. (1) 다른 의지가 원한 그 대상을 원하는 것. (2) [내 의지가] 원하기를 다른 의지가 원한 바,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것. “신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을 사랑하기”라는 말에 대한 일반적인 자연스러운 해석은 첫 번째 의미[1]에 해당한다(즉, X는 A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B는 X의 의지에 자신을 일치시키기를 원하고 따라서 A를 행복하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오캄은 두 번째 의미[2]가 더 적합한 해석이라고 본다. 즉, 자신의 의지가 타인의 의지를 따르도록 하되, 단순히 타인이 지닌 욕구를 그대로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X는 A가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지만 B가 A를 슬프게 하기를 원할 수 있다(아마도 A가 그 이후에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B는 X의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A를 행복하게 만들기 보다는 슬프게 만들기를 원해야 한다. (1)과 (2)가 차이가 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예: 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했지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들이 죽인 방식으로) 원하지 않기를 원했다. 신은 내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지 않기를 원한다. 신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신이 ‘우리가’ 원하기를 원하는 바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옥캄은 명제집주해 I, d.48에서, 모든 창조된 의지는 신이 자신이 원하기를 원하는 바를 신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습성적, 간접적으로(habitually and mediately) 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 “과연 어떤 습성이 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경향을 갖게 하는 습성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러한 습성이란, 신의 의지를 즐겁게 하는 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인간의 의지가 즐겁게 되는 그러한 습성을 말한다. 이성을 사용하는 모든 이에게, 그가 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 이후에는, 이러한 습성이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습성이 인간을 신이 원하는 것으로 직접 이끌어가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는 신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습성은 이러한 인식의 매개를 통해 인간을 행위로 이끌기 때문이다.”
의지는 맹목적 능력이 아니다. 의지는 자유로우므로 올바른 이성의 지시에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이성의 매개를 통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합하게 행위하기 위해서, 행위자는 자신이 원하기를 신이 원하는 바 바로 그것을, 신이 그렇게 원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것이 이성적 행위의 일반적인 조건이다. 즉, 신의 의지를 수행하려는 습성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되기(to be habitually disposed to carry out God’s will). 신의 의지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 관해 논하면서, 오캄은 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를 지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특정한 계명이나 일반적인 도덕 규칙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ies)에 대한 오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지성에게 오류가 있더라도 - 그 오류가 극복될 수 없는 것이었고 행위자의 잘못이 아니라면 - 의지는 얼마든지 올바른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이 어떤 극복 불가능한 오류에 빠졌을 경우, 그 이성을 따르는 창조된 의지는 [여전히] 올바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기를 신이 원한다면, 신은 자신의 의지가 우리에게 알려지도록 할 수 있을 것임, 우리는 그의 의지를 수행할 의무를 지닌다.
7. 신적 명령
신은 한 행위자에게 다른 행위자와는 체계적으로 다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신은 누구에게도 모순적 명령을 내릴 수는 없으며, 모순을 원할 수도 없다.4) 도둑질, 살인, 간통이라는 개념들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그것과 반대의 것을 행하라는 신적 명령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신은 그런 행위들을 명령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다. 즉, 신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올바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명칭들이 붙는 행위들을 명령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행위들이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집트인의 재산을 빼앗으라고 명령할 때, 이것은 전혀 도둑질이 아니다. “그것은 악하기보다는 선한 일이었다.”
행위의 도덕적 중립성을 받아들인다면, 신은 어떠한 행위나 행위의 유형에 대해서도 의무적 이행 혹은 금지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의 명령이 행위들의 올바름과 잘못됨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캄은 명제집주해 I, d.46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던 사례를 논하면서, 어느 것이든 명령할 수 있는 신의 자유를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그는 신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했고 그에게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이 그러한 희생의 공모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은 살인, 도둑질 등의 명백한 경우가 인간에게 살인, 도둑질로 보이도록 인간을 고안해냈다. 우리의 능력들에게 이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에 대한 의무 혹은 금지의 명령을 신이 내린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어야(designed) 할 것이다. 물론 신은 도둑질이나 살인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특수한 경우들(이집트의 약탈이나 이삭의 희생)을 알려준다. 그러나 어쨌든, 신에게 속하는 명령의 자유와 겉보기에 잘못된 행위들이 명령된다는 사실 사이의 긴장은, 오캄 윤리학의 연구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이며, 이 난점에 대한 그의 대답을 둘러싸고는 아직 합의된 바가 없다. 그가 이 어려움을 인정했는지 자체가 불확실하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든, 오캄 윤리학의 궁극적 토대가, 적어도 상이한 행위자에게 상이한 신적 명령이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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