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든 자에게 의원을 (막2:13-17절)
현대 의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은 길어지고 병든 자가 건강해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편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현대 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의학의 발전 못지않게 병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이름 모를 병이 생겨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이 도처에서 현대인을 위협합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암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암이 생겼다 하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두려워하고, 환자에게 사실을 숨기기도 하고, 생을 포기하면서 인생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후 10여 년 전에는 에이즈라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는 놀라운 병이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정상적인 사회가 마비가 올 까봐 걱정하고 경악하였습니다. 이 병은 한 때 유행하는 전염병이 아니라 남녀의 성적 문제로 확산되기 때문에 점점 무서운 속도로 방대한 지역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예방과 치료를 위하여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속수무책이요, 못 고치는 불치의 병입니다. 사람들은 이 병을 가리켜 인간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병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에이즈라는 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메르스 같은 유행병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낙타의 콧물에서 전염하는 이 병은 감기처럼 호흡만 같이 해도 전염이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순식간에 온 나라가 파탄이 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 전에 당했습니다.
메르스가 지나가고 나니까 그 다음 타자가 등장하는데 소두증이라는 남미 브라질에서 발생한 병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두 달 있으면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는데 일부 운동선수는 아예 참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모기가 전파하는 이 소두증에 걸리면 어린아이의 두뇌가 자라지 않아 머저리가 되고 저능아가 되어 평생을 바보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현대는 의학의 풍요를 누림과 동시에 병의 시달림을 받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은 생령이 되어 건강하게 태어났고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병균이 떠돌아다닌다고 해도 그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면역성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이 늙고 병들고 마르고 썩고 없어지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이 땅에는 수많은 병균과 질병이 존재합니다. 어차피 인간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병마와 싸우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함으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환난과 풍파가 엄습했기 때문에 인간은 질병의 도전에 응전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육신이 겪는 질병입니다. 이것은 병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을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병 혹은 사상적인 병입니다. 생각이 아픈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이런 질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묻지 마 살인’ 이라는 말도 나오고, 비관하고 낙심해서 자살을 하고 미쳐버립니다.
엊그제 곡성에서 일어난 투신자살도 이와 같은 현상이 빚어낸 것입니다. 젊은 공무원 지망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투신자살을 했는데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나는 잘난 것이 없다. 너무나 못났고 모자라고 부족하다.’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옥상에서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군청에서 퇴근한 공무원 위에 떨어져서 둘 다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섯 살 난 아들과 어머니 배속에 있는 자식을 두고 아버지가 어이없게도 비명에 황사를 한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적인 병입니다. 잘못된 종교에 빠져서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미신이든지, 사이비든지, 이단이든지, 폭력적이든지, 귀신을 섬기든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믿고 거기에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맹신적이 되고 맹종하고 광란합니다. 가정도 버리고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무조건 추종하다가 일생을 망치지마는 자신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을 영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합적으로 보면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로 기인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종교적으로 타락할 때 정신적인 병이 생기고, 정신적인 병이 들어올 때 육체가 병들기 시작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의 75%가 정신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자동차를 몰고 나가면 사고가 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조금 언짢은 일이 있을 때는 운전을 삼갑니다.
어떤 사람은 약국에 가서 진정제를 사 먹고 안정을 한 뒤에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신경이 산만한 상태로 운전하다가는 사고가 나고 사고가 나면 나뿐만 아니라 애꿎은 남까지 다치거나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분이 나쁜 일이 있을 때에 사람을 만나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조심합니다. 내가 아무리 감정을 잘 조절해도 내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잠12:15-16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무슨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의원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이 아프니 안과로 가고, 이빨이 아프니 치과로 갑니다.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있어 배가 아픈 사람은 내과로 가고 부인병이 있는 사람은 산부인과로 갑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내 병을 알아서 치유함을 받으려고 해당 병원을 찾아가고 담당 의사를 바로 찾아가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병의 치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경제 문제나 다른 조건들은 무시합니다.
일단 병을 고치고 보자는 식의 저돌적 성향이 있습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해 나가는 형입니다. 만사를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받을 때 자기 병의 증상과 원인과 치료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픈 것은 분명히 맞지만 의사를 찾아갈 용기가 없습니다.
먼저 겁이 나고, 의심이 가고, 억지를 부려 보기도 하고, 될 대로 되어라 하는 식으로 무작정 참습니다.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아픔을 참고 병을 키웁니다.
물론 경제적 이유도 있고 신체적 결함이나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앓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운명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자신을 인도하여 병원에 데리고 가면 마지못해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자기가 아픈 것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병색이 깊어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병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픈 줄 모르는 병은 그 어떤 병보다도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마치 암에 걸린 사람처럼 하루하루 죽어가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린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자기는 건강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대개 정신병 환자들이 그렇습니다.
정신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병자가 아니라고 우긴답니다. 자기 병을 시인하는 사람은 고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온전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나를 괴롭히는가.’ 바로 이러한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신 병원에서 어느 환자가 ‘나는 나플레옹 황제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닙니다. 옆에 있는 환자가 ‘뭐 네가 나플레옹이라고, 웃긴다. 진짜 나플레옹 황제는 나다.’ 하면서 같이 떠들고 다닙니다. 그때 다른 환자 하나가 나서서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희들을 나플레옹으로 임명했느냐.’ 그러더랍니다.
정신병 환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안하무인입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만 똑똑합니다.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내가’ 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갈등이 많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높은 곳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낮추면 화가 나고 그 화를 스스로 풀 수가 없어 마음에 병이 듭니다. 남이 나를 높여 주면 기분이 좋다가도 반대로 험담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해변에서 가르치시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시는 도중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이 레위는 바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그런데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레위를 부르심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제 1차 소명에 이은 제 2차 소명으로서 1차로 부르신 사람들이 갈릴리 해변의 어부임에 반하여 2차로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이 해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세리라고 하면 창녀와 더불어 천대와 멸시를 받는 신분이었습니다. 돈은 잘 벌고 있지만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반민족주의자, 폭행자, 탈취자, 아첨꾼 등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산 중에는 사자가 있고 거리에는 잔인한 세리가 있다.’ 라는 유대 속담이 시사하듯이 세리는 유대인들의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었고 세리와 창기는 유대 사회의 대표적인 죄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들은 비율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되었고, 회당에서는 출교를 당하여 완전히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문둥이를 사람들이 기피하듯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아예 기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늘 고민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에 잠겼던 것입니다. 마침 그 시간에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그의 눈빛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세리 마태의 신분을 바꾸어줄 수 없으며 그가 세리를 그만두고 다른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도 세리라는 죄인의 꼬리표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입니다. 한 번 변절자는 영원한 변절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리 마태의 깊은 갈등이요 고민입니다.
주님은 그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실 때에 마태는 너무나 기뻐서 저가 하던 일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아코루데이 모이’라는 이 말은 단 한 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끝까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로서의 부르심입니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 즉 사람을 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의 변화를 요구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마태가 평소 세리를 벗어나려는 고민이 없었더라면 주의 부르심에 상당히 주저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어부들은 예수를 따르다가 쉽게 자기 직업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레위는 자기의 직업을 포기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욕을 먹기는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 세리를 선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일순간에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 잔치에 자기와 함께 했던 많은 세리들과 창기들이 모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광경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합니다.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신들의 논쟁에 대답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시의 유행하던 격언으로 성육신의 목적을 단정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건강한 자’는 타인에게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하지 않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한 자를 빗댄 말입니다. 특히 의사이신 예수님의 진료와 치유 은혜를 거부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실 주님은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의 치유 사역에 자신의 전 인격을 내어놓을 수 있는 병든 자 곧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부르신 부름입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대목을 놓쳐서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죄인이지만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병든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세리와 함께 예수님도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지내는가, 비난과 질책을 퍼붓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바리새인 자신들도 병자인데 교만한 까닭에 자기가 병자인줄 모르고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여기에 또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처럼 자신이 병자인줄 알고 있는 사람과, 병자인 줄 모르는 바리새인 외에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들입니다. 저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비난도 못합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구경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세 종류의 환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주를 좇았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시간과 부르시는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 하나님의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이므로 즉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명령하시는 시간이므로 즉각적인 응답만이 은혜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즉각적이어야 하며 희생적이어야 하며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레위는 예수를 자기의 집으로 영접하고 잔치를 하였습니다.
레위의 이 같은 행동은 네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의 지금까지의 수치스러운 삶을 청산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셋째, 동료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가족과 그의 환경과 이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의 부름을 받고 밭을 갈고 있던 소를 잡아 잔치를 하고 부모와 이별했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레위는 사치와 부의 길을 버리고 가난한 길을 선택했으며 이 땅의 죄인의 길을 버리고 하늘의 사도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리 레위가 아니라 사도 마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사람들에게 첫 번째로 주신 인상은 의사입니다. 많은 환자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의원 예수, 치유자 예수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몸과 영혼과 도덕과 생활을 치료하시고 인생의 삶의 본질을 치료해 주십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현실만을 봅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환자가 수술 직전에 의사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게 돈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예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없는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주십시오. 건강 하나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 하나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이 없다면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명예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이 없다면 아무 것도 당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환자의 몸 상태,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그 사실을 그대로 볼 뿐입니다.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특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VIP 병동이라고 해서 으리으리하지만 그 병실에도 죽을 사람이 사는 법이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특실에 있는 환자나 입원할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일반실 환자나 똑 같은 환자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보실 때에 세 가지 관점에서 진단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죄와 관련해서 환자를 봅니다.
*막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병이라는 것이 죄와 관련이 있음을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병 때문에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사유함이 먼저입니다. 육신의 병을 고침 받기 전에 먼저 죄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그들의 믿음이 죄 사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병부터 고침 받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병만 고침 받고나면 죄 문제가 그대로 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 병자를 봅니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경륜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곱이 유다에게 예언했던 바로 그 실로라는 것을 증거하는데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을 지으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눈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 날 때부터 장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귀신과 마귀와 관련해서 병자를 봅니다.
*눅4:40-41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줄 앎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악마의 사슬에 매여서 부자유한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병을 하나의 현상으로, 그리고 하나의 표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표적이요, 그 속 깊은 곳에 원인이 있습니다.
실제로 의사는 환자가 어디 아프다고 하는 그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뒤에 숨겨져 있는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수고합니다. 며칠을 두고 검사하고 사진을 찍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숨겨진 원인을 찾아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자는 자기가 아픈 것만 알고 병의 원인과 깊이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문제의 원인을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서 몸이 문드러지고 가정이 절단이 나고 사회에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된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파괴되고 썩어가는 것입니까. 고통은 알고 병이 더 중해질 것은 알지만 원인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 이유를 알고 있고 처방도 알고 있습니다.
의사가 병의 원인과 과정과 진단과 처방에 대해 설명을 해줄 때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병의 원인을 내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깊은 근원적 원인을 시인해야 하며 주님의 판단을 시인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병리적으로 봅니다. 본래부터 병자라면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앓아온 병이라면 더 조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잘못 먹어서, 잘못 살아서, 어떤 이유 때문에 병리적인 현상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받아야 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이요, 그래서 이 병적인 인간상이 나온 것이라고 주님은 진단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현상, 모든 죄, 모든 고통을 다 병리적으로 보십니다.
치료해야겠다고 판단하시고, 치료받을 수 있는 병자로 보십니다. 그래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의원이신 예수님의 믿음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이 그 병에 걸립니다.
전염병을 치료하다가 전염되기도 하고 세균에 감염되기도 합니다. 삼성병원 의사가 메르스에 감염되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많은 위험 부담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다가 ‘죄인의 친구’ 라는 오명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환자는 무조건 의사를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의사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고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내 생명을 의사의 손에 맡깁니다. 그 때 의사는 환자에 대해 사명감을 다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 과정을 살펴봅니다. 먼저 병석에 누운 환자처럼 괴로워하며 세금을 징수하고 있는 마태를 그 현장에서 불러냅니다.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절망의 고통 속에서, 캄캄한 영적 죽음 속에서 그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유하십니다. 무조건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거하십니다.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인간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이제 세리 레위는 일반 백성들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 어울려 먹고 마시고 같이 즐거워합니다. 유대인의 인권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는 세리가 아닙니다. 이제는 매국노가 아니며, 패역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거룩한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구원해 주십니다. 몸만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당히 먹고 마십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질투할 만큼 레위는 대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영혼이, 그 육체가, 그 인격이, 그 삶의 전체가, 그 미래가 온전히 치료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참 좋은 의원을 만난 대단한 축복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