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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인치 TV가 한국에선 1000만원이 넘는 고가지만 해외직구로 사면 두 대에 600만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국내 해외배송 대행업체 1위 몰테일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해외직구를 통해 국내에 들어오는 국내산 TV는 한 달에 1000대가 넘는다. 이 중 95% 이상이 삼성스마트TV다. 월드워런티제도를 통해 해외에서 산 제품도 무상A/S를 지원해 주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LG전자 역시 해외구매 제품에 대해 1년간 무상A/S가 가능하도록 정책을 변경하며 판매량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국내 유통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온 블랙 프라이데이 이후에도 직구 열기는 식지 않고 오히려 구매량이 치솟고 있다. 최근에도 SNS와 블로그를 통해 50인치 이상 스마트TV를 한국 판매가에 비해 반값 이하로 구매했다는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신혼부부 사이에 TV제품 직구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4월 아마존을 통해 55인치 스마트TV를 60% 이상 저렴하게 구매했다고 밝힌 직장인 김영준 씨(33)는 “직구를 해보니 한국 기업들의 판매가에 의문이 생겼다”며 “한국에서 생산해 영토가 좁아 운송 등 유통환경도 유리한데 가격이 두 배 이상 비싸다면 분명 폭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의 생산제품 중 한국 판매가가 해외보다 높게 책정되어 있는 것은 TV뿐만이 아니다.
소비자시민모임이 지난해 미국, 일본, 중국 등 세계 15개국 주요도시에서 스마트폰, 노트북, 생활가전제품 32개 품목 60개 제품의 국제 물가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성 갤럭시 노트3와 LG G2는 15개 국가 중 한국이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갤럭시 노트3의 판매가가 가장 낮은 국가는 영국(78만6800원)으로, 한국(106만7000원)은 영국에 비해 1.4배가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났고, 미국의 판매 가격은 84만7000원으로 한국은 미국과 비교해 1.3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LG G2의 경우 판매가가 80만원에 불과한 네덜란드에 비해 한국 판매가격(95만 8000원)은 1.2배가 높았다.
반면 애플 아이폰5S의 미국 현지가(61만6750원)는 한국 판매가(101만원)에 비해 60% 수준에 불과했다. 이밖에 삼성 노트북 아티브 북4의 경우에도 15개국 중 판매가 1위를 기록했다.
소비자시민모임 관계자는 “조사 결과 다른 수입 가전제품은 대체적으로 브랜드 국가의 현지 가격이 가장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한국의 경우 다수의 품목의 판매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구형 제네시스 국내외 판매가 차이에 소비자들이 공분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부터 현대차는 신형 제네시스 출시를 앞두고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한국 소비자에게 최대 5%의 할인 혜택을 제공했다. 영업점별 200만~300만원의 할인 옵션까지 더하면 3800cc 2013년 모델은 최대 4700만원대까지 가격을 낮췄다. 미국의 현대차 전문 판매점에서는 같은 모델을 비 할인가 3만9999달러(약 4300만원)에 내놓았다. 그런데 현지 미국 자동차 거래 사이트에서는 현대차 제네시스 3800cc모델이 2만6000달러(약 2780만원)에 매물이 등록됐다.
사이트에 등록된 차는 아산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관세와 운송비·취등록세 할인까지 더해도 한국 판매가와 200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나타나는 셈이다.
다양한 유통경로를 통한 가격경쟁이 자연스러운 가격 하락을 만든 것이다. 반면 미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삼성전자, LG, 현대차 등의 대기업이 제품생산은 물론 유통구조까지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폭리를 취해온 수입업체들과 유사하게 유통에 있어 독점적 지위에 있지만 가격경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현재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해외직구가 그나마 견제장치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해외직구가 많이 이루어지는 산업일수록 유통 폐쇄성, 시장 지배력 등으로 진입장벽이 크고, 독점적 초과이윤이 존재할 가능성이 큰 산업들이다”며 “직구의 확대로 결국 수입 및 유통기업의 초과이윤이 소비자들의 후생으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통관비용 등으로 역수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자동차나 국가별로 주파수 환경이 다른 스마트폰은 AS문제 등으로 해외직구가 제로에 가깝다.
한 유통업계 전문가는 “해외직구가 늘어나며 한국 유통구조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라며 “직구가 더욱 늘어날 경우 국부 유출문제가 지적될 수 있는 만큼 국내 독점적 지위를 가진 대기업들의 유통환경 장악에 대해 정책적인 차원에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며 한국에서 유달리 고가정책을 펴온 대표로는 명품업체들을 꼽을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명품소비가 활성화된 1990년대 후반부터 대부분의 명품수입브랜드의 한국 소비자가는 미국·유럽보다 훨씬 높게 책정돼 왔다. 과시욕구로 물건의 가격이 비쌀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가 한국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었다.
<뉴스타파 영상, 베블런 효과 설명>
한국 소비자들의 명품사랑 심리를 파악한 명품브랜드들은 매년 판매가격을 4~15%씩 인상해 왔다. 공식 수입사를 통하지 않으면 제품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해외구입이나 병행수입된 제품에 대해서는 엄격히 A/S를 제한하는 통에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도 한 요인이다. 마케팅 전략 앞에서는 기초적인 경제원칙도 무색했다.
<2014년 고가 해외브랜드 통계 자료>
2011년 7월 초 한·EU 간 FTA가 발효됐다. 이에 따라 많은 수입품의 관세가 철폐되거나 내려갔다. 의류와 신발에 대해서는 13%였던 관세가 철폐됐고, 손목시계, 가방, 스카프에 붙던 8%의 관세도 없어졌다. 지갑류는 소재에 따라 관세가 없어지거나 2%가 떨어졌다. 그동안 명품업체들이 입을 모아 한국의 높은 판매가의 원인을 ‘관세’로 지목한 터라 많은 소비자들은 가격인하를 기대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이 2011년 6월~2012년 5월 루이비통·구찌·버버리·샤넬·프라다·에르메스 등의 360개 상품 가격을 조사한 결과 한·EU FTA 발표 후에도 가격은 오히려 인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최근 원·유로 환율이 원화 강세에 힘입어 하락하고 있지만 유럽산 수입 명품 가격은 올해 들어서도 계속 올라갔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중순 1530원대였던 원·유로 환율은 지난 5월 20일 1398원 선까지 떨어졌다. 원·유로 환율 1400원대가 무너진 것은 지난해 1월 11일 이후 처음이지만 유럽에서 수입되는 명품의 가격은 오히려 올랐다.
한 명품브랜드 관계자는 “한국 판매 제품은 길면 6개월 전 구매가 이뤄지는 만큼 일시적인 환율 변화가 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유통업계 전문가는 “유럽이나 몇몇 아시아 국가는 글로벌 브랜드의 자국 판매가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정부가 벌금을 부과하는 등 페널티를 주거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한다”며 “반면에 한국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해 업체들의 고가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명품업체들 못지않게 바가지 영업을 하고 있는 독점 수입업체들의 횡포 역시 문제다. 관세청과 소비자단체인 전국주부교실중앙회, 소비자시민모임 등에 따르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에는 수입원가 대비 4배의 판매가가 붙었다. 단돈 4200원에 들여온 휴고보스 넥타이는 백화점에서 15만원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지난 4월 관세청은 생수, 전기면도기, 유모차, 와인 등 10개 공산품의 수입 원가를 공개한 바 있다. 평균적으로 10개 품목은 수입가격보다 평균 2.7~9.2배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립스틱의 경우 한국 판매가가 수입가격의 15배나 되는 제품도 있었다.
김자혜 소비자시민모임 회장은 “립스틱, 등산화처럼 비교적 수입가격이 저렴한 품목의 경우 판매가격이 뻥튀기 되는 일이 많다”며 “특히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생소한 브랜드일수록 소비자의 정보가 부족해 업체들이 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수입업체들의 덤터기 영업이 가능했던 원인은 무엇보다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올바른 가격경쟁이 일어나지 않아 공급자 주도의 가격정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견제하기 위한 제도가 1995년에 시행된 ‘병행수입제도’다. 이는 국내 독점 판매권을 지닌 정식 수입업체 이외에 수입업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수입해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다.
도입 당시에도 수입업체들의 폭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국감자료를 토대로 보면 1995년 당시 수입품의 소비자 가격은 통상 수입원가의 2.7배, 평균 유통마진율은 209%였다. 이는 국산품의 5.2배 수준이었다.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병행수입 시장 성장은 더디고 독점업체의 가격폭리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치품의 경우 이전보다 마진율이 높아져 소비자부담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