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糠山)절
강산절. 우리는 그 절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 약 여섯 달 동안 생활했던 절이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머슴의 지게에 얹혀 산길을 십 리나 걸어서 들어간 절이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길리 강산이라는 산속에 묻힌 절. 지금 생각나는 건 거의 없다. 조그만 대웅전과 풀이 무성한 마당 건너에 요사가 있던 작은 절. 절 뒤편의 옹달샘에서 개구리 알을 막대기로 헤집었던 기억이 있을 뿐.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태어날 때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탓에 절에 목숨을 팔아야 했고, 아버지가 큰 시주를 한 절이 강산절이기 때문에 스님과 각별해서 나를 맡겼었다는 것이다.
그 절이 지금은 원갑사라 불린다. 남도의 3갑사라고 해서 영광의 불갑사, 영암의 도갑사와 함께 꽤 유명한 절이 됐다. 아버지는 군내에서 면허를 가진 유일한 총기 소유자로서 산과 들을 누비는 부잣집 사냥꾼이었다. 어느 날 달아난 노루를 쫓다가 이 절 마당까지 갔고 거기서 스님을 만났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터만 남아 있던 절에 텐트를 치고 수행하시던 스님을 만나 아버지가 절을 일으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1908년 아버지와 지도에 사는 임 아무개라는 친구분과 주동이 되어 이 절 주변의 산을 사고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최소한의 절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나는 그 절에서 최초의 부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었다.
KBS 시절
1967년. 나는 꿈에 그리던 방송기자가 되었다. 목포와 광주에서 학업을 마치고 KBS 광주방송국 기자로 입사했다. 1969년 결혼을 하고 1970년 서울중앙방송국 보도부 기자로 발령받아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KBS는 남산 지금의 드라마센터 자리에 있었다.
방송기자 초년병 시절, 이른바 첫 에너지 쇼크가 왔다. 나는 그 무렵 장성탄광 광부들의 모습을 취재한 특집방송 〈지하 1,000m의 땀〉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제1회 대한민국 방송대상 보도상을 품에 안겨 주었다. 입사한 지 7년 만에 맛본 기쁨이었다.
불교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5년, 문화부 취재기자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와 만났다. 다시 조계종 총무원에는 불교계의 재사로 통하는 정휴 스님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며 언제든 스님에게 전화했다. 스님은 불교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이든 자문해주었다.
그 무렵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
어느 해 토요일 오후, 나는 정휴 스님과 함께 직지사를 찾았다. 녹원 스님을 찾아뵙고 좋은 법문을 듣자는 정휴 스님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봄기운이 완연한 5월의 해 질 녘이었던 것 같다. 직지사에 도착하자 대중들은 안양루에서 대웅전으로 이르는 길에 높은 담장을 쌓고 있었다. 녹원 스님의 상좌 해창 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은 겉에 큰 돌들을 쌓아 올리고 중간에 철근을 박고 시멘트를 넣은 다음 다시 돌을 얹어 나가는 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담장은 상당한 높이까지 완성돼 가고 있었다.
그때 녹원 스님이 나타나시더니 해창 스님을 불러오라고 대로(大怒)하는 거였다. 철근과 시멘트를 쓰지 말고 담장을 쌓으라고 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사를 망쳐 버렸다고 화를 냈다. 해창 스님은 어디 숨을 데가 없었던지 나무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해창 스님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녹원 스님은 장대로 해창 스님의 어깻죽지를 두어 번 내리친 후 단호히 명령했다.
“지금까지 쌓은 담장은 모두 해체하고 처음부터 철근을 넣지 말고, 시멘트 붓지 말고 다시 쌓아라. 알겠느냐?”
대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큰스님의 말씀을 따랐다. 전각 하나하나, 담장 하나하나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던 당시 스님들의 노력이 오늘날 직지사가 옛 가람의 모습을 되찾아 나간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극적인 분위기에서 처음 만난 녹원 스님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불사에 대한 신념, 종단에 대한 소신이 대쪽 같은 분이었다. 나는 녹원 스님도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녹원 스님은 뒷날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었다. 스님은 이후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계종이 안정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참 뒤에는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의과대학교 경주캠퍼스에 의과대학을 허가받는 일이 난항을 겪은 일이 있었다. 필자는 그때도 정휴 스님을 도와 이런저런 역할을 했다. 아직은 다 밝힐 수 없는 많은 비사가 묻혀 있다.
종단 출입기자 시절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 더.
1984년 어느 날 새벽이었다.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누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잠옷 바람으로 나갔더니 놀랍게도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다. 우선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오자 스님은 다짜고짜 팸플릿 한 장을 내밀었다. 스리랑카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도대회(WFB) 관련 안내 책자였다. 의현 스님은 당신이 이 대회에 참가해 기조연설을 하게 되어 있으니 국영방송인 KBS가 이를 중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해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5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한 해였다. 교황이 처음 왔을 때여서 한국의 모든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웃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 간의 형평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불교의 수장이 해외에 나가 기조강연을 하는데, KBS가 중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았지만 방송사 입장에서는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난색을 표하며 상의는 해보겠지만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회사에 들어와 당시 사회문화부 데스크이던 배학철 부장에게 보고를 했더니 묘안을 내놓았다. 중계를 처음부터 다 하기는 어렵지만 개막식과 기조연설은 해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WFB 스리랑카 대회는 KBS 9시 뉴스 시간에 특별편성되어 7분가량 방송되었다. 9시 뉴스에 해외에서 열린 불교 행사를 7분 이상 중계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KBS에서 나의 방송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1981년 경주에 내려가 제작한 월요기획 6부작 〈신라의 신비〉는 문화부 기자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한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첨성대와 석굴암, 에밀레종, 천마총, 금관, 유리 등을 제작하면서 신심으로 일궈낸 신라의 불교유산들을 과학적 기법으로 파헤쳐 시청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으로 기자로서는 최초로 그해 대한민국 방송대상 최우수작품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신왕오천축국전〉
〈신라의 신비〉로 한껏 고무돼 있던 나는 다시 《왕오천축국전》을 읽으면서 지도에 점을 찍어 나갔다. 1,200년 전 혜초 스님의 눈에 비친 그곳과 오늘날 KBS 카메라에 담길 그곳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이걸 프로그램으로 제작한다면 한국방송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로써는 출발지인 중국을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광둥성 광주가 보이는 장소에서 오프닝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서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회사에 ‘신왕오천축국전 제작기획안’을 제출했다. 팀은 단장인 나와 취재기자 이동근, 카메라 취재 백승대, 이종문, 고증학자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 등으로 구성했다. 취재 기록을 나중에 책으로 만들기 위해 소설가 문순태, 사진작가 김종옥 씨도 함께 가기로 했다. 당시 코란도 9인승 지프 2대를 협찬받아 여기에 150일분의 곰탕과 라면, 각종 반찬 등 포장된 식품도 실어 보낼 예정이었다. 워낙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였지만 회사는 의욕적인 계획을 과감하게 승인해주었다.
1982년 초부터 가을까지 우리는 천축국으로 가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이제 떠나면 된다. 주한 인도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대형 차량 2대로 이 많은 인원이 취재를 위해 인도를 방문한 전례가 없어서 비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1983년 2월 22일 서울을 떠났다. 주 무대인 인도의 비자를 받지 못한 채로였다. 그것은 어쩌면 혜초 스님이 비자 없이 인도 여행을 시작한 것과 비슷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당시 혜초 스님이 오직 구법을 목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행을 떠났듯이 나는 프로그램 제작을 목적으로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팀의 제작일정은 125일 동안 장장 2만km에 걸친 산과 밀림, 바다와 강, 사막과 황무지 등을 따라가는 대장정이었다. 그 어려운 취재의 선봉에 나선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옛날 사람은 홀로 맨발로 걸어서 천축으로 갔는데 여러 현대적 장비와 많은 인원으로 구성된 우리가 못 할 일이 무엇이랴 하는 배짱에서였다.
혜초의 발길을 따라가는 여정은 내내 그야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곳곳에 펼쳐진 찬연한 불적(佛蹟)을 카메라에 담으며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시작된 여정은 그런대로 차질없이 계속됐다. 인도네시아에서 비자를 받아냈고 안다만 니코바르제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제1의 성지 보드가야, 죽림정사가 있어서 포교의 거점이 되었던 라지기르, 《법화경》을 설했다는 영취산, 아소카 석주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는 바이샬리, 한 줌의 뼛조각이 물에 용해되면서 생과 사가 한 덩어리로 변하는 곳 바라나시. 계속해서 성불 45년 만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던 쿠시나가라 와 탄생지 룸비니에 이르기까지 연신 감회와 탄성 속에 취재를 해 나갔다.
우리는 인도에서의 부처님 유적을 혜초 스님의 일정에 따라 추적해 갔다. 불교가 남긴 유적 중의 최고는 단연 아잔타와 엘로라였다. 신심의 절정이 이루어 낸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증명한 동굴박물관 아잔타와 엘로라……. 불법이 넘치던 남천축국의 도성 나시크에도 들렀다. 혜초 스님이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불교를 매우 공경하고 있고 사원도 승려도 많다고 적어놓은 곳이었다.
라자스탄, 사막과 오아시스, 왕들의 땅으로 일컬어지는 핑크 도시 자이살메르와 타지마할의 영묘인 아그라, 델리, 스리나가르, 작은 티베트 하늘의 정거장으로 부르는 레, 암리차르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라호르, 세계 최고의 인류문명 발상지 모헨조다로, 히랍파, 신라 불교의 기원으로 꼽히는 불교의 십자로 탁실라, 번창한 불교의 계곡 스와트. 그리고 페샤와르, 아프가니스탄 국경선 카이버 패스에 도착하면서 우리의 125일 일정은 마침내 끝났다. 곳곳에 암초 같은 문제들이 돌출되었지만 우리는 열정 하나로 해결해 나갔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8편을 제작 · 방송했다.
제1부 서역으로 가는 길, 제2부 저기 성도의 빛이, 제3부 불타여! 불타여! 제4부 광야에 핀 돌꽃들, 제5부 동굴박물관 아잔타 엘로라, 제6부 왕들의 땅에 이는 회오리, 제7부 험한 길 거센 바람, 제8부 계림으로 가는 구름.
방송 프로그램 타이틀은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써주셨고 작곡가 길옥윤 씨는 테마음악과 배경음악을 작곡 연주해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제작진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3년 대한민국 방송대상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기자가 프로그램으로 대상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것도 최고의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혜초 스님은 《왕오천축국전》에 이런 오언시를 남겼다.
月夜瞻鄕路,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緘書參去便, 나의 편지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風急不聽廻; 바람은 빨라 내 말 듣지 않고 돌아보지 않네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 다른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雁, 해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소식 전해줄까
〈신왕오천축국전〉을 제작했을 때의 내 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한강 유등제
88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과시한 뜻깊은 스포츠 이벤트였다. 그 무렵 나는 KBS를 퇴직하고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공연기획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이 일 년여 남은 초여름 어느 날, 나는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을 만났다.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한강유등제를 봉행하자는 기획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한강에 10만 개의 연등을 띄우고 강변에서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올림픽 성공 개최를 함께 기원하자는 웅장한 규모의 행사 계획이었다. 의현 총무원장은 나의 제안서를 보고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나는 다시 올림픽 조직위원회 기획위원회의 추인을 받아야 했다. 기획위원회에는 이어령, 한영순 등 명망 있는 인사들이 끼어 있었다. 기독교인인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동의해줄 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행사 자체가 워낙 웅장하고 상상되는 비주얼이 좋아서 올림픽 공식행사로 추인되었다.
10월 13일 아침부터 잠실 주경기장 건너 둔치에 전국에서 버스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한강 변은 전국에서 모인 10만 불자들의 기도처가 됐다. 확성기에서는 찬불가와 독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한 연등대법회는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됐다. 의현 스님을 비롯한 종단 지도자 스님들이 불이 켜진 연등을 물에 띄우는 것을 시작으로 10만 연등이 화려한 불꽃으로 한강에 흐르기 시작했다.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는 잔잔한 바람을 타고 연등을 반포대교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법회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 없는 감격에 취했다. 이런 장엄한 광경을 평생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많은 문화행사가 있었지만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이처럼 받은 행사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쉽사리 달성할 수 없는 종교적 희열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연등은 우리의 불심을 과시하기에 충분했고 한국 문화의 유구하고 웅장한 멋을 유감없이 국내외에 알린 쾌거였다.
불교방송(BBS) 개국
1989년 어느 날. 조계종의 정휴 스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불교방송이 생깁니다. 이 국장이 불교방송을 만들어주시오.”
당시 총무원장은 의현 스님이었다. 나는 총무원장으로부터 불교방송 설립추진단 기획실장 임명장을 받고 현재의 불교방송 17층에서 일을 시작했다. 370평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불교방송의 조직도와 지향점 등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일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인력이었다. 앞으로 불교방송을 이끌어 나갈 제1기 신입사원을 선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신심 깊은 젊은 불자여야 했다. 이들을 잘 교육해야 방송제작에 차질이 없을 터였다. 불교계에 처음으로 진행된 대규모 불자들의 일터에 일꾼들이 몰려왔다. 신입사원들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엄격한 연수교육이 계속됐다. 월정사에서 새벽 3시부터 일정이 시작돼서 밤 9시 취침 때까지 절하고 기도하고 산행까지 쉴 틈 없이 주입식 불교 수행을 지속했다. 마지막 날 연비 찍고 법명 하나씩을 받으면서 법회를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얼굴에는 환희로움이 번져 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90년 5월 1일, 새벽 5시, 이 땅에 첫 법음이 울려 퍼졌다.
“FM 101.9MHZ,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여기는 BBS 불교방송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범종 소리 시보. 나는 시보를 들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토록 온 힘을 쏟아 본 적이 있던가?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이토록 기쁨에 몸서리친 적이 있던가? 불교방송의 탄생이 나를 전율케 했다. 특히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이라는 슬로건을 완성했을 때 그랬다. 이 슬로건은 불교의 목적인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방송적으로 풀어낸 말이다. 처음에는 ‘나누는 기쁨 깨침의 소리’였다. 이 슬로건을 방송상무였던 정휴 스님과 장상문 사장에게 제시했더니 순서를 바꾸면 더 좋겠다고 해서 바꾸었다. 요즘도 불교방송을 켜면 이 슬로건은 그대로 나온다.
방송 슬로건과 함께 불교방송의 범종시보(梵鍾時報)도 자랑할 만한 일이다. 기술진은 처음부터 불교방송도 다른 방송사처럼 전자시보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불교는 오래전부터 범종으로 시간을 알려온 전통이 있었다. 그렇다면 범종 소리를 디지털로 구워 시보로 쓰면 좋을 것 같아 의견을 냈다. 기술진에서 어렵다는 반대의견이 나왔다. 소리가 축소돼 범종 소리가 전혀 달리 나오고 효과가 반감되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라의 신비〉를 제작할 때 에밀레종 소리를 내보낸 기억을 살려 조찬길 KBS 기술본부장에게 전화해서 뜻을 전했다. 그랬더니 조 본부장은 “멋진 아이디어다. 내가 해결해서 완성해 줄게”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범종시보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다.
불교방송이 개국하면서 나는 초대 편성제작국장을 맡아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에 맞춘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 전력을 다했다. 범종시보 같은 음색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불교방송의 특성을 살려 나갈 방도를 기획하고 실천해 나갔다. 불교방송의 첫 방송은 산사의 새벽예불로 시작했다. 예불이 끝나면 곧바로 경전 해설을 하게 했다. 이는 전통적 불교 수행을 방송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불자들의 신행을 돕기 위한 의도였다. 이어 불교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시사프로그램, 오전 10시부터 불자들의 신행을 돕는 Q&A 프로그램, 낮 시간과 오후 시간의 오락프로그램, 그리고 밤 시간대의 불자들 추억 들춰내기, 밤늦은 시간 따뜻한 대화의 음악프로그램들. 불교의 전문성을 높이는 것을 시작으로 대중성을 점차 농도 깊게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중간중간 불자수첩, 신행상담 등 캠페인성 불교 상식을 유명 불자 연예인들의 입을 통해 알려주는 프로그램들을 섞어냈다. 고인이 된 김영애, 김용림 씨 등이 차비도 안 되는 출연료를 받고 열심히 해준 덕택에 신생 불교방송의 청취율은 모두가 상상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김종현, 김재진, 홍사성 등 당시 최고의 스태프들이 뒷받침을 해주어서 가능했다. 역시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불교가 내뿜는 호흡은 예상했던 대로 깊고 길다는 세평이 쏟아졌다. 광고수입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져서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방송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
국악 교성곡 〈붓다〉
불교방송에서 했던 일 가운데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은 국악 교성곡 〈붓다〉 전국 순회공연이었다. 지금이야 불교방송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명실상부한 전국방송이지만 1990년 개국 당시만 해도 서울과 경기 일원에만 들리는 그야말로 ‘작은 방송’이었다. 불교방송 설립에는 전국의 불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동참해서 기금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방송 가청권은 서울 경기 일원이라니 많은 불자들이 실망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해소할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성일 스님의 대서사시 〈붓다〉에 국악인 박범훈 씨가 곡을 붙인 국악 교성곡을 들고 전국 순회를 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울의 사찰합창단을 중심으로 100명에 이르는 연합합창단을 구성하고 전국순회공연에 들어갔다. 이 공연단에는 중앙국악관현악단과 지휘자 박범훈, 국악인 김성녀, 가수 주병선 등이 함께 나섰다.
공연 일정은 대구, 부산, 광주, 대전, 서울 순이었다. 공연은 처음부터 대성공이었다. 가는 곳마다 많은 불자들이 공연장으로 몰려들었다. 우리는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광주에서 문제가 생겼다. 광주문화예술회관은 1천2백 석인데 겨우 5백석밖에 표가 팔리지 않은 것이다. 극장을 텅텅 비워놓고 공연을 해야 할 판이었다. 100여 명에 이르는 연합합창단 보살님들이 실망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는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형(家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형은 이름은 이인행인데 곡성 태안사 청화 스님을 따르는 금륜회라는 모임의 회원으로 독실한 불자이다. 형님은 딱한 사정을 듣더니 태안사 청화 스님을 찾아뵙고 상의해보라고 했다.
나는 공연이 열리기 하루 전 새벽 2시 곡성 태안사로 달려갔다. 태안사에 도착하니 웬 노스님이 연탄을 갈고 있었다. 청화 스님을 뵈러 왔다고 했더니 스님은 힐끗 쳐다보더니 당신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찻상 하나만 있었다. 스님은 손수 차를 내려 한 잔 권하며 나의 다급한 사정을 들어주었다.
“알았습니다. 좋은 법회인데 어떻게든 되도록 해봅시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광주로 돌아왔다. 객석의 절반만 채워도 그런대로 위안으로 삼고자 했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하루 만에 모든 표가 다 팔려 객석은 만원이었다.
호사다마
지방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기분도 한껏 고조된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내 바로 위 상사인 정인섭 전무가 구내전화를 했다. 저녁에 장상문 사장과 하얏트 호텔 일식부에서 저녁 식사를 약속했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때 만난 장 사장은 평소와 달리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장 사장은 걱정하는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 국장, 내일 나는 미국으로 떠난다. 간이 굳어져 가, 이걸 이식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그동안 불교방송을 개국하고 가꿔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떠나기 전에 내가 조그만 선물을 하려고 하니 사양치 말아 달라. 둘 중 하나를 골라라. 서초동에 있는 고급빌라 한 채를 줄까? 현금을 줄까? 정말 오랫동안 생각한 내 성의다.”
나는 흠칫 놀랐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답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장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지금 받지 않겠습니다. 미국에 가서 잘 치료하시고 건강해져서 돌아오시면 그때 더욱 큰 선물을 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장 사장과 정 전무가 적잖게 놀라는 것 같았다. 요즘 돈으로 제법 큰 액수가 될 빌라를 사양하다니! 나로서는 나를 이렇게 아껴주고 인정해주는 장 사장의 깊은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장상문 사장은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한 달 후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장상문 사장이 떠난 불교방송은 몹시 흔들렸다. 어떻게든 새로운 세력에 빌붙어 일어서려는 사람, 피땀으로 만든 터전에 오물을 뿌리고 거기 제 자리를 펴려는 사람들이 발호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불교텔레비전(BTN) 개국
마침 그 무렵 정부는 미디어 환경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케이블TV 사업을 예고했다. 각 종교에도 채널을 배정한다는 것이었다. 불교가 이 사업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불교방송은 불교계를 대표해 사업자 신청을 해 허가를 받았다. 당초 계획은 전국 사찰에 주식을 팔아 설립자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불교방송은 이 주식 중 10%씩을 기증받아 지배주주가 되어 불교TV를 자회사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방송 인력의 확보나 경험 등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 이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일은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종단은 서의현 총무원장 3선 관계로 시끄러웠고 새로 불교방송 책임자로 온 사람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지면서 불교TV는 독립회사의 길을 걸어야 했다.
불교TV의 새 책임자로는 통도사 태응 스님이 선임되었다. 스님은 불교TV 설립을 기획하고 준비해 온 나와 이호, 홍사성을 불러 케이블TV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새 회사로 둥지를 옮겼다. 불교TV에서 나는 방송본부장 이호는 경영관리국장 홍사성은 편성제작국장을 맡았다. 우리는 여기서도 라디오 불교방송 개국 때처럼 한편으로는 시설을 준비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입사원을 채용해 교육하며 개국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불교TV에서는 불교방송과는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 보기로 했다. 화면 속에 숨어 있는 전통의 소리,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의 염불 소리를 화면 가득히 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1차로 시작한 프로그램이 ‘한국의 명찰’ 시리즈였다. KBS 시절 나와 〈신왕오천축국전〉을 함께 제작했던 백승대 KBS 영상팀장을 자유계약 신분으로 만든 다음 이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한국 불교문화를 집대성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잘되면 외국에도 팔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 묻혔다. 힘차게 출발했던 불교TV에서의 열정도 그만 접어야 했다.
끝나지 않은 꿈
지금껏 서술한 일화들은 다비가 끝난 잿더미 속에서 몇 알의 사리를 줍듯 돌아본 내 인생에서 빛나는 추억의 사리들이다. 담담하게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아직도 나는 가슴 벅차다.
나는 지금도 버리지 못한 꿈이 있다. 다시 한강에 수많은 연등을 띄우는 유등제를 재현하고 싶고, 산속 깊은 암자를 찍기 위해 험준한 산을 오르는 촬영 팀에 끼어 이끼 낀 바위산을 오르고 싶다. 이러한 바람이 뒷날까지 이어져 불교방송(BBS)이건 불교텔레비전(BTN)이건 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송들이 양적,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이 어떤 매체 근무자들보다 대접받는 풍토가 조성되면 좋겠다. ■
이태행 thlee5478@hanmail.net
전남 목포 출생. KBS 보도국 기자, 문화부장, 불교방송 편성제작국장, 불교TV 방송본부장, 새천년준비위 기획운영부장, 월드컵조직위 문화행사추진 본부장 등 역임. 저서로 《백남준을 말하다》(공저)가 있다. 대한민국 방송대상 대통령상, 불교언론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