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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과 하느님의 말씀 주일
그리스도인 일치와 화합 다지고 말씀 일깨우다
1월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화와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는 이날을 정점으로 1월 18일부터 한 주간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1968년부터 해마다 일치 기도 행사를 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9월 30일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과 맞물려 있는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정하고, 보편 교회에서 해마다 이날을 기념할 것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 거행이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드러낸다고 밝혔다. 성경은 듣는 이들에게 참되고 굳건한 일치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교회는 왜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정점으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과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지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본다. 또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도 소개한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교회는 왜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정점으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과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지내나? 그 이유는 성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지독한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인을 죽이러 가던 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다. 이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열렬한 사도가 됐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일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순교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회심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부르심’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부르심 받은 사도”(로마 1,1), “하느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1코린 1,1; 2코린 1,1), “이방인들의 사도”(로마 11,13), “사람들에 의해서도 아니고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사도”(갈라 1,1)로 밝혔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바오로 사도의 만남을 구원사에서 결정적 사건으로 보고, 고대 교회 때부터 1월 25일에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로마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유해를 운구하는 예식이 처음으로 행해진 날에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로 지냈다고 한다.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 되면, 교황이 바오로 사도의 유해가 안장된 로마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을 방문,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사제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상징하며 영광과 결백, 기쁨을 드러내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이날 미사 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개종 체험담’(사도 22,3-16)과 1코린 7,29-31 말씀이 봉독 되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18)는 복음이 선포된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온전히 성경에 봉헌된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제정한 이유를 “성경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그분 교회의 사명에 따른 여러 사건은 이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온전히 하루를 봉헌하며 특별하게 지내는 날이 신자들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 주일 거행이 ‘교회 일치’의 중요성을 드러낸다고 밝혔다. 성경은 듣는 이들에게 참되고 굳건한 일치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은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인 1월 25일까지)과 맞물려 있는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정한 것이다. 이에 교황은 “하느님과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이루기 위해 온 교회가 하나 된 지향으로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거행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성경에 봉헌된 하루는 그저 하나의 연중행사가 아니라, 한 해 전체를 위한 행사여야 한다”며 주님 힘의 원천인 말씀을 일깨우는 신앙생활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 특집] 미사 때 읽는 독서와 복음 어떻게 정해지나요?
전례주년에 맞춰 선택… 3년이면 신·구약 대부분 통독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읽고 듣는다. 미사 때 읽는 성경 구절들은 어떤 기준과 원칙에 따라 배정됐을까?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독서와 복음의 구성을 통해 전례 거행 안에서 성경의 중요성을 되짚어본다. 나아가 성경의 깊이를 들여다보기 위한 성경 주해서 활용법을 배워본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미사에 참례하든지, 신자들은 같은 날에는 같은 말씀을 듣는다. 이처럼 전례 주기에 따라 모두가 같은 성경 말씀을 듣도록 성경 구절을 배정해 둔 것이 1969년에 발행된 「미사 독서 목록 지침」(Ordo Lectionum Missae)이다. 이 지침의 제2표준판은 1981년에 반포됐다.
지침에 따르면, 미사 독서의 선택과 배정에는 일반적인 원칙과 주일 및 축일 원칙, 그리고 평일 원칙이 있다.
일반적인 원칙 첫 번째는 사순·부활·대림·성탄 등 전례적 특징이 있는 시기에는 그 시기의 특성에 맞게 성경 말씀을 배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림 시기에는 이사야서, 성탄 시기에는 요한의 첫째 서간을 배정하고, 부활 시기에는 사도행전을 읽는다. 두 번째는 독서의 길이는 신자들이 잘 경청할 수 있도록 중도의 원칙을 적용해 적절한 길이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본문이 지나치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체나 비평, 주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으면 해당 구절을 생략하도록 했다.
주일과 축일의 독서 목록 배정 원칙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세 가지 독서로 구성되는데, 제1독서는 구약, 제2독서는 사도서, 즉 전례 시기에 따라 서간이나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 세 번째는 복음이다. 이로써 신·구약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은 파스카 신비로 기념하는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난다.
둘째, 가·나·다해의 3년 주기로 성경 독서가 배정되므로 3년마다 같은 성경 본문을 읽게 된다. 셋째, 한 해의 여러 시기와 각 전례 시기의 특징에 따라 두 가지 원칙, 즉 ‘주제의 조화’와 ‘준연속 독서’ 원칙이 적절하게 적용된다.
‘주제의 조화’란 독서의 주제와 내용이 서로 연결됨을 뜻하고, ‘준연속 독서’란 독서가 성경 본문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만 전례 독서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을 생략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 두 원칙은 연중 시기 주일은 물론 중요한 전례 시기인 대림·성탄·사순·부활 시기의 주일과 평일에, 각 시기의 특성에 따라 적절히 적용된다.
평일 독서 배정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평일 미사 독서는 2개로, 첫째 독서는 구약이나 사도서(서간 또는 요한 묵시록, 부활 시기에는 사도행전)를 읽으며, 둘째 독서는 복음이다. 둘째, 사순·대림·성탄·부활 시기의 평일에는 한 해 주기로 배정, 해마다 같은 독서를 한다. 반면 연중 시기의 34주 동안 평일에는 복음은 한 해 주기로 매년 같은 본문을 읽지만, 첫째 독서는 짝수해와 홀수해로 나눠 2년 주기로 배정한다. 평일의 독서에서도 주일과 축일의 독서 배정에서와 같이 ‘주제의 조화’와 ‘준연속 독서’ 원칙이 적용된다.
성인 경축일(대축일, 축일, 기념일)에는 그날을 위한 고유 독서를 배정하거나 성인 공통부분에서 선택해 사용한다. 그밖에 예식 미사, 여러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기원 미사, 신심 미사, 죽은 이를 위한 독서 배정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교회는 전례주년 전체에 성경 말씀을 적절하게 선택, 배정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깊게 하고 구원 역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은 “하느님 말씀의 더욱 풍성한 식탁을 신자들에게 마련하여 주도록 성경의 보고를 더 활짝 열어, 일정한 햇수 안에 성경의 더 중요한 부분들이 백성에게 봉독되어야 한다”(51항)고 권고한다. 실제로 3년 동안 미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면 신·구약성경 대부분을 통독하는 셈이 된다.
[문화사에 따른 전례] 12세기의 전례 생활
12세기의 로마 전례가들은 그레고리오 개혁에 따라 갈리아의 전례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전례서에 고전 로마 예식의 문화적 특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어떤 것은 더 잘 회복되었고, 또 어떤 것은 덜 성공했다.
전례 역사가 부르크하르트 노인호이저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례 개혁에 대하여 “역사적 실제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그는 로마 전례의 복원 작업을 하면서, 독일 – 프랑스 – 로마 전례를 개혁하고 공고히 하는 한편 스페인의 비시고딕 전례를 없앴다.”(「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 104쪽)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편 12세기 들어 전례가 신자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자 영성 생활에 새로운 움직임이 형성되었다.
순탄치 않은 그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개혁에 원인을 제공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독신제에 대하여, 보름스 협약(1122년)과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1139년)로 말미암은 변화가 있었다. 반면 고대 로마 전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 통일화는 쉽지 않은 여정을 거쳤다.
예를 들어 우르바노 2세 교황(재위 1088-1099년)은 서방 교회의 전례 일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구 일치를 선호하고 전례를 포함한 지역 관습을 승인했다. 곧 각 지역 주교는 지역 관구의 중심인 대교구가 정한 전례 규칙을 따라야 했다.
보름스의 주교였던 부르카르도(965-1025년)는 그의 훈령에서 “대교구가 결정한 미사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관구 교회에서 미사 통상문을 노래하거나 관습에 따라 봉사자들이 봉사하는 것이다.”(Decretum, Ⅲ, 66쪽)라고 하면서 옛 스페인 규정을 언급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의전 사제단은 예전보다 더 많은 성무일도에 참석해야 했다. 이런 과도한 전례 참석 의무는 수도회에도 부과되었으며 프레몽트레회와 아우구스티노회에도 영향을 주었다.아르투로 엘베르티는 「서방의 성무일도」(La liturgia delle ore in Occidente)에서 당시 프레몽트레회의 성무일도 구성에 관해 알려 준다.
“중요한 주일과 대축일에 바치는 전야 기도는 기간마다 다른 수의 화답송, 시편, 독서로 구성되었다. 11-2월에는 화답송 12개, 시편 6개, 독서 3개; 3-4월과 9-10월에는 화답송 10개, 시편 5개, 독서 3개; 5-8월에는 화답송 8개, 시편 4개, 독서 2개를 했다. 낮에는 아침 기도를,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을 드린 뒤에는 저녁 기도를 드렸다. 아직 ‘끝기도’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잠자기 전에 몇몇 시편을 낭송했다”(350-351쪽).
새로운 계급 등장과 대중 신심 발전
12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과 상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 계급의 재력과 지역 공동체에 의해 발전된 신심은 작은 성당들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통해 전해진 다양한 신심이 성당 건설과 연결되었고, 특정 성인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새 성당 건설에 앞장선 새로운 계급은 성당 주임신부로 자신들이 원하는 사제를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는 전례(세례식 제외)를 요청하기도 했다.
성당 옆의 묘지는 당시 죽은 이를 위한 위령미사와 기도에 분명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1세기 중반 뒤에 널리 퍼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무일도’와 함께 신심 기도들이 신자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기도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목적 관심
교회 생활에 관한 12세기 저술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사목적 관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혁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크나큰 찬미의 전례가 교회 영성에 유용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전례는 관습에 따라 부과된 것이어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다. 이는 너무 긴 전례 시간을 봐도 알 수 있다.
콘스탄자의 베르놀도는 그레고리오의 사상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당대 저명한 독일 신학자 레이게스베르그의 게로는 신자들을 위한 교훈적인 강론이 유용할 때는 나머지 전례 시간을 단축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중세 라틴문학 전문가인 에지오 프란체스키니는 ‘그 세기에 베르나르도 성인’이라는 글에서, 전례에 관한 당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 약간 다른 방향성을 지녔음을 알려 준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모든 것은 실질적으로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반면 아벨라르도는 전통의 화단에 머물지 않고 전례를 풍요롭게 했다. 그는 손에 삽을 금 들고 표면을 넓히려고 주위의 개간되지 않은 땅을 경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신학, 주석, 변증법, 전례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12세기 당시에도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배려해 전례 시간 축소와 강론의 유용성을 언급하는 성직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를 위한 사목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감각적 표지의 중요성
전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직면한 신자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요소들로 풍성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예전 갈리아 전례의 관심사였다.
독일의 전례학자 요제프 안드레아스 융만은 평신도 입장을 대변한 익명 저자의 글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미사에 관해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 부분, 곧 의복, 동작, 말씀 선포로 이해할 수 있다”(Missarum sollemnia, 92쪽). 사실 전례복은 상징적 의미가 있기에 종종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이 있었다. 신자들이 교계 구조를 바로 구별할 수 있도록 그 형태를 정했으며 각 축일에 따라 색상을 달리했다.
12세기 말, 나중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된 세니의 로타리오는 「미사의 신비에 관하여」에서 전례에 사용되는 거룩한 옷을 비롯하여 거룩한 기물들과 봉사들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설명과 규정을 제시했다. 그 뒤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중요한 전례 규정으로 전해진다.
12세기 말이 되자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체 축성의 순간을 알리고, 그리스도 몸의 실재 현존을 보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열망에 부응하고자 성체를 높이 드는 거양성체가 도입되었다.
전례학자 엔리코 카타네오는 당시의 이러한 노력을 “성찬례의 영적, 육적 열매를 강조하는 동시에 우리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인간의 것에서 신의 것으로 올라가도록 초대하는 것”(「서방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II culto cristiano in Occidente], 220쪽)이라고 평가했다.
[응답하라, ‘전례’] 전례는 왜 해야하는가?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에는 코로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이젠 어느 정도 잠잠해지리라는 기대가 현실이 되는 해가 되길 기원하며 전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1월이 되면 저는 25년 전 추운 겨울날,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며 로마로 유학을 떠났던 때가 떠오릅니다. “전례공부하러 간다며! 그것 공부할게 뭐가 있겠어, 전례규정이나 배우는 것이겠지!”라던 한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례’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하게 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전례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모르는 애매모호한 것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왜 전례를 해야 하는가?
전례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전례는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전례를 왜 해야 하는 지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기억하라”와 “행하라”는 동사를 통해 전례를 왜 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기억하라”에 답이 있습니다.
신명 32,7에서 모세는 옛날에 대한 ‘기억’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르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으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때로 이 단어가 ‘권고하다’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사람들의 망각을 일깨워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자카르’는 그리스어 Anamnesis(아남네시스)로 번역되어 그 의미를 이어갑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 2,8)라는 말씀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사건, 특히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드는 기억입니다.
전례는 무엇을 기억하여 고백하고 선포하는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왜 전례를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선포한다. 이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고 이 신비를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1066항).
교회가 전례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임을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말해줍니다. 그리고 전례는 신자들이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고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전례에 참석만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삶을 통하여 증언해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고 전례를 형성하게 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의 ‘현재화’일 겁니다. 그리고 전례를 통해 ‘현재화’된 십자가 희생제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앞에서 선언한 것을 풀어서 말해줍니다.
전례를 통하여, 특히 거룩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저희의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전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생활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데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1066항).
전례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신비들과 사건들은 그곳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고 생활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례는 무엇인가?
전례는 한자로 典禮, 라틴어로 Liturgia라고 표기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와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단체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또는 성인, 복자들에게 하는 공식적인 경배 행위”라는 설명을 함께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Liturgia는 그리스어 leitourgia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백성 전체를 위해 행해지는 봉사인 정치적, 기술적 또는 종교적 일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루어진 유다 경전의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 성서는 성전에서 거행되는 사제들의 경배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초기 교회와 교부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모든 이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20세기에 전개된 ‘전례 운동’은 전례가 하느님 백성의 공적 경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 전례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전례 헌장, 7항)
전례는 예전의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 행위라는 외적인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인류 구원에 있어서 전례가 지닌 중요한 가치를 확인시켜줍니다.
독일의 전례학자 클레멘스 리히터는 전례를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라고 ‘전례와 삶’에서 말합니다. 이는 세계주교시노드(2021-2023)의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라는 주제와 전례의 개념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더하여, 이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친교를 맺고,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시며,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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