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간 학교를 비우면서..그만큼의 빚을 지고 있는 거 같아요..
어떤 공간에서 떠나있었던 만큼..그만큼의 무게..(말로는 잘 설명이 안되네요...^^)
그래서 더욱, 제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좀 많이 길지만(쓰다 보니 4시간이 훌쩍..^^)..
한번 읽어 보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골수 빨갱이입니다!!!
-사회당 전국 순회 유세투쟁단원, 수봉이의 12월 이야기
연말이다. 쌓인 레포트를 겨우겨우 해치우고 날아갈듯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갑자기 무언가 가슴을 콱, 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지?’하는 마음으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들, 건너편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저씨, 그 너머 유리창으로 보이는 【신도림】이라는 표지판, 그리고…….
또 무심결에 돌린 내 눈은 우연히도, 바닥에 버려져 있는 ‘목캔디’ 껍질에 박혀 있었다.
아, 그거였구나.
신도림, 지하철 2호선, 목캔디…….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 하다. 2002년 12월 어느 날, 나는 언제나처럼 목캔디를 하나 물고는 신도림역 환승통로 한 편에 서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시민 여러분!
저희는 이번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5번 사회당 김영규 후보와 함께하는,
사회당 당원들입니다!!!!”
#1.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우리는 평소처럼 지하철에서 사회당의 정책을 시민분들께 알려내고 있었다. 안그래도 아픈 목을 가지고 힘겹게 유세를 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혹시나 뭐 잘못한 게 있나 하여 그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이놈들, 니놈들이 지금 우리를 지하철 속에 가둬놓고 세뇌시키고 있어~! 네놈들 다 북에서 온 간첩들이지!!! 너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구우!!!!!!”
하지만 우리는 그 애국적인 할아버지의 충고에 이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야, 들었냐? 사회당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대!”
“진짜냐? 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해?!!”
#2. 목숨을 건 출근선전전
나는 그 때까지 목포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목포는 남쪽이니까 당연히 따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목포는 배신을 때렸다. 그것도 가장 처절하게.
아침 6시 30분 경에 우리는 목포의 한 조선소 앞에 도착했다. 늘상 있는 출근선전전이라고 여기고, 밖에 눈이 오길래 좀 춥겠지 생각하면서 유세투쟁단 버스를 내렸다. 하지만 버스를 내리자마자 나는 엄청나게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비가 오면 우의를 입으면서까지 마임을 했던 전천후 유세투쟁단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이따위 눈보라와 칼바람 정도에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의연하게 선전전을 진행하러 나갔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이따위 눈보라와 칼바람”에 생사를 걸어야 했다.
우리의 정면에서 무섭게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의 추진력을 그대로 안고 총알같이 퍼붓는 눈, 눈, 눈. 정말 과장 안하고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마임을 할 때 점프를 하면 뒤로 한 뼘 가량 밀려나서 떨어질 정도였으니.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바람 때문에 구호를 외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입을 벌리기만 하면 바람이 초당 한 웅큼씩 밀려들어와서 목구멍을 막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대…’까지만 말을 해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선전전은 해야 했고, 결국 우리는 밀려오는 바람에 대항하기 위해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야 했다.
“사~!회주의! 대! 통! 령! 투쟁! 투쟁!”
바람에 나부끼는 선거 운동원 패찰에 얼굴을 맞으며, 바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구호를 외치며, 우리는 강풍을 등에 진 덕에 초고속으로 내달리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시는 노동자들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마 목포의 그 조선소 노동자들은 불쌍해서라도 우리를 찍었을 거다.
#3. 목포대 메아리 사건
지옥같던 아침 선전전을 끝내고, 우리는 목포대로 향했다. 아무래도 사회당은 대학생들에게 더 많이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목포대는 유세투쟁단에게 강렬하게 어필함으로써 우리에게 보답을 했다.
12월 10일. 분명 종강은 안했을 거다. 하지만 날씨 관계로 휴교라도 했는지, 학교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았던 유세투쟁단, 학교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목포대 선전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호 5번, 김영규! 돈세상을 뒤엎겠습니다!!!”
“……뒤엎겠습니다다다다…….”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 유세투쟁단은 목포를 절망의 도시로 기억했다.
#4. 무서운 사회주의?!
유세투쟁단이 대전에 갔을 때, 우리는 용두동 철거민들과 연대하여 주택공사 앞에서 유세를 했다. 사회당 김영규 후보님은 주택공사 앞에서 용두동 강제철거를 비난하고, 주택공사에 ‘김영규의 레드카드’를 주었다.
그리고 유세 마지막 즈음에 우리는 주택공사의 모형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했다.
유세장 한가운데에 주택공사의 모형이 설치되고, 김영규 후보님께는 길다란 몽둥이가 하나 주어졌다.
한번, 그리고 또 한번. TV 카메라에는 김영규 후보님께서 주택공사 모형을 두번 내리치는 모습이 담겼다. 퍼포먼스는 끝난 듯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연호를 하려는 찰나,
후보님의 몽둥이가 부웅, 공기를 갈랐다!!
“퍽!”
그리고 그런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던 주택공사 모형은 이 한 방에 두 조각이 나 버렸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다.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김영규 후보님의 분노는 모형이 아니라 실제 주택공사도 그대로 부숴버릴 듯 했다. 하지만 후보님께서는 그걸로도 성에 안 차신지 두 조각이 난 주택공사 모형을 발로 몇 번씩이나 더 차고, 밟으셨다.
그리고 우리가 연호를 시작하자, 후보님께서는 한 손에 몽둥이를 그대로 들고 연호를 하셨다!
그날 난 깨달았다. 사회주의는 따뜻한 무서움이라고. 사회주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하지만, 주택공사나 악덕 자본가 같은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또한 한없이 무서운 것이라고.
지금의 나에게 유세투쟁단의 기억은 이처럼 조각난 파편으로 남아있다. 그 조각들을 완벽하게 짜맞출 수 있을 만큼 나는 머리가 좋지 못하다.
다시 11월 25일. 나의 2학기 거의 전부를 걸었던 총학생회 선거 개표날이었다. 그 날 아침, 한 선배가 나한테 다가와 말했다.
“사회당 유세투쟁단 가지 않을래?”
사회당에서 16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비록 진보정당이 사회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우려는 하고 있었지만, 사회당의 두 가지 기치인 반 자본주의, 반 조선노동당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고민 끝에 겨우 몇 달 전에 당원가입을 한 새내기 당원인 수봉이였다. 아직은 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회당의 전국 순회 유세투쟁단은 그리 와 닿지는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세투쟁단에 가면 12월 한달을 학교에서 떠나 있어야 했다. 솔직히 이것도 마음에 좀 걸렸다. 그나마 붙들고 있던 2학기의 마지막까지 날려버릴 만큼 절실한 투쟁일까? 수업시간 내내 저울질을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결국 나는 사회당 유세투쟁단에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5년에 한 번 뿐인 대통령 선거. 내가 대학생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물론 7학년 때 다시 갈 수도 있지만……). 그리고 사회당을 실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까지 확신 없이 어정쩡하게 반 발짝 걸쳐놓고 있던 사회당을, 대선을 통해서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실천으로 고민을 해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라면, 내 일상에서 한 번 탈출해보고 싶어서이다. 학교에 남아서 기말고사 준비하고, 공부하고, 이러면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기는 싫었다. 잘못하다가는 학생회 선거때문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신선한 공기. 유세투쟁단은 나에게 그런 새로운 일상을 맛볼 수 있게 해 줄 것 같았다.
11월 27일. 사회당 김영규 후보의 대통령 후보 등록을 시작으로 유세투쟁단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세투쟁단원들에게는 역사에 길이 남을 고상한 카키색―똥색 잠바와 목도리가 지급되었다. 유세투쟁단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닐 버스가 도착하고, 사회당 김영규 후보의 이동식 유세트럭도 기지개를 켰다. 바야흐로 전국을 누비며 사회당의 사회주의를 알려낼 준비가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사회당 대통령 후보 김영규 대표님께서 도착하시고, 사회당의 첫 유세―미 대사관 앞에서의 유세(를 가장한 집회)가 시작되었다. 미 대사관은 평소에 “주한미……”까지만 말하면 전경들에 의해 살포시 들려가는 살벌한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고 있었고, 사회당의 역사적인 첫 유세를 듣기 위해 몰려들어 있던 전투경찰들을 싹 무시한 채 미 대사관 바로 앞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당당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세가 막바지로 가고, 김영규 후보님이 성조기를 태우자, 질서정연하게 듣던 청중들이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우리 유세투쟁단을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그리고 김영규 후보님이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에 대한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미 대사관으로 가려 하자, 인도까지 점거하고 불법농성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거운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아무래 어르고 달래고 꾸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미 대사관도 “항의서한은 거절하지만, 거절한다는 의사도 밝힐 수는 없다”는 매우 고차원적인 답변을 해 왔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발길을 청와대로 돌렸다.
오후에는 삼성 재벌 타격 투쟁도 했다. 서울 중심에 높다랗게 위용을 떨치고 있는 삼성 생명. 그 거인 앞에서 사회당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이 불법으로 상속받은 7700억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들어갔다.
“한 달에 200만원씩 버는 노동자가 7700억을 모으려면 얼마가 걸리는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32083년이 걸립니다!! 또 있습니다! 7700억을 만원짜리 지폐로 쌓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옆에서 계산해 봤습니다. 7700억을 한 줄로 쌓으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던 에베레스트 산을 넘는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한쪽에서는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 가고 죽어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겨우 서른 네살의 나이에 불법․탈법으로 상속받은 재산이 7700억이랍니다!!!”
그리고 사회당은 제 1 공약인 ‘고액상속 금지법 제정’을 주장했다. 20억 이상의 고액 상속을 금지하여, 부가 세습되는 것을 막아보자고, 삼성 생명 앞에서 유세를 했다. 당연하게도, 삼성의 거대한 빌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깐 옆으로 새자면, 사회당은 유세 기간동안 9차례 정도에 걸쳐 ‘전국 동시다발 삼성 타격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미 대사관 앞에서는 22일의 선거운동 기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선전전으로 주한 미군 철수를 외쳤다. 한마디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전략이었다. 던지면 깨지고, 하지만 또 던지고, 또 던지고. 그러면서 바위에 투쟁의 흔적을 남기고, 비록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바위에 구멍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 거대한 재벌과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아마 선거가 끝난 후 삼성 빌딩에는 이런 푯말이 붙었을 거다.
―개와 똥색 잠바를 입은 사람은 출입 금지―
그렇게 우리는 거리 연설을 통해, 지하철 유세를 통해, 발랄한(?) 마임을 통해 사회당의 사회주의를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50년간 금기로 묶여 있던 단어, 사회주의.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는 인간해방을 그리는 우리들의 꿈을 응축시킨 단어, 사회주의. 그 단어를 분주한 명동 거리에서 외칠 때, 그리고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유세를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의 눈빛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지하철 아지(아지테이션. 유세.)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금함에 2만원을 넣으시는 한 여자분의 눈을 보면서, 열심히 하라고 지폐를 선뜻 건네시는 노동자분의 손을 보면서, 우리는 ‘벅차다’는 게 어떤 건지 드디어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지하철 아지는 아직도 귓가에 뱅뱅 맴돈다. 지하철 2호선. 소음도 그리 크지 않고, 사람들도 적당히 타고 있을 때, 중간쯤에 서서 말문을 연다.
“지하철을 이용하시는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희는 이번 대선에서 기호 5번 사회당 김영규 후보와 함께하는 사회당 당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기 집’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집이 없습니다. 저희 집은 집이 없습니다. 아직도 전셋방 전전하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김대중 정권 시대에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론 상으로 따지면 우리 서민들 모두 최소한 자기 집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왜 집이 없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 많은 사람, 재벌들, 부자들이, 집을 수십 채씩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무엇입니까. 집은 사람이 살라고 만든 것입니다. 우리같은 서민들이 편하게 휴식을 하기 위해 만든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집을 돈놀이의 대상으로,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살지도 않으면서 집을 수십 채씩 사놓고, 집투기를 해서 돈을 불리는 겁니다!
이런 세상, 바꿔야 합니다. 주택은 그곳에서 살아갈 서민들이 가져야 합니다. 토지를 농사짓는 농민들이 가져야 하고, 학교를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가져야 하듯이, 주택은 서민이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당이 말하는 사회주의 세상, 돈이 사람보다 소중한―차가운 돈세상이 아닌, 따뜻한 인간 세상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를 내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새 몇 정거장은 훌쩍 지나 있다. 그리고 아지가 끝난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가던 아주머니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맨 고등학생들이, 또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사원들이, 한 분 한 분 박수를 쳐 줄 때, 나는 목이 아픈 것 쯤은 깨끗이 잊을 수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한 나의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기쁜 일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
그렇게 유세투쟁단은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방방곡곡에 사회주의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유세투쟁단이 언제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당 기관지 기자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를 질문받았을 때, 나는 주저없이 말했다. ‘얼마 받고 일하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라고. 실제로 나는 그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지금까지 누가 정치를, 선거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냐고. 우리의 순수한 사회주의의 열정이, 저들의 이전투구에 섞여서 퇴색될까봐, 그것이 가장 화가 났다. 우리가 보수 정당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화가 났다. 저들은 재벌들에게 수백억 받아서 편하게 선거운동 하지만, 우리는 당원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기탁금 5억원 마련하고, 돈이 없어서 공보물도, TV 광고도 자주 내지 못했다. 돈 있는 자들만의 선거, 그들만의 선거.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우리마저 그들과 도매금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 정말 화가 났다.
게다가 유세투쟁단의 일정이 본격화 되면서, 그리고 그 일정이 바쁘게 돌아가고, 하루 이틀이 지나 며칠씩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고민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버스 타고 지역에 가고, 버스가 멈추면 내려서 선전전하고, 마임하고, 또 버스 타고, 내리고, 마임하고……. 하루에도 유세를 네다섯번은 하고, 마임을 100번 가까이 하는 우리로서는 ‘마임 기계’라는 말이 장난이 아니게 들렸다. 게다가 유세투쟁단의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조별 평가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우리는, 반미에 관련된 문제나 반여성적 발언을 듣고 느끼는 불만들을 그냥 마음 속에 묻어두고만 있었다. 그렇게 유세투쟁단의 하루하루는 기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드디어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해 버렸다. 일정 공유 후에 형식적으로 있던 ‘질문 없습니까?’라는 말에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서. 그 질문은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나도 늦었을 ‘평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문제시 되었던 것은 반미에 관한 것과 ‘여중생’에 대한 것이었다. 사회당은 지금까지 민족주의적인 반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를 하고 있었다.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미국 ‘군대’에 대한 반대였지, 그것이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반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당이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에 대해 연설하는 도중에 종종 민족주의적인 발언이 나왔고, 유세투쟁단원들은 그것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리고 ‘꽃다운 여중생’등의 반여성적 발언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나왔다. 사회당 유세 중 추모 집회를 할 때나 추모사 등을 할 때, ‘여중생’, ‘아리따운’ 등의 단어가 종종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성을 대상화하고 죽은 중학생을 두 번 죽이는 발언들이, 그것에 대해 주로 문제제기하고 있던 사회당 안에서 나왔다는 것은 유세투쟁단원들에게는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외에도 많은 평가가 쏟아졌다. 학생운동의 선전 방식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8박자 구호가 시민들에게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유세에서 줄을 맞추어 서 있는 것이 시민들에게 거리감을 준다, …….
그리고 그 날 이후 유세투쟁단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우리는 매 순간 고민하고, 매 순간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조별로 효과적인 선전방식을 고민해서 다른 조에게 알려주기도 했고, 문제점이 있으면 즉시 지적해서 고치도록 했다. 비록 남은 날짜가 별로 없었지만, 우리는 매일 최선을 다해서 ‘살아있는 유세’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D-1일. 사회당 전국 순회 유세투쟁단의 마지막 유세날이 다가왔다.
12/18 水 날씨는 기억 안나지만, 좋았던 거 같다.
오늘은 규칙을 깼다. 일기 불소급의 원칙을. 그만큼 12월 18일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
아침에 조원들이 늦게 나왔다. 마지막 날인데, 피곤해서 그랬던 거 같다.
늘 하듯이 미 대사관 앞에 갔다. 이제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곳이다. 어제 우리는 반전 평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유세를 했다. 우리 후보님은 또 주먹으로 미사일과 전투기를 박살내셨다. 역시 멋지다. 퍼포먼스로 파란 풍선도 날렸다. 나는 ‘전쟁 반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이라고 커다랗게 써서 날렸다. 그런데 바람 때문에 날아가던 풍선 대부분이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다. 우리는 평화 나무를 만들었다고 좋아했었다. 그리고 어제 만들어 놓은 평화 나무 밑에서 우리는 미 대사관 앞 마지막 유세를 했다.
신촌에서 간단히 유세를 하고 서울역으로 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의 서울역 유세. 모두 총집중하는 날이어서 우리 학교 사람들도 많이 왔다. 지나가던 분들도 꽤 많이 서서 보고 가셨다. 심지어 군인 한 명도 옆에서 정말 좋아하면서 들었다(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이 갓 제대한 군인은 서울역 유세를 듣고 그 자리에서 사회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신석준 동지의 심금을 울리는 격정적인 연설, 수도권 유세투쟁단의 이건희․이재용 부자를 풍자한 기상천외한 공연, 그리고 이어지는 후보님의 유세. 정말 좋았다.
마지막 날이라서 유세가 많았다. 명동으로 가서 왁자지껄한 거리 중간에서 판을 벌였다. 그리고 바로 대학로로 이동했다.
참,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20년 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20년 후 우리 중 누구는 대선 후보로 나가고, 한때 유세투쟁단 같은 조였던 동지들끼리 후보 경선 붙고, ‘사실 이사람이 20년 전에 맨날 늦잠자서 우리를 골탕먹였다’는 비방을 장난스럽게 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20년 후의 사회당을 꿈꾸고 있었다. 지하철 아지 때 그리도 많이 이야기했던, 20년 후. 그 미래에 대한 확신.
대학로에서의 마지막 유세.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마지막. 이 말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 몸이 언제 피곤했었나 싶게, 정말 신나고 열정적으로 마임하고, 연호하고, 환호하고, 아예 몸을 불살라 버리리라는 마음으로 유세를 했다.
“여러분께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저희들은 22일동안 뛰었습니다.”
석준 동지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영화를 보면 이런 순간에 그 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던데, 나는 그냥 하나의 감정을 느낄 뿐이었다. 여러가지 색의 빛을 섞으면 하나의 빛이 되듯이, 복잡한 감정이 한데 뒤엉킨, 단 하나의, 하지만 무수히 많은, 하나의 감정―
―감동을.
대학로 유세를 마치고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선전전을 했다. 그건 사실 선전전이 아니었다. 광란이었다. 축제였다. 우리들의 신명나는 한풀이였다. 조장 동지의 독특한 마임(이건 말로 설명이 안된다……)을 미친듯이 따라하면서, 우린 정말 미쳐 있었다. 아까 전 유세로 남은 기운을 다 써버린 나였다. 격렬한 마임 때문에 발바닥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즐겁게, 한 판을 벌였다.
다시 마로니에 공원에 들어가서 정말 우리들만의 축제를 벌였다. 오랜만에 Zen이 공연을 했다. 열광이었다. 비록 유세차량의 스피커가 말썽이긴 했지만, 공연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나를 감동시킨 것은, Zen의 막내 김민선 동지의 말이었다. 결코 달변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솔직함과 진심을 담은 그녀의 말은 나를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바라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와, 하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함성을 내질렀다. 처음이었다. 그런 함성은. 우리 모두 그 함성의 열기에 빠져 있었다.
이어지는 발언들. 석준 동지가 나왔을 때, 우리는 지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환호를 터트렸다. 내가 보기에 그는 후보님만큼, 아니 후보님보다도 더 많은 환호와 박수를 받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감동케 했을까. ‘사회주의자란 말입니다, 뜨겁게 눈물도 흘릴 줄 알고, 저처럼 이렇게 앞에 나와서 선동할 줄도 알고, 현실에 분노해서 짱돌도 들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던 그의 예전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후보님의 연설. 환호. 밤하늘에 작렬하는 불꽃. 불꽃. 사회주의자 선언. 촛불. <들불의 노래>, <인터내셔널가>가 흘러넘치고, 내 옆에 어깨동무 하고 있는 동지들의 얼굴…….
감동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많이 쓴 날은 처음이다.
집회가 너무 늦게 끝나서 밥먹고 심야 지하철에 택시를 타고 들어가니, 1시였다.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발만 씻고 뻗었다.
그렇게, 나의 22일간의 전국 순회 유세투쟁은,
끝났다.
다음 날, 한 달간 텅 비워둔 집을 청소하고, 이미 종강해버린 2학기의 남은 레포트들을 쓰다가, 나는 투표를 하러 갔다.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이후 진보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노무현을 찍는 분위기였다. ‘당선가능한’ 진보―사람들은 또 한번 환상에 속고 있었다. 이회창과 노무현이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 과연 어디가 더 진보적이란 말인가.
나는 내 생애 최초의 투표권을 ‘기호 5번 사회당 김영규’에게 행사했다.
저녁 6시 10분. 사회당 중앙당사에 가기 위해 여의도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사회당의 예상 득표율이 0.1%라는 라디오를 들었다. 설마 그 정도로 작을까 했다. 여의도에서 사람들과 같이 뉴스를 보면서, 솔직히 득표율에 실망이라는 말도 했다. 그 자리에는 김영규 후보님도 계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시면서 김영규 후보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하지만 감히 짐작해본다, 그 분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50년의 기다림, 10년의 약속―사회주의. 우리는 이 단어의 무게를 안다. 가장 억압받는 자와 가장 먼저 연대하는 사회주의.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하는 사회주의. 노동자 민중이 진정으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회주의. 여성이 해방될 수 있는 사회주의. 우리 청소년들이 더이상 입시지옥에 갇혀있지 않아도 되는 사회주의. 전쟁이 없는 사회주의.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장 따뜻한 상식을 말하는 사회주의.
이런 무수한 수식어들로도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사/회/주/의’라는 네 글자.
누군가가 지하철 아지에서 그랬다고 한다. “아직도 사회당을, 재벌 재산 사회 환수나 주장하는, 빨갱이 집단으로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골수 빨갱이들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의 꿈과 믿음을 말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다, 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우리와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꿈은, 함께하는 순간에 현실이 된다.
※이 글은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에 의존한 것이므로, 사실관계가 약간 다르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