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화유산답사기] <42> 창녕②
남천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무지개 모양의 만년교를 건너면 남산 호국공원이다. 영산 사람들은 이곳을 성지(聖地)라 한다. 3.1 독립 운동 때에는 영산의 24인 결사대가 독립만세를 절규한 곳이며 6.25때는 적군의 침공을 막은 최후의 보루로서 영산 사람들의 자존심이 서린 곳이다. 호국 공원 산위에는 3.1운동 기념비와 봉화대가 있고 6.25 전승탑이 있다.
만년교 입구에 있는 남산 호국공원 안내판의 전제(全霽)라는 이름이 할퀴고 지워지는 수난을 수 차례 당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임진왜란때 영산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전제에 대한 전공(戰功)은 정사(正史)와 임진록(壬辰錄)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전제에 대한 인명도 국사대사전(민중서관 발행)과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저)에도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남산 호국공원 임진왜란 충혼탑과 전승도 앞쪽에 전제를 기리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비문에는 영산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靈山縣監全霽將軍忠節事蹟碑)라고 거북등 위의 검은 비석에 새겼다.
비석이 세워진 내력으로는 1980년 10월경 영산에 살던 한 분이 영산 현지(縣誌)에서 임진왜란때 영산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전제(全霽)라는 이름을발견하고 혹시 전두환 대통령의 조상이 아닌가 하며 당시 창녕군수가 향로당을 방문했을 때 제언한 것이 계기가 돼 일이 추진되었다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며 대다수 지방민들은 비석건립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현감(縣監)에 장군(將軍)칭호를 붙인 것이나 곽재우 장군 휘하의 부장(副長)인데도 더 공을 높인 점과 임진왜란 전승도(戰勝圖)에도 곽재우 장군은 보이지 않고 전제장군만 이름을 새긴 것 등이다.
남산 호국공원에 더위를 피해 나온 허차수(80)옹이 「영산 사람들은 다 죽은 것이다」라고 한탄하던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전제 비각 뒤 남산 기슭에는 옛 영산 현감에 부임하거나 다녀간 벼슬아치들의 공적, 선정, 불망(不忘)을 새긴 비(碑) 32기가 있다. 원래 이 비석들은 영산 중학교 앞에 있던 것을 연지 못 인근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에 두게됐다. 백성들의 땀이 묻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돌아볼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한 여름 불볕 더위가 온몸을 땀으로 젖게 했지만 호국공원을 나오는 발걸음은 더위보다 더 무거웠다.
<영산 석빙고>
만년교에서 남천을 따라 600m쯤 가면 함박산 아래 사적 제169호 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가 있다. 석빙고는 원래 신라 때 얼음을 넣어 보관하던 창고이다. 영산 석빙고는 경주와 안동의 석빙고에 비해 약간 규모가 작으며 조선 중기 때 축조됐다. 석빙고는 길이 10m 높이 3.35m로 문쪽이 높고 그 반대쪽이 낮은 봉분형의 외모를 가졌다.
봉토 주변에는 자연석을 쌓아 호석(護石:주위를 둘러쌓은 돌)을 둘렀고 봉토 정상에는 두 곳의 배기(排氣)구멍이 설치된 것이다. 배기 구멍에는 갸름한 돌을 끼워 외기(外氣)와의 조절을 시도했다. 문은 지표에서 한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석계(石階:섬돌, 오르내리는 층계) 끝에 있다. 옹벽은 큼직한 돌을 쌓아 주변을 정리했고 옹벽 위로는 큼직한 긴 돌 세 개를 나란히놓아 천장을 구성하였다. 거대한 돌을 거칠게 다듬어 벽을 쌓고 홍예를 바깥쪽으로 하여 판석을 덮어 공간 전체를 차단하였고 앞뒤 벽은 그에 따라 축조되었다.
석빙고 뒤쪽 함박산 자락에는 신라 경덕왕 때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약수터가 있다. 위장병,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 마셔도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심재근 / 엣그늘 문화유산답사회 회장
첫댓글 호국공원내에 있는 전제의 비는 당시 권력에 아부한 전형적인 공무원이 저질런것입니다...제가 알기론 창녕군수보다 경남도지사가 더 적극적으로 한것으로 들었습니다....그리고 만년교의 다른이름이 원교라고도 한답니다...
석빙고 안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