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만 금식기도회
‘주 강사’ 김장환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가 2012년 10월 22일 포항실내체육관에서 여성 1만명 금식기도회를 인도한다.
가난한 소작농 아들인 그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도, 유색인 최초 세계침례교회 연맹 총회장이 된 것도, 교인수를 1천배로 성장시킨 것도, 극동방송 이사장을 맡은 것도 기적의 연속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그를 만나 목회 인생 50년을 들어봤다.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가난한 소작농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일제 말기,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매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을 볼 때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처 피난도 가지 못한 채 가족과 함께 수원에서 고스란히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군의 눈에 띄어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대에서 알게 된 미군 칼 파워즈 상사의 호의와 적극적인 주선에 힘입어 1951년 11월12일, 17살의 나이에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미국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대학과 대학원까지 있는 밥 존스 재단의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밥 존스는 극보수로 불릴 정도의 엄격하고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향수병이 걸렸습니다.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주신 수원 고향집 흙이 담긴 주머니를 부둥켜안고 매일 울었습니다.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제리 메이저라는 룸메이트 형이 예수 믿으면 향수병이 낫는다고 했고, 그를 따라 영접기도를 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모든 외로움이 사라졌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 농림부장관이 되어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꿈이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습니다.
-언어문제에 따른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네, 미국 땅에 도착할 무렵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미국에 온 지 2년 만에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고교 졸업 때 우등상을 타고 밥 존스 신학대학까지 진학해 올 A의 성적을 받았습니다.
까다로운 밥 존스의 규율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8년간의 학교생활 동안 단 1점의 벌점도 받지 않았습니다.
고교시절부터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전도를 나갔으며, 대학 1학년 때부터는 매 주일 전도집회에 참석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동양인이 전하는 생생한 간증은 현지인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더 열심히 전도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트루디 사모님은 언제 만났습니까?
△밥 존스 시절 만나 교제해 왔습니다.
주님이 배려한 최상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저의 동역자 입니다. 저희 둘은 직장을 갖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틈만 나면 전도집회를 다녔습니다.
1년 안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1959년 2월 단테침례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그 해 11월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섬기게 됐습니다.
-수원에서 교회를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까. 서울 목회의 유혹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수원이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를 만들려면 서울에서 개척하라는 권유가 많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수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족들과 내 고향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던 가족들부터 시작해 이웃으로 차례차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계동 집이 교회나 다름없이 개방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모님의 내조가 컸을 것 같습니다. 교회성장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시죠.
△30년간 전도를 위한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가난한 학생들과 선교사 가족들, 미군들까지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수많은 사회 유명 인사들도 다녀갔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와 봉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내 트루디는 그 누구보다 수원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이유는 그녀가 이곳에서 눈물로 뿌린 복음의 씨앗은 셀 수 없이 많고 기도로 심은 사랑이 셀 수 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는 현재 1만5천명의 성도가 있는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1959년 말 담임목사로 부임할 당시에는 단 12명의 교인이 전부였습니다. 낡아 비가 새는 교회를 다시 짓고 성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증축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수많은 성도들의 봉사와 헌금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교회성장의 이면에는 목사님의 특유의 부지런함과 탁월한 설교, 전도의 열정, 추진력을 꼽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청소년 선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지요.
△네, 수원 YFC를 창설하고 한국 YFC 총재를 지내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보탰습니다.
YFC(Youth For Christ)는 10대 청소년 선교를 목표로 하는 세계적인 조직으로 1966년 한국 YFC가 결성되고 초대회장을 맡았습니다.
음악, 스포츠, 세미나, 드라마 등의 간접 선교프로그램으로 수원의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때 미국을 돌며 대대적인 모금 집회를 펼쳐 모금 한 20만 달러로 부지를 매입하고 기독회관을 건축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직업소년학교를 선두로 성경공부반, 중앙유치원, 수원기독야간중학교, 한국평신도신학교 등을 열었으며 침례신학대학을 설립해 지금까지 신학생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전도집회에서 통역을 맡은 일로 일순간 스타로 부상했다는 예기도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한국기독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로 기록됩니다.
1973년 5월30일부터 6월3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한국 개신교발전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5일간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으며 마지막 날 모인 110만명의 인파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세계 최고 기록입니다.
당시 수많은 언론과 매체가 연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집회를 대서특필했습니다.
‘100만 군중, 유능한 통역’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러시아, 일본, 타이완,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 등 수많은 나라에서 집회 초청이 이어졌습니다.
-극동방송과 아세아방송 책임자로 북방선교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지요.
△1991년 8월 국제 10대선교회(YFC)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소년 전도집회에 참여해 순회설교를 했습니다. 공산권에서 일으킨 역사적인 부흥회였으며 대회기간동안 3천명이 결신 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실시해온 러시아선교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로스엔젤레스 대회, 96년 아틀란타 대회, 97년 하와이와 시카고 대회의 주 강사로 초청받아 수많은 신도들 앞에 약속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침례교 역사 이래 미국이나 유럽지역 목사들에게만 주어졌던 세계 침례교연맹(BWA)의 총회장 자리가 최초로 유색인종인 목사님에게 허용되는 순간 부담도 만만찮았을 것 같습니다.
△세계 침례교연맹(BWA)의 총회장으로 선출된 데에는 국경을 가리지 않고 펼쳐온 해외사역들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데다 국내선교를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해 목회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해외집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영어설교를 훨씬 잘 한다”는 예기를 듣곤 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 기독교 단체에서 초청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성 1만 기도회에 임하는 소감도 들려주시죠.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없는 감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육감입니다. 성경에서나 저희 교회나 세계 교회성장사를 보면 여성들이 아름답게 쓰임 받은 사례들이 많습니다. 여성이 없다면 교회 성장이 불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마음도 들 정도입니다. 물론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시지만... 여성이 은혜를 받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여성들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의 현장이 될 줄 믿고 있습니다.
/언론인홀리클럽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