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돈이 많고 '킹 메이커' 역할을 했더라도 궁극적으로 '킹'(정치 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당선 1등 공신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아버지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자산가인 에론 머스크의 생각이다. 그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최근 극한으로 치달은 트럼프 대통령과 아들 머스크 간의 갈등에 대해 "많이 지쳤고,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아들이 실수한 것이고, 대통령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사진출처:텔레그램
그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심 권력과 맞서고 있는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SEO)겸 창업자의 운명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오랫동안 '은둔의 기업인' 이미지를 굳혀온 두로프 CEO가 최근 부쩍 권력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데, 그에 따른 우려도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두로프는 10일 공개된 터커 칼슨 전 미 폭스 뉴스 앵커(언론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8월 파리 공항에서 체포된 뒤 휴대전화를 빼앗기고 제대로 된 침구(매트리스와 침대보, 베게 등)와 창문이 없는 7평방미터(㎡)방에 나흘간 갇혀 있었다"며 "프랑스 당국이 나에게 제기하는 혐의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프랑스 사법 당국)은 처음에 우리(텔레그램)가 법적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범죄자와 플랫폼의) '공모' 해석은 억지이고, 전례가 거의 없다는 게 변호사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도 프랑스 당국이 자신에게 무슨 혐의를 제기하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터커 칼슨 전 미 폭스 뉴스 앵커와 회견하는 두로프 CEO/사진출처:스트라나.ua 영상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체포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두로프 CEO가 "나의 체포가 국적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자, 칼슨은 "사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에 두로프 CEO는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또 보안상의 이유와 주의력 집중을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일주일에 두 번 텔레그램 앱의 새로운 기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시간에는 디지털 보안을 위해 노트북과 태블릿을 사용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현재 프랑스 당국에 의해 예비 기소된 상태다. 텔레그램 내 아동 음란물 유포·마약 밀매·조직적 사기 및 자금 세탁 등을 방치해 사실상 범법자들과 공모하고 수사 당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불응한 혐의다. 보석금 500만유로(약 74억원)를 내는 조건으로 석방됐으나 프랑스 법원의 엄격한 감독 하에 발이 묶여 있다.
공항에서 함께 체포된 그의 여자 친구와 파리 시내를 산책하는 두로프/영상 캡처
그는 지난 3월 프랑스 사법 당국의 일시 허가를 받아 텔레그램 본사가 있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다녀왔으나, 5월 27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자유포럼'(인권재단 휴먼 나이츠 파운데이션 주최)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언론의 자유와 감시, 디지털 권리 등을 주제로 한 오슬로 자유포럼에는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해 화상으로 기조연설했다.
그는 또 투자 관련 회의를 위한 미국 여행을 프랑스 사법당국에 요청했으나 거부됐다. 텔레그램은 350억 달러 규모의 중국어 사이버 범죄 네트워크와 연결된 수천 개의 채널을 차단해야만 했다.
프랑스 당국에 대한 그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의 도발적인 언행은 단순한 불만 차원을 넘어선다. 프랑스 정보기관의 루마니아 대선 개입 폭로가 대표적이다. 그는 아예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확언했다.
지난해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J D 밴스 미 부통령이 나중에 지적한 대로,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극우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한 것이다.
승리한 대선 1차 투표가 무효화되고, 출마 자체도 금지된 제오르제스쿠 극우 성향 후보/사진출처:페이스북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당시, 약 2만5천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 보름 전부터 제오르제스쿠 후보와 관련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하고,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시 치러진 1차 투표 결과, 역시 극우 세력 후보인 조지 시미온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유럽은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 CEO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 그는 이날 텔레그램 채널에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잠재워 달라고 요청했다"면서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며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다. 루마니아 국민은 둘 다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었다.
프랑스 당국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엑스(X)에 유포되고 있다"며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모든 사람(두로프 지목/편집자)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은 "두로프 CEO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요구 주장을 부인했다.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가짜"라고 적었다.
두로프는 20일 SNS에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중략) 주요 타깃은 항상 지정학적 문제였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 CEO의 SNS 포스팅/캡처
그는 또 "올해 봄, 니콜라 레르네르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20일 엑스(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해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결선투표에서 패배한 시미온 대선 후보/사진출처:페이스 북
두로프 CEO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22일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두로프 CEO는 기다렸다는 듯이 엑스(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잠재워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하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대처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