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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na.co.kr/view/AKR20240102067600005
신간]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삶이 스토아철학…'해법 철학'
쇼펜하우어 행복은 농담이거나 완전무결한 환상
이른바 '금욕주의'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로마 철학의 대표학파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으므로, 욕구와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자 최고의 선이라고 여겼다.
미국 오스틴 법학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2000년 전 스토아 철학자들이 내놓은 교훈을 12가지 키워드로 집약해 현대인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강의하는 방식으로 엮었다.
고통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주변 사람의 평판에 집착하거나 외적인 요소에 목매는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말한다.
허상일 수도 있는 타인의 삶을 보고 내 삶은 불행하다고 느끼지 말라는 의미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숱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양만큼이나 많은 불안을 경험하고, 소셜미디어 속 화려한 장면을 타인의 일반적인 삶인 것처럼 착각해 자신의 삶을 비하하는 것을 미리 꼬집었다고 볼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실천적 가치는 비교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다면 현재를 충실하고 절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책에는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등을 비롯해 실존주의 철학자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경제학 성서인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견지한 스토아철학의 얘기도 담겼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스토아주의를 비판했지만, 몇몇 구체적인 문제는 스토아주의자들과 동감했고, 쇼펜하우어도 이성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스토아철학의 여러 지엽적인 문제들과 의견을 같이하는 에세이를 펴냈다고 한다.
윌북.424쪽.
출판사 서평
새로운 정보가 넘치는 시대, 왜 우리는 오래된 철학자의 말에서 진리를 얻는 걸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던 2000년 전 철학의 교훈
그 어떤 시대보다 정보가 넘쳐나지만, 현대인은 그 정보의 양만큼이나 많은 불안을 경험한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과장된 대한민국 평균에 집착하고, SNS 속 화려한 한 장면을 타인의 일반적 삶인 듯 느끼며 자신의 삶을 비하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묻는다. “왜 당신은 타인의 삶을 보고 내 삶을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스토아철학은 2000년 전 인간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연구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고통이 남들과의 비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교’라는 현상은 내 안에서 나오는 생각에서 나오므로, 이것을 고쳐야 한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의 평판에 집착하고, 외적인 요소에 목매는 삶의 본질에 대해 짚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신이 그들의 받침대까지 같이 재기 때문입니다.” 비교라는 허상, 부풀려진 외부의 것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라고 조언한다. 동시에 스토아철학은 ‘멀리 보기’를 제안한다. 나를 아득하게 긴 시간 속의 하나로 여긴다면, 혹은 지금의 모든 것들을 죽음 앞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우리의 고민은 한낱 작은 것에 불과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타인과 대상, 혹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고통은 언젠가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스토아철학은 당연한 이치이면서도 우리가 도저히 바꾸지 못하는 ‘관점’의 변화와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비합리적 환상을 지적했다.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이러한 그들의 철학이지만, 이렇게 관점을 바꿀 때 남는 것은 현재를 충실하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힘뿐이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은 실천의 철학이며, 무엇보다 극에 치달으며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중간의 지점을 찾는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동시에 불확실하면서 완전한 행복을 좇기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작고 많은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그것이 스토아주의의 삶의 자세다. 불확실하며, 정보 과잉인 현대 세계에서 스토아철학이 알려주는 삶의 자세는 그래서 더 유의미하다.
스토아철학의 인용문을 한 권에, 정확한 해설로 엮은 스토아철학의 정수
그동안 스토아철학자의 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기장에, 세네카는 편지에, 에픽테토스는 강연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 책은 스토아철학을 12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스토아철학자들의 원전을 주제에 따라 엮어냈다. 그다음 철학을 단지 배우고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삶을 살아가며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을 이끌어낸다.
이 책이 다루는 철학자는 대표 스토아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에픽테토스뿐 아니라 쇼펜하우어, 몽테뉴, 애덤 스미스, 니체까지 다양하다. 실존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말 속에서도 스토아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고, 몽테뉴는 부분적으로 스토아철학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 또한 그의 책 『도덕 감정론』에서 상당 부분 스토아철학에 대해 언급하며 그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스토아철학이 관통하는 본질을 짚어내는 저자의 12가지 키워드는 그동안 흩어져 있었던 스토아철학을 완전하게 집약하고, 이해하기 쉽게 나누었으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인의 삶과 2000년 전 스토아철학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법학자이자, 법학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오래된 스토아학자들의 이야기를 묶고, 가끔은 해명하며 또 해석하면서 스토아철학이 삶에 다가가는 가장 정확한 방법을 제시한다. 실천하는 스토아주의자인 동시에 스토아철학의 정수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철학으로 삶을 바꾸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 매료된 것은 단순함과 절제라는 삶의 실천
가끔 진리가 하나로 귀결되는 것을 인지할 때가 있다. 고대 철학자의 말이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 혹은 2000년 전 철학자의 말이 현대 정신과 의사의 조언과 일치할 때, 동서양 철학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지점이 같을 때, 시공간적으로는 접점이 없는 것에서 우리는 아주 보편적이거나 혹은 하나로 움직이는 진리를 느끼곤 한다. 스토아철학이 그렇다.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많은 것이 내 생각 속에서 나온다는 관점, 시공간을 멀리 두고, 내 존재의 하찮음을 느끼면서 자의식을 내려놓는 일, 내일 죽음이 올 것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일까지. 스토아철학은 마치 우리가 수없이 들었던 동서양의 철학의 근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우리가 하루하루 견디면서 삶 속에서 얻었던 단순한 삶의 지침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스토아철학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 내가 나라는 세계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것, 나의 자아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철학자의 원전과 해석을 읽다 보면, 내 안에서 ‘아하’하는 순간을 수없이 겪게 된다.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평론가인 마이클 더다는 이 책을 ‘한 번만이 아니라 읽고 또 읽게 될 책’이라고 말했다. 독자들은 철학을 각 잡고 배우기 위해 애쓰려는 방식이 아니라, 내 안의 철학자를 일깨우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역경이 닥쳤을 때 내 안의 현자를 깨우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이용할 수 있다. 마치 철학 사용자의 인생 매뉴얼처럼, 삶의 매뉴얼처럼 꺼내 쓰는 철학자의 말을 삶의 분기마다 꺼내 읽어보자. 생각이 많아 길을 잃었을 때, 스토아철학의 조언은 산재한 문제의 주변 가지들을 잘라내고, 우리에게 선명한 길을 제시할 것이다. 이것이 역경을 산뜻하게 이겨내는 스토아철학의 실천적 가치다.
https://naver.me/GDNBnz94
스토아 철학의 기본 생각 4단계는 다음과 같
습니다.
1. 우리는 사건에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
건에 대한 우리 판단에 반응하며 그 판단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2. 생각의 결(관점)을 바꿔라
3. 덕이 찾아온다
4. (배움) 덕을 통해 잘 존재하게 되면 진짜 배울 수 (흡수) 있다
첫 번째, 우리는 사건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
리는 사건에 대한 우리 판단에 반응하며 그 판
단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 학파의 대표
적인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 실린 표현입니다.
"어떤 외적인 것 때문에 힘들다면 당신이 힘
든 이유는 그 외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지금 그 판
단을 없앨 힘이 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기쁨, 슬픔, 욕망, 두려
움 같은 감정을 느낄 때 어떤 단계를 거친다고
강조합니다. 이 중간 단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내면의 평온으로 가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
다. '자극과 반응 사이 공간을 둔다'는 것이 이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 중간 단계, 자극과 반
응 사이의 공간 없이 곧바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떤 사건에 대해 자
신이 하는 그 반응에 자신의 판단이 개입되었
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극(사건) -(자신의 경험, 선입견 등 판단 개입--이것이 문제의 본질임을 알아차리기) - 반응
여기서 두 번째, 생각의 결을 바꾼다는 내용
으로 이어집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어떤 사
물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대체로 연습
을 통하면 뿌리채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
니까 내가 지금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가를 알
아차리고 그 판단이 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한다
면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틀어버리는 것이 우리
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인 워드 판즈워
스는 말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모욕한다고 가정해보라. 그
모욕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지를 떠
나서는 의미가 없다. 당신이 불쾌하다고 느낀
다면 그건 분명 당신이 그 모욕에 신경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곧 판단이다. 대신 당신은
그 모욕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
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
다. 소란한 이웃, 나쁜 날씨, 교통체증 이런 일
때문에 화가 난다면 이에 대해 당신이 내리는
판단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내게
나쁘다는, 내게 중요하다는, 내가 화를 낼 만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이런 생각을 당신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오로지 당신만
이 들이밀 수 있다. 우리는 늘 세상에 이런저런
일에 반응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는 자기 내
면의 일에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리고 가끔은 세상을 바꾸려 애쓰는 것보다 나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일
때가 있다는 걸 알아차려라."
똑같은 일인데 사람마다 다른 반응이 나타나
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
신의 반응이 당연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려야 합
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다보니 대단
한 성인이 되야 할 것 같고, 너무 높은 경지나
수준에 올라야 하는 것 같아 멀게 느껴질 수 있
어요. 또 그동안의 수많은 반응들이 모두 내 탓
이 되버리는 것 같은 기분에 책망을 듣는 것 같
기도 하고요. 그런데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철학자들은 '판단'을 왜 못 알아채냐고 타박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롭않은 판단, 반응 이걸 없앨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소 평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살펴보시죠.
"정신적 동요에 대한 이 모든 논의에서 문제
는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네. 그것들 모두 우리
힘 안에 있고, 모두 우리 판단의 문제이며, 모
두 우리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
세. 왜냐하면 이 불운들에 휘둘리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온전한 정신을 지킬
수도 없을 테니까."
이런 생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역경'이라
고 부를 만한 것들이 찾아올 때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이 역경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에요. 좌절을 충격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 위대한 걸 만
들기 위한 재료로 바꿔내는 것입니다. 세네카
의 <서한집〉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
상록〉 등에 담겨 있는 인사이트를 보면 이렇습
"삶의 조건이란 목욕탕, 사람 많은 곳, 여행길
의 조건과 같습니다. 무언가가 당신에게 달려
들기도 하고, 어떤 일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기
도 합니다. 인생은 고상한 일이 아닙니다. 비틀
거리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지칠테죠. 어떤 곳
에서는 길동무를 저버리고, 어떤 곳에서는 두
려워할 겁니다."
"건강한 눈은 보아야 할 것을 모두 봐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보고 싶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병든 눈의 징후이다. 건강한 청각과
건강한 후각은 듣고 맡을 것을 모두 듣고 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마음은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한다."
이렇게 역경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자
좋은 것으로 바꿔 내는데 필요한 재료라고 생각
하면 생각과 말에 변화가 생깁니다. '불평해봐
야 소용이 없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났다고 불평하는 건 부질없
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
니다. 세네카의 <서한집>입니다.
"현자가 불운 때문에 힘들어 한다고 생각하십
니까? 그는 불운을 활용합니다. 그는 상아로만
조각을 만들지 않죠. 청동으로 조각을 만듭니
다. 그에게 대리석이나 그보다 못한 재료를 주
더라도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조각상
을 만들 겁니다. 현자가 부유하다면 부유함 속
에서 덕을 보여줄 것이고, 부유하지 않다면 부
유하지 않음 속에서, 장군이면 장군으로서, 병
사는 병사로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으
로 감탄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낼 겁니다."
그럼 이 역경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구체
적인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은 원래
방해물에 부딪쳤을 때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
는지 알게 된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이 불행
은 용감한 자인지 아닌지, 그걸 이룰 자격이 있
는지 없는지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세네카의 <섭리에 대하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역경이 없다면 덕은 시들어 버립니다. 덕에
고난을 견디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때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위대하고 강
력한지 알게 됩니다. 선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움츠
러들지 말아야 하고, 운명에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운명에게
당신 스스로 당신의 가치를 보여줄 기회를 주
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지금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
십시오.' 이 역경이라는 아이가 내가 어떤 사람
인지 나한테 제대로 보여주려고 이러는구나.'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역경을 '특권'이라고 합
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합니다.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도 여전히 무사하고,
현재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올 것을 두
려워하지도 않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스토아학파는 역경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는 많은 것들은 익숙해지고 나면 생각보다 괜찮
아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냉탕에 처음 들어갈
땐 몸이 저릿할만큼 차가워도 이내 적응이 되
어 괜찮아지는 것처럼요. 이 시간 속에서 우리
의 판단, 이성은 가다듬을수록 더욱 예리해집
니다.
이렇게 역경을 재료로 활용할 줄 아는 정신
상태가 되면 이제 3단계, 덕이 찾아온다고 합니
다.스토아학파는 어떤 경우든 덕이 행복을 만
들어내는 충분 조건이자 필요 조건이라고 봅니
다. 그렇게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기쁨과 마음
의 평화는 덕의 부수적인 효과로 따라오는 것이
라고 합니다. 이 모든 걸 아우른 행복을 일컬어
스토아학파는 '잘 존재함', '웰빙'이라고 부릅
니다.
우리가 이렇듯 마음을 잘 훈련시켜서 '잘 존
재함'의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4단계, 배움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뭔가 새로운 걸 배울 때 그냥 '와' 감탄만 하는 게 아니라 흡수를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을 무척 자주 만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
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입니다. 보십
시오.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정말 마음 먹은 사
람이 실패한 적이 있습니까. 배움은 지식이 아
니라 생각과 행동으로 나옵니다. 우리의 자신
감 부족은 어려움의 결과가 아닙니다. 어려움
이 우리의 자신감 부족에서 나올 뿐이죠."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다독여야 합니다. 처음엔 관심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쉬워진다고 해요. 정신을 채워야하는 양동이가 아니라 점화가 필요한 장작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점화를 일으키기까지 부채질을 하고, 장작을 넣어주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정신의 길이 내가 원하는 길로 난다는 겁니다.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당신 안에
확립되고, 당신이 자신을 보호할 힘을 어느 정
도 얻을 때까지는 지혜를 접하지 않은 자들과
투기장에 들어서는 일에 조심하라. 매일 정신
을 불러내 결산을 해야 한다. 나는 하루가 끝날
무렵 휴식에 들어갈 때 나의 정신을 심문했다.
나는 오늘 어떤 면에서 더 나아졌는가. 정신이
매일 판사 앞에 서야 함을 안다면 화는 떠나고
누구러질 것이다."
매일 하는 나에 대한 성찰. 나의 목표,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매일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어느 정도 단
단해지기 전에는 해보지도 않고 떠드는 사람들
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트레이
닝 없이 투기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니까
요.
마지막으로 아우렐리우스의 말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당신이 자주 생각하는 것들의 특성이 바로
당신의 특성이 된다. 마음은 반드시 그것이 자
주하는 생각에 물든다. 그러므로 그러길 바라
는 생각들에 마음을 푹 담그라. 생존할 수 있다
면 좋은 삶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