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청교도의 이상주의 국가 실현을 목표로 나라를 세웠듯이 그들은 백인들로만 구성된 이상주의 국가를 목표로 한 것인데 나라가 정식으로 건국이 될 무렵에는 정작 본국인 영국은 이런 차별을 반대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당시 1차대전 전에 영국와 일본이 동맹을 맺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차별적인 정책은 당시 세계적으로 서구권에 흐르던 추세일수도 있다. 학문에서도 차별적인 골상학이나 인종의 우열이 있어서 우월종만 남아야한다는 생각의 우생학이 횡행하던 시기이어서 그 풍조를 반영했을 수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이런 인식하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적은 인구에도 영국을 돕기 위해 자원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 여왕의 충실한 신민이었던 호주나 캐나다에게 아예 도움의 의견도 묻지 아니한 채 참전이 결정되었는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호주의 인구는 500만명 정도 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무려 50만명 정도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물샐틈없이 시행이 되던 백호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위협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고 이른바 본국에 가까운 아버지 나라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은 이름은 세계 대전이지만 주 각축장은 사실상 유럽 안쪽이었다. 그런데 2차대전은 일본이 추축국이 됨으로써 유럽에서 머나먼 태평양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란 허울 좋은 명분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미국이 식민지로 하고 있던 적도 근처와 지구 남반부도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중심에 싱가포르가 있었다. 만일 싱가포르가 무너지면 오스트레일리아는 바로 목 아래까지 서늘해진다.
당시 영국의 수상 처칠은 말로는 꼭 싱가포르를 사수하겠고 했지만, 일본은 손쉽게 처칠의 말을 허공에 날려보내며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 물론 이 싱가포르의 영국 기지에는 호주에서 파견된 군인도 포함되어 당연히 포로로 잡혀들어갔다. 곧 이어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아버지 같은 존재는 너무 멀리 있었고 또 무력했다. 이로 인한 배신감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을 뒷배경으로 하기 힘들어졌고 직접 일본군과 맞서야 했으며 머나먼 영국보다도 그래도 지리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운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충실한 푸들개가 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하여 먼 곳에 있었지만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결론적으로 백호주의의 해체로 이어진다.
witpo
일본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을 준비 중이라는 내용이 담긴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전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