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난도어 강, 흐르는노래는 노르웨이 여가수 시쎌이 부르는 '셰난도어'
[ 영화, 셰난도어 ]
이 영화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대의를 내건 전쟁에 의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싫어하던 주인공 찰리 앤더슨(제임스 스튜어트 분)은 결국 자신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전쟁에 휘말려 가족들 몇(아들 둘, 며느리 하나)을 잃게 됩니다(대신 막내는 살아 돌아오고 사위는 포로로 이송되다가 장인에 의해서 구출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전쟁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65년은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전쟁을 주시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주었을 겁니다.
기술 발전과 더불어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요즘은, 더더욱 개개인이 전쟁에서 벗어나기 불가능한 시대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 사회에서 소위 대의에 의해, 그리고 다수에 의해 고통 받고 희생되는 개인의 삶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아버지 찰리)
이 작품의 감독 앤드류 맥라글렌은 서부극의 대가였습니니다. 또 이 작품은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 영화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 서부영화의 영원한 주인공인 존 웨인의 아들 패트릭 웨인이, 극중 찰리의 큰아들로
출연한 것도 독특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얼마 후 <졸업>(1967)으로 스타가 된 여배우 캐서린 로스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한 아들이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부성애를 지닌 찰리 앤더슨은 “이 수색을 포기한다면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사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모든 아들들이 말끝마다 아버지에게 ‘Yes, Sir’라고 부르는 그 엄격함 속에서도 사위와 딸의 첫날밤 침구까지 직접 챙겨주는 자상함을 보여주는 장면, 영화 마지막 부분인 교회에서 막내아들이 살아서 들어오는 모습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장면으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사진,살아돌아온 막내)
[ 간략한 줄거리 ]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버지니아의 셰넌도어 계곡에 사는 찰리 앤더슨은 홀애비이지만 건장한 사내자식들 6명에 딸자식 1명까지, 모두 7명의 자녀들과 함께 흑인 노예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그들 가족끼리만 그 큰 농장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비록 지역은 남군 소속이지만 철저한 반전주의자인 그로서는 버지니아의 의무를 강조하며 아들들을 군대로 보내달라고 와서 사정을 하는 남군장교의 말 같은 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습니다.(아래 사진, 막내를 찾아나서는 가족들)
불과 10마일 밖에 북군들이 와 있는데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죠.
그런 와중에 결혼한 큰아들 제임스와 며느리 앤 사이에서는 첫 손녀도 태어나 16년 전에 사별한 부인의 이름, 마사를 아기에게 지어주며 다시 불러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또 외동딸인 제인을 남군의 현역 장교인 샘에게 시집보내는 경사도 치르지만,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는 이 앤더슨 집안에도 급기야 그 여파가 미치기 시작합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도중, 사랑의 맹세가 끝나자마자 전쟁터로 오라는 호출을 받는 사위 샘.
거기다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16살의 막내, 필립이 쓰고 있던 남군모자로 인한 오해 때문에 북군의 포로로 잡혀갑니다.(사진,외동딸의 결혼식)
그래서 큰아들 부부만 집에 남겨두고 온 식구가 북군의 캠프를 비롯한 북부의 이곳저곳으로 막내를 찾아 나서는데 하루에 천 명씩이나 철도로 수송되는 그 수많은 포로들 중에서 막내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고, 급기야, 포로 수송열차까지 탈취를 해보지만, 막내 대신에 포로가 된 사위 샘을 우연히 구하게 됩니다.
식량까지 다 떨어진 후, 결국 필립을 찾는 수색을 포기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아들이 16세 어린 남군 병사의 오인사격으로 숨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 그 동안 집을 지키던 큰 아들 부부마저 부랑배들의 습격으로 죽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 포로수용소에서 우여곡절 끝에 탈출을 한 막내는 여러 전쟁터를 전전하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앤더슨 가족과 교회 안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됩니다.(사진,북군에게 잡힌 막내)
[ 미국민요, <세난도어> 이야기 ]
영화의 배경 셰넌도어가 자연스럽게 영화의 제목이 되었듯이(오늘날에는 미국의 국립공원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제곡 역시 자연스럽게 미국의 민요인 ‘Shenandoah’가 채택이 되었습니다.
서부개척시대부터 유행하였다는, 작자 미상의 이곡이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이후부터 더욱 유명해져서 미치 밀러 합창단과 로저 와그너 합창단을 비롯한 수많은 합창단의 단골 메뉴가 되었으며 해리 벨라폰테 등 팝가수들의 노래들로도 1960년대에 크게 히트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노르웨이 출신의 Sissel이나 재즈 피아니스트인 Keith Jarrett의 연주로도 최근에 다시 리메이크되어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합니다.
쓸쓸하면서도 향수가 느껴지는 애절한 멜로디로 멀리 떠나온 타향에서,
그리운 셰넌도어 계곡을 노래하고 있는데 곡 중간의 “댁의 따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가사는 이 영화의 내용과도 공교롭게 아주 딱 맞아 떨어지기도 합니다.(사진,셰난도어 공원)
셰넌도어라는 말은 ‘하늘의 딸’이라는 인디언 말인데 원 가사에 딸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하늘의 딸을 나타냅니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을 표현한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 원조 미국 국민배우, 제임스 스튜어트(1908.05.20 ~ 1997.07.02) ]
얼빠진 모습에 머뭇거리는 말투로 소박하면서도 겸손한 매력을 지닌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는 1940년대 당시 대부분의 주연급 배우들이 지녔던 교양과 젠체하는 영웅주의가 부족했던 배우였습니다.
스튜어트는 이웃집 신사 같은 소박함과 편안함을 지닌 배우였고,(사진, 제임스 스츄어드)
그가 지닌 그러한 인간적인 매력은 그가 1930-80년대에 걸쳐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게 했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지닌 배우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스튜어트는 1932년에 프린스턴 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시절, 스튜어트는 일찍이 자신의 연극적 재능을 발견했고 1930년대 말부터 연기를 시작합니다.
작은 역할들을 몇 번 맡다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우리들의 낙원(1938)>에서 괴짜 가족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로 첫 주요 배역을 맡게 됩니다. 이듬해 그는 같은 감독인 카프라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부패한 정치가들의 가면을 벗기는 시골 출신의 순수한 인물로 탁월한 연기를 선보이게 됩니다.
캐리 그랜트와 캐서린 헵번과 함께 출연한 세련된 코미디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에 출연하여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게 됩니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이었다고 합니다.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참전하게 됩니다. 실전에 지원한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였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로 전환하자 스튜어트는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을 받자 트레이너를 고용해 몸무게를 늘였다고 합니다. 스파게티와 밀크셰이크를 잔뜩 먹고 다음 신검이 있기 36시간 전부터 화장실을 한 번도 안갔다고 합니다. 62kg까지 늘렸는데도 미달이었고 결국 군의관에게 사정을 해서 합격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1941년 3월 육군 항공대의 조종 특기 사병으로 전시 군 복무를 시작했는데, 이는 지난 1935년 개인 항공 자격증을 취득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 장교로 임관,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사진, 영화 <이창>)
그는 스타 영화배우라 하여 후방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거나 위문공연을 하지 않고, 실제로 유럽전선에서 여러 번 폭격작전에 참가하여 공적을 쌓았습니다. 입대 후 4년 만에 대령으로 까지 진급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제대 후 배우로 복귀한 뒤에도 아이젠하워와 존슨 대통령 시절, 상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1959년 7월 23일 미 예비공군(AFRC) 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헐리우드 스타들 중 가장 높은 군 계급입니다. 또한 그의 의붓아들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했습니다.(사진, 공군 준장 스츄어드)
이는 매파의 상징인 존 웨인이 징집을 피해 전쟁영화 출연으로 때운 것과 좋은 비교가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첫 영화는 역시 카프라 감독과 함께였습니다. <멋진 인생(1946)>은 좀 더 어두운 분위기를 띤 영화로 은행원 역할의 스튜어트가 소도시 삶의 좌절과 실망들을 겪습니다.
이전에 스크린에서 보이던 그의 캐릭터는 서민적이었고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과 느린 말투는 소시민적 도덕적 가치관을 구현했었으나 이제 그의 연기범위는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분노의 강(1952>과 <운명의 박차(1953)>,<라라미에서 온 사나이(1955)>를 비롯한 이 시리즈에서 스튜어트의 캐릭터는 충동과 강박관념에 내몰리고 거의 살인적인 난폭함을 터뜨리는 인물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출연한 히치콕 영화 <로프(1948)>에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었던 냉담한 두 젊은이가 저지른 살인을 밝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튜어트는 캐리 그랜트와 함께 히치콕이 가장 신임하는 주연 배우가 됩니다.
그랜트에 비해 덜 로맨틱한 스튜어트는 사근사근한 그랜트보다는 훨씬 내면적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을 연기했다는 평이었습니다.
<이창(1954)>에서 그는 다리가 부러져 자리에 묶여 있는 사진가로 출연해 아파트 창문을 통해 살인사건을 관찰하는 한편 그레이스 켈리와의 까다로운 로맨스를 풀어나가기도 합니다.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1956)>에서는 여배우 도리스 데이와 함께 파렴치한 스파이들에게 아이를 유괴당한 아버지 역을 맡았습니다.(사진, 영화 <현기증>)
그의 가장 뛰어난 역할 중 하나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의 경찰관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한 여자(킴 노박 분)에게 위험하게 집착하게 되는 한편 그의 일을 방해하는 고소공포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역할을 합니다.
후에 그는 존 포드 감독의 <투 로드 투게더(1961)>에서 말수 적은 독특한 태도를 지닌 부패한 보안관을 연기했고, 이어서 포드의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는 서부의 젊은 변호사였다가 총잡이로서의 가짜 명성을 발판으로 상원의원이 된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스튜어트는 할리우드의 화려함을 싫어했고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질색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사치스러움과 값비싼 자동차 같은 것에도 현혹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아내 글로리아에게만 전념했고 1994년 그녀가 3년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참으로 슬퍼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스튜어트는 우파적 대의들을 지지한 강경한 공화당원이었습니다.
언젠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상당히 진보적인 헨리 폰다와 정치에 관한 문제로 주먹질까지 오고 간 적이 있을 정도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그 일로 우정을 깨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정치에 관해 논쟁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얘기도 전해옵니다.(사진,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트루먼 대통령은 스튜어트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꼭 지미 스튜어트 같기를 바랐을 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재 국민배우는 톰 행크스인데 원조는 제임스 스튜어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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