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경계까지 1백 26리, 남쪽으로 삼등현(三登縣) 경계까지 38리, 강동현(江東縣) 경계까지 42리, 서쪽으로 은산현(殷山縣) 경계까지 46리, 북쪽으로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65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4리이다.【건치연혁】 본래
비류(沸流)와 송양(松讓)의 옛 서울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북부여(北扶餘)로부터 와서 졸본천(卒本川)에 도읍할 때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였으므로 드디어 다물도(多勿都)를 설치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로 하였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복구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종 14년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고, 현종 9년에 성주 방어사(成州防禦使)로 오다가 뒤에 지군사(知軍事)로 하였다. 본조 태종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금 예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세조 때에 진을 두었다.
【진관】 군(郡) 5
덕천(德川)ㆍ개천(价川)ㆍ자산(慈山)ㆍ순천(順川)ㆍ상원(祥原). 현(縣) 5
양덕(陽德)ㆍ맹산(孟山)ㆍ삼등(三登)ㆍ강동(江東)ㆍ은산(殷山).【관원】 부사ㆍ교수
각 1인.【군명】 비류(沸流)ㆍ다물(多勿)ㆍ졸본부여(卒本扶餘)ㆍ강덕진(剛德鎭)ㆍ송양(松讓)ㆍ성주(城州)
【성씨】 본부 이(李)ㆍ김(金)ㆍ최(崔)ㆍ송(宋)ㆍ변(邊)ㆍ황(黃)
모두 속성(屬姓)이다. 이(李)
수안(遂安). 송(宋)
봉주(鳳州).【형승】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다.
《삼국사(三國史)》에 있다.【산천】 검학산(劍鶴山)
부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좌우의 낭떠러지가 칼 같고 학같이 생겼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회산(檜山)
부의 북쪽 70리에 있다. 석벽(石壁)의 둘레가 30리나 되는데, 그 안에 흙빛이 붉은 언덕이 펀펀하고 넓으며, 큰 시내가 그 밑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만든 성이라고 일컫는데, 1천 명의 군사를 그 안에 수용할 만하다. 백령산(白嶺山)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으며, 산속에 굴이 있다. 약수산(藥水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산 위에 연못이 있다. 향풍산(香風山)
부의 동북쪽 30리에 있는데, 가이산(加耳山)이라고도 한다. 구룡산(九龍山)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삼등현(三登縣)에도 보라. 오운산(五雲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봉두산(鳳頭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흘골산(紇骨山)
부의 서북쪽 2리에 있다. 12개의 봉우리가 오기종기 모여 있는데, 세상에서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이라 부른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강 위의 여러 봉우리는 검처럼 뾰족하고, 봉우리 앞의 강물은 쪽[藍]을 풀어 놓은 듯하네.” 하였다. 박연(博淵)
구룡산 위에 있으며, 둘레가 40척이다. 가물 때에 범의 머리를 그 속에 잠그면 감응이 있다. 비류강(沸流江)
곧 졸본천(卒本川)인데, 속칭 유거의진(遊車衣津)이라고 하며, 객관 서쪽 30보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의 오강산(吳江山)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맹산현(孟山縣)의 대모원동(大母院洞)에서 나와 부의 북쪽 30리 되는 곳에서 합류, 흘골산(紇骨山) 밑을 지날 때 산 밑에 굴 넷이 있는데, 물이 그 굴 속을 뚫고 흘러 비등(沸騰)하여 서쪽으로 나가므로 비류강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또 자산군(慈山郡)의 우가연(禹家淵)과 합하여 대동강(大洞江)으로 들어간다. ○ 고구려의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咄固)를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를 피하여 집을 나가서 남의 집의 하인이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봉상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아들여 왕위에 올리려고 조불(祖弗)ㆍ소우(蕭友) 등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다. 비류강가에 이르러 찾아보았더니, 한 사람이 그 모습은 비록 여위고 쇠약하나 거동이 보통이 아니므로 소우 등이 나아가서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재상들과 여러 신하가 의논하여 폐하고, 왕손께서 인자하시어 대업을 이을 만하므로 신들을 보내어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 “나는 야인(野人)이요, 왕손이 아니다.” 하니, 소우 등이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왕손에 대한 바람이 매우 간절하오니 의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마침내 맞이하여 돌아와서 왕위에 올렸으니 이가 곧 미천왕(美川王)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노래와 춤이 강을 가로질렀는데 지는 해는 붉구나. 풍류와 기개(氣槪)는 제공(諸公)들의 것이로구나. 뉘 능히 고당부(高唐賦)를 화답하여 이루겠느냐, 운우(雲雨)가 의연하니 무산 십이봉이네.” 하였다. 온천(溫泉)
부의 서쪽 약수산 밑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화룡(火龍)은 물을 뿜으며 땅 밑에 잠겨 있고, 작은 골짜기는 봄을 머금어 별유천(別有天)이로구나. 목욕하고 나서 몸과 마음에 티가 없으니, 무우(舞雩)에서 돌아오는 흥이 참으로 유연(悠然)하구나.” 하였다.【토산】 사(絲)ㆍ삼, 백옥(白玉)
백령산 바위굴에서 나온다. 꿀ㆍ인삼ㆍ송이ㆍ사향ㆍ잣ㆍ옻ㆍ오미자ㆍ지치[紫草]ㆍ닥종이[楮]ㆍ복령(茯苓).
【성곽】 흘골산성(紇骨山城)
강선루(降仙樓) 서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송양(松讓)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1천 명의 군사를 능히 수용할 수가 있으며, 비류강 물이 그 밑을 안고 돈다. 고려 태조 때에 돌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백 10척, 높이가 5척이며, 군창(軍倉)이 있고, 또 궁궐의 옛터가 있다.【누정】 강선루(降仙樓)
객관 서쪽 모퉁이에 있다. 비류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서쪽 언덕에는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것이 있다. ○ 이원(李原)의 시에, “술이 있으니 주천(酒泉)을 물어 무엇하랴, 푸른 강가에 잔 들고 시 읊기가 가장 마땅하네. 천 년이라 궁벽한 땅 풍연(風煙) 예스럽고, 십 리나 둘러 있는 바위에는 나무들이 푸릇푸릇. 수면(水面)이 처음 불었으니 밤 지나갔고 산 모습이 수척하네. 해 지니 벌써 가을이로구나. 문호(文豪)가 그날 벽 위에 시를 써 두었는데, 화답하려고 읊조려보다가 보니 문득 망연(惘然)하구나.” 하였다.종공(宗工)은 정몽주를 가리킨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 앞으로 돌아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하여라.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 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하였다. 평관대(平寬臺)
흘골산 남쪽에 있다.【학교】 향교
부의 동쪽 1리에 있다.【원우】 온정원(溫井院)
온천 곁에 있다. 성은원(成殷院)
부의 서쪽 55리에 있다. 보강원(保彊院)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영빈원(迎賓院)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신증』 【교량】 귀룡교(貴龍橋)
객관 앞에 있다.【불우】 용천사(龍泉寺)ㆍ안동사(安東寺)
모두 검학산(劍鶴山)에 있다. 보현사(普賢寺)
약수산에 있다. 정진사(淨進寺) 향수암(香水菴)
모두 향풍산(香風山)에 있다. 월정사(月淨寺)
오운산(五雲山)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백운산에 있다. 묘운사(妙雲寺)
학궁산(鶴宮山)에 있다. 망일사(望日寺)
봉두산(鳳頭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오봉산(五鳳山)에 있다.【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흘골산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고적】 졸본천(卒本川)
《삼국사(三國史)》에,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아들 7형제가 있어 주몽(朱蒙)과 함께 놀았는데,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그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으면서, 또한 용기가 있으니 제거하소서.’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게 하니, 주몽은 말 먹이는 꼴과 콩을 더하고 덜하여 좋은 말은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살찌게 하였더니, 왕은 늘 자기는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는 여윈 놈을 주었다.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에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잡은 것은 언제나 많았으므로 여러 왕자들이 그를 꺼리어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 낌새를 알고 타이르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너의 재주로 어디에 간들 안 되겠느냐.’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과 함께 집을 떠났다. 엄호수(淹淲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나 다리가 없는데, 뒤쫓아 오는 군사가 다가옴을 염려하여 빌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자인데, 오늘 난을 피하여 여기에 왔으나 뒤쫓는 자가 따라 잡으려 하오니 어찌하오리까.’ 하였더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주몽이 건너갈 수가 있었다.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재사(再思)ㆍ무골(武骨)ㆍ묵거(默居) 등을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큰 명령을 받고 나라를 세우려 하는데, 이 3현(賢)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하고, 함께 졸본천에 이르러 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하므로 거기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는데, 또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도 일컫는다. ○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임신하였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유리(類利)인데, 어렸을 적부터 기이한 절조(節操)가 있어 탄환(彈丸 옛날 새를 잡는데 쓰던 물건)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밖에 나가 놀다가 참새를 쏘면서 잘못하여 물 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맞혔다. 그 여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 없이 자라 이렇게 거칠다.’ 하였다. 유리는 부끄럽게 여기고 동그란 진흙덩이를 쏘아 뚫어진 물동이의 구멍을 막아 주고, 돌아와 그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니,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는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아 남쪽 땅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일으키고 왕이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떠나면서 나에게,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의 돌 위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얻은 자가 곧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했더니,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두루 찾아 보았으나 얻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기에 듣고 가서 보았더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으므로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는 일곱 모[稜]이고, 돌 위의 소나무는 기둥이로구나.’ 하고 곧 기둥 밑을 찾아서 부러진 검(劍) 한 조각을 얻었다. 드디어 옥지(屋智)ㆍ구추(勾鄒)ㆍ도조(都祖) 등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주몽을 뵙고 그 검을 올리었다. 주몽이 간직해 두었던 부러진 검을 꺼내 맞추어 보니 과연 들어맞았으므로 곧 뒤를 이을 아들로 삼았다.” 하였다.비류국(沸流國)
동명왕 주몽이 처음 졸본에 이르러, 비류수 위에 푸성귀 잎사귀가 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냥하면서 가서 찾아보았더니, 과연 비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왕 송양(松讓)이 주몽의 용모가 비범함을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외딴 해외(海外)에 있어 일찍이 군자(君子)를 보지 못하였었는데,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니,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서쪽 나라의 왕이오. 감히 군왕(君王)께 묻노니 누구의 뒤를 이었소이까.” 왕이 이르기를, “나는 신선의 후손으로서 여러 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땅이 좁아서 두 임금을 용납하기에는 부족하고, 당신은 도읍을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나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였다. 주몽이 “과인은 천재의 뒤를 이었고, 지금 왕은 신의 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 된 것이니, 만약 나에게 귀순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 하였다. 왕은 주몽이 여러 번 천손(天孫)이라고 하는 말에 속으로 의심을 품고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당신과 함께 활쏘기를 해 보고 싶소.” 하고는 사슴을 그려서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의 화살은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주몽이 옥가락지를 1백 보 밖에 걸어 놓고 쏘아 기왓장 부수듯이 깨뜨리니, 왕이 크게 놀라, 도읍을 세운 선후에 따라 부용(附庸)을 삼고자 하였다. 주몽이 궁실을 짓는데 썩은 나무로 기둥을 하여 천 년이나 묵은 것 같이 보였으므로, 왕은 마침내 감히 다투려 하지 않았다.골령(鶻嶺)
동명왕 3년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서 일어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수천 명의 사람 소리만 들리면서 토목공사를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는 흩어지고 성과 궁대(宮臺)가 이루어졌다. 해원(蟹原)
주몽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아다가 해원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주문을 읽기를,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왕의 도읍을 물속에 잠가 버리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니, 그 사슴의 슬피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어 7일 동안 큰 비가 내렸다. 송양(松讓)의 도읍이 물속에 잠기었으므로 왕은 갈대 새끼를 가로 흘리고 오리말[鴨馬]을 타고, 백성은 그 새끼를 잡았는데,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졌다.양곡(涼谷)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에게 두 왕비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라 한다. 두 왕비가 사랑 다툼을 했으므로 왕은 양곡에 동ㆍ서 두 궁을 짓고 각각 살게 하였다. 뒤에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그동안에 두 왕비가 서로 싸우며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漢) 나라의 종년으로서 어찌 그리 무례하냐.” 하였더니,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한 나라로 도망하여 버렸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몸소 뒤쫓아 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쉬면서 꾀꼬리[黃鳥]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껴지는 것이 있어 노래 부르기를,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따르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더불어 돌아갈꼬.” 하였다.【명환】 본조 윤승해(尹承解)
부에 세력을 가진 무리가 관기(官妓)를 멋대로 죽이는 일이 있으나, 전후의 사명을 받드는 자들이 결단성이 없어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윤승해가 그 주모자를 조사하여 죽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부쳤더니, 온 고을이 평안하여졌다. 신영손(辛永孫)
부사다. 『신증』 민효증(閔孝曾)
【열녀】 본조 난공(卵公)
정두언(鄭豆彦)의 아내다. 정두언이 범에게 잡혀갔는데, 난공이 도끼로 범을 죽이고 남편을 구하였다. 이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제영】 성곽은 의연한데 학은 갔다가 오리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신인(神人)의 옛 고을이 몇 봄을 지냈는고. 성곽은 의연하여 학은 갔다가 오네. 경치와 풍류는 이 세상에 보던 것이 아닌데, 구경하고 성곽을 지획(指畫)한 이는 누구이던가. 옥비녀 미인들 모시는 술자리는 두 척 배 나란하고, 채령(綵嶺)의 신선님들 줄 지은 배에 벌여 있네. 눈에 그윽한 강산은 한 폭의 그림이요, 절세[傾城]의 명기(名妓)들은 천 무더기의 비단이로다. 푸른 물결 그림자 속에는 부용막(芙蓉幕)이요, 맑은 노랫소리 가운데는 호박잔[琥珀杯]이로구나. 해는 저물어 화성(火城)이 십 리나 이어 있는데, 풍악 소리로 둘러싸여 요대(瑤臺)로 들어오네.” 하였다.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하늘이로다.
장수(張脩)의 시에, “원우(院宇)는 비록 송양(松讓)의 시대 아니지만, 강산은 오히려 마한의 때로다.” 하였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상부(上部)
읍내에 있다. 하부(下部)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서부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숭인(崇仁)
동남쪽으로 70리이다. 묵소(墨所)
동남쪽으로 60리이다. 남전(藍田)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1백 리이다. 대곡(大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60리이다. 왕을이(王乙伊)
동남쪽으로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암포(巖浦)
동쪽으로 30리이다. 사가동(史加洞)
동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80리이다. 문헌(文憲)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직동(直洞)
위와 같다. 천곡(泉谷)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와룡(臥龍)
남쪽으로 80리이다. 삼파(三坡)
동남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10리이다. 온천(溫泉)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이다. 축전(杻田)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심학(深壑)
서쪽으로 45리이다. 추탄(楸灘)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유동(柳洞)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삼기(三岐)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5리이다. 칠전(漆田)
북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1백 10리이다. 성암(城巖)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산음(山陰)
동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삭면(朔面)
북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10리이다. 봉래(蓬萊)
북쪽으로 90리이다. 필밀(必密)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10리이다. 회곶(檜串)
동북쪽으로 처음이 9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와동(瓦洞)
처음이 55리, 끝이 90리이다.【성지】 기암성(岐巖城)
북쪽으로 30리이다.【창고】 중창(中倉)
읍내에 있다. 동창
동쪽으로 50리이다. 남창
남쪽으로 90리이다. 서창
서쪽으로 40리이다. 북창
동북쪽으로 90리이다. 회창(檜倉)
위와 같다. 대곡창(大谷倉)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직동창(直洞倉)
남쪽으로 40리이다. 신창(新倉)
북쪽으로 40리이다. 삭창(朔倉)
북쪽으로 10리이다. 석창(石倉)
동북쪽으로 50리이다. 기창(岐倉)
북쪽으로 30리이다. 산창(山倉)
서쪽으로 1백 리, 자모산성(慈母山城)에 있다.【진도】 비류진(沸流津)ㆍ백현진(白峴津)ㆍ아파진(丫波津)ㆍ선래진(仙來津)ㆍ석장진(石莊津)ㆍ기창진(岐倉津).
【교량】 모두 21곳이다.
비류강 위아래 여울 다리 건너에 14처가 있다.【토산】 지치[紫草]
【사원】 기성영전(箕聖永殿)
백령산(百靈山)에 있다.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그해 현액(懸額)하였다. 기자(箕子)
평양 편에 보라. ○ 학령서원(鶴翎書院)
선조 정미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정구(鄭逑)
충주편을 보라. 조호익(曺好益)
영천편을 보라. 박 대덕(朴大德)
자는 사화(士華)요, 호는 합강(合江)이며 무안(務安) 사람이다. 벼슬은 동중추(同中樞)이며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 쌍충사(雙忠祠)
선조 기해년에 세우고 숙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정의(鄭顗)
고려 대장군 선유사(大將軍宣諭使)이며, 상장군(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최춘명(崔椿命)
해주 사람으로 최충(崔沖)의 후손이다. 고려 벼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였다.
첫댓글 양곡(涼谷), 유류기에나 나오는 량곡이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