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는 1933년 1월 17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욜란데 질리오티. 양친은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오키스트라단에서 제1바이올린을 켜던 음악가였다. 그러나
질리오티가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음악적 재능으로보다 천부적인 미모에
의해서였다. 1954년에 그녀는 21세의 나이로 미스 이집트에 뽑힌 것이다.이 영광은
그녀에게 스크린에 데뷔할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술잔과 담배'(Un Verre Et Une Cigarette),
'투탄카몬의 가면'(Le Masque De Toutankhamon) 등의 영화에서 주목을 받은 그녀는 그해 크리스
마스에 홀홀단신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온다. 파리의 한 카바레에서 '천국의 이방인'(L'etranger Au
Paradis)이란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모은 그녀는 여기서 만난 레코드사 사장 에디 바클레의 도움
으로 첫 레코드 '밤비노'를 취입했다. 달리다는 곧 유럽 전역에 걸쳐 일류 가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더욱 중요한 남자는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뤼시엥 모리스였다.
4년간의 약혼기간 후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성격차이로 곧 이혼했다.
1966년 8월 달리다는 로마에서 27세의 음악가 루이지 텐코를 만났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그해 10월 그는 달리다를
위해 '사랑이여 안녕'(Cia Amore, Ciao)을 썼다. 그는 이 곡으로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루이지 텐코는 결선 하루 전날 밤 38
구경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살해 버렸다. 달리다는 텐코 대신에 무대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1967년 그녀는 처음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자살 미수였다. '신께서나를
거부한 것에 감사해요. 다시는 죽지 않을 겁니다'라고 달리다는 자실 사건 이후에 인터뷰를 통해 말
했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온 첫남편 뤼시앵 모리스에게 '내가 어제 자살을 기도했어요. 내가 한 짓을
당신은 부디 하지 마세요'라고 울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뤼시앵 모리스는
자살해 버렸다. 1973년 3월 달리다는 '생제르맹의 백작'으로 알려진 리사르 샹프레와 다시 결혼
했지만 7년만에 이혼했다. 이혼으로부터 3개월후 샹프레 또한 가스 자살을 행했다. 가수로서는
화려한 생을 보냈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서는 더없이 상처받은 생을 보낸 달리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생을 사랑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까지도 그녀에게서 죽음의 기미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리다의 생애를 특집으로 보도한 '파리 마치'지의 기사 중에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그녀는 끊임없이 생을 열망했음에도, 죽음은 끊임없이
그녀를 유혹했다.' 결국 달리다는 죽음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날 용서해 줘요. 인생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사랑의 여신' 달리다는 사라져 갔다.
1987년 5월 3일, 그녀의 나이 54세였다. 알랭 들롱과 함께 부른
'달콤한 속삭임'(Paroles Paroles)로 우리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샹송 가수 달리다. 조금 일찍부터 그녀에게 주목한 사람들은 첫 히트곡
'밤비노'(Bambino)에서의 정열적인 남구의 매력을 무한히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화려했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연인이 있었지만, 그녀의 사랑에는
언제나 '자살'이란 기묘한 단어가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마침내 이 불행한
운명은 그녀 자신의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