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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산악조난구조대 창설에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고사례입니다.
글의 내용은 중앙일보 김홍준 기자의 2018년 11월 25일 기사와 사고 당시 스크랩 및 촬영된 사진, 중앙119구조대의 재난 유형별 사례집을 편집하였습니다.
참고로 1983년 4월 3일에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고가 발생합니다.
당시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 [1971년 11월 29일자 중앙일보]
71년 인수봉 참사 생존자 “로프 풀고 기어 내려가려는 희생자들…추락 막으려 묶어놨다”
“산이 돌변했다. 20여 명이 쓰러질 듯 백운산장으로 들어섰다. 산장 안은 이들이 몰고 온 냉기로 가득 찼다. 인수봉에서 하강한 이 사람들은 다행히 화를 면했다. 하지만 아직 바위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7명 사망…북한산서 무슨 일이
날 화창하다 체감 영하 30도 돌변
강풍에 로프 엉켜 5명 꼼짝 못해
체육복 한겹만 입고 제때 못 먹어
하강 중 보니 5명 이미 얼어붙어
우리팀 2명도 저체온증·탈진 사망
의류·식량 부족…하강 너무 늦었다
오는 28일은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산 인수봉 대참사 47주년이다. 이종록(73·부루마운틴 산악회)씨는 당일 생존자이면서 최후의 하강자였다. 그의 증언과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의 사고 일지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이종록씨의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바위틈에 낀 로프 끊으려 "칼! 칼!"
1971년 11월 28일 체감 영하 30도의 혹한이 몰아친 인수봉에서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다음날 구조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11월 28일 경찰과 구조대원들이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인수봉 사고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백운산장은 1983년 4월의 인수봉 사고 때도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일요일인 1971년 11월 28일, 서울역에서 양희철(21), 최성규(20) 등 동료 5명을 만나 우이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인수봉 등반에 나설 계획이었다. 날은 화창했다. 지난 며칠간 한낮에는 최고 15도까지 올라갔으니 오늘도 역시라고 생각했다. 백운산장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코펠 뚜껑에 묻은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이렇게 추워질 수도 있나 싶었다.
오후 1시30분, 기존A 코스를 택했다. 앞 팀 등반이 더뎠다. 한참을 쉬자니 강한 바람에 한기가 엄습했다. 정상에 오른 건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였다.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6시, 남측 하강 구간에서 로프를 뿌렸다. 오버행(90도 이상의 경사로 이뤄진 암벽 구간)을 지나니 여러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로프가 바람에 날려 엉키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구해달라고. 바람에 목소리가 묻혔다. 두 명이 정상에서 내려왔다. 10여 명이 옹기종기 붙었다.
우리 팀에서 하강하던 희철이 허공에 갇혔다. 로프가 바람에 쓸리며 바위틈에 낀 것이었다. 희철이 소리쳤다. “칼! 칼!” 그는 로프를 끊으려고 했다. 성규가 다른 로프를 써서 펜듈럼(반동을 이용해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등반법)으로 희철에게 다가갔다. 수십 번의 시도에도 희철의 팔을 잡을 수 없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영하 12도에 바람이 거셌다. 체감기온은 영하 30도였다. 등반자 대부분이 입고 있는 옷은 한 겹 셔츠거나 허술한 체육복이었다. 끼니를 거른 사람도 있었다. 저체온증으로 몇 명이 졸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로프를 풀어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 내려가려고 했다. 바닥에서 30m 지점이었다. 그들의 손이 바위를 스칠 때마다 ‘딱딱’ 금속성 소리가 났다. 바위도 얼었고 그들의 손도 얼어버린 것이다. 난 이들을 때리면서 힘을 내라고 소리쳤다.
백운산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누군가 우리 쪽으로 올라왔다. 밤 11시30분이었다. 그 사람들이 가져온 로프로 하강을 시작했다. 그런데 5명이 문제였다.
이미 이곳까지 하강한 지 한참 지난 이들 5명은 인사불성이었다. 나는 이 5명이 추락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추락은 0.1%의 희망도 버리는 거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다. 기온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성규를 먼저 내려보냈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하강 시킨 뒤 내가 마지막에 내려섰다. 밤 11시45분, 하강에만 5시간45분이 걸렸다. 그들 5명과 희철은 얼음장 바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규는 하강했지만 털썩 주저앉더니 일어서지 못했다. 성규는 수십 번의 펜듈럼 끝에 탈진으로 숨졌다.
난 인수봉 하강 지점에 희철과 성규를 기리는 명패를 만들었다. 사고 이후 인수봉에서 하강할 때마다 그 명패를 닦아주고 쓰다듬어 줬다. 백운산장지기였던 (이)영구 형(2018년 9월 작고)이 한참 지나 내게 이러더라. 그때 인수봉에서 내려온 사람들, 구조대원들 챙겨주느라 쌀이 동났다고. 그래서 며칠 굶었다고. 그래도 누군가는 살아서 괜찮았다고.
1971년 11월 28일 인수봉에서 숨진 양희철, 최성규씨를 기리는 명패. 이종록씨를 비롯한 부루마운틴 산악회 회원들이 만들었다. 이 명패는 원래 인수봉 하강지점에 있었지만 지금은 추모공원으로 옮겼다. 북한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 명패를 철거할 때 하단에 '산벗 일동'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산벗'이란 산악회를 수소문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루마운틴 산악회가 만든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계기로 이종록씨는 하단에 '부루마운틴 산악회'를 별도로 표시했다. 사진 이종록
당시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 기사 [1971년 11월 29일자 경향신문]
1. 발생개요
가. 일시 : 1971. 11. 28
나. 장소 : 서울 북한산 인수봉
다. 원인
기온이 급강하하여 강풍에 자일이 얽혀 참사
28일 하오 6시 40분경,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인수봉 산봉우리의 벼랑에는 순간 “사람 살리라는” 비명이 메아리 쳤다.
한발씩 조금씩 봉우리를 내려오던 등산객들은 갑자기 휘몰아친 강풍에「자일」이 휘말려 수십 개의 바위아래 떨어져 죽었거나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영하 15도가량의 추위와 찬바람에 기절, 동사자까지 속출하는 사고를 냈다.
자일에 몸을 의지한채 웅장한 인수봉을 배경으로 숨져간 젊은이들의 처참한 모습들 [1971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2. 피해상황 : 23명(사망 7, 부상 16)
벼랑에서 숨진 산사람을... 겨울산속에서 숨진 젊음을 거두어 내리기 위해 산악회원들이 벼랑에 올라 작업을 폈다. [1971년 11월 29일자 경향신문]
3. 경과 및 조치내용
가. 경과과정
한파주의보 외면한 등반자들이 1971년 11월 27일 중앙기상대의 기상예보에서는 전국이 평년보다 5~6 낮은 추위가 될 것이라고 예보하였으며 서울이 영하 8°의 강추위를 보일 것이라는 예측을 한바 있다.
그러나 11월 28일의 북한산 하늘은 맑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으나 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동안 계속된 난동으로 한파주의보를 외면한 채 많은 등산객이 평소의 주말처럼 붐볐다.
오후 2시경부터 서쪽(구파발)에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백운대나 정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의 등산로에서는 5분 이상의 휴식이 어려울 정도로 쌀쌀해 졌다.
오후 4시경부터 바람은 서북풍으로 변하여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오는 쪽과 반대 방향인 동남쪽으로 위치한 인수봉 전면은 바람 한점 없이 아늑한 상태였으며, 여러팀이 인수봉 전면에서 암벽등반을 하고 있었다.
1) 어둠속의 절규
최○○(당시 25세)와 그의 동료 8명은(이팀에서 김○○ 사망) 오후 3시경 기존 B코스를 올랐다.
이때 B코스에는 약 25명 정도의 사람이 몰려 혼잡을 이루며 등반 중이었다. 최○○팀이 3피치를 올랐을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며, 등반 인원이 많아 속도가 늦어졌다.
이들이 정상에 도달한 시간은 일몰 후(5시 30분 경)였으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몸이 쓰러질 정도였다.
이들이 오버행 쪽의 하강을 포기하고, 후면 쪽의 하강을 서둘렀다.
이 팀이 보유한 로프가 4동이었으므로 2동을 연결하여 40m 길이로 두피치를 하강, 신속하게 내려갔다.
먼저 하강한 일행은 추위와 바람때문에 백운산장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최○○가 하강을 완료한 시간은 오후 8시였다.
그가 곧 로프를 회수한 후 떠나려고 할 때 오버행 쪽에서 뛰어내려온 사람이 김○○(당시20세)의 실신을 알려왔다.
최○○가 곧 능선위로 달려갔을 때 김○○은 의식을 잃은 채 능선의 30m아래 바람막이 지형에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점심을 굶은 상태로 하강 중 3시간 이상을 추위와 강풍에 시달려 탈진 상태였다.
최○○가 김○○을 부축하고 능선으로 올라왔을 때는 몹시 추웠다.
이때 백운산장에서 김○○이 올라와 함께 부축하고 내려가던 중 혹한의 어둠 속에서 비명이 들려 위를 쳐다보니 오버행 아래 테라스 쪽에서 웅성대는 사람의 목소리와 바람결에 구조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2) 백운산장
이들 3명이 백운산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였다.
곧 김○○을 마사지하고 더운물을 먹이고 나니 회복되는 듯 하다가 그 는 10시 20분 경 갑자기 숨이 끊어져 버렸다.
김○○는 후면 하강팀중 유일한 사망자이며, 이날 인수봉 조난사고의 첫 희생자였다.
백운산장에 먼저 도착한 일행 모두가 손과 귀에 동상을 입고 퉁퉁부어 올랐거나 물집이 생긴 사람들도 있었다.
3) B코스
한편 김○○(당시 고 2년)와 그의 동료 3명은 오후 3시 30분 경에 전면 슬랩을 출발, B코스를 올랐다.
인원이 많아 등반속도가 느린 몇 팀을 앞질러 6시경에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때 정상은 강풍이 불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하강을 하려고 오버행 쪽을 살펴보니 광운공고의 다른팀 11명이 하강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서 이들을 설득, 안전하고 비교적 하강이 수월한 후면으로 인솔하고 내려왔다.
후면은 강풍이 불고있어 몹시 추웠으나, 마침 배낭 속에 휴대해 온 담요 한 장을 여럿이 뒤집어 쓰고 체온을 유지하며 하강을 완료하였다.
이들은 하강하기 직전에 정확한 판단을 하여 자기 팀 4명과 다른 팀 10명을 인솔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한 담요를 여럿이 뒤집어 쓰는 슬기를 발휘하였기 때문에 체온 유지가 가능했으며, 한 명의 동상자도 없었던 것이다.
4) 죽음의 하강
심○○(당시 26세 이 팀에서 구○○ 사망)과 그의 동료 7명은 오후 2시에 전면 슬랩을 출발하였다.
B코스 첫 피치에서 1명(장○○)이 몸이 불편하여 하강, 등반 인원이 7명으로 줄었다.
이팀이 B코스로 올라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경 이었다.
기념촬영을 끝내고 날씨가 매우 추워서 곧 오버행 하강지점으로 하강을 시작하였다.
심○○팀의 이○○은 하강하는 도중에 성명 미상의 고등학생 1명이 하강 중 강풍에 날린 로프가 크랙에 끼어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 로프를 매어준 후 테라스까지 하강을 도와주고 자기도 하강하였다. (오후 7시 30분경)
테라스에는 심○○팀과 고등학생 3명이 먼저 하강하여 있었다.
이때 정상에서 다른 팀의 로프 2가닥이 내려오면서 강풍에 날려 다른 로프들과 뒤엉켜 버렸다.
정상에 대기중이던 정○○과 구○○은 자기 팀과 다른 팀의 로프 3동을 모두 끌어올려 풀어보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오버행 아래 테라스에서 대기중인 사람들은 세찬 강풍과 급강하한 기온 때문에 당황하기 시작 아래쪽을 향하여 구조 요청을 하였다.
이때의 시간이 8시 30분.
한시간 이상을 한파에 시달린 이들은 심○○과 이○○(17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탈진해 졸고 있었다.
심○○은 이들을 흔들어 깨우곤 하였다.
이때 김○○(23세)팀 4명이 차례로 하강하였다.
테라스에 고립된 8명은 김○○의 로프를 이용, 하강하였다.
추위와 바람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황 속의 하강은 긴 시간이 흘렀다.
심○○은 다리가 경직(쥐)되어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사지를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와 손등에 심한 동상을 입고 있었다.
한편 이날 두 사람의 희생자를 낸 블루마운틴 클럽은 이○○(당시 28세)을 리더로 하여 임○○(여28세) 최○○(사망), 양○○(사망), 임○○(31세, 손에 동상), 박○○(21세, 귀 동상)등 6명이 인수산장 샘터에서 중식을 한 후 등반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점심식사 후 설거지를 할 때 코펠뚜껑의 물기가 얼 정도로 날씨는 영하의 기온을 보였다. (오후 1시경)
5) A코스
이들 6명은 오후 2시경 A코스로 등반했다.
이 코스에는 앞 팀 7~8명 정도가 밀려 있었다.
전원이 정상에 오르는 시간은 6시였다.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와 후면으로 하강을 시도하려 했으나 아래쪽에서 김○○(당시 20세)의 사망소식을 듣고 정상으로 다시 올라와 오버행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때 정상에는 유○○(당시 21세)팀과 친구의 군입대 송별등반을 온 5~6명이 하강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은 하강이 미숙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은 먼저 하강한 팀의 로프 4동이 강풍에 엉켜 하강치 못하고 있었다.
이○○이 로프를 끌어올려 정리한 후 이들을 하강시켰다.
곧이어 블루마운틴의 최○○가 하강하였다.
이때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와 로프가 심하게 날리기에 배낭을 매달아 로프를 내린 후 하강하였다.
다음 순서로 다른 팀의 5~6명과 임○○(여), 박○○이 하강하였다.
그런데 양○○이 순서가 되어 하강하려고 로프를 당겨 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먼저 하강한 고교생 5~6명이 하강용 로프를 잡고 서있는 바람에 로프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양○○이 여분의 로프를 피톤에 고정매듭을 지은 후 외가닥으로 하강 중 로프가 강풍에 날려 크랙에 끼어버렸다.
그는 오버행의 허공에 1시간 이상을 매달린 채 로프를 떼려고 사력을 다하였으나, 끝내 동사하였다.
이○○씨는 고등학생들이 메달린 로프에 카라비나를 끼우고 하강, 이들을 주 로프에서 한사람씩 떼어내 슬링으로 피톤에 확보시킨 후 곧 로프(군용 36미리)를 회수하려 했으나 엉킨 상태에서 회수치 못하였다.
한편 정상에 남아있던 정○○과, 구○○도 하강했다.
이들이 테라스에 내려왔을 때 이○○팀의 6명과 왕○○ 그후 내려온 유○○팀의 3명이 엉켜 로프를 회수치 못한 상태로 좁은 테라스에 고립되어 있었다. (10시경)
이후 이들은 4시간 이상을 강풍과 한파에 노출된 상태로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조난사상 가장 처절했던 상황은 이 시간을 기점으로 전개된다.
이들 11명은 이때부터 4시간 이상을 죽음의 테라스에 고립된 채 귀청을 찢는 듯한 초속 12m의 강풍과 영하 33°의 체감온도 속에 팽개쳐진 채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6) 절망속의 참혹한 밤
1971년 11월 28일 밤 10시.
죽음의 주사위는 이들 앞에 던져졌다.
먼저 유○○팀의 이○○(당시 18세)이 동사직전 혼수상태에서 졸다가 떨어졌다.
이때 정○○과 이○○가 잡았으나 감각이 마비된 손으로 잡다가 놓쳐 결국 추락사하였다.
이 팀의 나머지 2명도 동료의 추락을 멍하니 응시한 채 헛소리를 치다가 잠시 후 2명(유○○, 박○○)마저 사망하였다.
왕○○도 이때부터 계속하여 졸기 시작하였다.
정○○과 이○○는 그를 때리고 격려했다.
최후까지 강인한 의지로 버틴 사람은 이○○, 정○○, 임○○(여)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한 힘은 오직 살려는 의지 하나였다.
그들은 체감 온도가 영하 33°를 밑도는 추위와 바람 속에서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이 무렵 조난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와 김○○은 밤 11시에 백운산장을 출발, 조난지점에 도착하여 위쪽을 살폈다.
달빛에 전개된 광경은 실로 비참하였다.
오버행에 시체 한 구가 매달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그 아래 테라스에는 몇 사람이 뭉쳐 짐승과도 같은 신음을 하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테라스에 오른 시간이 밤 11시 30분.
모든 조난자는 의식을 잃었거나 사망하였으며 정상적인 사람은 이○○, 정○○, 임○○(여) 3명 뿐이었다.
대부분의 조난자는 방풍의를 입지 않은 채 엷은 남방셔츠와 작업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김○○이 임○○(여)를 앞에 안고 하강했다.
곧이어 최○○를 하강시키려 했으나, 점심을 굶고 탈진한 그는 자력 하강이 불가능하여 이○○앞에 안고 하강하였으나 땅에 내려서자 곧 사망하였다.
임○○, 박○○은 자력으로 하강하였다.
마지막으로 김○○, 정○○에게 하강할 것을 권하였으나 죽어가는 동료(구○○)를 버려둔 채 탈출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 구○○는 정○○의 품에서 사망하였으나 마지막까지 테라스에 남아있던 정○○은 장시간동안 고립된 죽음의 문턱에서 5시간에 걸쳐 계속된 긴 시간의 하강을 끝내고 탈출하였다.
죽음의 암벽에... 날이 밝자 구조대원들은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올라가 자일에 몸이 감긴채 동사, 절벽에 매달려있는 조난자들의 시체를 끌어내렸다. [1971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나. 조치내용
○ 신고 : 하산객이 연락, 인수봉 꼭대기에서 발이 묶여 있어 등산객들이 어둠 속에서「살려달라」고 외치자 백운산장 아래로 내려오고 있던 다른 하산객들이 산장관리인 이○○씨에게 처음으로 연락함.
이○○씨가 하산하는 등산객에게 부탁, 우이동파출소에 조난 신고를 하게 됨.
○ 조난사고가 나자 인수봉 꼭대기에서 하산하려던 임○○군 (당시 23세)이 가지고 있던 자일을 사용 희생자중 일부를 백운산장까지 옮겼다.
○ 이때 백운산장에 내려가 있던 김(당시 22세)군 일행 4명이 조난 소식을 듣고 모두 자일을 챙겨 현장에 달려갔으나 이미 4명은 테라스에서 웅크린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김군 등은 살아날 가망이 있어 보이는 이○○양 등 5명을 구조하였다.
○ 뒤이어 29일 새벽 00시 20분쯤 현장에 도착한 김○○씨 등도 구조에 나섰으나 날이 어둡고 장비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고 이날 새벽 2시 45분께 경찰, 방범대원들과 함께 나머지 살아있는 10 명을 구조 백운산장으로 옮겼다.
○ 경찰은 시체 인양을 날이 밝을 때까지 미루었다가 상오 8시쯤부터 다시 인양작업에 나섰으나 세찬 북서풍이 불고 추위가 심한데다 장비가 없어 29일 상오 연제계곡에 쓰러져 있는 양○○군, 김○○군의 시신만 산장으로 옮겨놨고, 하오에는 나머지 시체 5구를 인양 백운산장으로 옮겼다.
다. 인명구조 활동
○ 등산객, 경찰 : 사체 7구 백운산장 인양
○ 등산객 : 부상자 16명 백운산장으로 이송 안전한 조치를 취함.
좌> 인수봉의 비극.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음은 간신히 자일을 타고 산을 내리려했으나 지친채 쓰러져 동사했다. [1971년 11월 29일자 경향일보]
우> 벼랑에 걸린 자일. 강풍에 말려 엉킨 자일이 인수봉 바위 벼랑에 걸려 참경을 보여주고 있다. [1971년 11월 29일자 경향일보]
4. 문제점 및 대책
가. 문제점
○ 일기변동에 부주의
한파주의보 등 일기변동 상황이 이날 방송에서 일찍 예보되었는 데도 일기변동과는 아랑곳 없이 장시간을 산 위에서 보내는 바람에 허기와 추위에 허덕였다.
○ 등산객의 경험부족
인수봉까지 올라갔다 하산하는 데 필요한 소요시간(2시간)을 예상치 않고 무작정 시간을 허비하면서 꼭대기에서 지체했었고 체계없고 질서없이 서로 내려가려고 성급하게「자일」을 마구 던지다가「자일」이 바람에 휘말리게 됨.
○ 경험있는 리더 없이 무모한 등산
리더가 없이 등산계획을 치밀하게 짜지 못해 미리 하산시간, 하산코스 등을 정해 놓지 않았던 점에도 사고원인이 있다.
○ 장비부족
이들 조난자들은 겨울철 등반에 필수장비이고 꼭 입어야할 윈터 쟈켓조차 입지 않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장비가 허술했다.
나. 대책
○ 이미 신문방송을 통해 알려졌던 것으로 시내가 영하 5°라면 산악지대는 계곡풍 및 산악파의 영향으로 체감온도는 상당히 떨어지고 동절기는 일조시간이 짧음으로 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산악에서는 고도 100m마다 약 0.65̊가량의 기온이 떨어짐)
○ 강풍이 분다면 자일이 엉키지 않도록 자일 끝에 무거운 배낭을 매달아 그 무게에 의해 자일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하산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즉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정하여 체온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내려온다든지 불을 피우는 등 구조신호를 보내 구조를 받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 아무리 자주 다닌 산이라도 리더와 조원들간의 팀웍이 중요하고 등산, 하산코스와 시간을 미리 정해야 한다.
겨울철에 접어들면 산 중턱에는 해가 빨리 저물어 다른 계절보다 하산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특히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여러 등산반의 리더끼리 서로 의논해서 하산코스를 침착하게 찾아 내려와야 한다.
○ 등산객들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 보조자일과 모포, 의류, 식량, 버너 등의 기본장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좌> 인양되기 전 암벽에 매달려있는 조난자들의 사체 [중앙포토]
우>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반에 의해 하산하고 있다. [1971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5. 겨울등반의 기본원칙
인수봉 사고도 등산객들이 겨울등산의 등반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사고로 분석된다.
중앙기상대는 첫 한파를 이미 예보한 바 있었기 때문에 28일 등산은 사전에 겨울등반이 가능토록 준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일몰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늦어도 하산시간은 하오 3시까지 마쳐야 했을 것이라 지적했다.
겨울철 등반자가 매 시간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예상되는 일기예보에 대처한 모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등반의 A, B, C라고 지적, 첫 추위가 몰아닥쳐 급격한 기온의 변화가 예상되는 상태에서 산에 오래 머무는 것이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망자 이외에 전원이 동상에 걸린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미리 충분한 옷이나 장비 등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등반팀에는 항상 경험이 많은 리더가 전체대원을 통솔해야 하는데 이번 사고는 20여명이 함께 내려왔으면서도 뚜렷한 리더를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서로 앞질러 내려가다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강력한 팀웍을 강조하는 등반 훈련에 하이킹이나 놀이 간다는 기분은 절대 금물이다.
숙련된 지휘자가 있었다면 이번 사고처럼 한꺼번에 우르르 내려오는 자살행위는 없었을 것이다.
자일이 설사 얽혔더라도 줄을 회수하는 방법이 강구되었을 것이다.
요즘 등산붐과 더불어 산을 경시하는 풍조가 심한데, 이야말로 위험 천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수년 전 인수봉 전면 코스에 빨래줄을 가지고 오르던 소년들이 긴급 구조된 사례 같은 것도 요즘 「클라이밍」하는 청소년간에 산을 소홀히 여기는 예인데 협동심을 져버리는「클라이밍」은 위험 천만한 일이라 지적된다.
등산에는 장비계획, 기술상의 계획, 시간상의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번 사건을 보면 이 같은 기초 계획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요즘 날씨가 따뜻해서 이상고온 현상이라는 말을 믿고 장비계획에서 소홀했던 것이 동사자가 많았던 것이다.
흔히 가족 등반으로 어린이들도 낀 등산객이 백운대로 많이 가고 있지만 산에 오르는 것을 소풍과 같이 생각하면 언제든지 사고가 나기 쉽다는 것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