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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엄 1세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회담에서 프랑스가 보관 중인 11세기 유물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영국에 빌려주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어요. 영국 측은 "프랑스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빌려준 유물 가운데 최고"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고 해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1세기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바이외 지역에서 만든 직물(織物·실로 짠 물건) 벽걸이로, '정복왕 윌리엄'의 업적이 50여 개 장면으로 묘사돼 있는 중요한 문화재예요. 중세 영국의 역사적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오늘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담긴 정복왕 윌리엄의 이야기를 알아볼게요.
◇노르망디의 윌리엄, 영국 왕위를 노리다
7~11세기 중세 영국은 귀족 회의인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에서 왕을 선출하고 있었어요. 왕은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나왔지만 귀족 회의에서 뽑았기 때문에 권한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지요. 당시 영국 왕실을 '앵글로 색슨' 왕조라고 불러요.
1042년 위테나게모트에서 웨섹스 가문의 에드워드(1042~1066)를 새 영국 왕으로 선출했어요.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여동생이었지요. 어릴 적 에드워드는 외가인 노르망디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노르망디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어요.
당시 왕 못지않게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에드워드의 장인인 고드윈 백작이었어요. 고드윈은 자기 자식들 중 하나가 에드워드 다음으로 영국 왕이 되길 바랐지요.
1066년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 없이 죽자, 다음 영국 왕이 누가 되느냐를 두고 여러 사람이 경쟁을 벌였어요. 고드윈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럴드와 토스티그가 먼저 나섰고, 에드워드의 외가 친척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도 영국 왕 자리를 노렸지요. 하지만 위테나게모트는 고드윈의 아들인 해럴드를 새 영국 왕으로 뽑았답니다. 그가 앵글로 색슨 시대 마지막 왕인 '해럴드 2세'(1022~1066)예요.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영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영국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지까지 얻어낸 윌리엄은 해럴드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직접 영국 출정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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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해럴드 왕(왼쪽에서 둘째)의 모습을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 /위키피디아
시작은 순탄치 않았어요. 노르망디의 여러 제후가 굳이 바다 건너 영국까지 가서 전투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에 윌리엄은 전리품과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험가를 공모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플랑드르와 브르타뉴·앙주·메인 등 프랑스 주요 지역에서 전투 자원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약 8000명에 달하는 당시로선 대규모 군대를 결성한 윌리엄은 때를 기다립니다.
당시 영국은 정치·군사적인 위기에 휩싸여 있었는데요. 해럴드는 말만 영국 왕이지 사실상 본래 근거지였던 웨섹스 지역에서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해럴드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해럴드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며칠 후 영국 남쪽 해안가에 윌리엄의 군대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답니다.
◇영국을 유럽으로 만든 전투 동생과의 전투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해럴드 군대는 1066년 10월 14일,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 근처에서 윌리엄의 군대와 맞붙습니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윌리엄 군대는 해럴드 군대를 '거짓 퇴각'과 '기습 공격' 전략으로 크게 무찔렀지요.
전투 초반 윌리엄 기병대(말을 탄 병사들 군대)는 해럴드 보병대(걸어서 싸우는 군대)를 공격하지 않고 마치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처럼 꾸몄어요. 승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해럴드 보병대가 윌리엄 군대를 뒤쫓자 기병대는 갑자기 뒤돌아서 반격을 했고, 이런 기습 공격을 몇 차례 반복하며 해럴드 군대를 와해시켰지요.
전투 마지막, 윌리엄이 궁병대에 하늘 높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자, 해럴드의 군사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맞으며 쓰러졌답니다. 해럴드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요. 이를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라고 해요.
이 전투가 바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자수로 새겨져 있어요. 태피스트리에는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여러 사료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윌리엄 등에게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요. 윌리엄의 이복동생이 제작을 주도한 태피스트리이기에 해럴드가 '신(神)이 쏜 화살', 즉 신이 정해준 운명 때문에 죽은 것으로 꾸며낸 것이지요.
전투 직후 윌리엄은 그해 성탄절에 영국 왕위(윌리엄 1세·1027~1087)에 올랐어요. 이렇게 해서 영국에는 약 600년 앵글로 색슨 왕조가 문을 닫고 유럽 대륙 세력인 '노르만 왕조'(1066~1154)가 들어섰답니다.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했어요. 기존 앵글로 색슨 시대의 법과 제도, 풍습 등을 이어갔고 색슨족이든 노르만족이든 구분하지 않고 기사의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기도 했어요. 물론 대륙식 풍습을 심어놓기도 해서, 주(州) 장관으로 노르만인만 임명했고 프랑스처럼 주 재판권과 교회 재판권을 분리했지요. 또 왕을 뽑는 귀족 회의 대신, 왕을 섬기는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프랑스식 왕실 회의를 도입했어요.
윌리엄의 정책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솔즈베리 서약'과 '둠즈데이 북' 편찬인데요. 윌리엄은 전국의 귀족들을 소집해 국왕에게 충성하는 솔즈베리 서약을 하도록 하고, 왕의 명령을 받은 위원들을 보내 사상 최초의 토지 대장(둠즈데이 북)을 만들도록 했어요. 영국의 모든 토지와 농민들이 어떤 주, 어떤 영주에게 얼마만큼 소속돼 있는지 분명히 해 세금을 정확하게 징수하도록 한 행정 자료였지요. 앵글로 색슨 시대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던 자유민들은 이렇게 점차 중앙집권식 봉건 제도로 포섭돼 갔답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1066년 윌리엄의 승리를 '영국이 진정한 유럽 국가가 된 결정적 계기'라고 평가했어요. 그만큼 1066년은 영국이 유럽 대륙의 문화를 흡수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는 것이지요. 현재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절차를 밟고 있는 영국에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왕들의 별명]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의 별명은 '정복왕'이었어요. 이처럼 중세 유럽의 왕들은 대개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칭송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붙였지요. 에드워드 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을 만큼 신앙심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참회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12세기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전쟁터에서 용맹함을 자주 발휘해 '사자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