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흩날린 11월 18일. 해가 저물자 서울시 중구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반가운 이웃을 만난 듯 눈인사를 나누는가 하면, 서로의 손에 작은 촛불을 나눠 들기도 한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날씨임에도 어느새 대한문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이날은 225일간의 대한문 매일미사 대장정을 마무리 하는 날. 지난 4월 8일 시작한 미사는 대한문 앞에서 봄과 여름, 가을을 보냈고 겨울의 시작에서 마무리 됐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가 대한문에 분향소를 설치한지 1년 7개월 여 만에 분향소를 평택 쌍용차 공장 앞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현장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회사 측에 보다 구체적인 요구를 해 나가기 위해서다. | | | ▲ 11월 18일, 225일간의 대한문 매일 미사가 마무리됐다.ⓒ문양효숙 기자 |
이날 60여명의 사제, 그리고 500여 명의 수도자 및 신자와 시민은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225일간의 매일미사는 물러설 곳 없는 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분노한 이들에게 느티나무 같은 쉼터가 되어 주었다. 쌍용차지부 비정규 지회 유제선 씨는 “가족의 따뜻함을 모르고 자라 평번한 가족과 사는 게 꿈인 나에게 매일 6시 반이 되면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면서 “따뜻하고 선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시고 손잡아 주시고 기도해주셨던 모든 분이 가족이다. 앞으로 가족들이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했다. 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은 “진정 사람이 희망임을 눈으로 확인했고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부님들의 강론, 잊지 못할 듯 합니다. 수녀님들의 성가가 그리울 것 같습니다. 신자 분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해 주셔서 온기가 넘쳤던 공간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25일 함께 해 주셔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더 강하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희망’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주셔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기도해주세요. 그 힘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겠습니다.” | | | ▲ 김득중 쌍용차 지부장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문양효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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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매일미사는 참여하는 이들에게 배움의 장(場)이 되었다. 4월 16일부터 거의 매일 미사에 함께 한 박경림(아네스) 씨는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2013년 매일 저녁 6시 30분 대한문에서의 경험은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대한문 매일 미사가 ‘삶을 배우는 학교’였다고 말했다.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는 소중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하나의 소원을 향해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인데, 이 기적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은 쌍차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덕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게다가 할 수 있는 게 기도 뿐이어서 미안하다는 신자 분들, 앞일을 다 본 듯이 다 잘 될 거라고 확신을 주는 분들, 날씨가 춥든 덥든 묵묵히 함께 하는 분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요.” 미사는 신자들에게만 연대의 공간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미사라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는 문명선 씨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수녀님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쌍용자동차 분들이 절망을 극복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구나 싶었다”며,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사 강론에서 나승구 신부(서울대교구)는 “아무 것도 없었던 노동자들과 그들을 지탱해주기에는 너무나 무능했던 사제, 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225일간 작은 하느님 나라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 | | ⓒ문양효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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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시민이 형제가 되고 아무것도 없던 거리에서 사랑이 넘쳤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더 나아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 졌지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작은 하느님 나라를 경험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냐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억울한 처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냐고 따지던, 그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총입니다.” 나 신부는 이어 “오늘 이 자리는 눈을 뜬 우리가 다시 눈감지 않기를 다짐하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눈먼 이들의 도시입니다. 빼앗기기 않으려 눈 부릅뜨고 살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웃의 고통도, 억울한 이들의 참담한 아픔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보지 않습니다. 이처럼 보지 못했던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서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형제의 아픔은 결국 나 자신의 아픔임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눈먼 이로 안락을 누리던 우리가 이제 눈을 뜨고 고통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뜬 이 눈이 언제 감길지 모르겠습니다. 눈먼 이들의 안락함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 자리는 눈감지 않기를 약속하는 자리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나 신부는 “이 자리에 우리를 초대해준 쌍용 자동차 형제들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준 작은 사람들이었고, 선한 영혼의 수녀님과 수사님들이 어렵게 뜬 눈 지키도록 도운 하느님의 천사들이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해준 교우들이 눈 똑바로 뜨라고 밝은 빛을 비춰준 예언자들이었고, 신앙이 달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함께 해준 시민이 우리를 받쳐 준 선한 지팡이였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은총을 더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장동훈 신부(인천교구)는 “희망은 손에 만져지지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도 없지만 분명 아주 큰 존재감이란 것을, 이 곳 대한문에서 느꼈다”면서 “오늘 이 자리가 모든 것이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225일간 우리가 만들었던 희망의 이야기, 인연의 끈들을 기억하며 서로 더 걸어가자 격려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2시간 반의 미사를 미사를 마치며 장동훈 신부는 “여러분 모두가 희망이었다. 여러분이 바로 교회다.”라고 말했다. 한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대표 나승구 신부, 이하 사제단)은 이날 성명서를 발표하고, 박근혜 정권이 분향소 강제철거와 불법연행 등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제단은 “대한문에서의 미사는 오늘로 끝이 나지만 기도는 멈출 수 없다”며 “불의한 정권에 탄압받는 노동자 뿐 아니라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 진실과 공정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더 넓은 연대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 | | ⓒ문양효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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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앞 225일간의 기도를 마치며 |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1. 눈물 많은 기도가 쉼 없이 이어졌다. 권력과 자본이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이들이 손을 모아 기도했고 더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들의 곁을 내주었다. 위로받아야할 이가 오히려 위로했고, 상처 받은 이가 다른 이의 상처들을 싸매줬다. 상처 받은 치유자(治癒子)의 진료소, 돌려받을 길 없는 무상(無償)의 사랑을 배운 학교, 세상의 고통이 하느님의 고통임을 온몸으로 고백한 신앙고백, 바로 대한문의 225일이다. 또한 이 225일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아우성을 창검으로 틀어막다 멸망해간 어리석은 옛 왕조들의 폐허를 선명히 내다봤던 예언자의 눈동자다. 대한문에서 목도한 권력과 자본의 민낯은 그야말로 추악하고 참담했다. 사람 대신 재물을, 공정 대신 불의한 권력을 택한 이들의 말로가 얼마나 역겨울지 능히 짐작되는 자리였다. 예언자는 이미 그들에게 종말을 고했다. 2. 77일간의 옥쇄파업과 171일간의 철탑 고공농성, 41일 그리고 21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까지, 다시 일터로 돌아가려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분향소 철거도, 무덤 같은 화단도,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도 그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 의지가 우리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화답하게 했다. 희망이라는 깃발 아래 쉼 없이 기도했고 눈물로 함께 길을 헤쳐 왔다. 아니, 권력의 거짓 약속 앞에 신실하고 흔들림 없는 인내로 이 자리를 지킨 우리 모두는 이미 희망이다. 그렇게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로마서 5,5) 3. 225일간의 이곳 대한문에서의 기도는 불에 달궈진 돌멩이가 아니라 달궈진 돌멩이를 집어 삼킨 예언자의 뱃속이다. 달궈진 것은 식기마련이나 달궈진 것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상처로 남아 내내 기억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도를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예언자는 이제 제 뱃속에 들어앉은 ‘기억’으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이 또 다른 생명들을 살릴 것이다. 상처의 기억이 생명의 씨앗으로 거듭났다. 4. 동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분향소를 대한문에 설치한 이래 다행스럽게도 행렬 같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멈추었다. 하지만 잠시 주춤했던 죽음의 그림자는 다시 가장 약한 자들을 엄습했다. 9개월 남짓한 박근혜 정권 출범 이래 벌써 한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른 한명의 하청 노동자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대선 전 철새처럼 분향소와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방문해 늘어놓은 정치인들의 약속들, 국민행복시대를 외치며 쌍용차 사태를 해결하겠다던 박근혜의 공약 모두 그의 전태일 동상 앞의 헌화처럼 한낱 기만적인 퍼포먼스였음은 이미 자명하다. 약속이행은 고사하고 그가 노동자들에게 돌려준 대답은 분향소 강제철거와 불법 연행이었다. 자신이 쏟아내는 모든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제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5.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박근혜 정권이 쏟아낸 온갖 추문은 시대의 과오인 동시에 불안한 내일의 예시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비롯한 노동자 대중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물론, 국가 권력기구들의 조직적인 선거개입이라는 정권의 태생적 한계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불의한 뿌리를 은폐하려는 역사왜곡,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와 진보정당의 해체 시도,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논조를 흐리는 광범위한 여론 조작까지, 상식에 어긋나고 역사에 반한 추태는 이루 다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반성은 고사하고 도리어 역정을 내는 제왕적 태도 역시 대통령으로서의 자격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6. 우리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기본적 소양은 최소한의 상식과 국민의 고통에 대한 경청이다. 불행하게도 이 정권은 그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질 못했으며 절반의 국민을 오히려 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곳 대한문에서 매일 같이 드려졌던 미사는 오늘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기도는 멈출 수 없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기도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이 오만불손하고 불의한 정권에게 탄압받는 노동자 대중뿐만이 아니라 변두리로 내몰린 목숨들, 진실과 공정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의 더욱 넓고 강고한 연대로 거듭날 것이다. 그들 한가운데가 우리의 유일한 거처다. 7. 다시 힘차게 길을 나서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발걸음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더불어 아무것도 내줄 것 없는 우리 사제들을 기꺼이 동료로 맞이해준 동지들과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울어준 모든 이, 시민들과 교우들, 수도자들 모두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고통이 있는 한 우리의 기도와 희망은 멈추지 않는다. 2013년 11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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