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주소 : 화룡현 청파호
현주소 : 吉林省 和龍縣 龍城鄕 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丘陵
용성향 청호촌 청호종산의 조그만 황토 구릉위에 3位의 무덤이 서쪽 화룡시 건너 청산리를 향하고 있음
"대종교의 삼종사 :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
독립운동사에 빛나는‘청산리 전투’유적지를 둘러보고, 화룡(和龍)시 청파호 언덕에 자리한 항일지사 나철(1863년~1916년), 서일(1881년-1921년), 김교헌(1868년-1923년) 묘역을 참배했다. 묘역의 다른 이름은‘대종교(大倧敎) 3종사(三宗師) 묘역’나철(羅喆), 서일(徐一), 김교헌(金敎獻)은 20세기 전반기에 만주 동북지구에서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를 기지로 항일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청산리 전투 선봉에서 활약했던 분들이다.대종교(大倧敎)는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나철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교주가 죽은 후 김교헌이 계승하였다. 김교헌은 교세를 만주로 확장했으며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끈‘북로군정서군’중에도 대종교 교인이 많았다고 한다.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고. 관리인도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는 걸 보면서 용정시 조선족 동포들의 역사의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나철에 의해 중창된 대종교는 민족 신앙의 중심으로 큰 역할을 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을사늑약(1905년)으로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한 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투사 대부분이 대종교 교인이었던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대종교 3종사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가 두 개 남아 있었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은 '청파호'로 신도 대부분이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대종교 본부가 있었다 한다. 무기고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풀로 덮어놓으면 몰랐으므로 붉은 벽돌을 쌓은 돌출된 부분은 없었다고 한다. 대한군정서 총재로 무장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서일 장군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일어난 '흑하사변(자유시 참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단다. 서일 장군의 유언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대종교 3종사(三宗師) 묘역. 봉분을 중국식(삼각)으로 쌓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선족 묘는 봉분이 한국처럼 둥글다고 한다. 세 지사 묘비에는 '大倧敎'가 새겨져 있고, 나철 선생 비에는 한자로 '대종교 대종사'라 새겨 있었다. 그런데 묘역임을 알리는 안내문에는 빠져 있어 의아스러웠다. 문화유물 관리에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이 개입하기 때문이란다. 독립군을 도왔던 대종교 신도(마을주민)들의 억울한 희생과 항일지사들의 이력이 정확하지 않은 안내문을 보면서 하루빨리 북한과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에 민간단체는 물론 정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류도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