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정치적 중립은 정치권이 보호해야 한다. 통수권자는 국방장관을 통해 철저한 문민통제를 하되, 군의 인사는 각 군 고유의 인사관리제도에 의해 객관성 있게 유능한 군의 인재들이 발탁될 수 있도록 외압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 김대중 정부 때 없앤 ‘국군정신교육원’ 재설립해야
⊙ 장병들의 전투력 강화 위해 '정신교육의 날'과 ‘전투체육의 날’ 부활해야
⊙ 軍의 정치적 중립 보장돼야 軍이 산다
⊙ 지휘관은 사고에 예민한 반응 보이거나 언론 의식하지 말아야
朴裁旭
⊙ 1946년생. 육사 26기 졸업. 영남대대학원 경제학 석사,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수료.
⊙ 국방부 대변인, 육군 정훈감 역임. 예비역 육군준장.
⊙ 現 한국위기관리연구소 연구위원.
⊙ 김대중 정부 때 없앤 ‘국군정신교육원’ 재설립해야
⊙ 장병들의 전투력 강화 위해 '정신교육의 날'과 ‘전투체육의 날’ 부활해야
⊙ 軍의 정치적 중립 보장돼야 軍이 산다
⊙ 지휘관은 사고에 예민한 반응 보이거나 언론 의식하지 말아야
朴裁旭
⊙ 1946년생. 육사 26기 졸업. 영남대대학원 경제학 석사,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수료.
⊙ 국방부 대변인, 육군 정훈감 역임. 예비역 육군준장.
⊙ 現 한국위기관리연구소 연구위원.
2008년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기념식을 맞아 군 장병들이 무술시범을 보이고 있다. |
한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으로서 언급하기 매우 민망한 표현이지만, 역대 어느 국방장관도 이토록 솔직하게 국민 앞에 ‘양심보고’를 한 적이 없었다. 참으로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국민이 치는 회초리를 달게 받겠다’며 종아리를 걷어 올리는 군의 각오가 결연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군이 스스로 ‘총체적인 위기’라고 할 만큼 허약하게 된 그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군은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특수한 조직인 만큼 사기(士氣)를 먹고 사는 집단이다. 사기는 단결을 이루는 ‘에너지’이며, 필승의 신념이란 열매를 맺게 하는 ‘씨앗’이다. 이러한 군의 사기는 오직 국민의 신뢰와 성원으로 키워진다.
우리 군은 6·25 남침전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으며, 선진화된 기술과 행정능력으로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오랜 기간 그에 상응한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한 술 더 떠 정치권력으로부터 불신당했고, 국민으로부터는 외면당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의 입맛에 맞는 정실(情實) 인사로 인해 거목(巨木)으로 성장할 소신 있는 군의 인재들이 안타깝게 잘려 나갔다. 반면, 능력에 비해 중책(重責)을 맡은 함량 미달의 몇몇 군 수뇌부들은 국가안위라는 대의(大義)보다 자신의 안위(安危)를 위해 권력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군인답지 못한 그들 때문에 지난 정권 상당 기간 동안 군이 휘둘려 왔다.
국군의 原罪
지난 십수 년간 적(敵)을 응시하고 부하들을 보살펴야 할 본연의 임무보다 권력과 상급자를 쳐다보는 ‘보신(保身) 지휘’의 관성이 이번 천안함 사태와 같은 구멍 뚫린 국방을 초래했다. 더더욱 위기 대처에 있어 지휘난맥(指揮亂脈)이라는, 어찌 보면 천안함 피격보다 더 큰 국방 안보태세의 불안을 국민들에게 ‘생중계’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이러한 군의 풍토를 걱정하는 군 원로들의 충고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끊임없이 전달됐고, 새로운 군 수뇌부가 군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육·해·공 각 군에 만연된 정서를 단시간에 바로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독립된 주권국가의 상징은 그 나라의 헌법(憲法)이지만, 실효적인 주권 행위는 그 나라 국군(國軍)의 힘에 좌우된다. 전쟁은 국가 간의 또 다른 외교의 수단이자 행태이며, 모든 독립국가가 군사력을 키우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는 군인들이기에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군인은 국가로부터 그 가족과 함께 최고의 영예를 받는다. 국군은 건군(建軍) 당시 보잘것없는 장비와 병력으로 6·25전쟁이라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전쟁을 치르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던 나라를 구했다. 그만큼, 국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일체감은 매우 높았다.
휴전과 더불어 국토는 폐허가 됐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사회 전반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군에는 우수한 인력들이 모여들었다. 선진화된 미국의 행정조직과 문물을 접할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민간분야보다 앞서 있었다.
5·16군사혁명으로 군인들이 정치권력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부터 국정운영의 공과(功過)를 떠나 국민과 군의 일체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 년 동안 군 출신들이 정치무대의 주역을 담당해 옴으로써 국민들의 군에 대한 불신과 괴리가 점증(漸增)돼 갔다.
한때는 군과 민이 마치 대립하는 양상으로 악화되기도 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 명칭은 당시의 민·군 대립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들의 반군(反軍) 정서는 극좌운동권 단체인 ‘주사파(主思派)’의 세력 확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됐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까지 일반 국민들이 순수한 민주화 세력과 대한민국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좌익세력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안보환경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여당 후보의 조깅 제의 거부한 육참총장의 용기
우리 현대사에 있어 군은 공산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국체를 지켜냈고,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빈곤의 악순환마저 오늘날 경제대국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럼에도 그것이 군 본연의 역할이 아닌 외도(外道)였기에 절대다수의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숙명적인 원죄(原罪)를 잉태한 꼴이 되고 말았다.
1979년 12·12사태와 후속 조치로 단행된 군의 대폭적인 인사조치는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 군의 인사가 정치권력에 휘둘리게 되는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군내(軍內) 사조직인 ‘하나회’ 숙청과 그에 따른 후속 인사는 정권교체 때마다 군의 우수인재들이 뚜렷한 잘못도 없이 잘려 나가는 후유증을 나았다.
이는 군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감안한 객관적 인사판단을 도외시하고, 지연·학연·혈연에 따라 정권에 대한 충성 가능성만을 선발 기준으로 삼는 인사의 악순환을 초래하는 빌미가 됐다. 그로 인해 조금씩 군의 간부들은 정치권을 바라보고 ‘줄타기’를 하는 풍토에 젖게 됐다.
물론, 그러한 인사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정치역량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비대해진 군의 규모와 조직이 있었다. 근 30년 동안 국가를 통치·경영해 온 경륜과 우수인재들로 구성된 군의 사조직은 문민 정치 엘리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군내 고급 간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은 미국이 그들의 정치제도와 역사를 통해 이룩한 자유민주주의와 문민통제를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통치구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정서로 인해 5·16군사혁명, 12·12사태 때 군의 정신적인 뿌리인 사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후방의 각 군 간부들은 군의 정치 개입을 부정적으로 보고 반대했던 것이다.
1992년, 대선을 눈앞에 두고 당시 여당 대통령후보(김영삼)가 계룡대에서 “각 군 장병들과 함께 조깅을 하겠다”고 육군참모총장(김진영·예비역 육군대장, 이하 실명은 편집자 주)에게 요청하자, 참모총장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보여 군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결단은 전국의 모든 병영(兵營)의 선거 유세장화를 막으려는 심모원려(深謀遠慮)였던 것이다.
안보를 정권에 팔아먹은 죄인들
2002년 10월 4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철용 5679부대장(육군소장)이 “서해교전 직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정보보고서를 올렸다”면서 블랙북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사관생도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기상점호와 취침점호 때 우렁차게 ‘사관생도의 신조’를 낭송한다.
“하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
“둘,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셋,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이것을 함축하면 ‘충성’ ‘명예’ ‘책임’으로 요약할 수 있고, 웨스트포인트의 교훈 ‘Duty(책임)’ ‘Honor(명예)’ ‘Country(조국)’와 맥을 같이한다. 국가를 막론하고 군인의 길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조국에 대한 충성’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으뜸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덕목도 중요하지만 조국의 안보를 책임진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라는 뜻이다. 사관학교는 군의 핵심 간부가 될 사관생도들에게 이를 매일 암송케 함으로써 신념화시키고 있다.
지난 정권 국방장관을 비롯한 우리 군의 일부 수뇌부가 보여준 자세는 실망스럽다 못해 같은 길을 걸어온 많은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아직 군복을 입고 있는 현역 후배들에게 끼친 정신적 혼란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반미·자주라는 정권의 이념 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가안보의 핵심 기구인 ‘한미연합사령부’를 해체시키고, 시기상조인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대안 없이 저지른 한심한 국방장관과 이의 부당함을 간(諫)하지 못하고 묵시적으로 동조한 당시의 합참과 각 군 수뇌부들은 전작권 전환이 연기된 지금, 그동안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북(對北) 감청부대인 국군 5679부대장을 지낸 한철용(韓哲鏞) 장군(예비역 육군소장)이 서해상에서 북한의 무력도발 징후를 통신감청을 통해 포착했고, 정보보고(블랙북)를 올려 도발을 사전에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은 이를 자의적으로 깔아뭉갰다.
게다가 합참의 간부들이 적의 해상 무력도발에도 무력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참수리호의 여섯 장병은 무고하게 수장당해야만 했다. 제2연평해전은 훗날 반드시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하며, 당시의 지휘선상에 있었던 국방 관계자들은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
DJ정권, 국방정신교육원 해체
참수리호의 전사자 장례식에 대통령은커녕 장관과 군 수뇌부조차 참석하지 않았고, 전사자 가족 중 한 명은 “이런 나라에 환멸을 느낀다”며 이민을 떠났다. 이런 모습에서 과연 대한민국이 국가인가 하는 의심이 싹트는 것은 당연하다.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 장본인들은 이제 대한민국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김대업(金大業)이라는 희대의 ‘병무 사기꾼’을 앞세워 특정정당 대통령 후보(이회창) 아들들의 적법한 병역면제를 병역기피로 날조해 세운 공로로 영전한 어떤 국방장관(천용택)은 ‘국방개혁’이란 명분으로 70만 국군장병의 정신전력 산실(産室)인 ‘국방정신교육원’을 해체시켜 오늘과 같은 군 정신무장의 공황상태를 초래케 했다.(국군정신전력학교의 後身으로 정훈장교의 교육을 담당했던 국방정신교육원은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사라졌다.-편집자 주)
육군 정신교육의 수장(首長)이라 할 수 있는 정훈감 출신 장군(표명렬·예비역 육군준장)은 자신의 집안 내력이 빨치산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평생을 몸담아온 국군과 사관학교를 ‘잘못 태어난 사생아’라고 날조·비방·매도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보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갈 많은 전·현직 군인들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신을 굽히지 않은 美軍들
에릭 신세키 미국 육군참모총장은 이라크전 파병규모를 놓고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맞서다 사임했다. |
2008년 10월 1일 발간된 <육사총동창회보>에 게재된 박정기(朴正基) 전 한전사장(육사 14기)의 기고, ‘육사와 웨스트포인트’는 사관학교 출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自畵像)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에릭 신세키(Eric Shinseki·1999~ 2003) 미 제34대 육군참모총장은 하와이 출신으로 196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순수 일본 혈통이다. 당시 유색인(有色人)으로는 처음으로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된 사람이기에 주목을 끌었다. 그는 임기를 5개월이나 남긴 시점에서 총장직을 그만두게 된다. 자기 소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당시 국방장관이던 럼즈펠드에 맞섰기 때문이다.
미 육군은 이라크전을 계획할 때, 최소 30만 이상의 지상군이 소요될 것이므로 육군의 병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럼즈펠드는 해·공군의 첨단무기와 10만 정도의 지상군만으로도 3개월 이내에 이라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세키를 끝내 설득할 수 없었던 럼즈펠드는 결국 그를 해임하고 육군 내 신망이 가장 두터웠던 참모차장 존 킨(John Keane) 대장을 후임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킨 또한 신세키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육군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총장직을 수락할 수 없다”고 뜻을 굽히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물러서지 않자 그는 서슴없이 옷을 벗었다.
급해진 럼즈펠드는 당시 이라크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중부군사령관 토미 프랭크스(Tommy Franks) 대장을 총장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프랭크스 역시 똑같은 육군의 주장을 들고 나왔고, 소신이 관철되지 않자 평생의 꿈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버리고 군복마저 벗어버린다.
그 후에도 현역 대장 모두 같은 뜻을 보이자 럼즈펠드는 하는 수 없이 예편한 지 5년이나 된 피터 슈메이커(Peter Schoomaker) 예비역 대장에게 참모총장직을 위촉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35대 미 육군참모총장이 탄생하게 됐다.
현역후배들의 ‘울분’ 대신한 팔순의 老兵들
2006년 8월 11일, 서울역 광장에 백발이 성성한 팔순의 노병들을 포함한 5000여 명의 예비역 장성들이 호국의 전진(戰塵)이 배어 있는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뙤약볕이 작렬하는 아스팔트 위에 모였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한미연합사 해체가 가져올 대한민국 안보위기를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당시의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평생을 조국수호 한길로만 살아온 이들 노병이 무엇을 바라고 젊은이들도 견디기 어려운 8월의 무더위 속 아스팔트 거리로 뛰쳐나왔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후손들이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참화(慘禍)를 겪어서는 안 될뿐더러 북한사회와 같은 노예생활이 아닌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한 아버지로서 또는 할아버지로서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태를 맞아 국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천안함 인양 작업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것, 영안실 조문참배에 이어 장례식에 참석해 전사한 순국용사 46인의 영정에 일일이 훈장을 추서하는 행보, 수많은 국민의 추모행렬을 지켜본 60만 국군장병과 800만 예비역은 지난날의 한 맺힌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렸으리라 생각한다.
전사한 46인의 억울한 주검과 후배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한 한주호 준위의 영웅적인 모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안보현실과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전작권 전환 시기가 2015년으로 연기되는 등, 한미 군사동맹 관계가 굳건하게 다시 회복됨으로써 발등에 떨어졌던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돼 참으로 다행스럽다.
지난날 군의 안팎에서 흔들어 놓은 군심(軍心)을 어떻게 결속시켜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여기에는 당장 군 내부적으로 조치되어야 할 사안도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대통령의 통치권 차원에서 또는 여야(與野)를 가리지 않는 정치적 합의로 해결해야 할 사안도 있을 것이다.
정치권이 軍의 정치적 중립 보호해야
예비역 장성들 모임인 성우회 회원 등이 2006년 6월 22일 서울역 광장에서 ‘김대중 방북 저지 궐기대회’를 열고 6·15 선언 파기와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 취소를 촉구했다. |
첫째로 군의 정치적 중립은 정치권이 보호해야 한다. 지난날 군의 정치참여로 인해 군 스스로 정치적 중립을 파괴한 사례가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고 시대착오적인 그런 발상을 갖는 군인도 없다. 정권이 군으로부터 위협받는 후진성을 이제는 벗어났음을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오히려 정치권에서 과거의 피해의식에 젖어 군 인사에 간여하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따라서 통수권자는 국방장관을 통해 철저한 문민통제를 하되, 군의 인사는 각 군 고유의 인사관리제도에 의해 객관성 있게 유능한 군의 인재들이 발탁될 수 있도록 외압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둘째, 전시(展示)적이거나 구호성이 아닌 내면적이고 실질적인 강군(强軍)을 만들어야 한다. 강한 군대 육성은 모든 지휘관이 내세우는 목표다.
강한 군대만이 전승(戰勝)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군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려되는 점이 많다. 강한 군대는 오로지 강한 교육훈련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지휘관이 교육훈련에 진력하려면 여타의 간섭이 최소화된 지휘권 보장이 필수적이다.
청와대를 비롯해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각종 사고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언론을 의식하게 되면, 예하 지휘관들은 주눅 들 수밖에 없으며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킬 수도 없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병영이 신바람 나고 활기찬 에너지로 사기충천할 수 있도록 일선지휘관들에게 최대한 재량권을 부여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엄격한 신상필벌로 다스려야 한다.
군은 혈기 왕성한 젊은 세대들이 집단으로 모여 무기를 사용하는 생활이 반복되는 곳이다. 훈련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나 상하동료 간의 갈등에서 오는 예기치 못한 사태 또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전후방 각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가족들의 희생 속에 살아가는 간부들의 애환(哀歡)을 참작해 작은 사고와 물의는 군의 규율로 기강을 바로잡도록 언론과 국민의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이런 일로 군 간부들을 소심하게 하고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약한 군대를 만들어 결국 국민을 피해자로 만들 것이다.
‘정신교육의 날’ ‘전투체육의 날’ 부활시켜야
셋째, 군의 정신전력 강화를 위해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없애버렸던 ‘국군정신교육원’ 재설립과 매주 수요일 ‘정신교육의 날’과 ‘전투체육의 날’을 시급히 부활시켜야 한다.
다만 시대가 변했고, 젊은 세대들의 성향이 달라진 것을 감안해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닌 발전적인 내용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쌍방채널인 IPTV시대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국군 정신교육 기관을 ‘국방홍보원’과 통합해 정보통신시대에 걸맞은 군의 정신문화 센터로 발전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교육의 날’과 ‘전투체육의 날’은 병영생활에서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1977년부터 학계, 문화계, 언론계 등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군 정신전력 지도위원회’에서 창안한 한국군 특유의 제도다.
고된 훈련과 경직된 내무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정신적인 무장으로 가다듬고, 유쾌한 체육활동을 통한 상하 동료 간의 땀 흘리는 스킨십 속에서 전우애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매주 수요일로 고정한 것은 한 주의 중간이라는 것과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연속적인 야외훈련과 같은 부득이한 경우엔 일정을 변경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었는데도 야외훈련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를 폐지하고 말았다.
이는 제정목적을 사려 깊게 파악하지 않고 결정한 독선적인 단견(短見)이라 볼 수밖에 없는 만큼, 시급히 부활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군 개혁의 과제는 ‘통합군 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각 군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정치권에서도 여야 간의 주장이 다를 수 있어 지난(至難)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예측이 불가능한 북한군의 무력도발을 감내해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협소한 전장 환경과 적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는 전쟁양상에 신속하고 효율적인 전력 발휘가 생존의 관건인 만큼, 더 이상 지엽적인 이해관계에 묶여 있을 여지가 없다.
통합군 체제로 서둘러 가야
이번 천안함 사태에서 노정(露呈)되었듯, 적의 공격을 받은 해군 함정이 침몰당하는 초유의 비상상황이 발생했는데도 합참의 상황전파가 직속상관인 합참의장과 장관에게조차 적시(適時)에 보고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원인이 각 군 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불협화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상에 우리 모두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날 정치권이 군의 통합된 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 두려워 순조롭게 진행되던 통합군 체제에 족쇄를 채웠던 안타까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우려가 불식된 만큼 각 군의 사관학교와 각 군 대학부터 통합해 나가는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더욱이 병력 감축의 전제조건인 무기체계의 현대화와 전작권의 전환에 대비한 정보자산 확보를 위해 한정된 국방재원의 효율적 배분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만큼, 통합군 체제로의 전환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군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과제는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의 원죄’나 ‘국가안보를 정권에 팔아먹었다’는 견해에 대해 보는 이에 따라 그 시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정권에서 군의 핵심 위치에 있었던 분들은 자신의 소신 있는 결단이었다고, 아니면 그땐 그 자리에 누가 있었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향군인회를 비롯해 대한민국 성우회와 대령연합회 등 모든 예비역단체가 지난 정권이 저지른 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 해체에 대해 구국(救國)의 차원에서 결연하게 거리로 뛰쳐나가 항변한 엄연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함께 군인의 길을 걸어온 입장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건군 이래 국방의 핵심 요직은 대부분이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군들이 맡아왔다. 대한민국의 과중한 안보상황과 열악한 경제수준에서 채택할 수 있는 국방전략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지상군 위주가 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초래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필자의 30년 군생활 멘토였던 최찬욱(육사 11기) 전 국방부 정훈국장은 약주 한 잔을 하면 언제나 이렇게 독백처럼 말했다.
“먼 훗날, 군복을 벗고 나서 국방의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사악을 탐하는 후배들을 보면 지팡이로 등짝을 후려쳐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줄 수 있는 떳떳한 선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