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도(古都), 낙양(洛陽)
삼국지의 주무대, 낙양
낙양은 2,000여년 전에는 중국을 좌지우지하던 문화, 경제, 정치의 중심지로서 모든 중국인들에게 꼭 한번 들려 보고픈 번영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제 20세기말에 떠나는 낙양 여행에서는 아쉽게도 당시의 그 화려함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대개의 중국 도시들이 그러하듯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한 모습의 중국인들과 무채색의 빌딩으로 둘러싼 도심 그리고 이제 한참 자본의 맛에 길들여
져 여기 저기 파헤쳐진 채 공사가 진행중인 작업 현장들. 중원을 호령하던 대 제국들의 흔적이라곤 아무리 찾아 봐도 보이질 않았다. 허무하게도. 그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를 나누는 분기점에 이곳 낙양을 수도로 세워졌던 9개의 제국을 기념하기 위한 구룡탑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마 너무 많은 제국들이 이 도시를 수도로 삼고자
빼앗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던 탓에 남은 유적이 없지 않았을까? 중원의 한가운데에서 4개의 강을 교통의 통로이자 방어막으로 사용했던 낙양의 비애(悲哀)이다.
볼거리 하나, 용문 석굴
이곳은 중국 3대 석굴 중의 하나로 산서성의 대동운강 석굴과 감숙성(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의 불교 문화를 자랑하는 유적 중의 하나인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넘치는 부처 조각상들이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용문 석굴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중국 남북조 시대 당시 위나라를 세웠던 효문제는 수도를 중원의 중심에 위치한 낙양으로 옮기면서 소수 민족인 자신들이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선 중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하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그 방법으로 한족의 절대 다수가 믿고 있던 불교를 숭상, 더욱 전파시킴으로써 한족의 동요를 막고자 했다. 그런 연유로 기원 후 498년부터 400여년 동안 용문 석굴은 낙양으로부터 남쪽으로 13킬로 미터 떨어진 곳을 흐르던 이수(伊水)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굴만 해도 2,100 여개, 불탑 43개, 비문 3,600 여개, 10여 만개가 넘는 조각상들로 이루어진 이 석굴은 그후 당나라의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고 한다.
1킬로 미터에 달하는 거리에 널려 있는 동굴 중에 주목해야 할 동굴은 두군데. 그중 한곳이 바로 연화동. 수많은 용문 동굴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석굴로 알려져 있는데 석굴 천장에는 부드럽게 조각된 원형의 연꽃 모양들이 있고, 정면에는 6미터 가량의 크기인 입불상과 좌우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좌우 보살상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입고 있는 옷모양이 마치 우리네의 치마, 저고리와 같은 모양이라 당시 중국과 우리와의 활발한 교역을 짐작케 해준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동굴로는 봉선사가 있다. 멀리 강 건너에서 바라다보면 동방의 비너스라 별칭을 가진 거대한 보살상이 용문 석굴군 한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봉선사의 상징인 노사나불(盧舍那佛)로 크기가 무려 17미터가 넘는 조각상이다. 특히 이 불상은 당나라 고종의 황후이자 여걸이었던 측천무후가 직접 제작을 명한 작품으로 이 여황제의 심정을 잘 파악하고 있던 당시의 봉선사 주지는 제작하던 부처의 얼굴 모델로 측천무후를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불교가 시작하다. 백마사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게 된 계기는 바로 후한의 2대 황제였던 명제가 꿈에 후광으로 빛나는 신을 보면서부터. 잠에서 깬 황제는 채음과 진경이라는 두 신하를 시켜 이 새로운 신을 알아 오도록 명을 내리고. 두 신하는 서역으로 여행을 하다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근처에서 인도의 고승 축법란과 섭마등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두 승려로부터 불교를 설파받은 명제는 사찰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기원후 68년에 지어진 백마사이다. 특히 이 백마사에는 신비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도교와의 정통성 논쟁. 불교가 이제 막 들어왔을 무렵 중국에서는 도교가 한참 부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후한의 명제가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자 도교의 추종자들은 불교를 이교라 몰아 부치면서 비난을 일삼으며 명제를 괴롭혔다. 그러자 명제는 지금의 백마사 앞마당에 불교 경전과 도교 경전을 쌓아 놓고 불을 질러버렸는데. 도교 경전은 마냥 불타버린 반면 불교 경전에 불이 붙자 금빛 용이 나와 하늘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 이후 도교는 급속히 쇠락해 가고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경전을 태웠었다고 하는 앞마당에는 이제 잡상인이 관광객들을 부르기에 바쁘고. 중국에 경전을 지고 왔다는 백마는 그저 조각상으로 남아 백마사 앞문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1,900년 역사의 백마사 경내로 들어서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초로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축법란과 섭마등 승려의 무덤. 요즘의 무덤과는 달리 작은 동산 모양으로 쌓아 올린 모습에 주변을 빙 둘러 석축을 올리고 가운데 문을 낸 모습이 이색적이다. 무덤을 지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2층으로 된 대웅전이 눈에 들어오는데 안에는 부처상과 함께 우리네 사찰 입구에 위치한 사천왕상과 비슷한 모습의 좌우 신상이 서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하지만 백마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공간은 바로 맨 마지막에 위치한 청량대. 다른 건물과는 달리 약간 높은 곳에 지어진 이곳은 원래 한무제의 여름 별장이었으나 백마사가 선 후에는 승려와 함께 황제가 경전을 공부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소림사에선 무술을 배워 보자.
낙양으로부터 소림사까지는 승용차로 두시간 거리. 이 절이 우리에게는 단순히 소림 무술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곳은 중국 불교에 있어서 없어선 안될 중요한 고찰로 달마 대사가 9년간의 면벽 수도를 통해 선종을 창시, 중국에 전파한 곳이다. 하지만 역시 소림사라는 이름때문인지 소림사 근처로 갈수록 자칭 소림 권법을 가르친다는 무술 학원들이 난립해 있는데 그 수가 무려 44개에 이르고 배우는 학생 수만도 10,000명이 넘는다. 이제 소림사로 향하기 전 들릴 곳이 있다. 소림사 위쪽에 위치한 탑림(塔林). 이곳은 1대 주지 스님부터 최근에 열반한 주지 스님까지의 육신을 모신 곳으로 1,500여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는 그 장구한 역사의 증언자로 남아 있는 모습이 경탄스럽기 그지없다. 탑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모양이 변했는데 때로는 둥근 모습의 탑으로 때로는 높거나 낮은 탑으로 변해 가면서 무려 244개의 탑이 웅장하게 서서 소림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이젠 소림사 경내로 들어가 보자. 영화 ‘소림사’에서 처럼 커다란 경내에서 연신 무술 연습을 하는 승려를 볼 수 있으려나 하는 호기심을 품고 안으로 들어서지만 그저 경내에는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과 그런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승려들만이 눈에 띨 뿐이다. 하지만 이곳 저곳 자세히 구경을 하고 있노라면 옛 승려들이 무술 연습을 하도 많이 해 바닥 돌이 닳아 버린 모습하며 달마 대사가 면벽 수도를 워낙 오래해서 생겼다는 돌에 새겨진 그림자 자국 등을 볼 수 있어 역시 소림사가 만만치 않은 곳임을 느끼게 한다. 이외에도 달마 대사의 수제자였던 혜가 대사가 머물렀다는 입설정이나 소림 권법을 수련하는 승려들의 모습을 본딴 인형이 줄지어 서 있는 십원선방 등이 있어 둘러 볼만하다.
낙양 교통 정보 안내
항공편
낙양은 사실 그리 큰 도시가 아닌지라 많은 도시와 연계된 항공편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경과 연결된 항공편이 주 2회의 항공편이 있으며 광주, 상해, 남경 등에서 도착하는 항공편도 이용할 수 있다. 시간은 북경으로부터 1시간 25분 가량, 서안으로부터 1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열차편
북경으로부터는 10시간 정도, 상해로부터 18시간 30분 가량, 서안으로부터 6시간 등이 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