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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방세계는 이슬람 세계와 많은 접촉을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천문학, 기하학, 수학 등 자연과학을 비롯 당시 서방세계에 비해 앞서 있었던 이슬람의 문명과 다양한 문화들을 서구 기독교세계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서방이 기독교화 되면서 소멸되다시피한 그리스의 철학사상을 이슬람을 통해 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다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서방 기독교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같은 서방 기독교세계와 이슬람과의 접촉은 역설적으로 이후 서방세계의 경제적 발전과 문예부흥, 그리고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같은 때에 등장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를 대표하는 스콜라철학자요 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중세 카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에 관한 고찰
Ⅰ. 여는 말
우리는 이따금 광대한 자연과 더불어 이 지구상에 수십 억이 넘는 인류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수천 억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계, 눈에 보이는 작고 큰 사물들, 그리고 숨쉬고 있는 나. 발달하는 과학문명으로도 속시원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이러한 인간의 삶과 세계라는 존재 전반에 걸쳐 생겨나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이다.
사실 서구 철학의 첫 문제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묻는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즉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으며 또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들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철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의 문제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13C 중세 철학의 대표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실 존재를 형이상학의 첫째 문제로 삼으면서 본래적 의미에서의 존재에 관한 고찰을 시도했다. 즉 그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고는 모든 존재사물의 근거로서의 현존재 또는 존재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자체(ipsum esse subsistens)에 집중되고 있다. 요컨대 토마스의 철학은 구체적인 경험세계의 존재자들과 밀접히 관련을 맺으면서 동시에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원천적 존재자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존재론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存在와 本質의 問題’를 서구철학의 무대 전면에 내세웠다는데 있다. 이 문제가 대두되기까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은 멀리 고대 희랍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있어 철학의 근본문제는 存在의 一과 多, 생성과 소멸, 不動과 動, 不變과 變化 등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存在와 本質의 구별은 명확하게 언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의 구성원리로서 현실태와 가능태론을 제시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현실태)과 가능적으로 있는 것(가능태)으로 구분된다. 현실태는 어떤 완전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먼저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가능태에 있었던 것이고, 가능태는 현실태의 주체로서 그것의 완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존재와 본질의 실재적 구별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직 존재와 본질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중세에 와서 이 문제는 창조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有限有의 존재와 본질 사이에 실재적 구별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즉 피조물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의 구별이 실재적인 것인지 사고상의 구별에 불과한지의 문제이다. 중세철학에 있어 처음으로 이 문제의 구별을 명백히 한 사람은 아비첸나였다. 그는 필연유에 있어서는 본질과 존재가 실재적으로 일치하지만 우연유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원리들을 수용하여 존재에 관한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아비첸나와 함께 유한유에 있어서 존재와 본질 사이의 실재적인 구별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을 存在와 本質, 형상과 질료 등의 이론으로 상세히 보충함으로써 ‘存在와 本質’의 문제를 서구철학에 도입하였다.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에 있어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진수를 이룬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문제로 제기하였던 存在와 本質이란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이것들을 구분하고 있는가?, 토마스 철학에 있어 ‘存在’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토마스의 초기 저서인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방대한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의 존재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토마스의 存在와 本質觀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현대 철학적 입장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그의 존재론에 관한 이해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Ⅱ. 몸 말
1.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 대한 이해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중심 Text로 다루고자 하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성 토마스의 많은 저작들 중 가장 초기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저작연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토마스가 파리대학 교수로 임명되기 이전, 대략 1254-1256년 쯤으로 추정된다. 저술시기로 보아 알 수 있듯이 토마스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가 완성되기 이전인 젊은 시절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그가 소속되어 있던 수도 종단의 형제들과 동료들을 위해 강의를 목적으로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 짧은 작품 안에는 토마스가 일생을 두고 탐구해 갈 철학의 전 요인들이 담겨져 있다. 즉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윤리학, 인식론, 자연철학, 심리학, 신존재증명 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 저서에서 질료와 형상, 보편성, 영원한 실재, 본질과 존재사이의 구별, 개체화의 원리, 유의 단일성, 우유문제 등등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적절히 집약하여 논한다. 후기에 이르러 각기 독립된 특수분야로 발전할 것들을 토마스는 여기에 집약해 놓은 셈이다.
이 작품은 간단한 서론과 함께 6장의 소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장에서는 존재자(being)와 본질(essence)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떻게 그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무엇보다 존재와 본질간의 실재적인 구분은 내용 전반에 걸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를 위해 토마스는 존재자들을 합성실체와 단순실체로 분류하고 그들 안에서 存在와 本質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 단순성 때문에 정의도 적합치 않은 제 1원리’로서의 神을 강조하면서 간결하면서도 결코 간단하지 만은 않은 이 작품의 마지막을 매듭짓는다.
이상의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토마스의 존재론을 이해하는데 있어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지금부터 이 작품에 나타난 존재와 본질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존재와 본질의 개념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용어는 Being(ens), Essence (essentia), To be(Act of existing;esse)이다. 이들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은 토마스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고찰을 시작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일상적으로 존재자(Being,ens,有)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들 일반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이것은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자(ens)라는 말에는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의 개념이 함께 들어있다. 즉 존재자(Being,ens,有)라고 불리는 것은 ‘있는 것’(subject which is)이나 ‘있다’(to be)를 지칭한다.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주체’나 실재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을 지시하는 명사적인 有이다. ‘있다’는 현존한다는 점,‘실존함의 현실’(act of being), 하나의 활동을 의미하는 분사적인 有이다. 일반적으로 명사적인 有는 본질(essentia)을 의미하고 분사적인 有는 존재(esse)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本質(essence)은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고, 存在(to be)는 ‘그것이 있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무엇이냐?’하는 물음에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하는 경우 이것은 본질을 제시한다. 또 ‘책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존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들에 대한 토마스의 개념정의를 살펴보자.
(1) 本質(Essentia)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1장에서 토마스는 本質이라는 용어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本質이란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의 존재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본질은 그 본질에 의해 사람이 神도 아니요 동물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요인이며 그 본질에 의해 또 그 본질 안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그런 요인인 것이다.
본질은 모든 본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질의 명칭은 철학자들에 의해 통성원리(quiddity)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졌고 이밖에도 본성(nature), 형상(form) 등으로도 일컬어질 수 있다. 이러한 용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은 本質이 존재자를 일정한 존재로 존재하게끔 하는 어떤 보편적인 規定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를 수용하고 규정할 수 있는 ‘존재에 적합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들을 담아 토마스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본질을 정의한다. 즉 “本質이란 그것(본질)을 통해서 그것(본질) 안에 존재자가 존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essence means that through which and in which a being has its act of being [esse])
한편 이같은 본질은 다음의 몇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본질은 恒久的이다. 본질이란 어떤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類나 種에 속하게 되는 것이기에 어떤 사물이 그 사물로 고찰되는 한 그것의 본질적인 특성은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본질은 不可分的이다. 본질은 어떤 경우에도 加減될 수 없다. 만일 가감된다면 그 본래의 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본질은 영원하다. 어떤 본질이 특정한 사물의 원리와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 미래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끝으로 본질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물은 그 존재에 있어서 생성 소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본래의 본질에 필연적이다. 이러한 본질의 특성은 후에 본질에만 치중하는 본질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存在(Esse)
존재(esse, to be)라는 말은 ‘있다’ 또는 ‘존재한다’ 라는 동사적인 의미로서, 라틴어 ex(from)와 sistare(stand)의 합성어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것에서부터 서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종속을 뜻한다. 즉 他存在로부터 존재를 받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자를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무한 존재자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존재를 표시할 때 existentia를 쓰지 않고 esse(act of existing)를 사용한다.
토마스 자신의 표현에 의한다면 存在(esse)는 本質을 존재하게 하는 활동자체(act of being)이다. 存在라는 것은 하나의 본질을 ‘하나의 존재자’가 되도록 만든 것이고, 본질자체는 그것이 있기 위해서 존재를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act of being) 때문에 비로소 존재자(being)이게 된다. 따라서 존재는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실제로 존재 내지 실재하게 하는 그런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이다.
“존재(esse)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esse)는 어떤 것이 그것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다.”
“있다(esse)는 종속하는 형상들의 현실이다.”
“있다(esse)는 모든 현실들의 현실성이고 또 그 이유로 인해 다른 모든 완전한 것들의 완전성이다.”
다시 말해 ‘存在’라는 것은 각각의 사물에 대해서 존재자(Being)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모든 것이 거기서 생겨나오는 그런 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하나의 최고 존재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존재는 일반적인 개념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것을 존재자체에 대한 고찰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상을 통해 드러나듯이 토마스에게 있어 本質은 사물을 무엇이게끔 하는 것이오, 存在는 그 본질을 있게끔 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을 수용하여 존재와 본질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존재와 본질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특히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존재와 본질의 관계
?토마스에 앞서 이미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존재와 본질의 관계를 논하고 있었다. 예컨대 알파라비우스나 아비첸나는 유한한 대상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 만으로는 그것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존재는 본질의 한 偶有性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본질과 존재를 구분하고 있는 이들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존재를 결코 하나의 우유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사실 나는 무엇이 사람인지 또는 불사조인지 인식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이 사물들의 본성 안에 존재를 갖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존재는 본질이나 통성원리와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The act of existing is other than essence or quiddity]
토마스에게 있어 존재와 본질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대비되어 더욱 명확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存在者(있는 것)를 현실태로 있는 것과 가능태로 있는 것으로 구분했다. 가능태(potential)란 현실태를 지향하고 현실태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고, 현실태(act)는 가능태를 실현하며 행위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구분에 대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즉 가능태로 ‘보는 것’과 현실태 내지는 실제로 ‘보는 것’이 있다. 전자는 볼 수 있는 그러한 것????천부적으로 시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시력을 절명을 통해 상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며, 후자는 지금 여기서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본다는 것은 보는 능력[가능태로서의 시력]의 현실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내부에 가능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현실태을 가지고 있다.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도래하는 과도기, 즉 최종 현실태를 향한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과도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변화’(motus)라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변화에 있어서 가능태에 앞선 현실태의 선천성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가능태에 이전에 현실태가 있지 않았더라면, 결국 가능태는 활성화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다시 말해 이 가능태는 더 이상 가능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存在와 本質에 기인하는 존재자의 형이상학적인 구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능태-현실태 이론을 存在의 방향에서 근본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은 바로 토마스에게서 이루어진다.
토마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현실속에서 볼 수 있는 존재자들에 있어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을 인정하였다. “타자로부터 어떤 것을 받는 모든 것은 가능태 안에 있는 것이다. 또 그 안에 수용된 것은 그것(수용하고 있는 것)의 현실태이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현실태(act)란 그것에 의해서 실체가 존재를 가지는 것, 즉 存在(act of being)였다. 존재는 본질의 한 속성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밑바탕이다. 그 이유는 존재라는 현실성이 없이는 본질이 존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存在는 본질에 현실성을 주는 것이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을 뜻한다. 따라서 존재가 본질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현실태가 가능태에 관해서 갖는 관계와 그 범위상 일치한다.
토마스의 이러한 견해는 다른 여러 text들로부터도 입증되고 있다. “존재할 수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은 가능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진다.” 여기서 ‘존재할 수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란 바로 존재에 적합한 것으로서의 ‘本質’을 가리킨다. ?대이교도 대전?에서도 그는 “存在는 어떤 현실태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태에 있기 때문인 까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존재와 본질 가운데 ‘存在’가 보다 더 중요하고 완전하다. 존재가 완전성 중의 완전성이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구성원리라면 본질은 제한과 규정의 원리로서 존재자를 存在와 구별하고 다른 존재자들로부터도 구별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을 실재적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실태로서의 존재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와 본질은 상호규정하고 합치하여 존재자를 구성한다. “현실적인 유한유의 본질과 존재는 결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사물계에 있어서 존재가 없는 본질이 있을 수 없으며 본질 없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본질은 존재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창조된 존재는 언제나 일정한 본질을 지닌 존재이다. 창조된 존재는 본질과 함께 생겨난다. 즉 本質은 存在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存在는 항상 어떤 것의 존재인 것이다. 지금 있는 현존재는 본질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또한 존재와 분리된 본질도 아니다. 그것은 存在로 인하여 존재하는 本質이다. 다시 말해 토마스에게 있어서 存在와 本質은 존재자(being) 내에서 분리될 수 없는 구성원리이다.
이제 존재와 본질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자 내에서 작용한다. 존재자는 이 두가지의 형이상학적인 구성원리, 즉 존재라는 현실성을 규정해서 특정한 종류의 사물을 존재이게 하고 있는 ‘本質’(essentia)과 그 본질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存在'(esse)의 합성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존재와 본질이 어떻게 구체적인 존재자들의 구성원리로서 작용하는지 살펴보겠다.
한 관계에 있는지, 특히 현실태-가능태 이론과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펴보기로 하겠다.
4. 존재자의 구성원리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첫머리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10개의 類로 분류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들 중 실체를 다시 합성실체와 단순 실체로 분류하고 있다. 합성실체란 물질적 실체를 단순실체란 지성적 실체와 神을 가리킨다.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분류는 존재자의 내적 구성원리인 存在와 本質의 작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분이 된다. 합성실체와 단순실체는 그 本質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存在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갖는다. 이제 이들 각각에 있어 존재와 본질의 작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存在者의 구성원리로서의 本質
합성실체(composite substance)란 실체자체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어 있는 실체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 정신이 감각을 통해 비로소 관계를 지니기 시작하는 유형적인 대상들, 즉 물질적 실체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합성실체들의 본질은 질료(matter)와 형상(form)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성실체 안에는 인간에서 영혼과 육체가 지시되는 것처럼 형상과 질료가 알려진다. 그런데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을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질료만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질료는 인식의 원리도 아니고, 그 자체(질료)를 따라 어떤 것이 種이나 類로 규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합성실체의 형상만이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된 것들에서 본질은 사물의 정의를 통해서 의미되는 그것이라는 점이 분명한데, 자연적 실체들의 정의에는 단지 형상뿐 아니라 질료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은 질료와 형상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2장)
토마스가 예로 들고 있듯이 우리는 인간을 말할 때 영혼만을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육체만을 인간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이라는 정의 안에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지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합성실체의 본질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단순실체의 본질은 합성실체와는 달리 질료를 포함하지 않는다. 토마스에 의하면 지성적 존재들과 같은 단순실체(simple substance)는 질료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서 질료를 그 자신의 부분으로 지니지도 않고 질료에 새겨진 형상도 아니다. 당시의 몇몇 철학자들 중에는 神 이외의 모든 정신적 존재자들, 천사, 인간영혼 등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지성적 존재에 있어 질료와 형상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창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현실태인 神과 동일시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토마스는 “비록 정신이나 영혼 같은 실체들이 질료 없는 순수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순수현실태라도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단순성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반론의 근거는 다음 단원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지성적 실체의 본질이 오직 형상뿐이라는 사실이다.[The essence of a simple substence is form alone] 지성적 실체는 형상이 곧 자신의 실체이므로 단순실체이다. 물질적 실체에서와는 달리 그것들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없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물이든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만큼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원인이 되는 것은 다른 대상자 없이도 존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이 어떤 질료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질료없이 어떤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합성실체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 모두를 포함하는 반면 단순실체의 본질은 형상뿐이다. 이점에 있어서 토마스는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본질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합성사물의 본질은 한정된 질료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질료의 역할에 의해 다수화가 되기 때문에, 어떤 것들[어떤 합성사물의 본질들]은 種에 있어서는 같으나 數에 있어서는 다르게 된다. 그러나 단순 사물의 본질은 질료 안에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런 다수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종의 많은 개체들이 그런 실체들 안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비첸나가 명확히 말하는 바와 같이 그런 실체들에 있어서는 개체들이 있는 그만큼 종들도 있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
이처럼 실체들 중 어떤 것들은 단순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합성된 것이지만 그 어느 것에나 본질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실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본질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거기에는 존재자의 또 다른 구성원리, 즉 본질이 아닌 것으로서 본질을 존재하게 하는 ‘存在’(esse)가 필요한 것이다.
(2) 存在者의 구성원리로서의 存在
토마스는 합성실체와 단순실체의 구성원리인 본질을 논한대 이어 보다 핵심적인 구성원리로서 存在(esse)를 주장한다. 이것은 현실태-가능태의 합성과 마찬가지로 본질과 함께 모든 존재자의 가장 기초적인 합성을 이룬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존재는 본질에 대해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 갖는 관계를 갖으며, 현실태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
물질적 존재자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실체인 반면에 비물질적인 유한한 존재자의 본질은 형상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실체나 비물질적인 실체를 현실적 존재자이게 하는 것은 存在(esse)이며, 존재는 본질에 대해서 흡사 현실태가 가능태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서 발견된다. 어떠한 유한한 존재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존재자는 마치 현실태가 가능태와 구별되듯이 본질과는 다른 존재자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은 본질의 영역에서 규정하거나 완성하지만, 그 본질을 현실로 하는 것은 存在(esse)이다.
토마스가 더욱 관심을 갖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단순실체에 있어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다. 단순실체의 본질에 있어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단순실체에 있어 본질이 오직 형상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형상만으로는 단순실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형상이 아닌 것으로서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 바로 ‘存在’가 필요하다. “형상은 자기 존재에 대해 마치 가능태가 자신의 현실태와 맺는 그러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통성원리가 자기존재인 단하나의 사물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물에 있어서는 자기존재와 자기통성원리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들 안에는 형상 이외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성적 실체 안에는 현실태와 가능태와의 합성, 곧 형상과 존재의 합성이 있다. 이와 같이 토마스는 ‘순수한 존재’가 아닌 한에서의 각각의 존재자나 유한한 순수정신 속에는 가능태와 현실태가 함께 존재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것으로 앞서 논란이 된 ‘질료 없는 지성적 실체라 할지라도 순수현실태와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마련된다.
결국 모든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되어 있다. 합성실체는 존재자 실체 그 자체에 있어서 합성인 질료 본질과 형상의 합성과 함께 그렇게 합성(질료) + 형상 + 존재되어 있는 存在와 本質의 이중적인 합성으로 구성된다.
存在의 합성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存在’(esse)는 합성실체나 단순실체의 구분 없이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질료에도, 형상에도, 그리고 그들이 결합된 본질에도 속하지 않는 ‘存在’(esse)의 원리를 내세움으로써 무엇보다 존재자의 구성원리에 있어 현실태로서의 存在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질료-형상의 합성도 없고 존재-본질의 합성도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단순실체, 즉 모든 존재자들의 存在根據에 대한 고찰이 남게 된다.
펴보기로 하겠다.
5. 존재와 본질의 근거 -존재 자체로서의 神
지금까지로 보아 모든 (유한한)존재자들에 있어서 존재와 본질은 상호 규정하며 합치하여 존재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자들은 어디로부터 비롯됐을까?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토마스는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에서 ‘본질이 곧 존재인 단 하나의 실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와 본질은 구분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에 대해 그것들의 존재 근거인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어야만 함을 밝히고 있다.
존재가 본성(본질)과 다른 이러한 모든 사물은 타자로부터 존재를 가져야 한다. 타자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치 제 1원인에로 귀결되는 것과 같이 자체로 존재하는 그것(one existing in virture of itself)에로 귀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게는 존재하는 원인이 되고 자체는 존재만인 양식으로 어떤 사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존재만이 아닌 모든 사물은 자기 존재의 원인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원인문제에 있어서 무한정으로 소급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뿐인 제 1존재로부터 [the first being which is simply the act of existing] 존재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이 제 1원인이 곧 神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4장)
여기서 비로소 토마스가 말하고자 했던 존재자체(very Act of existing)의 정체가 드러난다.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지는[존재와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은 그 스스로 존재를 산출하지 못한다. 그 본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외적 원인에 의하여 존재를 부여받아야만 한다. 역으로 유한한 존재자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외적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자기원인으로서 존재하여야 한다. 이 외적 원인이 바로 존재자들의 근거가 되는 제 1원인으로서의 神이다. 토마스의 제 1원인으로서의 신에 이르는 추리를 E.질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약에 알려진 모든 사물의 본성(본질)이 ‘존재’가 아니라면, 그 본성은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자체 안에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유일한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을 제시한다. ‘존재’가 어디에서나 손쉽게 부딪칠 수 있고, 각 본질이 다른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들의 공통적인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는 세계의 배후에는 그 본질이 바로 ‘존재’인 어떤 원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존재의 순수한 활동인 ‘존재’인 바 이런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또한 우주의 제 1원인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에서 신은 ‘자체로 존재하는 그것’, ‘본질이 곧 존재인 단 하나의 실재’,‘존재뿐인 제 1존재’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에게 있어 존재와 본질이 일치함을 뜻한다. 신의 존재와 본질이 일치한다는 것은 토마스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학대전?에서 그는 ‘하느님 안에서 본질과 존재가 같은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부정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본질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외부적인 것에서 원인 되어야 하는데, 神은 그 스스로 第 1能動者이기에 神 안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또한 存在는 모든 본질들의 현실태이고 신은 모든 가능성이 배제된 순수현실태이기 때문에 신의 본질은 곧 존재이다. 따라서 神은 오로지 존재와 본질의 차원에서만 말하여질 수 있으며, 정확하게는 신은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存在自體이다.
神은 어떤 것도 그의 존재에 부가될 수 없는 純粹存在이다. 다른 어떤 것과의 합성도 이루지 않는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神은 절대적인 단일성과 절대적 동일성을 지닌다. 또한 神은 보편적 존재자일 수 없다. 왜냐하면 神은 그 자체로 최고인 절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神이 다른 완전성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神은 자기의 존재자체 안에 [in His very act of existing] 모든 완전성을 탁월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神은 필연적 존재이며 神에게로부터 存在를 부여받는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자체의 神에 대해 우연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물계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들, 즉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한다. 그런 우연적인 존재자들은 필연적인 존재인 神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것이다.
요컨대 神은 본질이 존재와 구분되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의 제 1원인으로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한다. 神의 본질은 자존하는 존재자체이고 그 존재방식은 바로 自存者로서 있다. 神은 전혀 특이한 본질이 아니고 실존의 순수현실이기 때문에 神이 될 수 있는 바의 어떤 무엇(essence)이란 전혀 없고, 神에 관해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神이 있다(to be)는 것 뿐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神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神이 모세에게 일러 준 이름, 즉 ‘있는 자’(I am Who am)라고 말한다. 이제 神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체로서 존재의 최고 위계에 서게 된다. 바로 이 ‘存在自體로서의 神’에서 存在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고 토마스 존재론은 그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Ⅲ. 닫는 말
지금까지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存在와 本質觀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존재와 본질로서 합성된다. 本質(esse ntia)이란 존재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게 하는’ 것으로서 존재자의 가능적 측면이다. 본질은 그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존재를 받아들인다. 存在(esse)는 본질을 그것으로서 ‘있게끔 하는’ 현실태이다. 토마스는 이 둘을 실재적으로 구분하면서 무엇보다도 존재한다고 하는 활동(act of being), 즉 모든 것을 실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현실성으로서의 存在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본질에서는 존재가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초로 하여 존재의 근거를 찾고 존재의 제 1원인인 存在自體로서의 神을 규명했다. 이제 存在는 더 이상 偶有가 아니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토마스 철학의 핵심이다. 存在는 토마스 형이상학의 시작이요 종착점이며, 존재의 극점은 존재자체로서의 神인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존재론은 고대로부터 중세 아라비아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투명하게 남아 있던 存在와 本質의 問題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며 한갓 偶有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存在’에 초점을 맞추어 그 문제를 완결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사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의 방법, 원리 및 심지어는 존재의 기본적인 현실성에 관한 핵심적인 관념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 해도 사물의 존재방식에 집중되어 존재한다고 하는 활동(act of being)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을 존속시키면서,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강조점을 ‘本質’, 즉 ‘사물이 무엇이냐’에 두지 않고, 실존하는 활동으로서 생각되는 ‘存在’에 두었던 것이다. 코플스톤은 바로 이점에 있어서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토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本質과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본래적 의미의 存在를 구별하여 存在의 탐구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이전의 본질중심의 철학에서 존재중심의 철학으로 전향하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오늘날 토마스의 철학은 계속해서 재조명되면서 일반화된 하나의 철학사조로서 자리잡고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철학자로는 J.마리땡과 E.질송이 이다. J.마리땡은 토마스의 형이상학을 평가하면서 ‘存在’란 감성에 의하여 파악된 다양한 본질들로 옷입혀진 것이며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 하고, 이처럼 베일에 감추어진 存在를 들춰내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형이상학의 사명이라고 했다. 또한 E.질송은 토마스가 실존의 껍질에 불과한 本質이라는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存在의 순수현실태를 찾아내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토마스의 철학은 실존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저작들에 관한 성찰은 문화 전반에서 행해지고 있다.
과학문명의 이기가 겉잡을 수 없이 가속도를 내고 있는 요즈음, 토마스의 철학은 역사적인 흥미의 대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또 ‘토마스가 말하는 존재자체가 꼭 종교에서 말하는 神으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철학자이기 보다는 당대의 평범한 신학자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철학은 단순히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암흑기 중세의 소장품이 아니다. 또한 절대자를 변호하기 위한 종교의 교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세계에서 출발하여 존재자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해내는 형이상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형이상학을 막연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반성의 기회를 줄 것이다.
본고에서는 토마스의 존재(act of being)개념과 현대의 실존(existence)개념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과제로 남기면서 본고의 끝을 맺고자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적 인간 이해
I. 서 론
1. 글의 목적
성 토마스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소개하기에 앞서 서두에서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인간학의 본질과 범위를 개괄적으로 논의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성 토마스의 인간 이해의 근본적 요소와 원리들을 차례로 다룬다. 이것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내가 누구인가'라는 제목 아래 다루어진다. 전자의 경우 인간 본질의 구조분석이 이루어지고, 후자의 경우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표설정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구체적으로는 전자의 경우 인간의 본질,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서의 인간과 인간 영혼의 신비가 논의된다. 후자의 경우 인격의 자기 창조와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논의된다. 결론에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 이해의 특징들이 논의된다.
2.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이해
모든 생명체들,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은 나름대로 자신을 의식한다. 그런데 알려진 바로는 인간만이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질문한다. 예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유래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가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나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인간은 묻는다. 누구나 인간은 은연중에 implicitly 자신의 원천, 본질, 운명과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리고 철학은 그 물음들을 뚜렷하게 explicitly 형식화하여 다룬다. 철학 자체는 다름 아닌 '이 세계는 어떠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이해는 가장 고귀하고 중요하며 어렵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지식의 존엄성과 중요성은 그 대상의 존엄성 nobilitas objecti과 그것에 대한 확실성 certitudo에 의존한다.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자기 이해는 가장 탁월하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어려운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인간이므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여러 면에서 알 수 있으나, 인간은 우리에게 항상 신비 중의 신비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내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해석으로 매개되는 이해이다. 그런데 인간의 세계란 오로지 인간 중심적인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서의 존재> ens in se 그 자체이다. 인간 이해가 세계해석으로 매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본질은 역사와 문화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 본질은 직접적이 아닌 인간의 행위와 인간이 창조하는 작품에 의해 알려지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자연과 생명체의 일부를 구성한다. 셋째, 인간은 "세계적 존재" 혹은 "세계내 존재" In-der-Welt-sein로서 존재 자체에까지 개방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본성에 따라 형이상학적 존재 animal metaphysicum라는 사실을 뜻할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인간본질의 구조 분석과 실존적 의미 문제)는 근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탐구인 형이상학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형이상학적 원리들에 의해서만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이미 인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요구하거나 포함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언급 없이 존재론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이해는 "나"에 대한 언급 없이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여러가지로 언급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같이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 본질의 구조분석 structural analysis of the human essence이며, 추상적인 인간 일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적이고 충분한 인간학일 수 없다. 하나의 충분한 인간학은 "나"의 실존적 의미 문제 the question of existential meaning도 다루는 인간학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언급 없이도 인간에 대해 탐구할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언급 없이는 "나"에 대해 충분히 탐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인간으로서의 나"이며, 오로지 특수자로서의 "나"인 "나로서의 나"란 마치 인간 일반과 같이 추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인간에 대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이다.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인간에 대한 중요한 지식은 바로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과 나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해답이 그것이다.
3. 철학적 인간학
인간이 여러 차원을 지닌 한에서, 여러 학문이 인간을 질료적 탐구 대상 objectum materiale으로 한다. 인문학을 포함한 학문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신론과 자연철학 그리고 과학철학을 제외한 철학의 분야들 또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을 다룬다. 인간학, 논리학, 인식론, 윤리학, 사회철학, 법철학, 미학, 언어철학, 역사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철학만이 대상을 전체로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totum et totaliter 다룬다. 그래서 철학적 인간학만이 전체로서의 인간을 전체적으로 탐구한다. 접근방법에 따라 철학적 인간학은 다양성을 갖는다.
여러 인문과학들은 문화적, 예술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가치들을 다룬다. 자연과학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준다. 그러나 철학적 인간학만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탐구한다. 그 이유는 철학만이 항상 탐구 대상을 하나의 관점에서가 아닌 모든 관점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한 철학적 인간학은 형이상학적 인간학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인간학만이 인간의 <무엇임>의 문제 뿐 아니라, <있음>의 문제, 즉 인간 본질의 구조분석과 인간의 실존적 의미부여의 문제를 존재의 궁극적인 원리들을 적용하여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상 의미추구의 존재로서 뜻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있는 모든 것에 이러한 혹은 저러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항상 시도한다. 이 사실은 인간이 형이상학적 동물임을 말한다. 인간은 "세계 내의 존재", 혹은 "세계적 존재"로서 형이상학적 동물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 대해, 즉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개방된 존재이다. 존재는 항상 <있는 것 id quod est>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해하는 존재는 단순한 주관적인 <우리에게의 관점 quoad nos>에서의 존재나 역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in se>의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모습이다.
인간은 존재로서의 존재의 근거에 대해 질문한다. 이 질문이 바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존재 일반의 근거에 대한 질문과 나의 존재의 근거에 대한 질문을 내포한다. 전자는 형이상학 일반의 질문이며, 후자는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전자는 존재로서의 존재의 <무엇임>과 <있음>의 근거에 대한 질문이며, 후자는 나의 존재의 <무엇임>과 <있음>의 근거에 대한 질문이다. 후자는 다름 아닌 형이상학적 인간학이다. "형이상학"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은 존재일반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하나의 대상을 존재의 원리에 따라 다루는 탐구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 지식에 대한 형이상학, 윤리에 대한 형이상학 등등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형이상학 혹은 형이상학적 인간학은 그 내용이 복합적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인간의 <무엇임>과 <있음>이 인간 일반의 그러한 것으로 그리고 또한 인간 특수자의 그러한 것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 개별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인간 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그 자체가 <있음>은 소유하지 않으나 <무엇임>은 소유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 즉 보편자 인간의 <무엇임>은 인간 특수자의 <무엇임>과 전적으로는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와 후자의 관계를 탐구하고 또한 후자의 <있음>을 탐구하여야 한다.
우리는 인간 특수자 homo particularis를 거론하면서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우리는 "우리"나 "나"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우리"나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충분한 인간학은 인간 본질의 구조분석과 인간으로서의 인간 특수자의 실존적 의미부여의 문제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학문은 인간의 본질적 차원과 실존적 차원 모두를 탐구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인간의 실존적 차원은 여러가지 사건과 현상들, 즉 탄생, 구체적 일생, 사회적· 지적·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등의 삶의 차원들 그리고 죽음과 운명의 문제를 탐구 대상으로 한다.
II. 성 토마스의 인간학
1.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본질의 구조분석
1) 인간본질
본질 essentia이란 형이상학적 원리는 어떠한 것을 그것으로 id quod est 만드는, 즉 그로 인해 어떠한 것이 무엇이 되는 것 id quo est을 말한다. 본질은 <무엇임 quidditas>의 원리이다. 본질은 사실 <무엇임>의 원리일 뿐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함 debere esse>의 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본질은 구체적 내용을 가지며 이에 따라 하나의 목적을 향한 자연적 경향성 appetitus naturalis을 갖는다. 본질은 규정성과 한계성의 원리 principium determinationis et limitationis이며, 모든 유한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유한자들은 본질 essentia과 실존 esse의 복합물이다. 실존은 현실성의 원리 principium actualitatis이다. 본질은 실존을 수용하며 한계지우는 원리이다. 그런데 본질은 근본적으로 가능성의 원리 principium potentialitatis이다.
본질 그 자체 essentia secundum se는 가능적 원리나 현실적 원리도 아니다. 그 이유는 본질 그 자체는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본질은 역설적인 원리로서 흔히 오해의 대상이 된다. 본질 그 자체는 보편자 universale도 개별자 individuale도 아니다. 본질 그 자체가 보편자도 개별자도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그것은 오로지 <무엇임>의 원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말임'은 '말임' 뿐이다 equinitas est equinitas tantum. 그리고 본질은 인간의 마음안에서는 보편자이나 실제적 세계에서는 개별화되어 있다. 관념적 존재인 개념들과는 달리, 본질은 실제 세계의 실제적 원리이다. 본질 그 자체는 무와 유사하다. 그것이 실존에 의해 현실화되었을 때만, 존재의 가능적 원리이다. 그런데 가능태는 현실태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potentia dicitur ad actum. 실존 원리의 수용없이는 본질은 가능적 원리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가능적 원리도 아닌 본질이 어떻게 실존을 수용함 recipere에 있어 그것을 한계지우는지는 우리의 구상력을 넘어서 있으며 언어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없다.
보편적 본질은 동시에 현실화 actuatio되며 개별화 individuatio됨으로써 하나의 존재자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본질이 자신을 현실화하며 개별화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모두 현실성의 원리인 실존 원리에 의한 것이다. 보편적 본질은 근본적으로 가능적 원리이며 그것이 개별화되었을 때마저도 아직 가능적 원리로서 현실화됨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실존과 함께 실제적 존재의 내적 구성원리 principia intrinseca constitutiva를 이룬다. 모든 유한자에 있어서 그것이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실존은 포괄적이며 궁극적인 현실성의 원리이며 그러한 것으로서만, <있음>의 원리이다.
본질과 실존의 관계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유한자에 있어서 존재의 원리로서의 실존이 본질과 실존, 즉 가능적 원리와 현실적 원리로 나누어진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니면 유한자에 있어서 그것의 존재성이 불완전하여 가능적인 것이 동반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성, 현실성 그리고 완전성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실존에로 환원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가능적 원리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관념적 구분 distinctio rationis이 아닌 실제적 구분 distinctio realis이 있다. 실제적 구분이란, 하나가 다른 것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거나 초래하지 않는 두 질서를 말한다. <무엇임>의 질서, 즉 실체적 질서 ordo substantialis에서는 본질이 최상의 원리이지만 그것과 다른 <있음>의 질서 ordo essendi의 현실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가능적 원리이다. 그런데 <무엇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음>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일 뿐이다. <어떠한 것>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는 항상 <무엇임>과 <있음>의 복합물이다.
본질은 논리적 보편자로 흔히 오해된다. 그리고 본질은 흔히 형이상학 일반에 대한 거부로 인해 부정된다. 인간 본질도 흔히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정되거나 거부된다; 첫째, 본질에 대한 논리적 이해. 둘째, 형이상학에 대한 오해와 거부. 세째, 인간 본질이 인간 특수자의 특수성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이유. 네째, 인간의 보편본질이 인간의 자기 창조의 자유를 파괴한다는 이유. 다섯째, 관습과 문화의 다양성은 인간의 보편본질을 부정한다는 이유 등이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질은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논리적 보편자가 아니다. 그리고 본질은 가능적 원리로서만 규정성의 원리이므로 역동성이 결여된 경직된 형상성이 아니다.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는 학으로서의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오해 뿐 아니라 존재 자체와 존재의 복합성 그리고 유비성에 대한 오해에서 유래된다. 본질이 인간 개별자의 특수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본질을 보편적 형상성으로 간주하며 또한 인간개별자의 특수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 개별자의 특수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인간이라는 종 내에서의 특수성이다. 완전한 특수자는 절대자인 신이다. 자기 동일성이 불완전한 모든 유한자는 세계성 혹은 타자로서 타자를 갖는다. 그래서 그것들은 종적으로, 아니면 종 내에서 상대적인 특수자들이다.
유한자는 완전히 혹은 절대적으로 특수자일 수 없다. 유한자에 있어서 모든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이 개별화된 것이며, 따라서 그 특수성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결합으로서의 특수성이다. 인간의 보편 본질이 인간의 자유를, 그리고 자기 창조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오해하며 인간의 자기 창조를 완전히 인간 본질의 규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오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적인 기능인 자유의지를 지닌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다. 그런데 인간은 여러 차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항상 상대적인 자유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자유로운 자기 창조는 인간본질의 규정성에 따르는 것이며 합리성의 추구의 임무에 부합되며 또한 인간 본질의 본래의 경향성에 따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라는 특수자의 자유와 자기창조의 주장은 허구이며 자기 상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로써 문화와 관습의 다양성이 거론된다. 그런데 이것은 본질이 근본적으로 가능적 원리로서 다양한 양태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과 본질이 구체적 내용을 내포하는 원리로서 인간들의 근본적 유사성의 원리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인간론은 그리스 인간론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론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간략히 그리스 인간론의 몇 가지 특징만을 살펴보겠다.
첫째,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인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위대한 퓌지스를 탐구대상으로 하였다. 영혼개념은 최초로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소개되었다. 인간 영혼은 우주의 변두리에 있는 성스러운 요소인 에이터 aether의 한 조각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육체에 갇혀졌으며 자신의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이러한 사상을 근본적으로 수용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조화와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영혼은 육체보다 고귀하며 육체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여러 기능을 구분하였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자연철학의 일부로서 하나의 체계적 영혼론을 제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영혼이 생명의 원리로써 자기운동의 원리이며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식물적 · 동물적 그리고 인간적 영혼을 구분한다. 형상의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상위의 영혼은 탁월한 방식 virtualiter으로 하위의 영혼의 기능을 내포하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기능을 갖는다.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자립적 형상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생명을 지닌 유기체의 제일 현실태 actus primus corporis organici in potentia vitam habentis라고 한다. 영혼은 생명체의 실체적 형상 forma substantialis이며 궁극적 현실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생명체는 생명체로서만 존재하며 하나의 생명체는 하나의 영혼만을 소유하고 영혼은 자신의 실체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이 장미의 영혼은 저 장미의 영혼이 아니며 그 종 외부에서 사자의 영혼이 될 수 없으며 그것과 혼합될 수도 없다. 따라서 생명은 생명에서, 그리고 생명체는 생명체에서만 유래될 수 있다. 한 생명체가 생명을 상실하면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 3장에서 누스가 혼합되지 않은 amiges, 운동을 수용하지 않는 apathes, 질료에서 분리된 것으로 koristos 불멸하고 athanatos 신성하다 hagios고 한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누스가 형상을 수용하며 dektikon tous eidous 가능태에 있다 dunaton고 한다. 이것은 인간 지성이 능동적이며 동시에 수동적, 즉 현실태에 있으며 동시에 가능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철학사상 최초로 누우스 nous 원리와 피시케 psyche 원리의 관계를 설정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신중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우스가 영혼을 지배하는지, 아니면 누우스가 영혼에 속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뚜렷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플라톤도 이미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복합물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탁월함과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 인간이 마치 자신의 영혼이며 인간 영혼이 인간인 것으로 이해한다.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 아닌 이상, 그 둘은 하나의 실체를 형성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마치 인간 영혼이 육체와의 결합에서 어떠한 이득이 없으며 육체와 결합되지 않았다면 더욱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래의 자연적인 결합이 아니며 그 결합은 영혼에게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영혼의 定義 덕분에 영혼이 육체를 현실화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과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통일성을 확보하며 그로 인해 육체와의 결합이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그 결합은 적대적이 아닌 자연적 unio naturalis인 것이며 영혼과 복합체에게 좋은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누우스와 영혼과의 관계를 뚜렷히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 인간의 전체적인 통일성은 확보하지 못한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의 정의를 받아들이며 누우스를 영혼의 작용적 기능 potentia operativa animae으로 영혼에 종속시킨다. 이로 인해 그는 인간의 총체적 통일성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초월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플라톤에서와 같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영혼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와는 달리, 영혼은 육체를 활성화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것이며 영혼은 그 복합체에서 이득을 가지며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와 같이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 forma per se subsistens이며 누우스는 영혼의 우유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기 초월적인 존재로 인격이며 영적 존재가 된다. 결론적으로 서양철학사에서 인간의 총체적 통일성을 확보한 철학자는 성 토마스이다. 이 점에서 그는 최초의 진정한 철학적 인도주의자라 할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경제성의 원리와 영혼론 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분석도 수용하여, 다음과 같이 인간 본성을 설명한다; 인간은 영적 기능인 지성 intellectus과 그것을 수반하는 영적 욕구 기능 appetitus rationalis인 의지 voluntas를 갖는다. 인간은 또한 감각적 기능potentiae operativae sensitivae들을 갖는다. 이들은 5개의 외적감각인 기관들, 구상력 imaginatio, 기억력 memoria, 판단력 vis aestimativa 그리고 공통감각 sensus communis이라는 내적감각을 갖는다. 그 외에 인간은 감각적 욕구능력 appetitus concupiscibiles인 쾌와 불쾌 그리고 분노의 감각적 욕구 appetitus iracibiles를 갖는다.
진리 verum와 선함 bonum은 의미와 이해과정에 있어 다르며 따라서 지성 intellectus과 의지 voluntas는 서로 다른 기능들이다. 인간은 무엇을 이해하든 참/거짓, 선/악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지식이 있는 곳에는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가 있다. 지성은 참 일반 verum in communi에 대한 작용적 기능이다. 따라서 의지는 선 일반 bonum in communi에 대한 작용적 기능이다. 그래서 이 둘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적인 기능들이다. 의지는 지성에 대응하는 욕구기능이다. 하나인 지성은 그것이 진리 혹은 선을 이해함에 있어 이론적 intellectus theoreticus 그리고 실천적 intellectus practicus 지성으로 이해된다. 감각적 정보들은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며 그것들은 내적 감각들에 의해 정리되고 수정된다. 구상력은 대상을 재형성하며 기억력은 대상을 과거의 것으로 보관한다. 판단력은 감각적 대상의 유익함과 해로움을 평가한다. 그리고 공통감각은 대상의 전체적인 경험을 통일한다. 인간은 감각적 차원에서 모든 경험하는 것을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평가한다. 대상을 추구함에 있어 방해물이 있을 때 분노가 발생한다.
2) 인간 영혼이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며,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학설
① 인간 영혼이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라는 명제
위에서 검토된 바와 같이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복합물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영적인 이해기능과 욕구기능을 갖는다. 이에 따라 그 기능들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영적이다. 지성과 의지의 영성은 인간의 이해행위와 욕구행위의 영성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후자는 이해대상과 욕구대상의 영성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성 spiritualitas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물질성 immaterialitas은 질료에서의 자유로움을 말하며 영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비물질성을 뜻한다. 형상 forma은 완전성과 가지성의 원리 principium perfectionis et intelligibilitatis이다. 질료는 한계지움과 비가지성의 원리이다. 따라서 형상은 이미 질료에 비해 현실적인 것이다. 질료는 가능태의 원리이다. 제일질료 materia prima는 순수가능태 potentia pura이다. 제2질료 materia secunda는 양을 가진 질료 signata quantitate로서, 물질적 존재의 종 내에서의 개별화의 원리이다. 질료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질료의 조건conditiones materiae에서나 질료 그 자체 ipsa materia에서 자유로움을 말한다. 영성은 후자를 뜻한다.
영성은 높은 등급의 존재성을 뜻한다. 존재성 ens, 현실성 actualitas, 그리고 완전성 perfectio은 동일하다. 존재성은 현실성을 뜻하며, 현실성은 완전성을 뜻한다. 따라서 영성은 고등급의 존재성, 현실성과 완전성을 의미한다.
철학자들 중 유일하게 성 토마스는 인간 영혼이 그 자체 자립적인 형상 forma per se subsistens이며 동시에 육체의 실체적 형상 forma substantialis animae임을 가르친다. 영혼의 근본목표는 물체를 형상화, 현실화함으로써 생명체를 산출하는 것이다. 다른 영혼들과 같이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육체가 가진 모든 형상성, 존재성, 현실성과 완전성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 영혼과 육체의 복합물이 아니라, 인간 영혼과 제일질료의 가능태 potentialitas materiae와의 복합물이다.
그렇다면 인간 영혼이 어떻게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일 수 있을까? 그 자체 자립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질료 그 자체로부터의 자유로움인 영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 자립적인 존재는 그 자체 자립적인 작용 id quod per se subsistit habet operationes per se subsistentes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인간의 이해작용과 욕구작용이 그 자체 자립적 작용이라면 인간 영혼은 그 자체 자립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이해작용과 욕구작용은 그 자체로 고려될 때 그 자체 자립적인 작용들이다. 인간의 이해작용 intellectio이 감각작용 sensatio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이해작용은 감각작용에 근본적 per se으로가 아닌 도구적 per accidens, instrumentaliter인 방식으로 의존한다. 감각작용 없이 인간 영혼은 지적작용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지적작용을 가지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미 인간 영혼이 지적작용의 기능을 가진 이유로 영혼은 육체를 산출하여 그것과 복합물을 이루며 지성작용을 위한 감각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지적작용이나 형상이 감각작용이나 질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현실화되고 형상화된 질료는 아직도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료를 현실화하는 영혼이나 형상은 마치 질료에 의존하는 듯 보인다. 예를들면 우리는 사유기능은 마치 두뇌의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처럼 착각하거나 영혼에서 분리된 인간시체가 질료의 고유한 속성 때문에 서서히 소멸하는 것을 아직도 영혼의 작용인듯 오해한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는 그릇된 환원주의로 귀결된다.
인간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은 그 영혼이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높은 등급의 존재성, 현실성과 완전성을 뜻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만 그 자체 자립적인 형상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이 그러한 그 자체 자립성을 확보한 것은 육체와의 결합 및 그로 인해 가능한 영적인 지성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지적 작용은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에 의존하며 그것의 표현이다. 인간 영혼이 오로지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만 그 자체 자립적이라는 것은 마치 지성작용이 감각작용에 대한 전적인 의존성으로 인해서 영적작용이 된다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인간 영혼은 오로지 그 자체로 자립적 형상으로만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② 인간 영혼의 원천과 불멸성
한 존재의 원천 origo은 그것의 존재성을 따른다. 그 자체 자립적인 인간 영혼의 존재성은 질료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우므로 질료에서부터 산출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가능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이끌어진 것 ex potentia in actum educere이 아니다. 모든 생성과 소멸 generatio et corruptio은 질료로부터의 형상을 이끌어냄을 포함한다. 식물적 그리고 동물적 영혼들은 질료의 가능태로부터 이끌어졌으며 그래서 그것들은 그 자체 자립적일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생성되었으며 즉 질료의 가능성으로부터 이끌어진 것으로 부모의 영혼들로부터 유래된다. 인간 영혼은 질료에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부모들의 영혼에서 유래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한 영적인 존재들로부터 유래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되거나 생성되는데, 후자의 경우 변화 mutatio를 초래한다. 그런데 이것은 불변하는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 창조행위 creatio란 가능존재에서 현실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조행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존재를 산출 ens producere하는 행위이다. 오로지 무한자이며 완전자 ens infinitum et perfectum인 신만이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immediate 창조될 수밖에 없다.
인간 영혼은 소멸 corrumpere할 수 없다. 물질적 존재들이 소멸함에 따라, 그것들의 형상은 우유적 per accidens으로 소멸한다. 다시 말해 물질적 생명체들의 죽음에서 그것들의 영혼은 우유적으로 소멸한다. 질료에서 이끌어지지 않은 인간 영혼은 이와 같은 우유적 방식으로 소멸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per se도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불변하는 인간 영혼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③ 분리된 영혼의 상태
분리된 영혼이 실체적 형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이 홀로 존재하는 한 하나의 실체 substantia일 뿐 아니라 완성된 실체 즉 suppositum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의 <바로 이것> hoc aliquid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 사실은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사실과 죽음이 영적 영혼에게는 도대체 있어서는 안될 초자연적 praeternaturalis인 것으로 비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이 소멸하는 육체를 지닌 물질적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죽음이 자연적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 영혼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죽음이 자연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어쨌든 영혼의 자연적 상태는 인간 본질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자신의 자립성과 육체의 실체적 형상 사이에서 중립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이 물질적 존재들 사이에서는 완전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영적 존재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편안함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리된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작용들 operationes propriae인 지적 작용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전제들에 의거하여 우리는 한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작용들을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들 역시 지극히 단순하다. 분리된 영혼에도 자기의식, 그리고 지성상의 보존으로 인한 지식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영혼의 고유한 작용의 수행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고유한 작용들이 어느 정도 변질되거나 저하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영혼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스는 영혼은 같은 영혼이며, 죽음으로 인해 실체적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본질이 변질되어 영적 존재들이나 신에게서 자연적인 방식으로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분리된 영혼의 상황에 대한 성 토마스의 기술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오히려 죽음이 비정상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분리된 영혼의 상황이 비자연적이라는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분리된 영혼은 분명히 실체이며 하나의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 영혼은 자신의 종적 완전성 perfectiones specificae을 모두 소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영혼은 인간 그 자체이거나 인간성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실체도 아니다. 분리된 영혼들이 모두 하나의 종인 인간성에 참여하며 수적으로 여럿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영성의 등급이 천사들의 것보다 하위임을 보여준다. 분리된 영혼의 특이한 존재론적 위상은 그것이 순수한 영적 존재 ens spiritualis가 아니라 항상 하나의 실체적 형상, 즉 영혼이라는 점에 있다. 이 사실은 그 영혼의 영성과 존재성이 자립적인 영적 존재와는 달리 육체와의 결합을 요구하며, 인간이라는 복합체의 작용을 바탕으로 함으로써만 자신의 자립성을 지니는 듯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분리된 영혼은 영혼으로서, 그리고 실체적 형상으로서 하나의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영혼의 본질, 실존 그리고 작용은 인간의 것으로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분리된 영혼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의 인격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영혼이 우유가 아닌 이상 일종의 실체이며, 그러한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항상 자신의 육체와의 연관성을 간직한다. 인간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이 비정상적이며 비자연적이라면, 이것은 또한 철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죽음이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현상이다. 모든 물질적 존재들은 생성과 소멸의 운명을 지닌다.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서의 질료성와 육체성을 고려할 때, 인간의 죽음이란 필연적이다. 그러나 영혼의 영성이 고려되는 한 언급된 바와 같이 죽음은 또한 비자연적인 현상이다.
모든 존재들은 존재하기를, 그리고 지적 존재들은 영원히 존재하기를 욕구 desiderat esse한다. 지적 존재는 내적인 성찰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비물질적이며, 시·공간 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이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들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시·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해함으로써, 영원히 존재하기를 욕구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 자체로서 자립적 실체로서의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의 영혼으로 표현된 인간 영혼의 신비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 역설이 존재론적 불가능성은 아니다. 분리된 영혼은 육체와의 결합에 대해 자연적인 욕구를 갖는다. 그런데 한 존재의 본질 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근본적 욕구는 헛된 것일 수 없다. desiderium naturale non est inane. 그래서 인간 영혼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육체와 다시 결합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어떻게 그러한 재결합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영혼이 자신의 힘으로 육체와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영혼은 이미 육체와 다시 결합했을 뿐 아니라, 육체에서 분리되지도 않았었을 것이다.
④ 인간영혼의 신비
인간 영혼의 존재성은 철학적으로는 오직 역설로만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런데 만일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으로서 그 자체로서 자립적이라면, 그 역 또한 사실이다. 같은 역설은 여러 다른 형태로도 드러난다: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된 실체로서 하나의 <바로 이것>은 아니다. 즉 하나의 존재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실체는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고립된 영혼은 실체로서, 그리고 바로 이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바로 이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완성된 실체는 아니다.
이 역설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은 성 토마스가 제시하는 두 진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모든 존재성을 주는 것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과, 그 영혼이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과 동일한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 자체 자립적인 형상이 물질적 존재의 실체적 형상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영혼의 본질은 죽음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현상과 분리된 영혼의 상황이 초자연적 즉 비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성 토마스의 영혼에 대한 이해는 일관적일 뿐 아니라 흠잡을 데 없다. 인간의 영적 영혼의 신비는 철학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두 명제들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이 실체적 형상일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올바르며, 인간의 영혼만이 그것의 유일한 사례이다.
실체적 형상은 자신의 존재성을 실체에게 부여한다. 그 결과 인간의 모든 존재성 즉 형상성, 현실성, 완전성 그리고 실존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영혼의 것이다. 이에 따라 복합체 인간의 부분인 인간 육체의 존재성 역시 영혼의 것이다. 육체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인간은 영적 인간 영혼이 제1질료를 현실화함으로써 산출된다. 그런데 실체적 형상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즉 영적인 형상일 경우, 그것에 의해 산출된 살아있는 실체는 인격 persona이며 영적 존재 ens spirituale이다. 인격은 영적 존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의 인격성의 등급은 영적 존재의 영성의 등급을 따른다. 그러므로 인간 인격은 인간적 영적 존재이며, 그 역 또한 동일하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적 인격인 이유는 그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만, 그 역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자신의 영적 본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 자립적인 영혼 덕분에 인격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나 영적 존재란 지성 intellectus과 의지 voluntas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인간을 인격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이 자기목적적이므로 하나의 절대적 의미를 지니며, 특수성을 지닌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 존재라고 할 때는, 인간이 자신 주변의 물질적 존재들과는 달리 하나의 세계초월적이며 영적인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기실현과 궁극적 목적은 절대적 진리, 절대적 선, 절대적 아름다움과의 만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모든 영적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진리는 인간이 인격이라는 진리보다 그 자체로서는 더 중요하다.
인간 영혼이 육체를 형상화하며 현실화함으로써 인간을 산출할 때, 그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 존재성을 부여한다. 엄밀히 인간 영혼이 인간에게 무엇을 부여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영적 영혼 덕분에 무엇을 획득하는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은 지적 이해능력과 욕구능력을 지니게 되며, 인격이며 영적 존재가 된다.
인간 영혼이 죽음 이후에 존재한다면, 그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존재성을 간직하거나 그것을 인간에게서 되돌려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리된 영혼은 어느 정도 자신의 고유 작용인 지성작용과 의지작용을 지닌다. 다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을 뿐이다. 분리된 영혼은 인간이라는 종의 모든 완전성을 현실화하여 소유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며, 자신이 소유하는 존재성의 등급보다 더 높은 등급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분리된 영혼은 인간 그 자체이거나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가 아니다. 분리된 영혼은 바로 자립적 형상으로서 영혼이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결과적으로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고유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인간의 영혼이라는 존재론적 규정과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 영혼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다른 역할을 상실하지 않고 간직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인간 영혼에 대한 설명은 잠정적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성과 실존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들의 전달 혹은 부여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존재성 ens, entitas이란 무엇임과 있음의 복합이기 이전에 현실성이며 완전성이다. 실존 esse은 최고의 현실성의 원리이다. 그리고 존재성의 전달이란 실존을 전달함으로써 현실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실존은 형상은 아니나 가장 형상적인 것 forma formarum이며, 완전성 중의 완전성 perfectio perfectionum이며 현실태 중의 현실태 actus actuum이다. 실존은 현실성의 원리로서 존재성의 원리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현실성으로서의 존재성이 물질적이거나 양적인 것이 아닌 이상 우리의 구상력을 넘어서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존재성의 부여 방식 역시 그러하다. 존재성의 부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부여 행위와 다르다. 존재성의 부여는 그것을 부여하는 자에게 아무런 손실을 주지 않는다. 존재의 부여자는 존재를 부여함과 동시에 간직한다undiminished giving. 그러나 존재성의 수용자는 변화를 겪는다. 존재성의 수용은 창조되거나 아니면 실체적 혹은 우유적인 변화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인간 영혼이 인간에게 존재성을 부여할 때, 그 영혼은 아직도 자신의 존재성을 전체적으로 소유한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인간에게 존재성을 전체적으로 부여하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부여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 영혼은 자신의 모든 존재성을 인간에게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지만, 또한 그 존재성을 자신의 것으로 유지한다. 그 영혼은 인간을 현실화함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성을 소모하지 않으며, 인간 또한 영혼의 현실성을 전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 안에는 영혼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이 별개의 것으로 공존하는 듯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을 어떤 양적인 것으로 구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혼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고려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실존은 모든 존재 내에서 우선적으로 궁극적 현실성의 원리이며, 그래서 본질의 현실화의 원리로서 있음의 원리이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 내에서도 실존은 있음의 원리이기에 앞서 그 존재의 전체적 현실성의 원리다. 또한 영적 인간 영혼의 실존은 물질세계에서 물질적 있음의 원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간 안에서 인간 영혼은 항상 자신의 고유한 실존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리된 영혼은 자신의 실존의 행위를 이전과 똑같이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에게 부여했던 존재성을, 즉 인간의 존재성을 되돌려받는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다름 아닌 바로 영혼이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분리된 영혼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성을 회수하기 이전에 존재성을 갖지 않았었거나 그것을 인간에게서 되돌려 받음으로써만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 영혼과 인간은 같은 존재성을 공유하는 것인데, 다만 그것이 동시에 인간의 것이며 그 영혼의 것이다. 따라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성과 실존의 원리는 자신의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자신의 자립성 혹은 영성을 인간의 지적 기능을 바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그 영혼의 영성에서 유래되며, 그것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 본래의 그 자체 자립성은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의 영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 영혼은 바로 성 토마스의 규정대로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이며 동시에 하나의 실체적 형상이다.
이제까지 검토된 인간 영혼의 역설적 성격은 인간의 존재론적 역설적 성격을 초래한다. 인간은 여러 근본적 형이상학적 범주들의 긴장 속에 놓여져 있는 존재자이다. 그래서 인간은 전통 형이상학적 범주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즉 유한과 무한, 물질과 정신, 변화와 불변, 시간과 영원, 세계 초월성과 세계 내재성, 상대적임 및 우연함과 필연적임 및 절대적임 등이 그것이다. 인간적 인격은 모든 사유와 욕구, 행위와 제작에 있어서 영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다양한 작용에 있어서 인간 인격은 자신의 세계 내재성보다 세계 초월성을 무한히 더 드러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 영혼을 지님으로 인해 영적인 본질을 지닌, 전체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 영혼의 그 자체 자립성은 인간을 인간적 인격으로 산출하는데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영적 존재를 산출하는 데 있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세계 초월적이고 영적인 운명을 가지며, 절대자와의 만남을 자신의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2. 나는 누구인가? 인간 실존의 의미 부여
et ait (Deus) faciamus hominem ad imaginem et similitudinem nostram (kath'eikona hmeteron kai kath' homoiwsin) Gen. 1, 26 (Vul.)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그리고 우리의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 26)
1) 인격 개념
인격 persona이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를 통해서 소리가 난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personare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가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rosopon으로부터 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인격 개념에 대한, 그리고 성 토마스가 어떻게 인격을 이해했는가에 대한 많은 저술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 인격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인격이 형이상학적 개념 conceptus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 인격은 인간 개별자의 현존 praesentia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 인격성은 인간 개별자가 영적 본질 덕분에 가지는 고유한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격에 관한 형이상학적 개념은, 인격을 인격이게끔 하는 인격의 본질을 가리킨다. 개념인 이상, 인격 개념은 보편적이며 추상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인격 개념은 개별적 인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 인격이 아니라, 왜 인격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논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적 개념만이 인간 개별자가 인격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왜 인격인가를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인격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에만 그치지 않고 인간이 왜·무엇인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인격에 관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제시해야만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에티우스는 인격에 관한 정의를 내렸다. 인격이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이다. 성 토마스는 이 정의를 수용했고 대부분 현대 토마스주의자들도 이것을 수용한다. 성 토마스의 실재론적 실존적 형이상학의 범주와 원리들은 보에티우스의 인격개념을 심화시키며 확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다. 보에티우스의 인격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이유도 다양하다. 이들이 거부하는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다. 2) 인격은 정의될 수 없다. 3) 인격에 관한 형이상학적 정의나 개념은 추상적이기에, 구체적인 인격를 가리키는데 적절하지 않다.
이상의 이유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신비는 전체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에 관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나눌 수 있으며, 따라서 신비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할 수 있다. 그 결과, 인격이 신비라 하더라도 인격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별자에 대해서 개별자로써 말할 수는 없다 individuum ut individuum est ineffabile. 그러나 이것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정의될 수 있는 것처럼 인격도 정의될 수 있다. 다만 특수한 사람은 정의될 수 없다. 인격에 관한 보에티우스 정의가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부적절하다는 논점은 개별자를 개별자로서 정의하는 경우와 개별자를 어떤 종류로서 정의하는 경우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격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그리스어 hypotasis는 개체를 가리키는데, 개체는 모든 개별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실체이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하는 개별적 실체를 실존 행위에서만 추상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suppositum이다. 인격은 이성적 개체 suppositum rationale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형이상학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인격 개념을 거부하며, 다른 이들은 본질이나 실체의 역동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격 개념이 인간 개별자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격에 관한 보에티우스의 정의는 존재하는 인간 개별자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인격에 관한 보에티우스의 정의가 실존적 규정이 아닌 본질적 규정인 것은 사실이다. 정의나 개념은 보편적이며, 보편자나 한 종류를 가리키며, 그럼으로써 한 종류에 속한 개별자를 보편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 경우 개별자 각각이 지니는 유일한 특수성은 표현하지 못한다. 모든 정의가 개별자와 개별자가 지니는 특수성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듯, 인격 개념도 개별자를 함축적인 방법으로 적절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본질과 실체가 근대철학의 관념론, 논리주의와 인식론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본질은 엄밀한 보편자이거나 형식적 규정성의 원리가 아니며 또한 경직된 것이 아니다. 본질은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며 본래의 경향성을 갖고 따라서 "무엇임"과"무엇이 되야 함"의 원리로서 역동적이다. 실체 또한 속성적 우유의 추상적 주체가 아니며 그들 우유들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그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거나 이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실체는 가장 적절한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자립적 존재이다. 실체는 타자에게 술어화될 수 없는 것, 변화 안에서 불변하며 지속하는 것, 그리고 우유들의 실제적 주체이다.
그리스인들은 인격 개념을 알지 못했고 다만 여러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인격성을 예시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개별자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는 만물이 반복한다는 자연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종의 영원성에 더 큰 관심을 두었으며, 인간에 대해서도 인간 개별자가 아니라 공동체, 국가, 그리고 종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았지만 인간 개별자가 가지는 절대적 가치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 점에서 예외일 수 있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영성과 불멸성을 믿었다. 플라톤은 인간을 정신 nous을 갖는 존재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영혼을 감각적 영혼으로부터 구별했으나 정신과 인간 영혼의 관계를 뚜렷이 설명하지 못했다. 성 토마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이 인간 영혼에 속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이해는 그 철학자의 의도에 충실한 해석이라고 했다. 인간 개별자의 구원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는 인간 각자가 갖는 절대적인 가치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육화 incarnatio의 교리는 본성 natura과 인격 persona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인격 개념의 배경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신학일지라도, 이 개념은 인간을 철학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개념이다.
2) 인간 인격의 세 가지 근본적 차원
인격에 관한 형이상학적 개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는 철학자들은 토미스트들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인 인격 개념보다 인간이 무엇인가일 뿐 아니라 인간이 왜·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절하게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격은 자립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또한 자발적이고 자기 목적적이다. 그래서 인격은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며 타자로부터 양도받지 않은 자신의 존엄성 dignitas을 갖는다. 인격이 갖는 침범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리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인격은 영적 존재로서 모든 물질적 존재에 비해 특별한 존엄성을 갖는다.
노리스 클락크 Norris Clarke 교수는 토미스트들의 인격에 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인간 인격성은 세 가지 차원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자기 소유, 자기 부여 혹은 헌신, 그리고 자기 초월성이 그것이다. 존재함은 하나의 활동이며 활동을 위해서이다. 인간 인격의 영적 본질은 인격을 고도의 활동적인 자아이게끔 한다. 인간 인격은 자신을 드러내어 전개한다. 그는 자기를 소유하며 또한 헌신한다. 궁극적으로 인간 인격은 자기를 초월한다. 궁극적 차원에서 자신을 찾기 위하여 인간 인격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기를 초월한다. 그는 물질적 세계를 벗어나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자기를 초월한다.
인간 인격이 갖는 자기 소유 능력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우며 책임을 수반하는 자기 창조에 의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자기 소유란, 자신를 자기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여를 의미한다. 인간 인격은 스스로 자신을 전달하고 부여한다. 그는 자기 본질의 영성에 의해서 세계 개방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있는 모든 것에 자신을 개방하며 또한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언급한 바대로 인간 인격의 본질이 자기 소유나 수평적인 자기 부여에만 그치지 않고 수직적인 초월에서 그 자신을 드러낸다. 모든 이러한 그의 특성은 자기가 갖는 영성에 그 원천이 있다. 이 특징들 중 그의 영성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수직적인 자기 초월이다. 이 수직적 초월을 통해서 지적·문화적·도덕적·종교적 영감에 대한 그의 영적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직적 자기 초월이야말로 인간 인격성의 핵심이다.
생명체의 생명이 신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성은 더욱 신비하다. 하나의 인격은 우주 전체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영적 존재인 인격만이 자신을 철저히 이해하며 또한 우주의 신비마저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인격만이 자기 실현의 관점에서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자기 창조를 이룰 수 있다.
인간 인격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고 깊다. 인간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것들, 즉 육체, 정서, 활동, 사회적 지위 등은 지엽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오직 보여질 수 있고 측정 가능한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문화나 사회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자기 창조와 자기 실현에서 필요한 영적 가치를 산출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3) 인간 인격의 자기창조
인간 인격은 자신 고유의 존엄성을 지닌다. 그 존엄성은 그의 현존에서 이미 드러나며 또한 타자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에 그의 전체적인 존엄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 존엄성은 그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 목적성 즉 자기 목적성에 기초한다. 인간 인격의 존엄성의 구체적 표현은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자연적 권한들이다. 사회생활의 원리들 즉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사회정의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인격의 자연적인 본래의 권한에 기초한다.
인간 인격의 권한과 자유는 책임질 수 있는 자기창조의 자유와 권한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그의 자기창조는 다음과 같은 상호연관된 조건화에서만 의미가 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따라야 한다. 둘째, 이성적 동물 animal rationale인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합리성을 추구하여야 한다. 세째, 인간은 자신의 모든 기능을 최대한으로 현실화함으로써 자기충족을 이루어야 한다. 즉 존재론적 의미의 행복 eudaimonia, beatitudo을 추구하여야 한다.
이미 검토된 바와 같이 인간 본질은 규정된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다. 인격의 자기 창조는 인간 본질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연적 경향성을 따라야 한다. 이들 경향성은 규정된 목표를 향해 있다. 그리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존재인 인간 인격이 합리성을 추구하는 의무를 갖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 합리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의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도덕적 존재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진리 일반, 선 일반 그리고 아름다움 일반을 추구하는 이성적 존재의 행위들과 삶에 있어서 합리적인 것은 다름아닌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 중 어느 것도 도덕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격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자신의 자유로운 자기 규정으로서 하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도덕성의 자기목적성의 근거이다.
행복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심리학적 행복은 순간적 심리적 만족함을 뜻하며, 존재론적 행복은 인간의 존재론적 자기 실현 self-achievement과 자기 성취 self-fulfillment를 뜻한다. 후자는 주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모든 기능의 극대화를 뜻하며 객관적 의미에서는 그 기능들에 대응하는 추구의 대상들인 선들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의 지평에서 벗어나 기능에 대해 그리고 선에 대해 주관적으로 평가하거나 하나의 주관적 가치관을 토대로 자기 창조하거나 자기 실현하는 권한을 갖지 않는다.
III. 결론
본 논문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 이해가 철학사에 나타난 어느 인간 이해보다 탁월하며 그 내용이 포괄적이면서도 올바르므로 오늘날 우리가 인간학을 기획함에 있어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본인은 지극히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인간이해를 소개하려 하였다. 성 토마스의 인간학은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인간학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 그것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한국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본 논문은 일반적인 인간의 자기 이해 문제와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 문제를 거론하고 그것에 비추어 성 토마스의 인간학의 특징들을 소개하였다.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성 토마스의 인간 이해는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이다. 이 인간학은 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인간의 본질의 구조 분석과 인간실존의 의미부여 문제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다.
2. 성 토마스의 인간이해는 철학사에 나타난 어느 인간학보다 포괄적이며 전체적이다. 인간영혼론, 인간 본질의 기능과 욕구들에 대한 분석, 인간의 자연적인 행복론, 도덕적 숙고와 도덕적 판단에 대한 포괄적 이론, 사회·정치철학의 근본원리에 대한 탐구 등 그의 여러 학설은 그의 인간 이해의 기초과정이다. 따라서 그의 인간 이해는 편파적이거나 일면적이 아닌 균형잡히고 통일된 전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3. 성 토마스의 인간 이해는 그 내용이 온건하고 올바르다. 그 이유는 성 토마스가 뛰어난 통찰력과 예리한 논리적 사유를 지닐 뿐 아니라 방대한 철학적 및 신학적 지식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적 지식은 그의 철학함의 방향을 지시하였을 뿐 아니라 학설들을 구성함에 있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부정적·궁극적 기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그의 형이상학적 인간 이해는 인간의 다양한 차원들을 모두 구분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조화시킴으로써 전체적인 인간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철학이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가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철학은 세계는 어떠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한다 하겠다. 그리고 철학이 우리에게 어떠한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를 요약할 수 있다면, 철학은 이 세계의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 세계 내에 철저히 현존하며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을 가르쳐 주며, 동시에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서 절대자와의 만남에서 자기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철학은 인간의 본질, 실존적 의미 그리고 그의 운명을 훌륭히 설명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철학 한계 내에서 그 이상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철학이 인간을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지평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철학이 이 세계의 존재의 궁극적 원인이며 목적으로서 신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스스로 자기 충족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신비를 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철학은 오로지 창조자가 있다는 것과 그의 몇 가지 속성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은 인간이 절대자와의 만남 없이는 자기 상실한다는 사실 뿐 그 만남의 가능성을 밝히지 못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계시가 이것들에 대해 궁극적 해답을 주고 있다. 이 해답들은 그리스도교인에게만 타당성을 가지며 다른 이들에게는 주장들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치 은총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며 고양시키듯, 그리스도교 신학적 진리는 철학적 진리에 모순되거나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며 완성시킨다.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구원사를 통해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신비를 해명한다. 신은 창조자이기 이전에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신이며 구원자 신이다. 왜 도대체 이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어떠한가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주고있다. 즉 창조는 구원을 위해서이다. 철학은 존재론적 악과 그것의 두 표현인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악이 모두 무엇인가는 설명하나 왜 그것들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죽음, 고통과 도덕적 타락은 원죄의 결과이며 그것에 대한 형벌이다. 물리적 악과 도덕적 악이 가능하지 않은 곳에는 도덕적 선의 가능성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신은 보다 큰 선을 위해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 왜 이러한 유한성의 양태를 선택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신비로 남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의 유한성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서의 이 세계의 유한성의 양태는 원죄로 인해 변질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인간이 신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신비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앙을 바탕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계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스러운 구원의 드라마를 구성하는 장면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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