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고난 주간이 되면 교회에서는 금욕을 강조하게 되고 절제와 근신을 가르칩니다. 이 주간 만큼은 텔레비전도 보지 말고 오락도 하지 말고 쾌락을 삼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통가운데 자신의 육체를 두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가르친 이유는 고난 주간에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난 주간 왜 이렇게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주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평상시에 하던 것이 고난 주간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면 평상시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평상시는 괜찮고 고난 주간에는 안 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적 삶으로 외식하는 자와 같은 것입니다. 고난 주간만 특별히 종교적 삶을 더 살아야 되는 날은 아닙니다. 신자는 매일이 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할 날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모든 날이 신자에게는 최선의 신앙으로 살아야 되는 삶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고난 주간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고난 주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기억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함으로 행하는 것들이 바른 것이냐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껏 당연히 고난 주간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에 참여하기 위하여 평상시에 행하던 모든 일상의 일들을 두고 근신하며 절제하며 오락을 삼가며 금식과 기도와 고행으로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가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에 그러한 종교적 행위를 부추기며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골1:24절을 봅시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합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 4장 13절에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육체로 참여 하는 것이 마땅한 신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은 갸륵합니다. 그러나 앞의 두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은 자신의 육체에 스스로 어떠한 고통을 가하거나 학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통은 예전의 수도사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스스로 학대함으로 죄를 속함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두 구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구절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박해나 핍박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육체의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신자가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마땅하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자체 만으로는 신자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고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앞의 구절들을 통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제부터 신자가 마땅히 받는 고난은 무엇을 가리키며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살펴봅시다. 27절을 봅시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27절부터 30절까지의 전체 내용 가운데 핵심 본동사가 하나가 있는데 그 단어가 생활하라 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합니다. 생활한다라고 해석된 단어는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자유롭게 국가를 위하여 상호 협력하며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유자로써 서로 협력하며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나라입니다. 또한 이 의미 속에는 신자는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닌 백성으로써 또한 나라로써 상호 협력하며 함께 나라를 세우며 돕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신자 개인이 개별적으로 자신만 옳게 행하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나라로 국민으로 부름 받아 시민의식을 가지고 협력과 일치를 위해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내가 가서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이것은 앞서 말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기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주님 앞에 신자 개인으로써의 신앙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심과 한 뜻으로 협력을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일심과 한 뜻이 지향하는 것은 복음의 신앙을 입니다. 복음의 신앙이란 의미는 공동번역에서 잘 번역했는데 그 복음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로 교리를 의미합니다. 즉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른 진리, 말씀의 왜곡됨이나 거짓된 가르침이 아닌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될 이유가 28절에서 소개가 되는데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공격하는 이 대적자들의 공격은 우습게 여길 것이나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사용하는 두려워하다 라는 말의 뜻이 어떤 예상치 못한 장애물 때문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겁먹은 말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겁을 먹고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공격을 받음으로 자제심을 잃게 될 수 있음에 대한 바울의 우려입니다. 그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의 신앙 즉 우리가 믿는 진리인 교리를 옹호하고 유지하거나 지켜내지 못하고 믿는 것에서 이탈하여 진리를 떠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고하며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부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며 왜곡하며 거짓말로 폄하며 속이려는 자들과 또한 복음의 믿는 것들로 인하여 박해를 일삼고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그것들로 인하여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9절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 어떠한 고통을 가하여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위한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은 모두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그 진리를 전파하며 그 진리를 위해 삶으로 받게 되는 핍박이며 박해이며 고난입니다. 그렇기에 고난 주간에 육체적 쾌락과 즐거움을 금하여 절제와 근신으로 보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으로 개인 경건이며, 신앙 훈련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결국 고난 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라는 말은 문제가 있으며 오히려 고난을 묵상하여 신앙의 유익을 삼으십시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한 우리가 적용해야 될 것은 나는 매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입니다.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하는 진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복음, 내가 이해하고 알게 된 말씀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내 삶이 힘이 든다면, 내 삶이 제약을 받고 있다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래서 내게 고난이 된다면 그것은 바르게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과 타협하고 있으며 내가 배운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과 동떨어지고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워 뒤로 물러가 대열에서 이탈하여 후퇴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