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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토론 내용
*지정 발표자
*신현식 (배정 시간 : 15분)
김정실 : 투박한 면장갑/하룻밤
임정희 : 터널
김미숙 : 반쪽 자유
*성병조(배정시간 15분)
권화송 : 말
노덕경: 동량지재
정영호 : 헬로우 미서방
*김은주(배정시간 : 15분)
노경애 : 등굽은 나무
신성애 : 가족
우순자 : 궤짝
*이미경(배정시간 : 10분)
장나영 : 신
백금태 : 포옹
추가 : 홍억선
김종활 / 잘 갔습니다
최경자 : 고명
권화송 : 부부의 도
*정리 : 홍억선(배정 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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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작품)
투박한 면 장갑 / 김정실
인간이란 자기 보호 본능이 있는 것이다. 대설(大雪)인데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청 캐스터의 소리가 들려온다. 오후에는 경북북부 산간지방은 눈(雪)이 내린다고 한다. 무언지 모르게 스산하게 추위를 느낀다.
목도리를 챙기고 장갑도 챙기려고 서랍장을 열었다. 여러 개의 장갑 옆에 둥그렇게 뭉쳐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집어서 펴보는 순간 아, 그때 그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따듯함이 묻어났다.
옥천 정지용 문학관 문학기행 가는 날이다. 나는 K임과 자리를 같이했다. 출발하기 전 이런 저런 이야기 중 하루 나들이 길에 준비한 소지품들을 서로 주어 섬겼다. 그녀는 모자에 파라솔까지 아주 알뜰하게 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을 두 사람 다 챙기지 못한 것을 알았다. 찜찜한 마음인데 그녀가 휴게소에서 사면된다고 했다.
첫 휴게소, 회원들은 각자 자기 볼일로 움직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사들고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먹는 것 일색일 뿐 우리가 찾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의 아쉬운 마음은 같았는지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식당과 편의점 밖의 주차장은 무척 소란스럽고 시끄러웠다. 가요테이프를 파는 아저씨가 틀어놓은 최신노래가 귀청을 멍멍하게 만들었다. 대형트럭 만물장수 스피커의 노래 소리도 뒤질세라 사람들의 말소리를 삼키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찾는 것은 없었다. 여러 종류의 공구들을 파는 트럭 앞을 지나가다 그녀가 여기 있는지 모르니 물어보자고 했다. 나는 없다고 단정하면서 그녀의 옷자락을 끌었다. 끌고 당기고을 몇 차례 어정쩡한 자세로 공구 트럭 앞에 섰다. 키 큰 공구 주인은 가로로 머리를 흔들었다. 어떤 말도 없이 돌아서 우리는 걸음을 빨리 하는데 누가 부른다고 지나가는 사람이 알려준다. 뒤 돌아보았다. 저만치 서 있는 키 큰 공구 아저씨가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니겠지 하고 돌아서는데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도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장갑 있소.” 그는 당신네들이 찾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 하면서 투박한 면(綿)장갑을 던지듯 뚝 내어놓았다.
결혼식장에서 주례선생님이나 신랑 신부가 예의로 끼는 면(綿)올이 곱고 하얀 흰 장갑이 아닌,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투박한 면장갑 이었다. 나는 그냥 빙긋 웃고 돌아서려는데 그녀는 이게 더 탄탄하며 좋다고 하면서 집어 들었다. 값을 묻기도 전에 그는 “그냥 가지고 가시오.” 너무 뜻밖이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별 것 아니니 그냥 가지고 가시오.”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면서 차에 올랐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보면서 참 도탑고 좋다고 했다. 나도 끼어 보았다. 투박함 때문에 모양은 없었으나 도탑고 톡톡함이 올 고운 장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면(綿)의 투박함이 편안하게 그대로 전해졌다.
왜 그냥 주었는지 하는 궁금한 마음이 일어 “참, 이상하다고.”했다. 그녀는 베실베실 웃으면서 그대가 좋아 보여서겠지요 했다. 서로가 뜬금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보시(普施)를 한 것이라고 했다. 복을 받는 사람도 기쁘지만 복을 주는 사람은 더 기쁜 법이라고 불심의 교리를 펼치는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복을 주고 복을 받았다. 어째든 들어서도 기분이 좋아지었고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었다. 그래서 일까, 그 날의 문학기행은 차멀미 없이 마음과 몸이 한 것 즐거웠다.
돌아와 그 작은 나눔과 베풂이 넉넉하게 전해지는 따뜻함을 배우기 위해 신발장 서랍이 아닌 장롱 서랍에 넣어두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별일이 아닌 일에도 항상 머리를 굴리며 실과 득을 찾는 세태이다. 더구나 치열한 삶의 터전인 관광지에서. 새삼 그 때의 따뜻함과 넉넉함이 전해지면서 실천 없는 나의 얄팍한 마음이 부끄러워지었다.
나눔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지 잘 알고는 있다. 다만 작고 별것 아니니 남이 흉볼 것 같아서하는 마음이 들어 선 듯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면 이런 저런 핑계로 실천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많이 내어놓고 나를 내세우려는 마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모든 것은 사람들이 언제나 무엇이든지 자기 잣대로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언제나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럼없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나눔이고 사랑일 것이다.
면장갑을 끼고 다시 손바닥을 마주쳐 보았다. 투박한 울림이 서서히 펴지면서 넉넉함과 따뜻함이 새롭게 전해진다. 그 키 큰 공구 장수는 오늘도 어디선가 말없이 실천으로 나눔을 베풀고 있지 않을까. 한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눔의 따뜻함과 훈훈함의 기쁜 소리가 들려 오는가하면 동참의 소리도 들려온다.
이 천년 전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 5개로 오천 명이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정해년 새해에는 오병이어의 작은 나눔과 베풂이 넉넉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눔과 실천은 지극히 평범한 대서 배우고 터득하는가 보다.
하룻밤 /김정실
전라남도 장성군 백암 관광호텔의 밤은 가을의 정취를 물신 품어 내면서 고요에 젖어있다. J선생님은 늦은 밤 저녁기도를 끝내신 후 피곤하신 지 자리에 들자말자 간간이 엷게 코를 고시면서 주무신다.
젖 먹은 힘을 다해 車멀미를 참어 내었는데도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또렷 해지고 있다.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 세미나에서 들었던 J선생님의「표현에 대하여」와 O선생님의 「書頭의 중요성」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 쪽 넘기는 소리에 J선생님이 돌아눕는다.
난방을 넉넉하게 틀어주어서인지 넓은 방안 공기가 무척 덥게 느껴졌다. 도레미 창문을 앞으로 당기고 안 창문을 열고 다시 마지막 창문을 열었다. 방충망 창으로 한밤의 바람이 쏴하고 몰려들어 왔다. 머릿속에서부터 발끝까지 새로운 氣를 받는 느낌을 느끼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검푸른 밤바다 같이 깊고 높았다.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별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별들은 풀 숲 벌레 소리들에 리듬을 맞추어서 빤짝 빤짝 빛을 내고 있었다. 순간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방안과 창밖을 다시 흩어 보았다. 틀림없이 낯선 곳이었다. 가족과 일가친척이 아닌 사람과 한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를 그냥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놓아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자리에 소리를 죽여 가며 누웠다. 옆자리에 누워서 뒤척이는 선생님을 보았다. 문득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인연의 겁(劫)’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수 천 수 만 종류의 겁을 만난다고 했다. 우리들이 흔히 잘 사용하는 말. ‘옷깃 한번만 스쳐도 인연이다’. 이 말은 전생에서 500겁을 거처서야 이루어지는 인연이라고 했다. 이러니 나는 오늘 하루에 그 많은 겁 중에 몇 개의 겁으로 몇 개의 인연을 이루었는가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살아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고 서로의 부디 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J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한없이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이었다. 가을 들어서서 1박 2일「창작수필 문인회」「문학세미나 및 출판 기념회」에 함께 길 떠나자고 했다. 여러 가지 힘든 일과 마음 아픈 생각 때문에 망설임이 들었다. 또한 나의 버스 여행의 어려움도 한몫을 했다.
나는 촌스럽게 아직까지도 장거리 버스만 타면 심한 車멀미를 한다. 어떤 때는 뱃속의 노란 물까지 뱉어내게 만든다. 그 지경에서 더욱이 잠자리까지 바뀌면...... 이 때문에 못 가겠다는 전화를 낼까 말까를 하루에 몇 번식 반복하면서 더위와 싸웠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따뜻함이 전해졌기에 “예”라는 답을 전했다. 이 때 벌써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 인연 즉 6천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선생님의 숨소리가 낮아지었다 높아졌다한다. 천장에는 점심시간부터 합류해 소쇄원의 가사문학관을 관람하고 장성군의 홍길동 생가를 거처, 친교의 밤이 끝날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한다. 내일 다시 그들과 함께 메타세퀘아 가로수 길을 지나서 대나무 골 테마공원을 돌아보고 난 후, 운장산 계곡과 무릉계곡 가을단풍 경치를 마지막으로 금산 I. C.에서 그들과 작별을 한다.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맞잡음의 인연과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는 인연, 이 두 개의 인연의 겁을 합치면 6천겁의 인연이 벌써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거기에다 하룻밤 한 집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함께 보내는 3천겁의 인연까지 더한다면, 우연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들은 이 엄청난 겁의 인연을 알까하는 마음이 일었다.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라는 것은, 곧 인간세계의 4억3천2백 만년을 1겁이라고 말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숫자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만남을 이루어왔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이 이상하게 와 닿았다. 생활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 또한 속상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럴 때면 미워지는 사람도 생기고 싫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겁으로 이어진다면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새벽이 뿌연 안개를 밀어내면서 아침을 열고 있다. 이방 저 방에서 사람들이 서둘러 나서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온다. J선생님과 나도 짐을 챙겨 서둘려 방을 나섰다. 모두 합치면 9천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번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
한밤을 뜬눈으로 보내어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 끝내 심한 車멀미로 J선생님을 신경 쓰이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인연이 있었기에 꼭 한번은 함께 치러야 할 겁인 줄 어찌 알았겠나.
울렁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선생님의 말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려온다.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앞 의자에 기대면서도, 내일 나는 다시 어떤 누구와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궁금함이 울렁거림과 함께 일었다.
터널/임정희
여름 바다로 향했다. 고속도로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터널 속으로 빨려든다. 2차선 천장에 두 줄로 늘어선 전등불빛이 허공으로 뻗은 레일처럼 나와 함께 평행선으로 달린다.
얼마 후쯤에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보면 분명히 미래로 가고 있다. 왼쪽 차선으로 달리는 머리 위의 불빛은 현재의 길이요 오른쪽 차선 위의 불빛은 근래로 향하는 과거의 길이다. 동시에 두 시공을 넘나드는 타이머신을 탄 듯 머릿속은 광속에 휩싸인다.
80년대 초 에어컨도 없는 포니2를 타고 동해안으로 자주 여행을 즐겼다. 창문을 활짝 내리고 달리면서 아스팔트의 달궈진 복사열을 그대로 들이킨 셈이다. 연신 부채질을 했지만 아이들을 껴안은 차 속은 찜통이었다. 울산 바다에서부터 포항, 울진, 강릉과 주문진을 경유해 군사분계선 너머 자유의 집까지 동해안 도로를 타고 누볐다.
다니다 교통체증에 걸리면 후끈 달아오른 차도 복판에 억류된 채 비지땀을 흘리며 견뎠다. 그런 와중에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보고 감탄했고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에게 손 저어 환호했다. 민박을 구하지 못하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텐트 속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다. 움직일 때마다 바리바리 고생을 사서 하였건만 휴가였다는 것만으로 뿌듯하였으니 젊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으리라.
가장의 나이가 쉰을 훌쩍 뛰어넘자 아이들도 제 혼자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성큼 자랐다. 이제 지들만의 세계가 있기에 부모와 함께 여행하려 하지 않아 부부만의 나들이가 되었다. 신혼 초부터 즐겨오던 낚시를 중년이 넘자 약해진 건강을 보살핀다며 산행으로 바꾸었다. 또 생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차 기종도 몇 차례 바뀌었고 집도 여러 번 옮겨 다니게 되었다. 어두운 터널을 여러 개 지나는 동안 성향이 바뀌어 바닷물에 몸을 적셔본지 오래 되었다. 그 성향 중의 하나는 텐트를 치고 걷는 일과 수영 후 소금기를 헹궈야하는 것이 귀찮아 모텔투숙이나 파도구경만 했던 나태였다. 오늘은 그 귀찮음을 이겨보고자 작정하고 바닷가를 찾았다.
해변의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수욕장을 향하여 모래밭에 들어섰다. 모래는 삶의 매운 맛처럼 무척 뜨거웠다. 맨발로 물가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쳐진 천막 그늘에 뛰어들어 발을 식혀가며 달려야 했다.
원색의 비치파라솔이 텐트와 함께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향해 넘실넘실 진을 치고 있다.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물가에 앉은 사람들을 비집고 물에 들어섰다. 바닷물은 삶의 배신처럼 몹시 차가웠다. 놀라 멈춰 선 발바닥 밑에서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가 사람사이에서 무너지는 신뢰 같다. 모래가 스르르 빠져나간 자리에 움푹 구릉이 생긴다. 순간 몸이 움찔하여 얼른 중심을 잡는다. 생의 전선으로 발을 들여놓듯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물이 다리부터 점점 상체를 향하여 목까지 넘쳐 오르자 팔과 다리를 휘저어 헤엄을 쳤다.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반응하게 되는 당연한 몸부림이다. 무심코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 파도를 거슬러 바다 쪽으로 헤엄쳐갔다.
“나가세요, 그리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는 적당한 한계라는 선이 있다. 돌아보니 검정 고무보트에 앉은 구조요원이 해수욕장의 질서를 세우느라 연신 호각을 불어대고 있다. 그 옆에 하얀 스티로폼 부표들이 이쪽과 저 쪽의 경계를 지으며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둥근 스티로폼 너머에는 차분한 감청 빛 바닷물이 넘실댄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물가 쪽을 바라보니 물속에 모래가 일어나 물이 온통 벌겋다. 흡사 어지러운 세상의 모습이다. 물기 맺힌 수경을 당겨 물모자 위로 들어 올리고 물속에 우두커니 섰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을 바라본다. 비로소 저런 곳에서 비바람의 고초를 겪으면서 아등바등 살아내는 것이 젊음이란 것이구나 싶다.
다시 그 터널 속으로 빨려들었다. 여전히 천장의 한쪽 불빛은 몇 시간 전의 바닷가로 달려가는 길이고, 현재 달리고 있는 차선 위의 불빛은 바다라는 우주에서 집이라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다. 차창 앞으로 저 멀리 보이던 작은 출구가 점점 커진다. 출구는 수 억 광년 저 쪽에서 달려온 별 빛보다 수억 배나 밝은 한 덩어리의 빛으로 다가든다. 순식간에 반원형 액자 속에서 초목 우거진 풍경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 대자연 속에 내 몸이 풀쩍 뛰어든다 싶더니 품 넓은 하늘이 훤히 열렸다. 광명천지가 따로 없다.
사람이 여행 중에 고속도로에서 터널을 지나가게 되는 것처럼 한 생을 살면서 어두운 터널을 종종 지나가게 된다. 생각해 보면 흔적으로 남은 과거도 한순간에 이루어졌고 다가올 미래에도 한순간에 도착한다. 내가 원했던 미래든 아니든 호흡도 고르지 못한 채 현재에게 자리를 내주고 곧바로 과거로 내몰린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덩어리로 굴러가는 찰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현실에서 부딪히는 절망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침잠했다.
삼복더위를 참지 못해 헐떡이는 육체처럼 불의 앞에 분노하고 미움으로 속을 끓였다. 때로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감내해야 하는 작은 일들이 억압 같아서 일탈을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섣부른 사람이라 터널처럼 짧은 시간에 지나가는 고통을 삶의 한순간이라 여기지 못하고 아직도 버둥거리기만 한다. 삶의 모난 구석을 아름답게 껴안는 일에 수양이 덜된 탓이리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올 때의 환희와 같은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노정에 있는 이 터널을 비틀거릴지라도 목적지까지 바로 걸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 05.08.15
반쪽 자유 /김미숙
정해년(丁亥年)이다. 이제 큰아이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상고머리와 교복으로 얼룩졌던 중학교 시절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삼 년 동안 무탈하게 모범생으로 잘 견디어 준 큰아이가 대견스럽고 또 고맙기도 하다.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는 젊은 혈기에 무던히 참고 지내느라 얼마나 답답하고 숨이 막혔을까 생각하면 두 눈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용케도 잘 버티었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나의 중학교 시절도 단발머리와 교복으로 규제를 받았던 상처가 남아있다. 몰지각한 교사들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어 내야만 했던 그 시절이 고스란히 기억의 저편에 저장되어 있다. 곱슬머리였던 나는 귀밑까지 매정하게 자른 단발머리가 너무도 싫었다. 머리를 감고 나면 항상 머릿결이 바깥쪽으로 뒤집어져 속이 상했다. 그렇지만 산골에서 가난한 여중생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학교의 규율에 따르는 모범생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구속이었고 감성이 한창 자라는 청소년에게 지옥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께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모범생으로 살아야만 했다.
우리들은 자유가 그리웠고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정학을 당하거나 아니면 퇴학을 맞아야 했다.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의 흉이 되는 일이었다. 물론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우리는 자유다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 <공공의 적2>에서 ‘강철중’이라는 강력계 형사의 학창시절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또,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보여주는, 모범생이지만 가난한 한 여학생의 처절한 사투를 보면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가진 자에게만 자유가 국한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물질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진실한 마음과 인격까지도 무참하게 짓밟힌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다. 1983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교복과 두발의 자유화’ 물결이 서서히 일렁이던 시절이었다. 산골 출신인 나는 대구라는 대도시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자취생활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머잖아 시집을 갈 운명으로부터 도망쳤던 여고생에게 날아온 자유는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큰 꿈을 가지고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루하루가 그리움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담임을 찾아오는 도시의 부모들과 나는 비교가 되었고, 서문시장의 난전에서 사 입은 일이천 원짜리 옷들은 넉넉한 집안의 아이들이 입고 오는 값비싼 옷들 틈에서 주눅이 들었다. 담임은 성실한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나의 꿈과 희망은 옅어졌다. 빈(貧)티가 흐르는 나로서는 차라리 교복을 입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소망했던 ‘머리와 교복의 자율화’ 는 오히려 나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다. 자유란,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진정한 자유가 되는 것이다. 표면상의 자유는 내면적 자유를 따르지 못하기에 오히려 고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진리를 망각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자유만을 좇다보면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2007년, 민주화 20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칭 선진국이라 말하면서도 현실은 암울할 뿐이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다시 청소년들은 교복과 두발의 규제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내 자식들이 이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두발의 자유화가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은 모른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의 도정(道政)에 선 지 올해로 20주년이 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과연 2007년을 두고 ‘민주화 20주년의 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능, 내신, 논술로 이어지는 ‘죽음의 트라이앵글’ 에 갇혀 숨쉬기조차 버거운 아이들이 가엾다.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부모의 가슴은 또 얼마나 쓰리겠는가. 우리의 자녀들이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세월은 흘렀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의 실태는 진정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더욱이 1997년 IMF 이후 우리는 경제의 파탄 속에서 희망을 잃었고, 가정이 해체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는가. 오직 ‘살아남는 법’을 하루에도 수없이 세뇌시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된다.
이 땅에서 정의 사회는 실종된 지 오래되었다. 20년 민주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 자유는 내 마음 속에 침잠해 있을 뿐, 세월만 무상하구나.
‘씨도둑은 못 한다’고 했던가. 남편을 쏙 빼닮아 이마의 중앙에 소용돌이가 있는 큰아이는, 이발을 할 때마다 가마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심하다. 웬만한 미용사들도 두 손을 들고 마는 부자(父子). 더구나, 요즘 신학기를 맞아 명품 교복이 서민들의 마음을 또 한 번 울리고 있다. 교복 한 벌에 칠십만 원이라니.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서민들의 애착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 마음이 시리다.
말 /권화송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동네 북’이 돼 있다고 하면서 바꾸면 좋은데 이제는 늦었다고 했다. 바꾼다는 것을 국민은 말하는 스타일이라고 안다.
자신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최하위권에 이르렀고 여당마저도 등 돌려 사면초가가 된 원인이 막말과 비속어를 여과 없이 마구 토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도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정치를 한다” 면서 “그 동안 참아 왔지만 앞으로는 할 말 다할 것이다”라고 했다.
집권 4년 동안에 뱉아낸 말만으로도 신문의 칼럼에 오른 횟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아마 말로써 말이 많은 지도자라는 오명을 기어코 기네스북에라도 올려서 역사에 길이 남길 모양이다.
공개석상에서 ‘깽판쳐도 괜찮다’, ‘못해먹겠다.’, ‘이제는 막 하자는거냐’, ‘한국이 개판이구나’, ‘맞좀 볼래’, ‘어디서 굴러 들어온 놈’, ‘별 달고 거들먹대고’,-----그 많은 어록을 음미해보면 우리 국민의 평균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막말이다.말은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나타내 보이므로 대통령이 함부로 쓰는 비속어는 국민들로하여금 조소를 머금게 하고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양 속담에 ‘자신을 파멸시키는 데는 말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발언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군주는 신하의 마음을 잃는다’고 한다. 두 말씀이 다 노대통령에게 바로 맞아 떨어지는 예가 된다.
‘막가파 식’ 막말을 절제없이 내뱉는 사람은 무슨 영웅심리 같은 호탕한 기분에 젖는 통쾌감 같은 것을 느낄 터이라 그대로 토해내지 않으면 입안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수양을 한다 해도 하루 아침에 쉽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다.
말 때문에 말이 많아 다툼이 잦다가 말이 없을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정에서도 있는 일이다.
시골 마을에 효부상을 받은 중년 부인이 있었다. 이 분이 효부가 된 것은 우여곡절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부인이 젊었을 때는 고부 간에 말다툼이 잦아서 마을에서 손까락질 받는 문제 있는 며느리였다. 가탈스럽고 수선을 떠는 시어머니는 입이 신중치 못하였다. 그런 시어머니의 말을 그냥 참고 넘어가지 못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 말끝에 꼭꼭 토를 달았다. 심심해서 이죽거린 시모의 말이 제 속을 긁는 소리로 알고 대받았다. 끗내 오가는 입정이 사나워져 싸우는 소리가 담너머까지 들렸다. 그래서 동네에서 말많은 집이 되었는데 시모가 환갑을 지나서는 말 못하는 치매에 걸렸다. 이때부터 그 집안에는 정적과 같은 깊은 평화가 찾아 오게 되었다. 여태까지는 말이 주고 받는 부메랑이 되어 싸우는 무기가 되었지만 한 쪽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말문을 닫고부터는 말이 많던 집에 봄바람 같은 훈기가 감돌게 되었다.
그렇게도 극성스럽던 며느리가 말 못하는 시어머니를 볼 때 안Tm러운 생각과 함께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노발대발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던 자신의 죄값을 깊이 참회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치매들린 시어머니의 수발에 온 정신을 쏟았다. 배설물로 벽에다 황칠을 하는 시어머니를 눈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딲고 씻기며 5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하루 같이 지성을 다했다. 지난날에 불효라는 악명을 떨친 며느리가 천하에 없는 효부로 변하게 되자 동네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던 것이다. 효, 불효는 말 때문이었다. 오랜 동안 그 마을에는 ‘말 많은 불효요 말없는 효부’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가족 사이의 불화의 원인은 주로 말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말씨가 온화하지 않으면 자식들의 기가 꺾일 수 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한다. 부부 사이도 상대방을 나무라는 말이 지나치면 도리어 반발을 사서 앙탈을 부리게 되고 거친 말이 오고 가면 분을 참지 못하는 한 쪽이 폭력을 쓰기에 이른다. 가정폭력의 원인 제공은 불순한 말에 있다.
예로부터 말조심을 강조하여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다. 슬쩍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생각없이 뱉은 말이 남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말은 이처럼 나와 가족, 내 이웃을 해치는 도구도 되므로 듣는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여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은 마음과 뜻을 전하는 소리이므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여 현인들 사이에는 말하지 않고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었다.서양의 철학자 에머슨도 대사상가인 칼라일과 노을 지는 호숫가에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도 많은 것을 얻었네.”하고 헤어졌다고 전한다.
말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함께 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극히 예외일 뿐이다. 대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유에는 말이 매개물이다. 때에 알맞은 요긴한 말은 천군만마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일이다. 서로 주고 받는 아름다운 말은 훌륭한 문학이요 예술이다. 모임에서 분위기를 어우르는 유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심리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를 가져온다는 상대방을 칭찬하는 말은 일의 능률을 배가시키고 잠재능력을 계발시킬 수 있다. 영국의 작가 월터 스코터는 어린 시절 열등생이었는데 그가 시를 낭송하는 것을 보고 당대의 유명한 시인 로버트 번스가 “이 소년은 장차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는 말에 용기를 얻어 후일에 영국의 계관시인이 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남기는 말씀은 때로는 절묘한 경구가 되어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고 앞길을 열어준다. 내가 어느 스승에게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데 요긴한 한 말씀을 부탁했더니 그 스승의 말씀이 “남은 생애에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하셨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 평생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이 말씀이 내 인생을 정리하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피날레로 더없이 지극한 말씀이 되었다.
동량지재 /노덕경
계절의 여왕이요, 가정의 달인 오월! 높고 푸른 하늘, 산천이 새싹으로 움트고 綠陰(녹음)을 더해가는 오월이다. 어린이는 가정과 나라의 희망이요, 자라날 새싹이다. 어린이를 보라! 얼굴에는 티 없이 맑은 눈망울, 순박하고 거짓이 없는 발랄하고 귀여운 웃음을 하고, 모든 사물에 대한 好奇心(호기심)과 新奇(신기)함으로 하루가 다르게 씩씩하게 자라는 생명력은 우리의 棟梁(동량)이요, 象徵(상징)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한 집안이 잘되려면 그 집안에서 세 가지 소리가 나야한다.” 즉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나야하고, 베 짜는 소리가 나야하고, 자녀들이 공부하는 소리가 나야한다. 고 했다.
첫째 : 가정생활이 으뜸이다.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정이다. 어린이가 태어나 제일 먼저 대하는 것이 어머니요, 아버지다, 자녀의 첫 교사는 부모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보는 대로 언행과 행동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 어린이다. 자녀교육에 관심과 사랑으로 대화하고 자녀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이 하고 싶은지?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수시로 학교생활과 교우관계도 관심을 갖고 자라는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함께하도록 해야 한다.
“자식을 낳는 것도 어렵지만 기르는 것은 더욱 어렵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훌륭한 사람 뒤에는 항상 훌륭한 어머니가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둘째 : 인격과 개성을 존중해라. 어린이도 한 사람으로 인격으로 대하고 존중해야하고 각자의 개성을 살려야한다. 어린이는 부모의 노리개나 장난감이 아니다. 또한 부모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도구는 더욱 더 아니다. 지나친 기대와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배우기도 많이 했다. 현명한 서구의 문물을 조기에 받아들여 IQ(인지적 지능지수) EQ( 정서적 지능지수) MQ (도덕지수) SQ(사회적 지수) DQ (발달지수) CQ( 리더쉽 지수) 까지 소개되어 장사꾼들의 상술에 어린이 책과 보조교재, 장난감이 범람하고 수요도 폭발하여 맹목적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오랫동안 각종학원에 다니는 것은 어린이나 사교육비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지치게 하고, 어느 분야에 흥미가 있고 적성과 재능이 있는지 빨리 찾아, 진로를 정하여 한 우물을 파야한다. 성장 후에 자신이 하는 일에 신바람으로 일하고 탐구하여 전진하는 평생의 직업을 갖도록 해야 한다.
셋째 : 과잉 사랑하지 말라. 물론 각 가정에서는 귀한 아들딸이다. 성장에는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 시기다. 과잉보호하면 모든 것을 의지하고 독립성이 없고 사리판단도 흐려진다.
“慈母(자모)에 敗子(패자)가 있다.” 고 했다. 너무나 사랑이 많은 어머니 밑에서는 실패하는 아들이 나온다는 말이다. 잘 못된 과잉사랑으로 애들이 나약한 인간으로 형성된다. 요즘, 살기 좀 나아졌다고 해서 어린이에게 기름진 음식과 “인스탄트” 식품으로 어린이가 병들어가고 있다.
넷째 : 自信感(자신감)을 키워주어야 한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외국인과 의사소통은 물론 다른 문화도 이해하고 살아 갈 세대이다. 너무나 간섭하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은 자심감에서 온다. 자신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는 씩씩한 어린이로 키워야하고, 정의감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한다.
또한 평소에 독서습관을 길러야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하지만 짧은 시간에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독서다. 어릴 적부터 온 가족이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는 습관을 길러 주변의 나쁜 친구들과 각종유혹에서 스스로 뿌리치고 공부하는 마음을 살찌우는 독서를 기르자.
다섯째 : 더불어 살아가는 禮(예)를 가르쳐야 한다. 대인관계가 원만해야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 눈이 멀어 슬기로운 사랑과 지혜가 없이 맹목적으로 어린이를 사랑할 때,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버릇이 없고 남을 모르고 오직 자신의 이기주위와 개인주위에 빠지고 참을성이 없고 나약한 어린이가 된다.
자녀들이 하교할 때에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공부에 지처 힘들어 할 때 책가방, 도시락, 책상위에 쪽지 편지를 넣어주어 부모의 관심을 보여 용기를 잃지 않고 학업에 전염할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고 성장하는 자녀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의 슬기요. 사명이요, 책무다.
헬로우 미서방 / 정영호
세계는 하나 라는 캠페인이 유행 된지 한참이나 되었다. 88올림픽 때도 그렇고 2004 월드컵 때도 번졌다.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고 반만년 역사를 품은 이 나라 백성들이다. 모두가 배달민족이니 백의민족 이라며 순수 혈통을 자랑하며 뽐낸다. 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 숱한 외세의 침입을 당한 역사는역사 속에 묻어두고 이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자랑하던 배달민족의 혈통이 이 시대에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주시대에 세계적인 교통 발달로 호랑이 담배 피우든 동화처럼 전설 속으로 묻혀져 간다. 불과 반 백년 전 그 시절에만 해도 꿈에도 생각 못할 순수 혈통이 오염되어 흐려져 가고 있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가 내세우시는 최고의 무기는 양반의 후손이라는 자존심 하나 뿐이다. 우리나라 4대 성씨에 들어가는 집안의 후손으로 우리 가문의 귀신으로 되신 후에도 맏 종부로서 집안의 교육 방침은 양반으로서의 행동거지 말씀으로 일관하셨다. 특유의 대쪽같은 꼿꼿한 성격으로 양반의 후손답게 언행을 조심하라며 그걸 앞세워 어릴 때부터 우리 남매를 닥달 하셨다. 양반의 후손이라는 단어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자랐기에 양반의 ‘양’ 자만 들어도 얼굴이 찡그려 질 정도다.
외갓집은 고향과 지척에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펼치면 호랑이가 황해를 향해 포효하는 모습이다. 척추 같은 백두대간의 중간 허리쯤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깨알 같은 점으로 찍혀있고 같은 굵기의 아주 작은 글씨의 지명이 반갑게 눈에 와 닿는 전형적인 시골이다. 교통기관 이라고는 중앙선 상. 하행 열차 밖에 왕래만 하던 시절에 고향을 가려면 외갓집이 있는 시골 역에 내려야 한다. 역전 광장을 지나 마을 입구에 제법 이끼가 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이 제일 큰 외갓집이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큰집이다. 방학 때면 어머니와 꼭 찾는 고향길이다. 어머니와 들러서 할아버지에게 큰 절로 단정하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사랑방에서 장죽을 물고 요즘 텔레비젼에서나 볼 수 있는 정자관을 쓰신 큰 외할아버지께서는 양반의 체통을 뽐내시듯 수염?! ? 쓰다듬으시며 인사를 받으신 후 반가이 맞아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정자관 쓰신 근엄한 모습은 뵐 때 마다 주눅이 들었다. 내어놓은 과일과 먹음직한 음식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곶감이나 한개 집어 들고 뒷걸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나서곤 했다. 어머니에게는 큰아버지도 반가우시지만 친부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음 급한 어머니의 발길은 마을 중간쯤에 자리한 본가인 친정으로 내 달렸다. 전화나 통신 시설이 없던 그 시절에 딸과 외손자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문 앞까지 달려 나온 외할머니와 식구들의 환송에 묻혀 집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튿날이면 마을 제일 위쪽에 사시는 어머니의 숙부 댁을 찾는다. 집성촌은 아니지만 삼형제 분이 한마을에 사시는 탓으로 외삼촌 형제분들과 그 분들의 자제 분이신 사촌들 모두가 나이가 한두 살 이나 몇 달 차이로 사촌간의 형제 서열이 정해져서 서로 호형호제라 부르라며 형과 제를 구분하기 어려운 비슷한 또래 들이다. 지금은 외할아버지 삼 형제분들 모두가 천수를 누리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아래 윗마을과 가운데 동네에 자리 잡고 생전처럼 다정하게 사실 것이다.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형제와 사촌 되시는 분들 모두가 아직도 정정하시다. 이번에 팔순을 맞으신 사촌 오라버니는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를 두신 분이다. 열 아들 보다 딸 하나가 더 낫다는 속언을 증명이나 하듯이 이 딸이 무궁화가 다섯 개나 피어있는 호텔에서 아버지의 팔순 잔치를 연다는 초청을 받았다.
이십년 하고도 반 십년 더 넘은 세월이다. 지난날을 곱씹어 본다. 당시만 해도 국제결혼을 한다면 시골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는 빅 뉴스였다. 도시로 공부하러간 딸이 양공주가 되어 코쟁이와 산다고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미국인과 정식 결혼을 한다는 딸을 믿는 부모들도 소문에 휩쓸려 서양 도깨비에게 홀린 것처럼 반신반의했다. 하루가 다르게 퍼져나가는 소문에 가슴속은 마당 끝 거름더미처럼 썩어만 갔다. 그렇게 초가삼간에 붙은 불처럼 순식간에 번지든 소문을 순식간에 불식시켰다. 국제 결혼한 딸이 친정에 논밭도 사주고 초가집을 번듯한 양옥집으로 고쳐지으며 온갖 최신식 전자제품으로 친정집을 도배했다. 코쟁이 사위가 굴지 기업 이사로 눈이 확 띄게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했다. 손바닥만한 시골에서 양키 사위 잘 봐서 일약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으로 동네 모?! 寬? 부러워하는 집으로 뒤집혔다. 양공주의 도깨비 같은 사위가 선망의 대상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이다. 이 스타 사위를 외갓집 집안 친지들과 동네 사람들은 미국 사위라며 ‘미 서방’으로 통했다. 거기다 이국 객지에 나와서 제일 고생한 영어 단어가 헬로우가 아닌가. 남여 노소를 막론하고 불러 젖히는 ‘헬로우’ 를 붙여 ‘헬로우 미 서방’ 이라 불렀다. 별명이 아니라 그럴싸하게 딱 맞는 호칭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양반의 후손이라고 내세우셨던 것이 헬로 미 서방 때문에 할말을 잃으셨다. 걸핏하면 양반의 후손이라고 큰 소리 치시던 그 기세가 풀이 꺾였다. 이세들은 황색에다 흰색을 섞으면 어떤 색이 될까. 때문에 어머니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헬로 미 서방’ 을 여태껏 탐탁하게 생각을 안 하셨다.
잔치 분위기는 밴드 가락을 탄 노래 소리가 냉방기가 무색 하리만큼 실내를 덥히면서 무르익어 갔다. 오랜 한국생활에 젖은 ‘헬로 미 서방’이 불러 제치는 대중가요의 가사 발음이 완전한 원음이다. 어느 나라 말이 원음인지 분간이 안 간다. 여기저기서 앵콜의 환호가 요란하다. 인사성 밝은 ‘미 서방’이 원음의 발음으로 ‘큰 고모님, 큰 고모님’ 하고 부르며 살갑게 대접한 탓인지 어머니의 쌓였던 마음이 좀 풀렸나 보다. 옆에서 곁눈으로 바라보니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다.
“이제는 양반 상놈이 없는 기라, 돈 많으면 다 양반인 세상인기라”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돼”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된다 며 돌아오는 차 속에서 혼자 말처럼 중얼 거리신다.
“미국 사람에게 시집간다고, 상놈이라고 그렇게 싫어하며 흉보더니 그런 말씀을 다하시고......”
상처 받은 당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려는 듯 옆 자리의 고명딸이 비수를 꽂는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국제 시대 아이가, 가가(조카딸을 지칭) 시집 갈 때 시대와는 다른 시대 아이가”
“호강도 하고 미국 구경도 하게 나도 코쟁이 사위하나 더 봤으면 좋겠다”
“없는 딸 언제 만들어서 미국 사위 보겠노, 꿈 깨시와요”
옆 자리의 딸이 핀잔의 기름을 계속 붓는다.
“그러 길래, 살아 있을 때 너 하나 라도 잘 해라”
전운이 감도는 모녀간의 대화를 감지한 앞좌석의 며느리가 끼어들어 중재를 한다.
“어머님은!, 고모도 잘 안 합니껴, 고모부도 미국 사위 못잖고..... 그만큼 하면 딸 노릇 잘 하는 거 아입니껴”
할말을 잃은 어머니가 허공에다 소리친다.
“내가 무슨 말 하드나........“
“너도 막내 며느리는 코쟁이 여자로 봐라...........”
양반도 배달민족의 혈통도 돈 앞에 소리없이 무너진다.
등 굽은 나무 /노경애
산을 오르다 보면 벼랑 끝에 선 등 굽은 소나무가 산을 지키고 있다.
이웃에 청도댁이 살았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청도댁의 얼굴에 잔뜩 구름이 끼여 있다. 특유의 웃음소리로 거리낌 없이 얘기를 나누던 밝은 청도댁이 빨래를 널다가 서로 마주쳤는데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옥상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청도댁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지난 가을에 케 놓은 고구마를 한 소쿠리 담아 그녀에게 갔다. 잠시 누웠다 일어났는지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차를 내왔다. 무슨 기분 상한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고개를 맥없이 끄덕거리며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꺼칠한 눈가에 금세 습기를 머금었다.
언제부터인가 청도댁은 친구들의 모임만 갔다 오면 신경이 예민해져 왔다. 점점 몸과 마음이 나약해져 가는 청도댁을 지켜보며 늘 마음이 짠해왔다. 몇 년 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리를 다쳐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했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삶의 모든 것이었던 남편의 직장마저 잃으니 가세가 기우는 것은 당연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이곳저곳 일을 찾았지만 불경기에 몸이 불편한 남편을 받아줄리 만무했다.
하는 수없이 골목어귀에다 포장마차를 차려놓고 호떡을 구워 팔았다. 그러다보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죄책감으로 그녀의 가슴에 응어리져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서울대에 보낸 한 친구는 눈치도 없이 아들자랑에 신바람이 났다. 골목에는 서울대 합격한 아들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오래도록 휘날렸다. 큰아이를 지방대에 보낸 자신도 현수막을 볼 때마다 마음이 움츠려 들곤 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목에 힘을 주곤 할 때마다 청도댁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앞에 놓인 음식만 꾸역꾸역 먹어댔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아 온 친구의 잘난 아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국제결혼을 하여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사업도 날로 번성하여 보기 드물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아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사업채가 하나 둘 늘어갈 수록 아들의 뒷바라지에 집까지 저당을 잡혀 돈줄을 대주기에 급급했다.
회사일로 스케줄이 꽉 찬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수년 동안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다. 월간지나 아들의 성공담이 실린 사진과 기사를 들여다보고 위안을 삼으며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모임이 있은 날이면 친구의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청도댁이 데려온 손자 재롱에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친구의 아들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동안 청도댁 아들은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을 하려고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다. 짧은 학벌로 그럴듯한 직장에 취업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회사에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틈만 나면 막노동이며 중국집 배달이며 등이 휘어지도록 일을 하며 몸을 혹사시켰다. 음지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삶의 거센 바람 앞에서도 휘청거릴망정 부러지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음 밭을 다진 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자 삶의 음지에도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의 성실함이 소문이 났는지, 마을 동장님의 추천으로 어느 이름이 알려진 제약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청도댁은 요즘 손자들의 재롱에 입이 귀에 걸려있다. 주말이면 아들 내외와 함께 도시락을 싸서 야외로 나들이를 가고 마트에 쇼핑도 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뜨인다. 지난날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 볼 수가 없고, 수시로 웃음소리가 담벼락을 넘나들었다. 청도댁의 빨래 줄에 올망졸망 늘려있는 가족들의 빨래를 보며 요즘 나는 두 친구를 통해 성공의 잣대가 달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현재의 행복이라는 토대 없이는 가족의 행복한 미래가 어찌 있겠는가. 나는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으니 자주 고향을 찾아온다. 문뜩문뜩 외로움이 밀려 올 때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도 있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소중한 내 아이들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이번 주말이면 아들내외가 내려온다. 차탁(茶卓)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다완에 찻물을 우려 놓고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밝혀야겠다. 요즘 곧은 소나무차탁(茶卓)보다 휘어진 차탁(茶卓)이 더 운치가 있고 고가에 팔린다. 척박한 땅에서도 묵묵히 산을 지키고 있는 휘어진 나무가 그 진가를 알아주는 세월이 왔는가 보다.
가족 /신성애
뚜벅 뚜벅 말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나무계단은 삐익 바람소리를 낸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쾌한 음악이 깔리고 핀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레인마다 형형색색의 불이 켜져 있고 쉼 없이 둔탁한 공이 굴러가고 있다. 다양한 피부색이 어우러진 시드니 중심가의 볼링장 안은 퍼덕이는 활어 장처럼 생기가 넘친다.
카운터로 다가간 아들이 게임 비를 지불하고 네 켤레의 볼링 슈즈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서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온다. 민소매차림의 그녀에게 신을 건네주고, 낯설어하는 남편과 긴 원피스 차림의 나에게 게임방식을 일러준다.
어저께 결혼식을 올린 아들내외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소통되지 않은 감정은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몰고 갔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문화적 충돌로 서먹한 분위기를 좁히지 못한 나는 무언의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볼링장의 넓은 마룻바닥의 질감을 떠올렸다. 굳이 말이 없어도 퍼질러 앉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육화된 원시언어가 살아있는 곳. 거기에는 나무공이가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이 가슴 깊숙이 내재된 파괴의 본능을 자극한다. 산산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형틀에 맞는 반죽으로 거듭 태어나는 변신도 없으리라. 의도적으로 제안한 내기 시합에 아들은 군말 없이 스포츠 센터로 차를 몰았다.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부자<父子>와 고부<姑婦>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한판인 듯 각자 자신에게 맞는 공을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는 얼굴이다. 신세대와 구세대의 맞대결이 바야흐로 펼쳐지기 직전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침을 한번 삼키고 레인 앞에 선다. 남자들은 무거워 보이는 청색 공을 집어 들고 그녀는 노란 공을 고른다. 나는 한번에 스트라이커를 날리고 싶어 무거워 보이는 갈색 공을 쓰다듬는다. 묵직하게 손아귀에 잡히는 맛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경기에는 안성맞춤인 듯 하다. 가뿐하게 들어올린 공의 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빙빙 돌리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지나온 세월만큼 쌓여있는 내공도 한몫을 하리라.
의기양양 레인을 훑어보는 시선 너머로 그림자처럼 다가선 아들이 한 마디를 건네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부상의 위험이 있으니 가벼운 공이 나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아무려나 텔레비전에서 볼링 하는 것을 봤을 때는 그 까짓것 똑바로 굴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첫 번째 선수가 앞으로 나선다. 두 손에 공을 받쳐 든 아들이 손을 길게 뻗어 공을 굴린다. 날렵하게 출발한 공은 레인 끝의 표적을 향해 윙윙거리며 달려간다. 일곱 개의 핀이 쓰러지고 세 개가 남았다고 전광판에 표시된다. 넘어지지 않은 공 세 개가 다시 레인 끝에 자리하고 다시 한번 아들이 공을 굴린다. 세 개중에 하나를 쓰러뜨리고 두개는 그대로이다. 다음은 생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 차례다. 똑바로 레인 앞에 서더니 공에 묻은 기름때를 휴지로 닦아낸다. 핀을 바라보는 품새가 많이 쳐본 볼링선수처럼 안정되어 보인다. 종종 걸음을 치더니 핀을 향하여 힘차게 공을 던진다. 아홉 개의 핀이 쓰러지고 하나 남은 스페어는 처리하지 못한다. 발을 힘껏 구르며 아들을 쳐다보는 눈길에 아쉬움이 배어있다.
이윽고 잔뜩 긴장한 남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레인 앞에 서더니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을 굴린다. 세 개의 핀이 모로 쓰러지고 나머지는 제자리에서 흔들리다 멈춘다. 일곱 개의 핀을 향해 다시 한번 공이 질주하는가싶더니 방향감각을 잃고는 고랑으로 빠진다. 머쓱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난 남편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는다. 실내는 서늘한데도 땀을 훔치는 손길위에 불빛이 뙤약볕처럼 내려 꽂힌다. 그 뜨거운 빛 한줄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환하게 드러난 사람들의 폼을 유심히 지켜보며 나름대로 머릿속에 투구자세를 그려본다. 나는 그만 하면 알겠다는 듯, 세 개의 구멍에 엄지와 중지, 약지를 끼우고 다부지게 레인 앞에 발을 멈춘다. 그리고는 서너 발자국을 뒤로 물러났다가 힘껏 레인위로 공을 흩뿌린다. 장엄하게 울리는 스트라이커의 음향을 기대하며 굽혔던 허리를 쭉 펴고 앞을 바라본다. 굉음을 내며 굴러가던 공은 순식간에 레인을 벗어나 데구루루 골에서 어영부영 기어간다. 운동은 뭐든 잘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는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실상이 말이 아니다. 힘만 있으면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던 부동의 핀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민망함이 겹쳐 실없는 헛웃음이 나온다. 만회하려고 할수록 자꾸만 어께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고 팔은 똑바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흔들린다. 공은 번번이 레인을 벗어나고 핀은 붙박이가 되어 있는지 옴짝달싹도 않는다. 목이 말라 들이키는 음료수는 밍밍하니 바람 든 무맛처럼 감칠맛을 잃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볼링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아들은 시골집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듯이 공을 굴리고 있다. 한 움큼의 구슬을 따먹어서 호주머니가 불룩한 것처럼 게임을 즐기는 듯 어께가 가볍다. 하늘위에 떠있는 독수리의 날개처럼 느긋하니 조망한다. 정확한 스텝에 손목의 스냅으로 공을 굴리는 그녀에게는 먹줄을 따라가는 듯한 정교함이 묻어난다. 결코 서두르지 않은 침착한 몸짓이 돋보인다. 레인 앞에서 공이 굴러가는 방향을 따라 온몸을 비틀며 안간힘을 쓰는 남편의 뒷모습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집념이 엿보인다. 막무가내 자세를 바꾸어가며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볼링을 치는 나의 투구 폼은 말하지 않아도 가관인 것이 분명하리라.
게임은 중반을 넘어서고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시점에서 남편이 굴린 볼이 스트라이커가 되더니 다음번에는 스페어처리도 깔끔하게 한다. 시합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기 마련이라더니 볼에 마술이 걸린 걸까. 자리에 돌아오는 남편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환호성을 지른다. 요번에는 나도 마술을 부려야지 애꿎은 볼만 쓰다듬는데, 어설픈 엄마를 보다 못한 아들이 맞힌다는 기분으로 힘을 죽여보라고 말을 해준다. 그래, 어차피 꼴찌인데 시키는 대로 해보자고 물속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헤드 핀을 향해 공을 굴린다. 떼굴떼굴 일직선으로 굴러가던 공은 정확하게 중앙을 맞히고 커튼 속으로 사라진다. 와르르, 난공불락 같은 삼각형의 거대한 성채는 사라지고 전광판에 폭죽이 터지며 팡파르가 울린다. 의자에 앉아있던 모두가 튀어나와 손바닥을 마주치며 축하를 한다.
어느새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마음은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열개의 핀이 일순간에 하나의 볼로 쓰러지며 얽히고설킨 일상적인 문제들이 일거에 함몰된 듯 후련하다. 이런 기분에 볼링을 하는구나! 이 통쾌한 스트라이커의 묘미가 볼링의 진정한 매력인가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스트라이커를 칠 때마다 손바닥을 부딪치고 환성을 지른다. 언제 시합을 펼쳤는가싶게 경쟁의식은 사라진 모습이다. 어느 편인지 그건 가릴 바가 못 된다. 그저 맞히고 쓰러지는 핀을 보고 서로 손과 손을 맞잡으며 격려하고 조언하다보니 한마음이 되어 레인위의 공에 집중을 한다. 핀이 맑은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순간의 쾌감은 함께 나눔으로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다. 여기는 함께 채워야할 지구의 한 귀퉁이. 나무표적을 쓰러뜨려야하는 공동의 목표를 향한 질주 속에 가족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떠오른다.
하늘빛을 닮은 두개의 청색과 대지를 아우르고픈 갈색과 노란공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세상의 핀들을 향해 도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궤짝/ 우순자
“공짜입니다. 모이세요.”
청년회 주최 자선바자회에서 찬조 물품으로 들어온 삼단 서랍장을 팔고 한 개가 남았었다. 청년 회장이 끝까지 남아 수고한 청년회 부인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서랍장을 주겠다며 가위바위보를 하라고 했다. 지금껏 가위바위보를 한다든가 심지뽑기를 해서 이겨 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어느새 자리잡고 있었다. 긴장을 하면 떨린다고 했던가? 그런 낌새를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왜 그리 떠느냐고 하기에 추워서 그런다고 얼버무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은 내가 하는 내기에 있어서 만큼은 무색하기 짝이 없다.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끌시끌하던 오늘의 불우이웃 돕기 바자회장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한 이들의 만남의 장이었고 정을 나누는 장이 되었다.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을 공짜라는 말에 뿌듯함은 온데 간데 없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내가 되었다. 지금껏 지기만 했으니 한 번쯤은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번쩍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서랍장을 건너다보았다. 디자인이 야단스럽지 않고 점잖은 미색으로 신혼부부들이나 아이들의 방에 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안방에 있는 어머니의 서랍장을 구입한지 17년이 되었다. 어버이날의 선물로 사 드린 것이었다. 무난하게 입을 수 있겠다 싶어 옷을 사 드렸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 바꾸다보니 번거롭고 해서 아예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는 것이 낫겠다 싶어 구입한 것이 지금의 서랍장이었다.
서랍장이 있던 자리에 궤짝이 하나 있었다. 빛이 바래고 문짝이 시원치 않아 당장이라도 번쩍 들어 내다버려도 아까울 게 없는 낡은 궤짝으로 새댁인 나에게는 가난의 상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난하여 고생문이 훤하다며 반대를 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안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궤짝 문을 열고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가난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어머님은 고맙다는 말씀보다 아직은 쓸만한데 뭐 하러 사왔냐고 하셨다. 며느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그러시는 거라고 생각을 했지 아버님의 손때 묻은 서랍장을 치워야 하는 섭섭함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몰랐었다.
궤짝 안에는 아버님과의 혼례를 위한 사주단자, 빛 바랜 남편의 배넷저고리, 삼회장 치마저고리, 저고리동정, 버선코에 곱게 수놓인 하얀 버선, 그 위에 어머님의 옷가지들이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한복을 입을 때 신겠다며 버선을 챙기는데 그 안에서 빛 바랜 종이가 나왔다. 아버님이 손수 쓰신 자식들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난 때를 알지 못한다. 저녁 먹고 난 뒤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지 술시인지 해시인지 긴가 민가다. 아버님은 자식들이 자기의 난 시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아버님이 쓰신 글씨를 어머님께 보여드렸더니 아버님의 자상한 면을 자랑하신다. 자식자랑 남편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칠순을 넘기신 어머님이 하시는 남편의 자랑은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
그 궤짝이 있던 자리에 서랍장을 놓았다. 설빔을 입은 듯한 단정한 방안의 모습. 서랍장 하나로 방안의 분위기가 이렇게 확연히 달랐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가구 하나를 새로 갖다 놓으므로 인해 어머님의 품위도 달라 보였다. 궤짝은 불쏘시개로 사용해도 하등 아까울 것이 없는데도 어머님은 먼지를 털고 신문지로 몇 겹을 두르시더니 선물을 포장하듯 이불보로 궤짝을 싸서 창고로 쓰는 뒤주에 고이 넣어두는 것이었다. 어머님에게 있어서 궤짝은 세월의 저편에 있는 아버님과의 교감이었고 신식 며느리에게는 덕지덕지 앉은 가난이었다.
어머님을 위해 산 서랍장이었지만 온전히 어머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어머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사랑하는 손자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자 함인지 5단 서랍 중, 위에 있는 칸도 아래에 있는 칸도 아닌 한 가운데를 아이의 서랍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수시로 서랍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통에 손잡이는 언제 달아났는지 알 수 없고, 서랍 바닥이 내려앉아 교체의 신호를 받은 지도 오래. 그 낡은 서랍장을 치우고 새것으로 바꿀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기존의 짙은 색에 반해 점잖은 저 미색을 가져다 놓으면 방안은 겨울 속에 봄이 온 듯 화사할 것이고, 나이가 드시면서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해 하시는 어머님에게 선물을 함으로 인해 잠시나마 주름진 얼굴이 박꽃같이 환하게 펴질지 모르지 않겠는가?
헌데, 지금껏 한 번이라도 가위바위보나 심지뽑기에서 이겨본 적이 있으면 혹시나 하는 기대라도 해 보겠지만 전례로 보면 일말의 희망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인 데다가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겠다는 부인들의 표정에서 지레 기가 꺾였다.
‘그래, 내 능력이 까짓 것인데 뭘 바래?’
‘아니지, 마음을 접기에는 너무 아까워. 가구점에서 사더라도 5만원은 더 줘야할 건데...’
그런데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번쩍 손을 들었다. 가위바위보를 위해 올라가던 손들이 내려지며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내가 사면 안 될까요?”
살아오면서 당당하게 의사표시를 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가슴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얼마 뒤, “둘 데도 없는데 하여튼 욕심은...”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니 남편이 서랍장을 옮기고 있었다.
신 / 장나영
‘정’의 신은 가운데에 가죽 두 조각을 이었고 투박한 박음질 선이 뚜렷하다. 굽이 거의 없어 납작하게 땅에 붙어 무술을 하는 신처럼 생겼다. 정이 가지고 있는 소품들은 회갈색에 전통적이고 약간 특이함이 있는데 물건을 한 번 사면 웬만해서 실증내지 않고 오랫동안 사용한다. 그녀는 이십대 초 동갑내기 친구를 사귀어 오랜 기간 연애하였다. 조금은 까다로운 정의 성격에 두 사람은 이따금 다투곤 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이 맞아 짝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며 토닥거리며 산다.
‘경’의 신은 하이힐 구두이다. 나는 휴게실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차갑고 매끈한 바닥에 하이힐이 닿아 작은 쇠망치 두드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복도 먼 공간에서부터 울려 퍼지더니 점점 커진다. 구두와 같은 색상의 타이트한 정장을 입은 그녀는 한 손에 서류를 쥐고 있다. 사무적이고 빈틈없는 그녀의 얼굴이 나를 발견하자 미소가 피어오른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내 앞에서 멈춘다. 구두 앞부분은 여우 입모양으로 날렵하게 쭈욱 내밀고 있고 역삼각형으로 가늘고 길게 빠진 굽은 한 점으로 바닥에 콕 닿았다. 가녀린 그녀는 체구에 살이 있고 넉넉한 성격의 남자와 결혼한다고 소식을 전한다.
‘나’의 신은 통굽이다. 검정 가죽에 별다른 무늬가 없이 밋밋하다. 통굽은 키 높이가 되고 발소리도 거의 없으며 캐주얼과 정장 등 웬만한 옷과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발이 편해서 통굽을 즐겨 신다 보니 어쩌다 하이힐로 멋을 내려다 발이 아파 다시 통굽 신으로 바꿔 신는다. 예쁜 신발에서 발이 편한 신발로 취향이 서서히 바뀐 건 내면 찾기에 열중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통굽에는 평균치보다 더 높은 십 센티미터 이상의 높은 통굽도 있다. 신을 신으면 한 계단 올라선 듯 시야가 넓고 전망이 좋아진다. 굽 모양은 윗부분 보다 아랫부분이 더 넓어서 자신의 발 크기보다 바닥에 닿는 면적이 훨씬 더 넓다. 걸을 때 소리가 없고 쿠션감이 있지만 코끼리 발처럼 모든 걸 뭉개버릴 것 같이 조금은 위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진 코끼리도 화가 나면 무섭다. 코끼리 발 같은 신발을 하나 마련해 넓게 쿵쿵 땅을 디디며 가끔 절제된 감정을 풀어 볼까하는 마음도 생긴다.
‘자’의 신은 운동화나 고무신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녀는 마흔 가까운 나이가 믿기지 않게 갈래 닿은 머리를 하고 캐주얼에 운동화 차림이다. 절에서 볼 때 그녀는 머리를 가운데로 가지런히 모아 묶고 재가수행자 회색법복에 고무신을 신는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선을 보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도 미팅에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 자신은 독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대부분 그 나이 정도 되면 적어도 일 년에 한 두 번만 봐도 미팅에서 선팅과 맞선까지 다 본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녀는 억지로 만든 만남보다 자신이 가는 발걸음 속에 자연스러운 인연이 좋다고 한다. 결혼을 기다리는 그녀의 어머니가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너는 왜 없느냐고 라고 푸념하시자 그녀가 말했다.
“엄마, 내신은 짚신이 아니고 고무신인데 그것도 민고무신이 아니라 꽃신이거든. 꽃신은 무늬가 맞아야 짝이 되는 거야.”
그녀의 고무신 위에는 그녀가 그려놓은 무늬가 있다.
실제 꽃무늬가 수 놓여 있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신을 꽃신이라 부를 수 있다. 납작 신발, 하이힐 구두, 통굽 신, 운동화, 고무신 등 자기 성향에 맞는 신은 자기다운 무늬를 가진 꽃신이다. 사람의 성향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색깔과 무늬가 있다. 아무 신과 짝을 지을 수 없다. 자신의 전반적인 성향에서 어느 무늬가 맞아도 맞는 사람이 짝이 되는 것이다. 애당초 짚신도 고무신이 아닌 꽃신인데 맞출 무늬가 더 많겠지.
포옹 /백금태
“선생님. 이거.” 아이가 아이스케이크를 내밀었다. 줄줄 흘러내린 아이스케이크 국물이 아이의 손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바닥에 흥건하다. 반쯤 남은 아이스케이크마저 7월의 후끈한 열기에 견디다 못해 막대기에서 미끄러져 ‘철퍼덕’ 바닥에 퍼드러진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섭씨 35도와 35명의 열기에 힘겨운 듯 흐느적거리는 수업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찰흙으로 상상의 동물을 만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호랑이 같은 사자, 뿔 달린 토끼, 날개 단 강아지, 하늘을 나는 공룡....... 아이들의 머리 속은 상상의 바다가 너울댄다. 아이들의 손놀림에 희한한 동물들이 책상 위에서 꿈틀댄다. 만들기 수업이 막바지로 이어지고, 마지막 숨결을 동물들에게 불어 넣고 있는 아이들의 손길이 바쁘기만 한데 아이는 벌써 만든 것을 찰흙 판에 얹은 채 앞으로 들고 나왔다. 교과 공부도, 그림 그리기도, 모든 것이 2학년 수준에는 함량미달인 아이였다. 아이가 내 책상 위에 찰흙 판을 놓았다. 정교하게 조각된 우둘투둘한 등, 아래, 위턱의 날카로운 이빨, 예리한 발톱과 굵고 억센 꼬리를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만 같은 티라노사우루스를 닮은 공룡이 찰흙 판에 버티고 있었다. “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껴안았다. 그 소리에 놀란 아이들의 시선이 한 몸이 된 우리 둘에게 모아진 채 멀뚱거렸다. 사위(四圍)는 선풍기의 날개만이 흐느적거릴 뿐 아이들의 숨소리조차도 멈춘 듯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팔딱거리는 아이의 새가슴의 울림만이 공룡의 심장소리처럼 쿵쿵 굉음을 내며 내 가슴으로 전이 되어 왔다. 아이의 혼이 꿈틀거리는 소리다.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던 로댕이, 도자기를 빚던 어느 도공의 진지하던 삶이 아이의 눈망울에 어린다. 나는 아이가 만든 공룡에 칭찬의 열을 올렸다. 선생님한테나 아이들한테나 항상 미운 오리새끼였던 아이가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게 의아스러운지 아이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듯 방황한다.
신은 인간에게 공평함을 베풀었나 보다. 축구를 잘 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공부를 잘 하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골고루 나눠준 것 같다. 물론 재능을 다른 이보다 더 가진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말처럼 남이 보기엔 모자라고 어설퍼 보이지만 그래도 어느 구석엔가 재능은 숨겨져 있는가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었다는 뉘우침에 가슴에 시린 바람이 인다. 나는 속죄하듯 아이를 감싸 안은 두 팔에 힘을 가한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빛에 언뜻 스치는 따사로움. 아이는 어색한 듯 몸을 비틀며 내 품을 벗어났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이의 발걸음이 의기양양하다 못해 쿵쿵거린다. 제자리에 앉은 아이는 연신 벙글거리며 평소에는 나 몰라라 했던 뒷정리를 하느라 분주하다.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의 눈길도 사뭇 달라진 듯 부드럽다.
아이는 학기 초에 전학을 왔었다. 책가방을 대신 든 어머니를 앞세우고 줄래줄래 따라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왠지 나사가 조금 덜 조인 것 같다고나 할까. “나는 공부 못하는데.” 아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나에게 처음 내뱉은 반말이었다. 아이가 오기 며칠 전, 참하고 똑똑한 아이가 전학을 간 자리를 아이가 메운 것이었다. 손해 본 것 같아 괜히 울화통이 치밀었다. 왜 하필 우리 반이냐며 아이를 대하는 내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아이가 온 이후 교실은 연일 전쟁터였다. 창문턱에 놓인 화분은 바닥으로 내 팽개쳐지기 일쑤였고, 복도의 하얀 벽에는 수 백 마리의 공룡이 지나간 듯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부모님이 집중력을 기른다며 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낸 덕이었다. 공부는 아이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 전 인 듯 가방 속에는 장난감과 과자 봉지만 수두룩했다. 수업시간, 휴식시간이란 개념이 희미했던 아이는 교문 앞 가게를 자기 집인 양 수시로 드나들었다. 고개를 들면 아이의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곤 했었다. 아이는 점점 더 내 눈밖에 나기 시작했고 반 아이들도 그를 미운 오리새끼 대하듯 따돌렸다. 심심해진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이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하지만 그를 얕잡아 본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떼거리로 몰려드는 아이들을 대적해 보지만 결과는 뻔했다. 우직스런 고집에 등치를 믿어보았지만 혼자의 힘으로 버티긴 역부족이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지칠 줄 몰랐고 몸은 생채기가 늘어만 갔다. 아이도, 아이들도 서로가 옳음을 주장하며 나에게 판결을 기다리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급기야 아이에게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무인도에서의 생활인 양 아이는 혼자 웃고 혼자 이야기하며 지루한 수업시간을 메워 나갔다.
펄떡거리던 교실 뒷쪽이 허전했다. 어느 새 아이의 자리가 또 빈 것이다. 덩치가 반에서 둘째 하라면 서러운 아이였기에 아이가 난 자리는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더위로 교실 앞, 뒷문은 개방되어 있었다. 아이는 내 눈을 피해 교실 밖으로 빠져 나간 것이었다. 그때서야 아이 몇몇이 그가 방금 문을 나섰다는 언지를 내게 보냈다. 나는 아이가 사라질 때면 하던 버릇대로 창문 너머로 목을 쭉 뺀 채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손오공의 축지법처럼 어느 새 교문 밖 문방구 안으로 등을 감추는 순간이었다. 금수만도 못한 것 같으니라고. 나는 조금 전의 칭찬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가 뒷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아이를 복도로 쫓아 낸 후 문고리를 걸었다. 뒷문에 매달린 아이의 애타는 눈빛이 말간 유리를 넘어 내 눈동자를 자극했지만 나는 못 본 채 눈길을 돌렸다.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나지막하고 느릿하던 소리는 점점 더 강도와 속도를 더해 갔다. 나는 화를 참지 못해 문을 열었다. 아이의 손에는 아이스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한여름의 열기에 견디다 못한 아이스케이크는 줄줄 녹아내려 아이의 손등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이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며 불쑥 아이스케이크를 내밀었다.
조금 전, 선생님의 품에서 올려 다 본 아이의 눈에는 선생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보였나 보다. 자기가 먹었던 시원한 아이스케이크가 생각났으리라. 아이는 한달음에 문방구로 달려가 아이스케이크를 샀다. 군침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이는 교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복도로 쫓겨난 아이는 녹아내리는 아이스케이크를 보며 가슴을 바짝바짝 태웠으리라.
아이의 손에 들렸던 아이스케이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반 쯤 남은 아이스케이크가 막대기와 분리되어 바닥에 뒹군다. 아이의 손에 남겨진 앙상한 막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아이가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바닥에 퍼드러진 아이스케이크를 보며 자기의 마음을 선생님께 전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속상한 것이었다.
“고마워, 고마워.” 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아이스케이크 국물에서 아이의 쫀득한 정이 베어났다.
잘 갔습니다 /김종활
노을 머금은 찬바람이 볼을 스치며 흐른다.
금산재에 오르니 싱그러운 솔 내음과 오백년 옛 도읍의 향취가 출향 인을 반겨준다. 가야산 영봉에서 발원한 두 수량이 합류 하는곳 , 임수 배산 접도 남향 풍수지리학 상으로 전형적인 길지다. 여기가 나의 시원의 땅이요 영혼의고향이다.
시골에 계시는 친척 형수로 부터 전화가 왔다.
“삼촌, 이럴 수가 있나. 여자를 숨겨놓았다며.”
평소에 들어보지 못하던 날이 선 추궁에 나는 당황했다. 서글서글하고 인정이 철 철 넘치든 친척 형수께서... 나는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요. 달밤에 수건 놓기 하는거요. 뭘 숨겨나요?”
한동안 말싸움이 이어졌다. 속담에 신사는 우산과 거짓말은 챙겨두라고 했든가. 결국 나의 능청과 오리발에 형수는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로 웃으며 끝이 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삼십여리 떨어진 고령중학교 입학초부터 읍에서 자취를 했었다. 자취방 앞집이 친척 형님네가 살았다. 형님은 그 시절에 드물게 관공서 다녔다.
처가가 삼공화국 실세의 배경으로 인해서인지 나름대로 좋은 지위에 계셨다.
선머슴아이들의 자취생활은 번지럽기 짝이 없다. 밥을 지어 먹고는 취사도구며 냄비를 양동이에 그냥 던져 놓고 등교하면 앞집 형수나 누나가 깨끗이 설거지를 해주었고, 매섭게 추운 날과 여름에 모기가 들끓으며 형님 집에 꼽사리로 끼여 자곤 했다. 그것뿐인가 반찬이 떨어지면 간장이며 김치를 얻어먹기 일쑤였다.
온 삼년을 그렇게 가족 아닌 가족으로 지냈었다.
학업을 마치고 이모 집 공장에서 도제 살이를 할 때이다.친척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상, 재미있게 노는 거 잠깐 미루고 좀 만나 보자.”
“대구입니까?”
하고는 약속한 다방으로 나갔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민망해 하던 형님이 말을 꺼내셨다.
“동상, 사람하나 숨겨주게.”
“범죄자입니까?”
“내가 범죄자이지. 범법자는 아니다.”
라며 다방한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한 여인을 인사 시켰다. 초면인 데도 여인은상냥하게 삼촌 이야기 많이 들었다며 인사를 했다. 나도 또한 넉살좋게
“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맛 인사를 나누었다
새우에 몸단장한 봄보리 마냥 청신하고 난들난들 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또렸 하며 에스라인 허리가 남자의 흉금을 사로잡는 자태였다.
형님은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너와 나만 알게 좀 거두어 달라는 부탁 이였다.
시골에 있는 너의 형수 성질 잘 알지 않으냐 면서.
나는 이 여인을 내가 근무하는 공장 검단부에 취업시키고 기숙사에 기거시켰다.
여인의 행적과 과거는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알 수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 집사람과 다정한 동서간이 되어 잘 지내였다.
친정이 일본인 집사람과 같이 나들이 할 곳이 별로 없으니 집지키는 강아지 신세는 같은 처지였다. 여인은 핍박받은 처지인지라 끔찍이도 살갑게 우리내외를 대해주어 날이 갈수록 정이 깊어갔다. 명절이면 외롭게 집을 지켜 주는 것이 고마 왔고, 빼앗긴 핏덩이 생일날에는 정한수 밭쳐들고 가슴치며 하는 애절한 기도는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둔다는 것은 끝장 이였다.
“인두로 찌질 년 담배 불로 찌질 년
고기반찬 많다 해도 밥맛이 없드니만
보리밥에 된장국도 밥맛이 꿀맛이다.“
형수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구다.
“형수 우리집안과 고령인심이 어디 그렇게 야박 하요? 콩 한쪽도 노나 먹고, 집에 없으면 빌려서라도 대접하는 것이 우리내인심 아니요. 형님의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면 집에 데리고와 일도 시키고 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요 형수가 상전 아니요.” 라고 부아를 지른다.
형수 왈,
“어찌 이 집안은 전부 한통속으로 내속을 이리도 뒤집고 애간장을 태우느냐.”
고 공격과 항변이 거세다.
“인두나 담뱃불로 찌지면 엄청 떠거울 것이고 어디를 찌진다 말이요?”
“데리고 와 바요 어디를 찌지나. 찌저서 분이 풀리기나 하면 다행이지....”
편안하고 부담 없고 정이 많은 형수와 일상의 대화를 나누다가도 형님 로맨스 이야기만 나오면 독사로 변한다. 지조 있고 현모양처의 규감이시며 신사임당 같은 형수께서 그렇게 심한 말을 할수 있느냐고 놀린다.
“그분도 내 입장되어 보라지.”
네 또한 질 새라
“여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윤리 도덕 지키는 사내 없고, 해결책이 안보이면 여자 찾아간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고.”
하면서
“서방님 진지 상에 나물죽을 올려 놓고
헤어진 삼배치마 두 손으로 가리 우고
이것도 네 탓인가 하여 몸 둘 바를 몰라라.“
형수 왈, “나도 가난한 이집 가문에 시집와서 그 열배 이상으로 노력 하며 살았다.”며 날밤을 새워도 이야기와 논쟁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옳고 좋은 말로 설득을 해도 씨앗질투에는 효험이 없다.
“맞아 형수 말이 맞아요”, 세상이 변하면 세태도 변해야 하는데, 수구 보수인 형님이문제야, 라며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어야만 이 집안에 된 사람 하나 본다며 대화는 환하게 웃으며 끝이 난다.
시골 형수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일찍 돌아가시고 내가 숨겨준 여인도 어느 날 말없이 제 갈 길로 가고 말았다.
친척형님은 공직 생활을 접고 민선을 준비 하려고 퇴직을 했다. 현직에 있을 때와 퇴직 후의 사회의 이목은 천당과 지옥 이였나 보다. 예측 못한 주위의 인심과 사회의 환경 때문인지 목 디스크 때문에 15년간을 기동도 못하는 식물인간으로 되었다. 병상에 있을 때 면회를 가 의술 좋고 약 좋으니 마음 편히 먹으라고 위로를 하면 나의 손만 잡고 눈물 지우는 것이 심려를 끼처 드리는 것 같았고, 나 또한 안스러워 자주 병문안도 못하였다.
기동을 못하는 십오년의 투병생활은 너무나 길었고 자인했다.
아침에 친척 장조카로부터 전화를 밭았다.
그렇게 애쓰시던 빼앗아온 핏덩어리도 이복형제들과 함께 넉넉히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영정을 바라보고 핏덩어리를 보니 인생무상 과 만감이 교차한다.
이승에서 하늘과 땅을 넘나들었으니 저승에 가서는 애러(error)는 없겠지요?
고향 재실 석가래 가 썩어서 비가 새지 않을 가 걱정하시든 형님!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 잘 가셨습니다.
떠나 올 때 영정을 바라보니 빙그레 웃으신다.
동상, 잘 가게.......
고명 /최경자
잡초와 잡목들이 무성하던 하천 부지를 밀어서 교실 두 칸과 부속 건물 두어 동을 지은
학교에 입학을 했다. 선배들이 다니던 학교가 멀고 불편해서 면내에 중학교가 새로 생긴 것이었다. 운동장조차 닦여져 있지 않은 학교에 아이들이 입학을 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학예회를 겸한 개교 기념식 행사가 열렸다. 교육장님을 비롯한 군내의 많은 손님들이 방문 하시게 되어 학교에서는 당일 손님들에게 점심식사 대접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음식점 하나 있을 리 없는 산골 마을이라 고을에서는 손맛 좋기로 소문이 나 있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손님 접대를 맡아서 하시게 되었다.
그 날의 점심 식단은 수정과와 찹쌀 경단, 그리고 몇 가지 과일을 곁들인 비빔밥 이었다.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 명은 교실에 남아서 손님상을 차리시는 교감 선생님 사모님을 도와 드리기로 했다.
손님들이 마주 앉을 수 있도록 교실의 책상들을 적당히 배치를 하고 그 위에는 하얀 종이를 깔았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며느리, 두 고부간에 애써 만든 음식들을 한 가지씩 차례대로 가져다 놓았다.
먼저 고추장과 김치 접시를 놓았다. 뚜껑이 예쁜 하얀 그릇 속의 고추장은 통깨가 솔솔 뿌려져 있어 정갈하게 보였다. 먹기 좋은 크기로 알맞게 잘려진 김치는 파란 겉잎으로 감싸진 채로 담겨 있었고 역시 푸른 잎 사이사이에 뿌려진 통깨가 구미를 당기게 했다. ‘손님상에 놓을 김치는 저렇게 담아야 촉촉하고 싱싱하게 먹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평범하기만 한 음식들이 고명으로 뿌려진 통깨 몇 알들로 인하여 더욱 정성스러워 보이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수정과를 가지고 왔다. 꽃 모양의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겨진 흑 갈색의 음료를 우리는 처음 보았다. 생강 맛과 계피 맛이 잘 어우러진 수정과의 향기는 참으로 독특 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검은 빛깔의 무언가가 하나씩 들어 있어 우리를 몹시 궁금하게 했다. 그래서 오며 가며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숟가락으로 수정과 한 그릇을 저어보고 그 속의 것도 눌러 보았다. 그것은 물렁해진 곶감 이었다. 처마 밑에 발갛게 말라가던 곶감은 아버지 몰래 하나씩 먹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냥 먹어도 얼마나 맛이 있는데 저 속에다 넣었으니 굉장히 고급 음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위에 몇 개의 잣을 동동 띄워 모양을 낸 것에도 많은 감동을 받았다.
오전 행사가 거의 끝이 날 무렵 손님들이 들어오실 시간에 맞추어 비빔밥을 내어 놓았다. 넓은 대접에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쌀밥을 담고 하얗게 볶아진 도라지와 갈색의 고사리나물, 노르스름한 콩나물과 깨소금을 듬뿍 넣어 무친 파란 미나리나물을 얹고 채로 썬 홍당무를 볶아 색을 내었다. 오색 빛깔 고운 나물 위로 잘게 다져 익힌 쇠고기가 계란과 함께 고명으로 얹혀 있어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예쁘게 장식된 비빔밥은 여태껏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비빔밥과 함께 나온 국물은 나박김치였다. 얇게 썬 무와 푸른 잎이 적당히 어우러진 나박김치에는 가느다란 실고추가 들어 있어 한층 빛깔을 더해 주고 있었다.
몰랑몰랑한 경단은 고물이 마르지 않게 늦게 내어 오고 과일은 맨 나중에 예쁘게 깎았다.
바깥은 개교 기념식 행사로 떠들썩했지만 상차림을 돕게 된 것은 내게 있어서는 어떤 가사 실습보다도 더 값진 경험이 되었다. 하나하나가 감동의 연속이었다. 여태껏 보아온 상차림과는 사뭇 다른, 아주 화려 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런 예술품을 본 것 같았다.
음식 문화가 발달하고 영상이나 지면으로도 맛깔스런 음식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요즘에야 그리 대단한 요리는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보리밥 도시락 겨우 면하던 삼십 여
년 전의 일이니 당연히 진한 감동을 받을 만도 했다.
그날의 상차림은 고명이 있어서 더욱 돋보였다. 고추장 위에 뿌려진 하얀 통깨, 수정과 위에 동동 띄워진 잣, 그리고 비빔밥 그릇에 얌전하게 놓여진 계란 지단은 보기에도 정갈해 보였지만 식욕을 돋구는데도 충분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리 요란 하지 않으면서도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고명은 평소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즐겨 먹던 고추장이나 김치에도 한층 품격을 더해 주는 듯 했다.
어릴 적에 사람들은 나에게 누구네 고명딸이라고 불렀다. 보통 대여섯 명 이상의 남매들이 섞여서 자라던 시절에 내리 남동생만 셋을 둔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는 한번도 어머니께 고명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나물을 섞어서 양푼이 속에서 비벼진 밥 알맹이처럼 그냥 묻혀서 무의미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새삼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한 세월의 아픔만 간직하시고도 수정과처럼 맑은 향기를 지니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여생에 실백보다 깨소금보다 더 은은한 고명이 되고 싶다.
부부의 도 / 권화송
퇴계 이황은 조선의 최대 유학자다. 그는 주자의 성리학을 확충하고 발전시켜 완성한 공로가 크다. 이에 못지않게 빼어난 점은 부부의 바른 도를 몸소 실천하여 털끝만한 허물도 남기지 않은 점이다.
중국에서 성현으로 일컬어지는 분들도 부부의 도를 올바르게 행한 사람은 드물다. 삼대(三代)로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전하는 공자의 가계와 부모에게 불효하다고 출처한 증자(曾子)에 비추어 보아도 퇴계의 아내에 대한 덕행은 너무도 인격적이어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대인의 풍모를 갖추었다.
이점에 있어서는 악처 크산티페가 고함을 지르고 욕설과 함께 자신에게 퍼부은 양동이의 구정물을 뒤집어쓰고도
“천둥이 친 뒤에는 비가 오는 법이지.” 하고 해학으로 넘길 수 있었던 철인 소크라테스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인 부부도(夫婦道)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고루한 유교적인 악풍인 칠거지악이나 남존여비 사상 같은 것은 퇴계의 안중에는 없었다. 단지 부부가 각기 정한 분야를 지키고 손님처럼 서로 공경해야 하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 그의 실천 덕목일 뿐이었다.
퇴계의 부부관은 그가 혼인을 앞둔 손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나 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사이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하며 바르게 행해야 한다. 그런 관계로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와 존경함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칭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해서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려면 처음부터 조심해야 한다.”
이 편지는 부부의 근본이념을 요약한 가르침이다. 퇴계는 손님처럼 공경하였던 첫 째 부인 허씨와는 27세 때에 사별하고 3년 후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나는 일찍이 퇴계의 후처인 권씨가 분별없이 우둔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것을 들었다. 항간에 이르는 말로는 ‘권가들 딸네 사설 좋고 칠칠맞다’고 하는데 퇴계의 부인에 대하여는 어찌 된 영문을 알 수 없어 퇴계 처가의 내력을 안동권씨 대동보에서 찾아 보았다.
나에게 십륙대조 되는 할아버지 삼형제 중 끝집이니까 종십륙대조 화산공(花山公) 권주(權柱)가 권씨 부인의 조부였다.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는 관찰사 도승지까지 지낸 분인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성종이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에 공이 사약을 가지고 갔다 하여 원지에 유배되었다가 교살형으로 죽었고 부인도 자결하여 지아비를 따랐다. 권씨 부인의 아버지인 권질(權鑕)은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거제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가 기묘사화에 뒤이어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 무옥은 거짓으로 꾸민 옥사)에 연루되어 다시 예안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숙부인 권전(權槇)은 형장에서 매맞아 죽고 숙모는 관비가 되었다. 권씨 부인은 권질이 거제 유배시에 태어나 예안에 있을 때는 처녀로 성장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것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권질은 어느 날 퇴계를 조용히 불러 들여 말하였다.
“이보게 자네 연전에 상처를 하고 난 뒤 재혼을 하였는가?
퇴계는 권질의 부친인 권주를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아우인 수찬공(修撰公) 권전은 현량과 출신의 사림이므로 흠모하고 있었으므로 예안에 귀양온 권질을 자주 찾아뵈었다. 대뜸 그렇게 묻는데 난처해 하며 대답했다.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권질은 정신이 옳지 못한 딸을 불러 차를 한 잔 올리게 하고 물린 뒤에 퇴계에게 말했다.
“자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집은 양대에 걸쳐 두 번이나 사화로 인한 참화를 입어 멸문이 되지 않았는가?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놀란 내 딸이 착란을 일으켜 정신이 혼미하고 온전치 못하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런 가련한 아이를 맡길만한 데가 없었네. 자네와 같이 어진 분이 내 딸을 데리고 가서 처녀를 면케 해주게나. 부디 이 죄인의 원을 풀어주시게나.”하고 눈물을 지었다.
퇴계는 한참 동안 침묵한 후에 승낙하였고 곧 혼인하여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함께 살면서 웃지 못할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항간에 떠도는 일화 중에는 제사상을 차리다가 잘못하여 배가 굴러떨어지니 부인이 주워 치마 밑에 숨기다가 맞동서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을 퇴계가 보고 “형수님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이 사람을 잘 못 가르쳤습니다. 앞으로는 잘 가르치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신 사과를 했다. 그러고 후에 아내에게 왜 배를 숨겼느냐고 물었더니 먹으려고 그러했다 하므로 퇴계는 배를 구해서 칼로 깎아 먹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퇴계가 상가에 조문을 가려다가 도포자락이 해진 것을 보고 꿰매달라고 하자 권씨는 흰 도포에 빨강 헝겊을 대어 기웠는 것을 선생이 그냥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놀라며 “흰 도포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합니까?”하고 예의를 잘 아는 퇴계에게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신이 모자라는 아내로 하여 퇴계가 겪는 마음의 깊은 상처와 고통은 이런 일화를 통하여 짐작하고도 남는다. 퇴계는 아내를 가르치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나무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런 아내를 감싸는 보호자가 되었다. 퇴계는 권씨 부인을 하늘이 자신에게 주신 시련, 또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성덕의 체인(體認)으로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였다.
당시에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사람들은 퇴계의 아내에게 베푼 덕행을 전해 듣고 크게 감명을 입어 단란한 가정으로 되돌린 예가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내가 부족한 데가 많다고 내심 불만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퇴계의 아내와 비교해보면 자기의 아내는 하늘이 내려준 큰 복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부 간에 화합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제자 이함형(李咸亨)에게 준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상에는 부부 사이에 화합하지 못하여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에는 부인의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가 있고 모양이 못나거나 지혜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남편이 방탕하고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편이 항상 반성하고 잘 대해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하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네. 가정이 파괴되어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세. 아내의 성품이 악덕하여 고치기 어렵다 해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참고 견디며 오만 가지 수단을 다 써서라도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걸핏하면 성격차이라 하면서 애써 반성하여 고치려고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허물을 상대방에 덮어씌우며 이혼이 능사인양 쉽게 헤어지는 오늘날 세태에, 어떻게 해야 참다운 삶을 사는 것이며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자신의 인격에 허물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퇴계의 부부의 도를 한평생 화두로 지니고 산다면 집안이 언제나 화목하여 큰 광명과 행복이 깃들고 남으로부터 칭송받는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으리라. (끝)
(끝)
첫댓글 토론방식을 보니 예전과는 달리 한층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네요. 작품을 열심히 탐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 숙제가 너무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