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바람맞히다 외 1편
권혁재
시월에 어느 시인이 보내준 시집을
아내가 받아 거풍을 시키려다
베란다 문살에 끼워두고 잊고 지냈다
아직 뜯지 않은 겉봉투에
비와 바람, 추위와 허기 그리고 울음으로부터
창문을 두드리며 담쟁이처럼 뻗어난
새로운 시들,
퉁퉁 불은 시집을 만지작거리며
굽어진 시의 길을 펴면서 읽었다
불룩한 갈피를 넘길 때마다
라라파비안의 아다지오 노래가 끝나도
바람에 쏟아진 커피가 흘러 번져도
비에 시집냄새가 옅어져도
나는 시집을 바람맞히며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시의 행간에서 빠져나간 잉크자국이
뒤쪽의 행으로도 연결되는 물먹은 시간을
시집은 어쩌면 다시 말리면서 견디어 왔으리라
마른 갈피가 뻣뻣해진 두께로
손에 와 닿을 때
한 길로 모인 시들이 거뭇거뭇 다가왔다
시집이 팥같이 알맞게 잘 불은
동짓날 저녁 무렵이었다.
대설주의보 2
눈발에 삐라가 섞여 내렸다
산으로 간 발자국 위로
흔적을 지우며 내리는 삐라
어리목에서 솟은 눈발이
성판악 쪽으로 유탄처럼 흩어졌다
먹이를 찾지 못한 고라니들이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다
불안한 발자국만 남긴 정오
내리는 대설을 타고
마을이 차츰 포위망 속으로 갇혔다
소개령의 전갈을 받지 못한 집은
대설에도 검붉게 타올라
대설을 뚫고 기어오르는
검은 사냥꾼들을 노려보았다
비명이 모이면 분노가 된다고
절망이 하늘에 닿으면 눈이 된다고
어승생 계곡에서 수군거리는 바람들
살은 사람의 발자국과
살아 남은 사람의 마을에
눈이 온다고
대설이 자유처럼 온다고
한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문어}에서
권혁재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집 『안경을 흘리다』 『엉겅퀴꽃』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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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의 시집을 바람맞히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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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8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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