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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부정(博而不精)
넓지만 자세하지 않다는 뜻으로, 널리 알고는 있지만 정밀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博 : 넓을 박(十/10)
而 : 말 이을 이(而/0)
不 : 아닐 부(一/3)
精 : 쓿은 쌀 정(米/8)
(유의어)
주마간산(走馬看山)
주마간화(走馬看花)
피육지견(皮肉之見)
이 성어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한 가지 전문 지식이나 능숙한 면이 없다는 말로 사전에는 널리 알지만 정밀하지는 못함 이라고 뜻을 적고 있다. 박(博)은 ‘넓음’의 뜻이고, 이(而)는 이 구절에서 앞말을 부정적으로 이어 주는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박이(博而)는 ‘넓지만’ 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精)은 ‘정밀함’, ‘자세함’의 뜻이다. 그러므로 넓게 알지만 자세히는 모름, 즉 깊이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중(鄭衆)은 동한(東漢) 때의 유명한 경학가(經學家)이다. 그는 주역(周易), 모시(毛詩), 주례(周禮) 등의 경전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다. 학문이 깊고 넓었으므로, 그는 사대부 계층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년간, 황태자 유강(劉疆)과 산양왕(山陽王) 유형(劉荊)은 정중의 재능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광무제의 사위(壻)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양송(梁松)을 시켜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서 정중을 구슬리게 하였다.
정중은 양송이 찾아온 뜻을 알고 거절하며 말했다. “황태자께서는 제위를 계승할 분이고, 산양왕께서는 제후이시니, 규정에 따라 사사로이 빈객과 내왕할 수 없습니다. 감히 명에 따를 수 없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양송은 정중의 태도에 불쾌해 하며 그를 협박하였다. 정중은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강하게 거절하였다. 양송은 돌아와서 태자와 산양왕에게 아뢰었다. 두 사람은 정중이 이처럼 강경하게 거절할 줄을 몰랐던 터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양송은 범죄를 저질러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서 죽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양송과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정중은 양송의 유혹을 강하게 거절하였기 때문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자, 정중은 벼슬에 나섰다. 그는 월기사마(越騎司馬)를 지내면서,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으며, 후에는 무위(武威)로 승진되어 많은 공적을 쌓았다.
정중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경서(經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경서를 가르치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하여 주석(註釋)을 달았다. 이 책이 완성되자 매우 빠르게 전파 되었으며, 유명한 학자인 가규(賈逵)도 자신이 주석을 가한 책을 완성하였다.
당시 마융(馬融)이라는 유명한 경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명성은 정중이나 가규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일찍이 주역(周易), 상서(尙書), 시경(詩經), 논어(論語), 노자(老子) 등에 대하여 주석(註釋)을 달았으며, 그는 또한 춘추좌씨전을 깊게 연구하고 주석본(註釋本)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중과 가규의 저작을 읽은 후, 이렇게 평가하였다. “가규의 주석은 세밀하나 넓지 못하고, 정중의 주석은 넓으나 정밀하지 못하다. 두 종류의 주석본(註釋本)은 합친다면 정밀하고 넓게 될 것이니, 내가 다시 무슨 주석을 가하겠는가(賈君精而不博, 鄭君博而不精. 旣精旣博, 吾何加焉)?” 훗날, 마융(馬融)은 과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하여 주석(註釋)을 가하지 않았다.
박이부정(博而不精)
아는 것이 힘이라 했으니 널리 알수록 모든 일에 유리할 터다. 두루 알지만(博而) 세세한 분야까지는 정밀하게 알지 못한다(不精)는 것이 이 성어다. 널리 아는 사람이 박사(博士)의 본뜻이지만 실제는 어느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들어 많이 아는 사람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인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분야에 모두 통달했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럴 때는 정이불박(精而不博)이 된다.
노자(老子)가 이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고, 모든 일에 다 통한다는 사람은 도리어 아무 것도 모른다(知者不博, 博者不知).' 많이 알고도 요령이 부족하면 박이과요(博而寡要)라 한다.
후한(後漢) 초기의 유명한 경학자 정중(鄭衆)은 유학의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광무제(光武帝) 때 태자가 그를 존경하여 가까이 하려 했으나 사사로이 빈객과 내왕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2대 명제(明帝) 때는 흉노(匈奴)에 사신을 갔다가 배례를 않는다고 억류되었어도 굽히지 않았다. 이런 강직함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고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경서 연구에 몰두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여러 경전을 가르치면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한 주석을 편찬했다. 같은 시대에 유명한 학자인 가규(賈逵)도 주석을 가한 책을 완성하자 두 종류의 주석서가 화제가 되어 빠르게 전파되었다. 지조 없이 옮겨 다녔지만 이름 높은 유학자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마융(馬融)이 자신도 여러 경서를 주석했고 좌전(左傳)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나온 정중과 가규의 저작을 읽은 마융이 이렇게 평가했다. '가규의 주석은 세밀하나 넓지 못하고, 정중의 주석은 넓으나 정밀하지 못하다(賈君精而不博 鄭君博而不精).' 마융은 이 두 책을 합치면 정밀하고 넓게 되니 다시 책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후한서’ 마융전에 실려 있다.
폭넓게 지식을 넓혀야 한다며 책을 읽을 때는 많아야 한다고 한우충동(汗牛充棟)을 권했다. 소가 옮길 때 땀을 흘리고 대청에 가득하도록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많은 책이 있다 해도 훑기만 해서는 깊이 알 수가 없다. 어느 분야에 깊이 아는 박사가 아무 곳이나 지식을 판다고 해서 군사정권 때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여사‘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많은 지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학문을 실천하는데 어떤 길이 바른가도 잘 판단해야겠다.
박이부정(博而不精)
널리 알지만 자세하지는 못하다는 뜻으로, 지식의 정도가 분야는 넓지만 깊이는 얕은 것을 말한다.
마융(馬融)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로 시(詩) 서(書) 역(易) 논어(論語) 효경(孝經) 노자(老子) 회남자(淮南子) 등의 경전을 쉽게 풀이한 글을 남겼다. 후한서 ‘마융전’에는 마융이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로 전해지는 '춘추'의 대표적 주석서 중 하나인 '춘추좌씨전'에 주석을 붙이려다가 전대 경학자였던 가규(賈逵)와 정중(鄭衆)의 글을 평한 글이 나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가 선생은 정밀하나 두루 알지 못하고, 정 선생은 두루 아나 정밀하지 못하니, 정밀하면서 박식한 것으로는 누가 나보다 낫겠는가(賈君精而不博 鄭君博而不精精博 吾何加焉).” 자못 자신의 학식을 드러내는 말인데, 마융은 후에 '좌씨전' 뿐만 아니라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을 포함한 삼전(三傳) 모두를 비교 분석한 춘추삼전이동설(春秋三傳異同說)을 지었다고 한다.
박이부정(博而不精)은 여기저기 두루 관심이 있고 아는 게 많지만 앎에 깊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두루 아는 사람은 한 가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박자부지(博者不知)도 뜻이 비슷하다. 깊이 알지만 두루 알지는 못한다는 정이불박(精而不博)은 뜻이 반대다. 박대정심(博大精深)은 아는 것이 크고 자세하고 깊은, 완벽한 학식을 가리킨다.
현재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학위를 이르는 박사(博士)는 '넓게 아는 선비'라는 의미다. 천학비재(淺學菲才)는 학문이 얕고 재주가 보잘것 없음을 뜻하며, 흔히 자신의 학문을 낮추어 이르는 말로 쓰인다.
앎은 세상을 보는 망원경이자 현미경이다. 널리 보고 자세히 보려면 앎이 넓고 깊어야 한다.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광대한 세상으로 가는 앎의 디딤돌을 하나둘씩 놓아가는 일이다. 앎과 생각이 깊으면 좋은 글도 절로 써진다. 게으름에 피우지 말고 앎을 크고 깊게 하자.
박이부정(博而不精)
박이부정(博而不精)은 '널리 알지만 깊이 있지는 못함'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즉,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특정한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나 전문성이 부족한 상태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지만 이를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에 ‘박이부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박이부정이라는 표현은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공자는 학문을 깊이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단순히 지식이 넓기만 한 것은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널리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공자는 학문을 대할 때 단순한 지식의 양보다는 그 본질을 이해하는 깊이가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박이부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이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경계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역사 속에서 다양한 분야를 접했지만 깊이는 부족했던 사례들이 있습니다. 송나라의 학자 소식(蘇軾)은 문학, 정치, 철학, 미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지만, 정작 정치적으로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해 좌천을 반복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로 다빈치와 같은 인물들은 여러 분야를 섭렵했지만, 일부 학문에서는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습니다.
근대 과학 혁명의 초기 과학자들은 넓은 분야를 연구했지만, 점차 전문성이 중요한 시대가 되면서 깊이 있는 연구가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박이부정’은 지식의 넓이도 중요하지만, 깊이 있는 연구와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다방면의 지식과 전문성의 균형 오늘날에도 박이부정의 개념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방면의 지식을 가진 사람(제너럴리스트)들은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 분야에 깊이 있는 사람(스페셜리스트)들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유튜브, SNS, 블로그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이 깊이 있는 연구 없이 피상적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 ‘박이부정’한 지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고 깊이 이해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다방면의 지식을 가진 ‘멀티플레이어’를 선호하기도 하지만, 핵심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를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단순한 ‘박이부정’한 지식만으로는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우므로,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유사한 사자성어로는 '겉만 보고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수박 겉핥기의 피상지견(皮相之見), '널리 배우되 예의와 도덕을 지키라'는 뜻의 박문약례(博聞約禮), '넓게 배우되 깊이 연구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박이구세(博而求精) 등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박이부정(博而不精)은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것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본질을 이해하고 깊이 탐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널리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깊이 파고들어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넓게 배우되 깊이 연구하라!" 이제 우리는 ‘박이부정’의 함정을 피하고, ‘박이구세(博而求精, 넓게 배우되 깊이 연구하는 태도)’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참고] 면학(勉學)의 서(書)
예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양주동 박사의 명 문장이다. 어려운 한자어가 섞여 있어서 단어의 의미와 문맥에 대하여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옮겨 온 글이다.
면학(勉學)의 서(書) / 양주동(梁柱東)
독서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한 언급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삼락(人生三樂)에 모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好)?'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失望)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度)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의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註)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희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이다. 세상에는 실제적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함이다. 선천적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한이야 그야말로 다생의 숙인으로 다복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이다.
독서의 즉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에게나, 다 공통히 ‘발견의 비쁨’에 있다. 콜룸부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즈워드적인 영감, 경건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의 작품에서 나버렸던 자아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에서 발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주지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하였다.
그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 (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 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가장 새로운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前者)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 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 후자의 지론(持論)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개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다(多)’와 ‘정(精)’을 겸(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 -- 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가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겨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서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히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일편(笑話一片) -- 내가 12,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 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학교(普通學校) 교장(校長)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이 젊은 신임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함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수馬渤)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끝
▶️ 博(넓을 박)은 ❶형성문자로 慱(박)과 동자(同字), 愽(박)은 와자(訛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열 십(十; 열, 많은 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尃(부, 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博자는 '넓다'나 '깊다', '넓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博자는 十(열 십)자와 尃(펴다 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尃자는 손으로 실타래를 푸는 모습을 그린 專(오로지 전)자와 같은 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專자도 방추를 돌려 실타래를 푸는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尃자에는 '펴다'나 '퍼지다'라는 뜻이 있다. 博자에 쓰인 十자는 숫자 10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꽉 찬 숫자라는 의미에서 '모두'라는 뜻을 전달한다. 10은 소수에서는 가장 높은 수이기 때문이다. 博자는 이렇게 꽉 찬 수를 뜻하는 十자에 '펴다'라는 뜻을 가진 尃자를 결합한 것으로 모든 실을 풀어 '넓게 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博자가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을 뜻하다 보니 '노름하다'라는 뜻까지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博(박)은 (1)저포(樗蒲)와 한 가지로 중국에서 전하여 진 가장 오랜 노름의 한 가지이다. 5목(木)으로 새를 삼아 그것을 던지어 엎어지고 자빠지는 모양에 따라 효(梟), 노(盧), 치(雉), 독(犢), 새(塞)의 등급을 매기고 국(局) 위의 말을 움직여 승부를 정(定)하던 것이다. 지금 폐(廢)하여 행(行)하지 아니함 (2)얇고 질긴 천이나 종이 따위가 찢어지는 소리 등의 뜻으로, ①넓다, 깊다 ②많다, 크다 ③넓히다, 넓게 하다 ④크게 얻다 ⑤바꾸다, 무역(貿易)하다 ⑥노름하다 ⑦넓이, 폭 ⑧평평함, 평탄함 ⑨노름, 돈을 걸고 하는 놀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넓을 광(廣), 넓을 회(恢), 넓을 활(闊)이다. 용례로는 모든 것을 널리 평등하게 사랑함을 박애(博愛),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을 박학(博學),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여러 방면에 많은 지식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박식(博識), 책을 널리 많이 읽음 또는 사물을 널리 봄을 박람(博覽), 옛일에 정통함을 박고(博古), 기나긴 밤을 박야(博夜), 널리 연구함을 박구(博究), 널리 사물에 통달함을 박달(博達), 노름을 일삼는 사람을 박도(博徒), 널리 얻음을 박득(博得), 학문을 많이 닦아 지식이 너름을 박문(博文), 여러 사물에 대하여 두루 많이 앎을 박물(博物), 초여름의 대단치 않은 더위를 박서(博暑), 여러 사람이나 여러 곳에서 널리 받음을 박수(博受), 많은 사람에게 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풂을 박시(博施), 모든 것을 널리 앎을 해박(該博), 장기와 바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기박(棋博), 크고 넓음을 호박(浩博),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음을 홍박(鴻博), 구체적이지 못하고 대강 두루 걸친 범위가 넓음을 범박(汎博), 소매가 넓음을 수박(褎博), 깊고 넓음을 심박(深博), 아는 것이 깊고 넓음을 연박(淵博), 두루 넓음으로 널리 환히 깨달아 앎을 흡박(洽博), 동서 고금의 서적을 널리 읽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박람강기(博覽强記), 학문이 넓고 식견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박학다식(博學多識), 널리 옛일을 알면 오늘날의 일도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을 박고지금(博古知今), 널리 사물을 보고 들어 잘 기억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박문강기(博聞强記), 또는 박문강식(博聞强識), 글로써 나를 넓힌다는 뜻으로 시나 글로 자신의 견식을 넓힘 또는 널리 독서하여 자기 인격을 높이자는 뜻을 이르는 말을 박아이문(博我以文),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 못함 또는 널리 알되 능숙하거나 정밀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박이부정(博而不精), 온갖 사물을 두루 아는 군자라는 뜻으로 온갖 사물에 정통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박물군자(博物君子),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묻는다는 뜻으로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태도를 일컫는 말을 박학심문(博學審問), 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를 연구하고 이것을 실행하는 데 예의로써 하여 정도에 벗어나지 않게 함을 이르는 말을 박문약례(博文約禮),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 아니라 깊게도 앎 즉 나무도 보고 숲도 본다는 말을 박이정(博而精), 널리 예를 들어 그것을 증거로 사물을 설명함을 일컫는 말을 박인방증(博引旁證), 사랑과 은혜를 널리 베풀어 뭇사람을 구제함을 일컫는 말을 박시제중(博施濟衆), 널리 공부하여 덕을 닦으려고 뜻을 굳건히 함을 이르는 말을 박학독지(博學篤志),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음을 일컫는 말을 박채중의(博採衆議), 학식과 견문이 대단히 넓음을 일컫는 말을 박학다문(博學多聞), 학식이 넓고 학문에 정통하며 재주가 많음 또는 그런 사람을 박학다재(博學多才), 아는 것은 많으나 요령 부득임을 일컫는 말을 박이과요(博而寡要), 가축이나 짐승 따위가 비대함을 이르는 말을 박석비돌(博碩肥腯), 모든 일에 다 통한다는 사람은 한 가지에도 정통하지 못하므로 도리어 아무 것도 모름을 이르는 말을 박자부지(博者不知)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精(정할 정/찧을 정)은 ❶형성문자로 精(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쌀 미(米; 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靑(청, 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靑(청)은 푸른 색깔, 깨끗하다, 깨끗하게 하는 일을 뜻하고, 米(미)는 곡식(穀食)으로, 精(정)은 곡식(穀食)을 찧어서 깨끗이 하다, 정미(精米), 애벌 찧는 것을 粗(조)라는 데 대하여 곱게 찧는 것을 精(정)이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精자는 '깨끗하다'나 '정성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精자는 米(쌀 미)자와 靑(푸를 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靑자는 초목과 우물을 함께 그린 것으로 '푸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푸르고 깨끗함을 뜻하는 靑자에 米자가 결합한 精자는 '깨끗한 쌀'이란 뜻으로 만들어졌다. 수확한 벼는 탈곡 후에 다시 도정(搗精)과정을 거쳐야 한다. 도정과정을 잘 거쳐야만 깨끗한 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에는 오로지 사람의 노동력으로 도정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精자는 '깨끗하다'라는 뜻 외에도 '정성스럽다'라는 뜻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래서 精(정)은 (1)정수(精髓) (2)정수(精水) (3)정기(精氣) 등의 뜻으로 ①정(精)하다(정성을 들여서 거칠지 아니하고 매우 곱다) ②깨끗하다 ③정성(精誠)스럽다 ④찧다(쌀을 곱게 쓿다) ⑤뛰어나다, 우수(優秀)하다 ⑥가장 좋다, 훌륭하다 ⑦총명(聰明)하다, 똑똑하다, 영리(怜悧)하다 ⑧세밀(細密)하다, 정밀(精密)하다, 정교(精巧)하다 ⑨정통하다, 능통하다, 능(能)하다 ⑩순수한, 정제(精製)한, 정련한 ⑪몹시, 매우, 대단히 ⑫정기(精氣), 정신(精神), 정력, 원기(元氣) ⑬요정(妖精), 정령(精靈), 요괴(妖怪) ⑭도깨비 ⑮정액(精液)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정할 전(奠), 정할 정(定), 반대 뜻을 가진 한자거칠 조(粗)이다. 용례로는 마음이나 생각 또는 영혼을 정신(精神),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참되고 거짓이 없는 성실한 마음을 정성(精誠), 가늘고 촘촘함이나 아주 잘고 자세함을 정밀(精密), 정밀하고 교묘함을 정교(精巧), 자세히 살피어 읽음을 정독(精讀), 정성을 들여 잘 만듦을 정제(精製), 정밀한 계산을 정산(精算), 어떤 사물에 대하여 밝고 자세하게 앎을 정통(精通), 상세하고 확실함을 정확(精確), 뼈 속에 있는 골 또는 사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알짜를 정수(精髓), 썩 날래고 용맹스러움 또는 정련된 군사를 정예(精銳), 암수의 생식 세포가 서로 하나로 합치는 현상을 수정(受精), 곡식 등을 찧거나 쓿는 일을 도정(搗精), 조촐하거나 깨끗하지 못하고 거칠거나 지저분함을 부정(不精), 자세히 연구함을 연정(硏精), 마음을 가다듬고 성의껏 힘씀을 여정(勵精), 순수한 금과 좋은 옥이라는 뜻으로 인격이나 문장이 아름답고 깨끗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금양옥(精金良玉), 쇠붙이가 충분히 단련되었다는 뜻으로 충분히 숙련되고 많은 경험을 쌓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금백련(精金百鍊), 사리에 밝고 판단에 민첩하며 역량과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정민강간(精敏强幹), 삼가 게을리 하지 않고 일에 힘쓴다는 말을 정려각근(精勵恪勤),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 못하다는 말을 박이부정(博而不精), 몹시 애를 쓰고 정성을 들인다는 말을 각고정려(刻苦精勵),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라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로부터 그 정신과 육체를 물려받았음을 이르는 말을 부정모혈(父精母血),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한다는 말을 학업정진(學業精進), 작은 것이 정밀하고 세차다는 뜻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다부지고 강한 면모가 있다는 말을 단소정한(短小精悍)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