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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정원사가 아닌 생활인 정원사로서 나의 하루는 퇴근 후부터 시작된다. 업무가 끝나는 오후 4시부터 식물원이 문을 닫는 6시까지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가을이 깊어가고 해가 점점 짧아지면 걸음이 더 빨라진다. 겨울에 임박해서는 처음부터 목적지를 한 곳만 정해놓고 시작해야 한다. 한겨울이 되면 추운 날씨도 문제지만 이미 너무 어두워져서 퇴근 후의 즐거운 일상도 잠시 접어야 한다. 식물 공부를 한다며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조경수들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를 확인하는 일도 즐거웠고, 계절이 바뀌면서 식물들 생태와 정원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한번 나갈 때마다 200-300컷을 찍는데, 밤늦도록 사진을 분류하며 식물과 정원을 알아가는 시간은 큰 낙이다.
식물원의 여러 곳을 두루 돌아보려 노력하지만, 자주 찾는 정원 중 하나는 아젤리아 가든(Azalea Garden)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달래, 철쭉, 영산홍, 만병초를 포함해 세계 각 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육종된 진달래속(Rhododendron sp.) 식물들을 수집해놓은 곳이다. 5월마다 3만 제곱미터(약 9천 평)의 언덕에서는 그야말로 꽃 잔치가 벌어진다. 하지만 내가 여길 자주 드나드는 이유는 꽃나무들 때문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심어놓은 여러 종류의 구근식물과 다년생 화초들, 그리고 다양한 아교목1) 정원수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특히 이곳은 옅은 그늘을 좋아하는 진달래속 식물들의 생육 환경에 맞게 높이 30미터 이상의 교목들이 하늘을 가리는데, 최근에 우리나라 조경가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는 숲 정원(Woodland Garden)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수수함이 오히려 빛났던 산수국과 미국수국. (이하 사진: 필자 제공)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난 6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카메라를 둘러메고 적막해진 아젤리아 가든을 찾았다. 교목들은 더욱 무성했고 그늘도 짙어졌다. 이즈음에는 나뭇잎 틈새로 간간이 들어온 햇빛을 의지해 수국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국(Hydrangea macrophylla)은 꽃송이가 탐스럽고 색깔도 고운 데다, 토양의 산도에 따라 붉은색에서 푸른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선보여 인기가 높다. 그런데 이날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하얀색과 옅은 청색의 꽃잎이 느슨하게 흐드러진 산수국(H. serrata)과 미국수국(H. arborescens) 군락이었다. 언덕 위 다른 초화류와 어울려 자유롭게 하늘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쪽 하늘에 낮게 깔린 태양으로부터 숲의 측면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꽃잎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늘 짙은 숲 정원에서 이 수수함은 오히려 찬란하게 보였다. 수국의 매력이 수수한 데 있다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낯설고도 신비한 모습에 한참을 머물러있었다.
빛이 있으라
색의 원천은 빛이다. 동의어로 써도 좋을 만한 이 둘을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정원을 향한 시선을 색에서 빛으로 옮겼을 때, 정원을 만드는 사람과 정원을 감상하는 사람,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수많은 ‘정원 생활자’에게 주는 의미는 작지 않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선물받은 그리스신화 속 인간들이 누렸던 풍요처럼, 정원사들이 빛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정원의 미학은 다른 차원으로 진보했다. 정원이 빛을 품기 시작하면서 정원 자체는 물론 각각의 식물들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었고,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넘어 하루에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주의 정원이 큰 흐름을 만들면서 빛에 대한 고려가 깊어졌고, 이는 식물 선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그라스(grass)류 식물들이다. 그라스류는 우리에게 친숙한 벼, 강아지풀, 억새 등 벼과(Poaceae)나 사초과(Cyperaceae)에 속한 외떡잎식물을 통칭한다. 다양한 색상과 질감뿐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세련된 자태로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자연주의 정원의 흐름을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그라스류는 빛을 담아내는 데 탁월하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분위기는 물론,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태양 광선의 미묘한 차이까지 받아낸다. 정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를 역동성이라 표현하는데, 정원의 미학적 요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처럼 그라스류는 정원의 역동성에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이를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표현해낸다. 식물에 내재된 미학적·기능적·생태적 가치를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돕는 과정을 식물원에서는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한다. 그라스류는 정원사의 역할 없이 스스로 해석 능력을 가진 듯하다. 거꾸로, 전문 정원가들 중 그라스를 통해서 정원의 역동성에 대한 미학적 감수성을 키워온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핑크뮬리 등 다양한 그라스류로 조성된 뉴욕식물원의 한 정원. 우리나라에서 핑크뮬리는 생태계 교란 식물로 분류되어 퇴출 위기에 놓였 다. 넓은 면적에 핑크뮬리 한 종만 식재하여 규모의 경쟁을 부추긴 데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식재 디자인 부재의 단적인 사례이다.
정원사들이 정원에서 ‘빛이 있으라’ 선언하기 시작하면서, 즉 빛이 불러일으키는 역동성에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정원과 식물의 진면목에 눈뜨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정원에 내재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놓쳤던 이유는 정원(庭園)을 고요한 장소[靜園] 또는 고정된 장소[定園]로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의식만 살아있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하듯이, 식물로 가득한 정원을 정적이고 고정된 곳으로, 또 그래야만 하는 장소로 생각해왔다. 제국의 정원들이 풍기는 엄격함과 질서 속에서 정원의 개념이 형성되어 왔다면, 그 인식 속에는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진 우리의 실존이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허함과 흑암이 지배했던 태초 이전의 혼돈을 누구도 역동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빛이 있으라’는 선언으로 시작된 창조의 서사는 역동성 그 자체였고, 창조주는 그 아름다움을 흡족해했다. 생명의 질서와 자유로운 의지 속에서 변화와 성장과 번성은 창조주가 부여한 가장 큰 축복이었다. 고요하고 정적이었던 정원이 자연을 닮아가면서 비로소 그곳에도 빛이 임했고, 태초의 축복이 내려졌다. 그 결과 정원의 미학적·생태적·기능적 가치는 경제적인 지표로 가늠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
우리의 교회들은 충분히 역동적인가. 충분히 자유롭고 아름다운가. 진리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많은 질문과 회의(懷疑)와 토론이 용납되는가. 그런 교회가 있다면 일단 무척 어수선할 것이다. 제국들의 정원처럼 엄격하고 절제된 상태를 ‘경건’으로 인식해왔던 종교 문화 속에서 이런 어수선함은 매우 부담스럽다. 자연주의 정원을 처음 본 사람들은 정원이 아니라 야생의 초원 같다고 말한다. 어수선하다고 한다. 어수선함은 역동성이 주는 첫인상이다.
첫인상이 대단히 어수선했던 서울 명동의 조그만 교회를 생각한다. 첫인상뿐 아니라 출석했던 기간 내내 그랬다. 그곳을 떠나온 지 10여 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그 어수선함을 무척 그리워한다. 어수선함 속에서 참여와 이끎이 조화를 이루었던, 계시와 토론이 통합되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교회들이 제도를 강화하고 체계를 세우는 데 힘을 쏟느라 본질을 향한 집중력을 잃어가는 동안, 이 작고 어수선한 교회는 질문과 대답과 성찰을 통해 나와 신의 관계, 성도 간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성경을 보는 우리의 인식과 관점 속에 어떤 왜곡과 오류가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는 서울의 빌딩 숲, 어두운 그늘 속에 숨어있는 영혼들을 찾아 나선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던 아젤리아 가든 수국들처럼, 소외된 영혼들을 그렇게 빛나게 할 모양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지난해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미국에 나와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새로 개장한 정원과 식물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좋은 계절에 갔다면 고국의 기화요초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텐데, 바쁜 전시 기간을 피해 두 주간 휴가를 겨우 받아낸 때가 하필 11월이었다. 주된 관심사가 수목이었으니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의 수형(樹形)을 관찰하기에는 오히려 낫겠다며 어설피 위로하던 차였다. 일정을 쪼개 여러 곳의 공공정원과 수목원을 다녔다. 중요한 만남들도 주로 그런 곳에서 이루어졌다. 시간을 아끼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나도, 지인들도 무척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출국 전날에도 두 친구와 서울식물원을 찾았다. 둘은 정원사의 가이드로 식물원을 둘러본다고 감격스러워했고, 신이 난 나는 입방정이 잦아졌다. 그러다 사고를 냈다. “정원은 11월이 제일 아름다워요.” 이 말을 어떻게 수습할까, 이유를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머릿속이 분주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늦가을의 깊고 풍부한 빛깔을 담아낸 작가정원들과 노랗게 물든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던 호수 변이 대신 답이 되어주었다. 돌아보니 이번에 둘러봤던 곳들이 다 아름다웠다. 강바람에 가늘게 떨리던 선유도 수생식물원 수면 위에 비친 자작나무, 경북 영천 임고서원 흙담을 배경으로 빛나던 단풍, 잔잔한 강물에 잠긴 노을 속 실루엣이 아름다웠던 성주 성밖숲 왕버들, 신도시 고층 아파트 수직선과 조화를 이루던 국립세종수목원 대나무…. 꽃 한 송이 없는 그 장면들은 왜 그렇게 나의 감각과 의식 깊숙이 파고들었을까. 모두 빛을 품은 장면들이었다.
11월은 색이 죽고 빛이 사는 계절이다. 색은 식물의 투쟁이다. 벌과 나비와 새를 불러들이기 위한 몸부림이다. 후세를 남기기 위한 처절함은 초라한 갈색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그때 비로소 식물들은 빛으로 자신을 채울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빛난다. 실제로 최근 정원가들은 갈색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칙칙한 색상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준 인물은 자연주의 정원의 대가 피트 아우돌프이다. 그의 활동 이후로 갈색은 자연주의 정원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색은 식물의 투쟁이다. 벌과 나비와 새를 불러들이기 위한 몸부림이다. 후세를 남기기 위한 처절함은 초라한 갈색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그때 비로소 식물들은 빛으로 자신을 채울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빛난다.
갈색이 빛났던 11월의 선유도공원
죽음의 색에서 빛을 인식하고 그걸 아름답다고 찬미하는 일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러나 죽는 게 곧 사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구원의 언어만큼은 아니다. 변화산에서 빛나던 모습보다 상하고 찢겨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에서 더 큰 영광을 보는 일만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가 죽어간다고 말한다. 교회는 죽지 않는다. 화려했던, 색에 의지했던, 높아지려 몸부림쳤던 그 허무가 무너지는 중이다. 죽은 듯한 무기력 속에서, 갈색의 초라함 속에서 우리가 놓쳤던 진리의 빛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곧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선언했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아닐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봄마다 북미의 숲을 파스텔 톤으로 곱게 물들이는 주역은 단연 단풍이다. 앙증맞은 아기 손바닥을 닮은 우리나라 단풍과는 많이 다르지만, 계통상 단풍나무속(Acer sp.)의 가까운 친척들로서, 미국에서는 메이플(maple)이라 부르는 덩치 큰 교목들이다. 붉은 꽃눈이 아름다운 참꽃단풍(A. rubrum), 메이플 시럽 원료를 제공하는 설탕단풍(A. saccharum), 그리고 유럽에서 건너와 토착화된 노르웨이단풍(A. platanoides)이 주종을 이룬다. 4월 중순경 먼저 참꽃단풍이 빨간 꽃망울로 숲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면, 설탕단풍의 연한 주황색 꽃 무리가 뒤를 잇는다. 노르웨이단풍은 노랑에서 라임그린에 가까운 밝은 꽃과 잎을 내며 연둣빛으로 바탕을 채운다. 봄마다 펼쳐지는 장관의 주인공들은 사실 손톱만 한 작은 꽃들이다. 꽃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이 작은 꽃들이 봄날의 밝은 햇살을 받아 드넓은 숲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의 주인공은 단풍이라지만, 나는 빛을 머금은 봄날의 메이플 꽃망울에 더 매료된다.
이른 봄 햇살에 빛나는 참꽃단풍 꽃
빨강, 노랑, 파랑의 물감을 섞으면 물은 점점 탁해지다가 결국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빛의 삼원색으로 알려진 색들을 조명으로 섞으면 투명에 가까워진다. 북미의 봄을 담당하는 세 종 단풍들이 그렇게 일한다. 자연주의 정원에서도 빛을 머금어 빛나는 식물들은 자기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다른 식물들과 어울린다. 겹칠수록 더 밝아진다. 식물 간 경계가 희미해진다. 정원은 조화롭고 역동적으로 변한다. 색깔로 멋을 내던 예전 방식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 때문에 정원디자인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색상을 빛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데 많은 정원가들이 공감하고 있다. 색상환에서 맞은편과 짝을 이루는 관계인 보색(補色)도 대립과 갈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색은 문자 그대로 보완 관계이다. 보색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과정은 시각적으로 긴장과 갈등을 동반하지만 시신경을 타고 우리 의식 속에서 인식되었을 때 심리적으로는 매우 조화롭다는 점을 발견한다.
누군가 소금의 역할은 짠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제맛을 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타당하게 들렸다. 소금이 적절하게 들어가면 짠맛도, 비릿한 재료 맛도 아닌 새로운 맛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소금은 조미료(調味料)보다는 조미료(造味料)에 가깝다. 빛도 그렇다. 빛 자체는 너무 밝아서 쳐다볼 수도 없고, 색도 없고, 눈에 고통을 줄 뿐이다. 그런데 그 빛이 대지를 비추면 모든 사물이 본연의 색깔을 낸다.
미국 정원사들이 하얀 개나리를 본 적 있냐며 데려간 곳이 이 꽃나무 앞이다. 우리나라 특산종을 타국의 수목원에서 만나는 감정은 특별하다. 필자가 인턴으로 근무했던 플랜팅 필즈 수목원의 미선나무(Abeliophyllum distichum)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미국에서 는 실제로 하얀 개나리(white forsythia)라고 부른다.
빛을 포용한 정원 같은 교회를 그려본다. 각각의 성도가 제 빛깔을 내도록 인생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는 곳이 있을까. 각각의 성도가 제도상 직분을 넘어 부르심과 은사에 기반해 교회의 머리 앞에 서는 교회가 있을까. 정답이 정해진 듯 획일적인 성경 해석, 소비적이고 수동적인 봉사자 모습으로 고착된 성도의 역할, 세상을 그대로 닮은 계층구조 대신에, 더 다양하고, 더 어수선하고, 더 빛나는 공동체가 있을까. 화려한 건물로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지역을 빛나게 하는 조그만 동네 교회가 있을까. 나의 사진첩에는 정원의 빛을 주제로 한 사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빛을 머금은 정원에서 포용과 조화의 묘미를 경험한다. 하나 됨의 원리를 배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했을 때, 빛을 창조하고 스스로 빛이라 칭했던 절대자의 속내에는 어떤 기대가 있었을까. 모이면 밝아지는 삶, 남을 빛나게 하는 삶, 빛으로 수렴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더 탐구하고 싶어진다.
■ 주
1) 아교목(亞喬木)은 개나리, 진달래 등 키 작은 덤불나무를 가리키는 관목과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의 교목 사이의 중간 크기 나무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