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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따라다니며 도산서당에서 가르침 받지 못한 일이 한스럽다.’
‘천지의 이치에 힘써야지 어찌 산수의 즐거움만 누리겠습니까.’
도산서당을 상상하다
기대승에게 손님과 함께 귀한 선물이 왔다. 손님은 이정 김취려(而精 金就礪), 선물은 <도산기>와 <도산잡영>이 쓰여진 첩(帖)이었다.
김취려는 이황에게 배우려고 서울에서 경상북도 예안 사이를 오갔다.
서울서 예안까지는 약 244KM, 조선시대 거리 단위로 치면 약 620리이다.
산과 물을 지나야 하는 노정임에도 김취려는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정성이 대단하다. 이황은 공부를 향한 김취려의 의지와 실천을 높게 평가했다.
그 정성 때문인지 김취려는 이황이 쓴 도산기와 도산잡영 초고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로 가져와 표지를 더해 첩으로 만들었다. 곧장 기대승에게 가서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기대승의 마음을 희열로 가득 찼다. 어르신이 직접 쓴 글을 볼 수 있었다. 편지도 아니었고 도산서당을 그려낸 글들이었다. 거기에는 어르신이 글귀를 고치느라 지우고 다시 쓴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서울에 와 처음으로 뵙고 사단과 칠정에 대해 논설을 주고 받았을 때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황은 서울을 떠났다. 아쉬움이 한없던 차에 어르신의 작품과 필적을 보니 반가움, 기쁨에 절로 흥이 났다. 김취려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찬찬히 읽어갔다. 그 곳의 모습을 어찌나 상세하게 썼는지 마치 그림 보는 듯했다.
영지산(靈芝山)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陶山)이 되었다. 이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다. 골짜기가 넓고 형세가 뛰어나고 치우침이 없이 높이 솟아, 주변의 산봉우리와 계곡들이 모두 이 산에 절하면서 사방으로 둘러 안은 것 같다. 왼쪽에 있는 산을 동취병(東翠屛),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 한다. 동병(東屛)은 청량산(淸涼山)에서 나와, 이 산 동쪽에 이르러서 벌려 선 봉우리가 아련히 트였고, 서병(西屛)은 영지산에서 나와 이 산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았다. 산 뒤에 있는 물을 퇴계라 하고, 산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洛川)이라 한다. …(중략)…
정사년에서 신유년까지 5년 만에 두 채를 완성하여 겨우 거처할 만하였다. 한 채는 3칸인데, 가운데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고 했다. 주선생(朱先生)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고 하는 말에서 따왔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岩棲軒)이라 했다. 주자 운곡(雲谷)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더니 바위에 깃들여[巖棲] 조그만 효험이라도 바란다.”는 시의 내용을 따왔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또 다른 건물은 여덟 칸이니, 시습재(時習齋)ㆍ지숙료(止宿寮)ㆍ관란헌(觀瀾軒)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고 현판을 달았다.…(중략)… 우주(宇宙)를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감개한 마음이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짚고 뜰 마루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기도 한다...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 안에 쌓인 책이 가 득 하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혹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기도 잊어버린다.
기대승이 지은 <도산기> 속에 있는 도산서원 그림.
기대승이 이황의 도산기와 도산잡영에 대해 쓴 발문과 화답시가 있는 첩. 표제를을 <도산기>라고 했다. 이황이 지은 도산기의 첫 부분. 한국학호남진흥원소장 |
도산기는 글만으로도 그 곳의 그윽함을 실감하게 했다. 이황은 1557년 즈음부터 퇴계 부근의 산을 사서 건물을 지었다. 맏아들 이준은 아버지를 도와 서당의 설계도도 그렸고, 건축 과정을 챙겼다. 1561년 즈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가 완공되었다. 이황은 여기서 학문 연구와 제자 길러내기 곧 강학 공간으로 쓸 요량이었다. 완공을 기념하여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썼다. 도산서당은 늘 붐볐다. 학생들 사이에서 들어가고 싶은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도산기와 도산잡영은 문인들이라면 꼭 읽고 싶고 봐야할 글이 되었다. 명종은 도산서원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고 송인에게 도산잡영을 써 넣게 했다. 그리고는 늘 곁에 두고 완상했다고 한다.
어르신이 설계하고 지은 그 곳은 어떤 곳일까. 무엇을 하려고 그 곳을 선택하여 건물을 지었을까. 기대승도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한가롭게 풍류를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연구하고 강학하는 곳이라니. 그것도 단순한 정자 정도가 아니라 3칸 서당, 8칸짜리 학생들이 머무를 건물이라니. 기대승은 다른 이들의 정자를 드나들며 시문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서당과 학생들의 공부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는 발상은 못했다. 이황은 도산에 그것을 만들었다.
도산기와 도산잡영 첩을 오래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고맙게도 김취려는 선뜻 빌려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서스럽게 읽고 베끼기도 하면서 도산서원을 상상했다. 어르신이 만들어낸 서원의 작은 공간까지 마음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갔다.
호기(豪氣) 찬 도전, 노련한 응전
1558년 10월 즈음. 이황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젊은이는 기대승이라고 소개했다. 곧바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해 물었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단초가 된다고 한다. 칠정은 일곱가지 정이란 말인데,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이다. 성리학의 주요 논제이다. 이 즈음 이황은 주자서를 읽고 요긴한 내용을 정리한 <주자서절요>를 막 끝냈던 참이었다. 오랫동안 주자서를 읽었어도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30대 젊은이 기대승이 과감하게 이를 논하고 있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뒤에 태어난 이는 늘 두렵다고 했던가. 이황은 주자서를 꽤 깊이 읽고 이해한 듯한 기대승의 논설에 적잖이 놀랐다. 훗날 은봉 안방준은 〈죽천박선생행장(竹川朴先生行狀)〉에서 기대승의 논의 가 명쾌하다고 했다. 논리 전개의 명쾌함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 호기롭게 논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대승은 20대후반부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주자서를 읽으며 주요한 내용을 뽑아 <주자문록>도 만들었다. 1557년이었으니 이황을 만나기 약 1년 전 일이다. 이황은 놀란 기색을 온화한 표정 뒤에 두고 경청했다.
놀라기는 기대승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어르신이 처음 보는 어린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가. 그 말을 수용하면서도 은근히 반대의 논리를 막힘없이 펼치고 있었다. 기대승은 나이 차이에는 관심 없고 사단 칠정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경청하는 이황의 응대에 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10여 년이 흐른 뒤, 이황은 기대승을 만나게 된 일이야말로 정말 행운이었다고 회상했다. 권상하의 제자였던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는 ‘이황이 이(理)에 관한 글을 많이 쓰게 된 것은 기대승 같은 상대가 있어서였다.’고 했다. 기대승의 당돌한 질문이 이황의 공부를 뒤흔들어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던 것일까.
왼쪽: 『양선생왕복서』, 이미지출처:한국국학진흥원.(https://www.koreastudy.or.kr) 오른쪽 : 『양선생서』, 이미지출기대승이 이황의 도산기와 도산잡영에 대해 쓴 발문과 화답시가 있는 첩. 표제를을 <도산기>라고 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소장 처:국립중앙박물관소장 (https://www.museum.go.kr)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이 주고받았던 편지모음집. |
1558년 이후 기대승은 줄곧 사단, 칠정, 이기(理氣) 등 성리학의 요긴한 난제들을 갖고 이황에게 질문해댔다. 자신의 의견도 당당하게 펼쳐나갔다. 이황의 응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황은 기대승의 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넌지시, 은근히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7,8년 동안 진행된 두 사람의 논변(論辨)은 교류는 <양선생왕복서>에 있다. 둘다 주자서를 읽으며 내용을 간추리는 작업을 했으니 흡사 용과 호랑이가 대결하는 듯하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면 누가 이길까. 사단, 칠정, 이기 등은 재빨리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논제가 아니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쉽게 결정되 않는다. 논박의 쉼이 필요하고 다시 분석하고 궁리해야하는 주제다. 이황은 논변을 쉬는 쪽을 택했다. 1562년 10월 16일에 온화한 어조로 기대승에게 편지를 띄웠다.
지난날 왕복하던 사칠 논쟁은 내쪽에 이르러 그쳤습니다. ...(중략)... 내 논술을 돌아보니 조리가 번잡하고 사설(辭說)이 늘어졌습니다. 내 견해가 넓게 망라하지 못하고 조예가 미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선 학자들의 설을 찾아 당신의 변론에 회답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과거 시험장에서 문제를 보고 옛일들을 가져다 조목조목 답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중략)...쓸데없이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회답하려고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1562년 10월 16일에 이황이 기대승에게 쓴 편지. 그 동안의 논변들이 경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지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짐을 실은 두 사람 경중을 다투지만
헤아려 보면 저앙이 이미 공평하였네
을쪽을 이기어 갑쪽으로 돌리면
짐의 균형 어느 때나 공평해질까
兩人駄物重輕爭 商度低昂亦已平
更剋乙邊歸盡甲 幾時駄勢得勻停
이황은 그동안의 논설들이 마치 경쟁하듯 했다고 말했다. 질문이 오면 이리저리 찾아서 응답하기에 바쁘기만 했을 뿐 학문 진전에 도움이 안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지었다. 짐의 무게를 다투지만 사실 알고 보면 공평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기는 데에 치중하다보니 공평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기대승의 질문으로 인해 이황 자신의 학문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터이지만, 이황은 논변을 주고 받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어르신답게 경계했다.
지난날 서로 주고받은 글에서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대략 말했던 것은 선생님께 감히 숨길 수 없어서였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간절히 깨우쳐주시니 경계가 되고 두려운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들 잘못은 진실한 공부를 하지 않고 말로만 서로 경쟁하는 데 있으니 병통의 근원을 알아차려 반성해 찾는다면 헛된 말에 이르지는 않은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진실로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 병에 딱 맞는 약입니다.…(중략)…저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기로 자허하고 문장으로 자임했습니다. 늦게야 성현의 가르침에 뜻을 두었지만 오랫동안 방종하게 지내서 법도로써 저를 단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하니 어찌 조금이라도 수양했겠습니까.…(중략)…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기대승이 1563년 2월 12일에 이황에게 쓴 편지. 이황이 상호 논변을 쉬자고 하자 기대승은 이를 수긍하고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는 내용을 담았다. 전남대박물관 소장
기대승은 이황의 진심과 의도를 이해했다.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황이 자책하는 겸손한 말로 충고 아닌 충고하니, 기대승도 겸손한 태도도 받아들였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 고치는데 좋다고 한다. 하지만 쓴약을 선택하는 여부는 인품과 도량에 따라 다르다. 기대승은 쓴말 속 명약(名藥)을 읽었다. 학문의 어르신이 타이른 말을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꾸짖었다. 가르침을 갈망하고 병통을 고치겠다고 했다. 온건히 말하는 어르신의 노련함, 공손히 수용하는 어린 사람의 도량이 엇비슷하다. 이것이 나이 차이, 학문적 견해 차이를 뛰어넘어 끝까지 예와 의를 지켜낸 비결이리라.
‘도산서당’ 같은 명승지를 꿈꾸다
기대승은 1570년 즈음에야 <도산기> <도산잡영>을 읽고 말미에 발문과 화답시를 썼다. 김취려는 첩을 빌려주면서 도산기 발문과 화답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었다. 이황이 기문과 시를 지었을 때가 1561년 즈음이었다. 김취려가 얻어 온 글은 이황의 수정을 했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초고였다. 그렇다면 기대승이 김취려에게 글을 얻어 본 때는 1561년 이후였을 터이다. 그리고 1570년에 발문을 첩의 말미에 부쳤으니 적어도 7,8년 동안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대승의 변명은 이렇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오니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때때로 이것을 펼쳐 놓고 읊조려니 선생의 은미한 뜻을 한두 가지나마 엿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선생께서 한가롭게 지내셨기에 다른 날보다 스스로 즐기심이 더 깊었을 터이다. 다만 내가 선생을 모시고 당이나 단, 바위, 대(臺) 등의 사이에서 따라다니며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기대승이 지은 <도산기에 대한 발문>, 한국학호남진흥원 소장 |
1570년 2월, 기대승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직행했다. 그제서야 도산기, 도산잡영을 음미할 여유가 생겼다. 도산 속 서당이라니, 멋진 일이었다. 글을 읽으며, 4월 17일에 이황에게 편지를 썼다.
고향으로 돌아와 방 안에 누워서 고루한 저의 학문을 익히고 뜻을 캐어 보니 자못 맛이 있어, 가난한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변변찮은 음식을 달게 여기는 것을 거의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산언덕에 작은 초암(草庵)을 신축(新築)하여 노닐며 지낼 곳으로 삼기로 하고, 낙(樂) 자를 그 초암의 이름으로 걸고자 합니다. 이는 대개 전에 주신 글에 “가난을 마땅히 즐겁게 여겨야 한다.〔貧當可樂〕”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소망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 산이 비록 높지는 않으나 안계(眼界)가 두루 수백 리나 되므로 집이 완성되어 거처하게 되면 진실로 조용하게 수양하기에 합당한 곳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한가함을 누리며 학문과 수양에 전념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작은 암자를 새로 지어 ‘낙암(樂菴)’이라고 불렀다. 이황의 권고를 적극 수용하여 지은 이름이다. 낙암 동쪽에 또 몇 칸 건물을 들였다. 이름을 동료(東寮)라고 지었다.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삼았다. 기대승의 시장(諡狀)을 쓴 이식은 ‘낙암이란 편액을 걸고 학문을 닦는 장소로 삼으니, 이에 따르고 배우려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황은 그 뜻을 지지하고 기문과 편액 글자도 써 주었다. 이황의 지지를 받으면서 기대승은 5월에 도산기 발문을 쓰고 화답시를 지어 완성했다. <도산기>는 이황이 도산의 터를 얻고 건물을 지은 과정, 건물 이름 유래, 서당 주변 풍경 등을 기록한 글이다. <도산잡영>은 7언시 18수와 5언시 26수이다. 완락재, 암서헌 등과 같은 도산서당 건물의 공간부터 몽천(蒙泉), 열정(洌井), 어량(魚梁), 토성(土城), 교동(校洞) 등과 같이 서당 주변 장소, 먼 곳의 경치까지 시에 담았다. 기대승은 7언시 18수에 화답했다. 한 편씩 화답하면서 이황의 마음과 도산서당의 모습을 헤아리고 상상했다.
천연대를 읊은 시.
왼쪽이 이황의 시, 오른쪽이 기대승의 화답시이다.
도산서당 건물 앞에는 천연대가 있다. 높고 큰 바위여서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탁영담과 낙동강 물길을 볼 수 있다. 사계절 자연 변화를 보기에 알맞은 지점이다. 책 속에 있는 천지나 자연의 이치,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사유할 수 있다. 천연대는 그 자체가 학문 공간이었다. 기대승은 도산서당 공간을 설계한 이황의 마음도 이러했으리라 여겼다. 기대승도 그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연 속 정자에서 산수의 즐거움만 누리는 공간을 꿈꾸지는 않았다.
저 푸른 하늘을 누가 우러르고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아득한 땅을 누가 굽어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을 알아서 자신에게 돌이켜보는 사람은 적습니다.…(중략)…한계가 있는 인생으로서 끝없는 변화를 다스리려면,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천지의 차고 비는〔盈虛〕 이치와 인물이 영췌(榮悴)하는 이치에 힘써야 합니다. 어찌 산수의 즐거움〔樂〕만 오로지 하겠습니까.
기대승의 <면앙정기> 이미지출처: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
송순은 면앙정을 완공하고 기대승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기대승은 면앙정기에서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도산서당의 천연대에서 하듯이 자연 변화와 이치를 살피고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 이치를 밝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양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면앙정이란 공간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했다. 산수 속에서 한가로움만을 누리며 즐기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봉의 꿈, 꾸지만 말고 이루어야 : 학문•문학 흥성의 호남으로
학문 연구와 강학이 있는 공간. 기대승은 낙암에서 그것을 이루려고 했던 듯하다. 그런데 도산서당의 의미를 더 자세히 캐물어보기도 전에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도산기에 발문을 쓰고 화답시도 지었지만 이황에게 보이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신의 게으름을 질책했다. 기대승 홀로 그 의미를 궁구해야했다. 하지만 기대승도 곧 세상을 떴다. 이황에게서 낙암의 기문과 편액 글자를 받은 지 2년도 채 안된 때였다. 택당 이식은 ‘기대승이 일찍 죽어 강론을 못했고 호남에 학문이 전해짐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하늘이 기대승에게 이황의 나이만큼 주었다면, 호남에도 도산서당 못지 않은 명문 강학 공간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호남은 대대로 학문과 문학이 함께 흥성하는 명승지로 부상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의 꿈의 설계대로 공간을 짓는 일은 우리의 몫일 터이다.
<도움 받은 글들>
『(고봉종가 기대승)도산기』 필사본, 목판본, 한국학호남진흥원소장
기대승(1998), 『(국역)고봉집』, 민족문화추진회.
김영두 역(2003),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고영진(2017), 「조선시대 영•호남의 학문과 사상 교류」, 『영남학』 60, 영남문화연구원.
김경호(2012), 「고봉 기대승의 낙향과 삶으로서의 철학」, 『한국인물사연구』 17, 한국인물사연구소.
안동교(2024), 「『양선생문답첩』의 구성과 문화유산적 가치」, 『고봉 기대승 종가 자료의 심층연구 학술대회 자료집』, 한국학호남진흥원.
이상원(2015), 「송순의 면앙정 구축과 <면앙정가> 창작 시기」, 『한국고시가문화연구』 35, 한국고시가문화학회.
임준성(2010), 「고봉친필본 도산기 해제」, 『고시가연구』 26, 한국고시가학회.
추제협(2018), 「이황의 도산잡영에 그린 도산의 삶과 산수지락」, 『퇴계학논집』 23, 영남퇴계학연구원.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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