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월성 숭신전 터의 팔각 석기둥의 정체는...
2011년 12월 월성 숭신전 옛 터의 석주 모습, 이때는 주변에 대나무와 다른 나무가 무성한 정비 전 모습.
근래에 다녀온 월성 숭신전 옛 터의 석주 모습, 숭신전 터는 숲 너머에 있습니다.
팔각 석 기둥 너머 비석대와 우물, 우물의 덮개석은 아마도 신라시대 석불좌상의 사각대좌의 상대석 또는 하대석을 재 가공하여 사용 한것으로 보입니다. 보물 제 8호 여주 고달사지 석불 대좌를 참고하면 그 본 모습이 확인 될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팔각기둥은 애초에 이렇게 세워져 입구 초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석진환 회장의 증언을 보면 옮겨질 때 팔각 기둥은 그대로 두고 경엄문(현재 내삼문)과 사당(숭신전), 비 만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동천동으로 옮겼을 때 비로소 내.외삼문을 갖추고 홍살문을 세워 사당의 격식을 갖춘 것이라고 합니다. 비석 받침은 두고 비만 옮겼고, 옮겨지면서 새로 비석 받침 그리고 비각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비와 비각의 높낮이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팔각 기둥을 두고 간 이유는 아마도 홍살문이 대신하게 되어 필요 없어진 까닭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장초석 개념으로 외삼문에 사용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 외삼문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영녕문(외삼문)은 동천동으로 옮겨진 후에 새로 생겼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설사 장초석(실제 사당 건물 또는 비각 등에는 장초석이 많이 쓰임)으로 외삼문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높이가 너무 높아 삼문의 비율에 잘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홍살문의 장초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없지만, 그 상태로 세우기 힘든 구조이며, 홍살문 또한 동천동으로 이전하여 세웠다는 증언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현재의 모습처럼 세워져 '숭신전의 입구(외삼문)'라는 상징적 격식만 갖추고 사용된 듯 보입니다. 실제 그 정도 높이의 홍살문 장초석이 이용된 예가 거의 없고 충북 괴산 칠충각 홍살문 장초석이 이와 높이가 비슷하나 홍살문을 지탱해야 하는 구조상 장초석에 깊은 홈이 패어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즉! 현재의 팔각 석주의 모습으로는 홍살문에 아예 사용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팔각 기둥은 그 쓸모를 다하고 이전하였을 때는 큰 의미가 없어 두고 간 듯합니다. 애초에 이곳에 사용될 석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경주에 그 흔한 신라시대의 석재가 아닐까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다 보니 불현듯 숭신전 건물을 세울 때 사용하려 어디선가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팔각 석주가 사용된 예입니다.
불국사 대웅전 및 극락전 앞 석등, 국립경주박물관의 미술관 뒤 경주읍성 석등
신라시대의 석등 석재는 경주 일대에 무수히 많습니다. 조선시대 민간인의 집(교동최씨 고택)에도 정원 장식용으로 가져와 세워 둘 정도입니다. 특히 팔각의 석주는 석등의 간주석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월성의 팔각 석기둥을 석등의 간주석으로 본다면 너무 높고 지름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단석,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까지 더한다면 상당한 높이의 규모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2기나 되는... 따라서 석등의 간주석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옥산서원의 정료대, 신라시대의 석등 간주석과 상대석을 재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사당에 흔한 '불그릇'을 올려 밤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가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는데 그렇게 사용하기에도 높이가 너무 높아 사용하기에는 불편하여 구조적으로 실용적이지 않다는 점도 있습니다. 불을 붙이거나 불그릇을 올리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이지요! (실제 경주 일대의 정료대는 보통 석등의 간주석과 상대석(하대석), 심지어 석탑의 옥개석과 조합하여 설치 한 예가 많습니다. 동천동의 숭신전 앞에도 한 기의 정료대가 확인됩니다. 이 또한 석등의 것으로 보입니다.)
감은사지의 계단 석주와 망덕사지의 계단 석주
또 다른 추정은 신라시대 건물로 올라가는 석계단의 석주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감은사지의 계단 석주와 망덕사지에 묻혀있는 계단 석주가 좋은 예가 됩니다. 이 또한 그런 용도로 사용되기에는 지름이 너무 크고 높이가 필요 이상으로 높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월정교 남북누각 앞에 배치된 팔각 석주와 사자상
복원(중창?) 된 월정교에는 남북에 각 한 쌍의 팔각 석주가 누각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석주를 유심히 살펴보면 발굴된 옛 석주 석재를 사용하여 세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은 일정교지의 발굴에서 실제 이러한 석주가 발굴되었습니다. 길이 257cm, 지름 41cm의 상당히 길이가 긴 석주였습니다. 받침석과 하반신만 남은 팔각 석좌에 조각된 사자상도 함께 발굴되어 현재의 월정교 복원에 그 모습이 참고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 사자상의 파손을 우려하여 손닿기가 쉽지 않은 높이에 사자상을 세웠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복원된 월정교의 석주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를 토대로 월정교의 팔각 석주가 복원되었다고 봅니다. 월성 내 숭신전 터의 팔각 석주(서쪽 석주)는 높이가 대략 168cm 정도 지름은 하단의 둘레 150cm를 π로 나눠 지름을 확인하면 48cm 정도, 같은 방법으로 상단 130cm로 지름 41cm 정도 나오게 됩니다. 하단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7cm 가량 좁아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름은 일정교의 것과 비슷하지만 높이가 턱없이 낮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월정교, 일정교의 석주가 발굴되었고 그 실체가 확인된 바, 이곳의 석주가 옮겨진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월성과 월정교 및 일정교는 매우 가까운 곳이라 월성의 팔각 석기둥이 그곳에서 옮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앞서 거론한것을 요약하지면 ...
1) 삼문과 같은 건물(홍살문 포함)의 장초석: 건물과의 비율 및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
2) 석등의 간주석 및 정료대: 일반적인 석등 간주석 비해 지나치게 크고 높다.
3) 석 계단의 석주: 석 계단 석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굵고 높으며 주변 조화가 잘 맞지 않는다.
4) 월정교 및 일정교의 다리 앞 사자상 석주: 일정교지 발굴에서 이미 확인되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팔각의 형태를 가진 석기둥의 용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앞서 거론한 것들이 아니라면 이 팔각 석기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팔각 석기둥의 형상만을 가지고 추정해 본다면 딱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릉의 이것 입니다. (다음 글에 계속)
[출처] 탈해 왕릉의 불편한 진실과 팔각 석기둥의 비밀|작성자 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