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해 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집콕하면서 그래도 책을 좀 읽은 한해였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독서를 해본 적이 참 오래 되었지요. 은퇴를 했어도 작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그다지 여유가 없었습니다. 코로나 덕에 오랜 시간 집에 갇혀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묵어두었던 책들을 뒤졌습니다. 이사하면서도 미련 때문에 남겨두었던 것을 이번에 해결했네요. ㅎㅎ 앞에 이야기한 ‘파리의 노틀담’도 여름엔가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옛날 포스터가 기억으로 삼삼하여 영화를 찾아내 보았습니다. 소설로는 아리송했던 것이 명료하게 나타나기도 하여 아주 흥미 있게 보았지요.
이렇게 한해가 가는가보다 싶습니다. 2020하면 ‘코로나19 팬데믹’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힘들게 살아온 한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시간은 갑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지요. 아직도 진행 중이니 마음 놓을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더,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불안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도 계속됩니다. 성탄절과 연말의 분위기도 잠잠히 재우고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새해의 꿈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미 몇 나라에서는 백신 공급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간은 좀 걸릴지 모르지만 새해에는 이 사태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만납니다. 더욱 건강하고 복된 새해를 기대합니다.
해피 뉴 이어!!!
2020년 12월 26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12-20주일설교(진리에 속한 자)
성경 요한복음 18 : 33 - 38 2020년 12월 20일
설교 : 진리에 속한 자 김종우 목사
해마다 이 때를 맞습니다. 1년 12달 가운데 어쩌면 마음이 가장 싱숭생숭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아쉬움과 기대가 오락가락하는 때입니다. 물론 이 기분도 나이 연대별로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10대에 느끼는 감정과 20대 그리고 30대 나아가 중년에 느끼는 기분이 다를 것이고 70대에 가지는 감정이 다르겠지요. 젊을 때는 신나게 지나갑니다. 아쉬움보다는 새해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노년에 느끼는 감정은 한결 다릅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기대는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만큼 크지는 않을 듯합니다. 어쩌면 세월 가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가면 가나보다, 오면 오나보다 그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나이 하나 더 먹게 되나보다, 그런 생각으로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12월은 역시 감정이 다른 달과는 다릅니다. 내가 노력해서 먹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안 먹는 것도 아닙니다. 나이 하나 더 쌓는다고 뭐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달라지는 세상에 때로 먹먹해집니다.
1960년과 70년대까지만 해도 성탄절은 대단한 절기였습니다. 11월 말부터 이미 거리에는 성탄 캐롤이 넘쳐났지요. 크리스마스 카드, 성탄 트리, 하며 가게마다 백화점마다 온갖 치장으로 요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자정을 기해서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탄절 전야에 하루 동안의 통행금지 해제는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과 몸이 확 풀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거리를 쏘다닐 수 있는 날이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나와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은 밤새도록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추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눈이 온다면 더 아우성이었지요. 교회마다 성도들이 모여 새벽까지 준비하며 쉬다가 무리를 지어 나갑니다. 소위 새벽송을 도는 거죠. 성도들의 가정 가정을 돌며 캐롤을 불러주고 축복하고 그래서 또 푸짐한 선물도 받아 돌아옵니다. 우리 세대 성도들은 누구나 이 추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는 신자 불신자 구분 없이 성탄절은 온 국민의 축제였습니다. 교회에서든 거리에서든 구석구석 모두 성탄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지냈지요. 너무 그러니까 나중에는 도대체 의미나 알고 떠들자 하는 각성의 목소리도 교회 내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가 되었습니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정작 성탄절이 되어도 거리에서 캐롤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 백화점이나 기독교서점에서나 혹 들을 수 있을까 거리에서는 정말 듣기 어렵지요. 교회에 가지 않으면 언제가 성탄절인가 할 정도입니다. 불과 한 20년 사이에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새마을운동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막을 내렸고 산업시대 고도성장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것이 하루에도 물밀듯이 우리에게 엄습해 옵니다. 따라가기 바쁘지요. 그리고 날로 빠르고 편리해지면서 보고 듣고 놀며 누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 사이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껏 돈 많은 대형교회들이나 조금 따라잡아서 볼거리들이 있을까 나머지 많은 교회들은 거의 강 건너 부자 동네에서 하는 잔치를 구경하는 꼴과 비슷합니다. 조용할 수밖에 없지요. 자기네 식구 추스르기에도 바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교계나 신앙세계 속에서 빚어진 부익부빈익빈 문제는 겉으로 드러내기는 싫어도 아픈 현실로 우리들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마치 동네 구멍가게들이 몰락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있는 자들의 잔치라고나 할까요? 그 비슷한 현상이 보이는 듯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지나간 역사의 발자취는 그냥 박물관에서 잠이나 잘 골동품이 아니지요. 바로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소란스러움 속의 고요함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때는 2천 년 전 유대 땅입니다. 눅 2 : 1 - 3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어쨌든 그래서 흩어졌던 주의 백성들이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가려 분주한 때였습니다. 4 - 5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마리아와 요셉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8 - 11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조용한 중에 주님의 강림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세상은 소란스러워도 주님은 조용한 곳을 찾아서 이 땅에 오셨지요.
오늘날 세상은 성탄절로 소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어떤 절기를 빙자해서 요란을 떨지도 않습니다. 매일 축제를 벌일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습니다. 구태여 성탄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통행금지라는 것도 없지요. 매일 24시간 돌아갑니다. 돈만 있다면 매일 축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더욱 안달이 났습니다. 저 요란한 세상에서 성도들을 지켜야 하고 더 좋은 것으로 교인들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돈 있는 교회들은 세상에 뒤질세라 더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옆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들은 그런 것으로 주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자위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똑같이 헌금하면서 누구는 많이 누리고 누구는 누리기는커녕 더 힘들고, 그러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일꾼이 부족하니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안식일이 안식은 고사하고 고사당할 지경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안식일은 아닐진대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도 속이 타지요. 어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할 텐데 마음 같지를 않습니다. 무슨 이유일까? 이 못된 환경 때문일까, 자신의 모자람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일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17 : 26 - 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주님이 오시는 그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갑니다. 다 자기 일하느라 바쁩니다. 28절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다시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습니다. 모두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며 애쓰고 힘씁니다. 자기 행복 찾아가느라 바쁘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답니까? 29 - 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아멘! 사실 아멘 소리가 쉽게 나올 처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아니한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때마다 주시는 말씀을 듣고 아멘 하고 교회를 나옵니다. 사실 그리고 끝입니다. 그 말씀을 곱씹으며 생활하려고 하지는 않지요. 그것은 교회에서나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곱씹을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이 없다는 뜻이지요. 모두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바로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지요. 받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주겠습니까? 그냥 있는 것 가지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를 않지요. 오히려 갖고 있는 듯이 행세합니다. 예 물론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끼리 만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만든 것이지요. 여태 그렇게 해왔고 그것이 주기도 받기도 모두 편합니다. 왜냐하면 익숙하니까요. 거기에 어떤 변화를 주다니 말도 안 되지요.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왕따 당합니다. 하기야 그래봤자 그것도 거짓일 게 뻔합니다. 역시 하나님 주신 것이 아니라 혼자서 연구하고 개발한 것에 불과할 테니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는 자가 없답니다. 누구를 아는 자가 없답니까? 아버지 곧 하나님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유대 땅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몰라요?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쉽게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들 조상 적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겼던 백성입니다. 모세 때부터 솔로몬 시대를 지나 열왕의 시대 때도 우상을 섬겼기에 결국 나라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잘 아는 대로 2천 년 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려 오셨습니다. 사 53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아멘! 그렇게 예언되었고, 그래서 오셨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마 26 : 28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렇다면 다시 오실 때는 왜 오시겠습니까? 또 죄를 사하려 오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시 정리해봅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 나타나시는 때가 ‘세상 끝’ 곧 말세입니다. 이미 한 번 있었으니 초림이고 다시 또 한 번 있을 것인데 바로 재림입니다. 그런데 초림 때는 ‘죄를 없이 하시려고’ 오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재림 때는 왜 오신답니까?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두 번째 나타나시는 것이니 재림이고 그 때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재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의합니다.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다가 병들 수도 있고 또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지만 ‘죽은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약 2 : 26) 문제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이 그것이지요. 마 24 : 44 - 4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인자가 오는 그 중요한 때,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재림 때 주님이 누구를 찾습니까? 양식을 줄 자를 찾습니다. 이 양식이 세 끼 밥 먹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정말 수준 차이 나지요?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 : 11) 하신 이 양식이 세 끼 양식이라고 우기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뒤에 가서 주님이 뭐라 하시지요? 마 6 : 31 - 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런 건 다 누가 구하는 거라고 하십니까? 이방인들이. 그런데 우리 주님이 그런 것 구하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답니까? 이게 마귀의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양식이 무슨 양식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살 양식인지 먹으면 죽는 양식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전파된다고 무조건 아멘! 아멘! 하며 따라갈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마귀가 어디에 나타나기 때문입니까?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 성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지요. 교회에 나타나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야 설교하겠지요. 영의 양식이라고 성도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먹고 살 양식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먹으면 병들고 죽을 양식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오래 다녔으니까 어련히 맞는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도 되는가, 자문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고후 11 : 14 - 15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아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온 유대교를 장악하고 있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 영적 지도자들의 대표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 23 : 1 - 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의 자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곧 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을 우러러본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당신 백성의 영혼을 죽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진리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왔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달라고 데려온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재판에서 총독 빌라도는 사실 예수를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백성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십자가 처형을 명했습니다. 처형에 앞서 잠깐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요 18 :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아멘!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빌라도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랬지요? 요 18 :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는 이방인이니까 그렇다 치고 자기 백성이 그리고 그 지도자들조차도 몰랐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가장 종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해라 마라 하는 율법의 교훈만 따라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 수준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사실 율법은 세상의 윤리도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그보다 수준 높은 것도 있지만 그것은 주로 하나님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제5 계명부터 제10 계명까지는 일반 도덕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니 그것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구태여 하나님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삶과 별차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신앙은 그런 세상 사람들과 수준이 다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 나타난 실체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그 약속의 실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문제는 초림 때의 이 사건이 재림 때의 거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요 5 :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그리고 그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다시 당신의 이름으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성령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육신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기에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성령)와 하나 되어 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을 이루시는 실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잘 아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재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 성령도 누구인가 육신에게 임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을 입은 약속의 목자를 하나님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초림 때 그랬었고 이제 재림 때 또 그럴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그 때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속한 자 곧 진리에 속한 자는 그 보내신 자를 알아보고 믿고 따라갈 것입니다.
이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요 8 : 44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약속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진 실체가 무엇인가 아는 자가 진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조제>
세상을 보는 눈이 두 가지입니다. 자기 속에서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요. 자기 속에서 본다는 것은 다양하면서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자기라는 틀에 갇혀있다는 말이고 마음대로 상상하는 세계가 펼쳐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랬다가 내일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한번 그려놓은 그림을 쉽게 지우거나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틀이 점점 굳어집니다. 잘 알겠지만 틀을 바꾼다는 것은 자기를 바꾸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버릇을 바꾸기가 쉽습니까?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고 따라서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안 바꿉니다.
동정이 사랑의 시발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반발을 사든지 실망을 하든지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동정으로 느끼면 자존심을 상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본인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보상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니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동등한 인격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품어주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랑으로 전진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사랑이 만들어주는 기쁨과 보람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감정에서 비롯된다면 자칫 상처를 만들기 쉽습니다. 사실 균형 있게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름은 ‘조제’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후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모와 떨어져 홀로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왜 하필 부다페스트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역시 자기가 만들어낸 그림 속에서 만들어진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이름처럼 ‘조제’한 것입니다. 현재는 폐지 수집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할머니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인척관계도 아닙니다. 좀 허름하지만 살고 있는 집은 할머니 소유로 되어있는 듯싶습니다. 그러니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겠지요. 게다가 조제는 주민등록도 말소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행동반경이나 삶의 범위 자체가 넓지 않습니다.
전동휠체어가 고장을 일으키며 길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지나가던 대학생이 발견하고는 도움을 줍니다. 그렇게 처음 만났습니다. 졸업을 앞둔 ‘영석’은 심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취하며 지내며 취업을 앞두고 여기저기 찾아다닙니다. 손수레까지 빌려 조제를 집까지 데려다준 대가로 조제는 밥 먹고 가라고 상을 차려줍니다.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만남은 그 뒤 궁금함과 걱정됨으로 이어집니다. 할머니도 영석의 태도에 그다지 경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 언행으로 보아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악의를 느낄 수 없으니까요. 더구나 장애인에게 무슨 흑심을 가지겠나 싶기도 할 것입니다.
영석을 좋아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그녀도 고시원 쪽방에서 자취를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보다 깊어질 소지가 있으면서도 거리가 있습니다. 긴가민가 하면서도 거리를 둡니다. 조제를 알고서는 더욱 감정으로는 멀어지는 듯합니다. 그래도 가깝게 지냅니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며 봉사하는 가운데 조제를 도울 수 있는 길도 열어줍니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는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지요. 조제가 무슨 힘으로 생활을 꾸려가겠습니까? 그러나 조제는 여전히 거리를 두려 합니다. 아무래도 동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얼마간 떨어져 있다가 할머니 타계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갑니다. 내치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떠나지 마!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요즘은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 함께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몸이 가까이 있으니 마음도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사랑도 익어갑니다. 그런 때를 지나온 사람들은 다 압니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랑하면 예뻐져요,’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 하듯이 사랑에 빠지면 세상은 행복한 곳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랑의 안경을 통해 들어옵니다.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시간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시간은 사람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이 적응해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표현은 ‘변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성장했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석을 만나고 또 사회복지 혜택을 받으며 조제는 자기를 벗어나 세상으로 나옵니다.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고 경험하고 누립니다.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닫혔던 마음도 한결 자유롭게 열려집니다. 한 사람의 감정에 매여 있지 않아도 삶을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영석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조제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석은 그 경험으로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영화 ‘조제’(Josée)를 보았습니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름다운 이국 풍경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기도 많지 않은 시간인데 말입니다.
<노틀담의 꼽추>
사랑은 어쩌면 괴물이기도 합니다. 두 남녀가 서로 맞게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는 기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문학작품이 행복한 결말의 사랑 이야기보다 불행하게 끝나도록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야 독자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새겨지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달콤한 이야기보다는 고통의 결말을 더 잘 새기니까요. 개인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웠던 시간보다는 아프고 힘들었던 때가 더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하기야 그림보다는 벽에 새긴 것이 더 오래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아무튼 그 아픈 이야기 중에 사랑 이야기는 누구나 즐겨 읽고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해줍니다. 꿀맛 같은 사랑인데 쓴 맛을 품고 있다니, 그 엉뚱함이 우리를 보통 아닌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는 것이지요.
사랑의 대상이 서로 엇갈립니다.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저 사람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은 이 사람을,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들은 서로 짝이 될 수 없는 운명을 만듭니다. 본인들은 자기 상대의 마음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운동이라면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나 상대라면 어쩌면 시작부터 비틀린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여자를 사랑합니다. 사랑이기보다는 정욕입니다. 하기는 평생 억누르고 산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러다 불행히도 눈에 박히는 여성을 보았습니다. 잊히지를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잊어야지 하면 오히려 가슴을 갉아 먹히는 고통을 당합니다.
경비대장이 떠돌이 집시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당시 신분 차이로 인하여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집시 여인도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준 이 멋진 군인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그래도 좋은 걸 어쩝니까? 경비대장의 사랑은 한 마디로 하룻밤 즐기면 끝납니다. 자신의 약혼녀는 이미 따로 있습니다. 그의 말은 입에 바른 말뿐이고 그 밤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 식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럼에도 집시의 마음에는 화살로 꽂혀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불행한 노틀담 성당의 종지기 ‘카지모도’의 사랑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여자와 함께 합니다.
노틀담 성당 앞의 광장을 두고 빙 둘러 있습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바로 그 광장을 둘러서 일어납니다. 천하의 추남 카지모도는 부주교 ‘프롤로’의 몸종처럼 붙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 설명이 없습니다. 소설을 보면 그 생김새에 놀라 사람들이 모두 외면한 가운데 이 부주교가 거두어서 양육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노틀담 성당에서 기거합니다. 성당 꼭대기 종각 근처 다락방에서. 시간을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종을 칩니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종소리에 귀를 먹게 됩니다. 애꾸눈, 꼽추, 귀머거리에다 아주 몰골입니다. 처음 본 사람은 괴물인 줄 알고 기겁을 합니다. 그러나 짐작대로 심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세고 성실하고 충직합니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사회상이 그대로 보입니다. 많은 백성이 가난 속에 삽니다. 거리에는 거지가 떼를 이룹니다. 그들 나름의 사회조직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권력 앞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성당의 사제도 중요한 권력층입니다. 그리고 성당 곧 교회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입니다. 그러니 사제는 그 안에서 또 다른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죄인이 도망쳐 들어오면 누구도 함부로 들어와서 체포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피난처’ 구실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다른 한편 눈을 벗어난 죄인이 숨어있다면 잡아낼 구실을 찾으려 합니다. 무슨 전례가 있는지 물어보고 연구하고 샅샅이 뒤져봅니다.
흰 염소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구경꾼들에게서 헌금(?)을 받습니다. 아리따운 이 집시 여인은 그래서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다 해도 감히 접근하기 힘든 어떤 힘이 둘러 있습니다. 오랜 시간 부주교의 눈에 찍혔습니다. 기회다 싶었을 때 프롤로는 카지모도에게 집시 ‘에스메랄다’를 잡아오라 합니다. 카지모도가 골목길을 가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잡아채 허리에 두릅니다. 당연히 여자가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마침 경비대장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 그 소리를 듣고 쫓아와 여자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카지모도를 체포합니다. 눈에 든 경비대장 ‘페비우스’는 에스메랄다를 데리고 여관으로 갑니다. 그러나 여자는 지혜롭게 벗어납니다. 남자는 입맛만 다시고 돌아 나옵니다. 이 모든 광경을 프롤로가 숨어서 지켜봅니다.
카지모도는 잡혀서 사람들 앞에서 형벌을 받습니다. 매를 맞고 목이 타서 ‘물’을 외쳐도 어느 누구 물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 에스메랄다가 당당히 나와서 그에게 물을 줍니다. 그 고마움으로 죽음까지 에스메랄다를 따라갑니다. 에스메랄다를 두고 세 남자가 어떻게 엇갈리는지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자기를 양육해준 아비 같은 사람이었기에 노예처럼 순종하였지만 그 사람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달라집니다. 장편의 소설과는 조금 다르지만 핵심은 잘 살렸습니다. 그리고 배우 안소니 퀸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영화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를 보았습니다. 1956년 작이고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틀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