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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이 마음을 덮고
고린도후서 3장12-18절
“12. 그런즉 우리에게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하고 13.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 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15.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 17.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곧 [주]의 [영]으로 통하는 것이니라.”(고후3:12-18 KJV)
사도 바울 그는 이방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성경에서 증거를 받고 있고 또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그 일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나서 그들이 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고 있고 그래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대해서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이라는 단어는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임하셔서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비록 육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성경을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하심으로 해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왜 이 성경을 주셨는가 하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 인생들의 언어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영]이시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우리 창조물들에게 말씀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언어로 비유적으로 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고린도후서4장에서 예수의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고 다 우리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을 해서 생명(life)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고 있지만 순전히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러니까 인생의 철학적 지식 안에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같은 생명이라는 단어를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성령님이 임하시면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저 생명(life)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보고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새로 나야 합니다.
반드시 두 번 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절대 인생들이 알고 있는 생명(life)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입니다.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거듭나기 위해서 [영]으로 그러니까 성령님이 오셔서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분명히 다른 생명으로 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4장을 말씀을 하기 위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의 확신입니다. 주의 영으로 통해서 낳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하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진리에 대해서 듣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가 있고 그 생명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예수의 생명에 대해서 전하는 자를 그리스도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2. 그런즉 우리에게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저 소망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그리고 성경말씀을 아는 것으로 자기가 소망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망을 말씀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소망이라는 인생의 언어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초등학생이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11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1. 없어진 것에도 영광이 있었을진대 남아 있는 것에는 더욱 영광이 있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과 물질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창조물이고 아담을 흙으로 지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리고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고 바로 이 진토의 생명을 보고 사도 바울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생길 때에 영광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잠시 있다 사라질 것과 길이 남을 것을 비교를 해서 두 가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분명히 두 가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된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비교를 하지 않고 도무지 깨달을 수 없으니까 생명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으면 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더라도 믿음이 선진들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도 그 열조에게 돌아갔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죽어 흙으로 돌아간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은 죽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도 모르면서 그저 소망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종교인들이 남겨 놓은 책들을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창조를 하시고 우리 피조물들에게 어떻게 영생을 얻게 하시는가를 모르니까 자기들의 철학적 지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종교인들은 그것을 배우면서 그런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1장2-3절에 “2 영원한 생명의 소망 안에서 사도가 되었는데 이 생명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하셨으나 3. 자신의 말씀은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진 복음 선포를 통하여 정하신 때에 드러내셨느니라.”
➤요한1서 2장23-25절에 “23.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곧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그러므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그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그것이 너희 안에 남아 있으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소망은 생명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종교 안에만 들어가면 교만해져서 자기들이 하나님과 같이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심지어는 대화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샤머니즘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종교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을 말씀한 것은 이제 4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하는데 자기들의 언어라고 하면서 그 언어를 아는 것으로 마치 영의 깊은 모든 일을 다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해서 그 생명을 얻은 자들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 전부터입니다. 만약에 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생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요한1서에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 생명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생명은 다 같은 생명(lif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도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의 말씀에서 이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영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종교 역시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의 말씀에서 이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지 못하고 있고 그저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된 성경을 보면서 무슨 생명인지도 모르면서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지도 않고 있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생명을 얻어 소망이 있다는 것을 담대히 말씀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이제까지 종교의 교리도 그렇고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 역시 이 생명에 대해서 언긎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입니다. 아마도 종교인들이라면 다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필독서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단테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자기가 갔다 왔다고 하면서 쓴 것이 신곡이라는 책이고 종교인들이 성경보다도 더 알기를 힘쓰는 책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가 지옥과 연옥과 천국에 갔다 왔으면 뭐 합니까? 저는 솔직히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아니 그 자체가 성경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그 책을 보고 인생들은 최고의 신학서라고 하면서 그 책에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솔직히 말씀을 하면 성경을 부정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종교가 그 책을 이용을 하니까 사람들이 마치 필독서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못하고 있고 천국 편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있는데도 샤머니즘에 빠져 그러한 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단테의 신곡은 성경과 배치가 되고 성경에도 없는 말씀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을 어떻게 이루는지를 모른다면 그가 소망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없어질 것과 길이 있을 것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무엇이 없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길이 있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경을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생의 언어로 그저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요한은 태초에 있는 생명이라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난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베드로 역시 거듭나는 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습니까? 이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두 번 나야 한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소망입니까? 내가 소망을 하면 뭐 합니까? 생명을 얻지도 못한 그가 이 생명에 대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지도 않는 그가 그저 소망이라는 단어를 안다고 해서 자기가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을 해서 무지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담대히 말씀합니다. 그저 인생들이 철학적 지식으로 모든 종교에서 말을 하는 그런 소망이라면 사도 바울이 굳이 담대하게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담대히 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입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설의 고향과 같은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굳이 담대하게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법입니다.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하면 하나는 없어질 것이고 하나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비교법도 모르면서 성경을 본다고 하고 있고 자기들이 성령님의 임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영의 일에 있어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우리 성도들에게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를 보고 알면 뭐합니까? 의문(儀文)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의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 종교는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에 기록이 된 문자를 의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임하심으로 해서 그 의문(儀文)에서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은 것을 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문자를 보고 안다고 하면서 말을 하고 행위를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문자를 보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하면 예수의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문에 기록되어 있는 죄를 목록들을 페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 “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분리 벽을 허무시고 15.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 16.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죽이사 친히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서 광체가 나서 이스라엘이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 얼굴에 수건을 썼다는 것을 출애굽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그 십계명의 문자를 아는 것을 의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고 믿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 되었고 그것을 주님께서는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소망이 있음으로 담대히 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13.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 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15.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그런데 그 율법입니다. 장차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것도 영광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그 영광은 없어진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그 안에서 온갖 종교적인 의식의 행위를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4-25절에 “24. 그는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길로 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즉시 잊어버리거니와 25.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
율법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포를 하신 율법은 이 세상의 법이 아닙니다. 인생들이 성경을 보면서 마치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으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으면 수건은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고 율법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형제 야고보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신 율법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그 수건이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들의 철학적 지식을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완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으면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생각의 변화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고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예수의 생명을 얻은 자 되어 담대하게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인생들은 이 율법을 지키고 수건은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5.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오늘까지입니다. 성경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라는 날에 그리고 온갖 절기와 날을 지키면서 그 날에 그 안에서 온갖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글입니다.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 하면 우리 이방의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수건이 마음을 얻었다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의문(儀文)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그는 정죄를 받아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사망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수건은 율법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수건이 덮여 있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 아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거대한 종교의 교리에 포승으로 묶여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마음을 덮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인생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의 종교 안에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고 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
➤누가복음 19장20절 “20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여, 보소서. 주의 일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나이다.”
수건은 벗겨져야 합니다.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수건은 벗겨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하지만 주의 형제 야고보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예수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므나의 비유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한 므나를 받은 자는 수건에 싸 두었다는 말씀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진노를 받는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고 그 날에 종교 안에서 그들의 의식을 따라 온갖 행위의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사도 바울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17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17-18절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주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을 보내주시면 더 이상 의문에 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종교는 교리로 포승으로 묶어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무엇에서 자유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의문의 직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거의 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지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삼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두려움이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없어질 정죄의 직분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은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율법은 세상 법이 아니라 영생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이는 죽을 때까지 율법을 지키다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18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곧 [주]의 [영]으로 통하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2장11-13절 “11.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 교회의 한가운데서 노래로 주를 찬양하리다. 하시며 13. 또 다시, 내가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나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을 보라. 하시느니라.”
하나님과 같은 형상입니다.
주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통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이제 예수의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우리 질그릇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주의 영광이 이를 수 있는가 하면 히브리서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해서 생명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역사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 되면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바로 깨닫고 그 율법에서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