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러시아의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 '스푸트니크V'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 시기가 대략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스푸트니크V'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심사 중단 한달여 만이다.
스푸트니크V는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신종 코로나 백신으로 등록됐지만, WHO와 유럽연합(EU)에서 긴급 사용 승인을 얻기 위해 고투를 벌여왔다. 지루하고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러시아측은 지난해 10월 WHO에 긴급 승인 등록을, EU의 식약처 격인 유럽의약품청(EMA)에는 지난 1월 긴급 사용 승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증 과정에서 러시아측은 자체 플랫폼으로 개발한 스푸트니크V에 관한 모든 자료의 공개를 꺼렸고, WHO와 EMA는 평가에 필요한 자료가 충분히 제공돼야 한다며 버티는 양상을 보였다.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사진출처:RDIF
결과적으로는 러시아 측의 '판정패'로 귀결되는 듯하다. 당초 러시아 측은 백신 개발 방식이 비록 미국·유럽과는 다르더라도, 개발 능력 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해 EMA와 WHO의 승인이 곧바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전세계 수십개국에서 이뤄진 접종에서 백신의 안정성과 효능도 확인됐다.
하지만 백신은 과거 냉전시절의 우주및 핵무기 개발 경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의약품의 긴급 사용에는 안전성이 최우선시되고, 실제 접종에 앞서 다각적인 검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상대의 의학적 인정이 필요한 분야였다. 러시아 측의 낙관적인 예측은 오산이었다.
로이터 통신, "EU 내년 1분기에 스푸트니크V 백신에 대한 평가 계획"/얀덱스 캡처
EU의 의약품 규제기관 EMA/사진출처:홈페이지
현지 언론에 따르면 EMA의 임상시험 검증및 품질관리 실무그룹 책임자 페르구스 스위니( Fergus Sweeney)는 21일 브리핑에서 “스푸트니크 V 백신에 대한 평가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며 "계속 개발자 측과 소통하고 (자료를)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승인 시점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은 더 암울한 소식을 전했다. 이 통신은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스푸트니크V의 평가에 필요한 일부 자료가 여전히 누락돼 있다"며 "적어도 2022년 1분기까지는 (EMA가) 승인 여부를 결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필요한 자료가 11월 말까지 제공되면 내년 1분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며 "불완전한 자료로는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통신은 또 "EMA는 스푸트니크V 개발자 측에 백신 제조법에 대한 보다 완벽한 문서와 구체적인 내용을 요청했다"며 "이는 유효 성분의 생산과 완제품의 병입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EMA는 지난 3월 스푸트니크V에 대한 평가 개시를 공식 발표하면서, 긴급 승인 여부는 5, 6월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EMA측이 지난 7월 "평가에 필요한 자료가 누락됐다"며 "부족한 자료를 추가 요청했다"고 밝혔다. 승인 시기는 자연스럽게 가을 무렵으로 늦춰졌다.
러시아 주재 EU 대사의 rbc 인터뷰 기사/캡처
그럼에도 여전히 EMA 측은 백신 평가에 필요한 자료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러시아 측은 이를 '정치적인 접근'이라고 비판했지만, 러시아 주재 마르쿠스 에더러 EU 대사는 지난 8일 현지 인터넷 매체 rbc와의 인터뷰에서 "EMA의 승인 지연은 러시아 측의 책임"이라며 "EMA가 요청한 검사 시기를 러시아 측이 거듭 연기해 절차를 늦추고 있다는 게 팩트"라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 rbc는 21일 "스푸트니크 V 승인이 지연된 것은, 무엇보다도 개발자 측이 유럽으로 공급할 백신의 제조 공장을 계속 바꿨기 때문"이라며 "EMA 전문가들이 야로슬라블 지역에 있는 최소 두 곳의 'R-팜'(제약사) 공장을 방문한 뒤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으나, R-팜의 모스크바 공장이 새로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스크바 R-팜 공장에 대한 현장 검증이 연말까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스푸트니크V 백신 제조업체 '시스테마' 모습/사진출처:SNS
또 다른 쟁점은 러시아측의 정확한 자료 제공 여부다. 러시아 측이 EMA가 요청한 자료를 제 때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추정된다. 우선 평가를 이유로 백신 개발 플랫폼의 기밀에 해당되는 모든 자료를 전부 EMA측에 넘길 수 없다는 피해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 등을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러시아측이 준비한 자료가 유럽의 관련 규정에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러시아 개발 의약품(백신)이 EMA에 등록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백신을 개발한 러시아 '가말레야 센터'는 국제 약물 평가기관과 직접 일을 해본 경험도 없다고 한다. 처음부터 진행이 순조롭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푸틴 대통령을 만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일의 의약품 전문가들로 하여금 '스푸트니크V' 백신의 EMA 등록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그 때문이다.
페스코프 대변인, 스푸트니크V 백신의 유럽 등록에는 기술적 형식 문제가 남아 있다/얀덱스 캡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1일 "EMA 평가를 위해 제공된 자료의 완벽함 기준에서 기술적인 불일치가 있다"며 "관련 부서(가말레야 센터?)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중"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측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넘겨주지 싫은 자료들을 11월 말까지 EMA측에 제공한다면 EMA가 스푸트니크V 평가를 재개해 내년 1분기에는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게 로이터 통신의 결론이다. 그 자료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러시아 백신의 활성 성분 생산과 완제품의 병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로이터 통신은 지난 7월 EMA의 승인 절차가 늦어진 이유로 '마스터 세포 은행'(Master Cell Bank)와 임상실험 중 나타난 부작용의 보고 방식, 위약 투여자 추적 방법 등에 대한 자료 부족을 든 바 있다. 이 문제들은 그동안 러시아측의 자료 보완에 의해 이미 해결됐을 수도 있다.
WHO, 스푸트니크V 승인(평가) 절차 재개/얀덱스 캡처
EMA 평가와 비교하면 WHO의 스푸트니크V 승인 등록은 조금 더 순조로운 것으로 평가된다. 스푸트니크V 유통을 책임지는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 측은 21일 WHO가 '스푸트니크V'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최종 점검 단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닌 듯하다. 마리안젤라 시마오 WHO 사무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개발자 측이 어제(20일) 법적 절차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했다"며 "법적 절차로 중단된 평가 작업이 오늘 재개됐으나 아직 스푸트니크V에 대한 모든 자료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시마오 차장은 또 "우리는 업데이트된 자료를 받아 검토한 뒤 현장 실사를 실시할 것"이라며 "몇주 내에 러시아 백신 제조공장에 대한 현장 검증에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업데이트된 자료란 지난 6월 공개된 '러시아 백신 제조 공장에 대한 WHO·EMA 공동 현장 실사 보고서'에서 지적된 GMP 기준 미달 업체의 보완 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장 실사 대상 4개 공장중 1개 공장에서 GMP 규정에 어긋나는 지적사항이 나왔다.
WHO 본부(위)와 '백신 현황' 보고서. 맨아래 12번이 스푸트니크V 백신에 관한 현황 설명이다/캡처
WHO는 전날(20일) 공개한 'COVID 백신 현황'이라는 보고서에서 "스푸트니크V 백신에 대한 (평가) 프로세스가 재개됐으며, 순차적인 (자료) 제출 완료와 최종 (현장) 점검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자료 제출과 후속 점검들이 완료되면 승인 예상 날짜가 정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마오 사무차장의 브리핑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WHO는 러시아 측의 긴급 승인 등록 신청 11개월여만인 지난 9월 15일 백신 평가 절차 중단을 공식화했다. GMP 규정에 미달하는 백신 제조 공장 때문이다. 이 공장에 대한 보완작업이 이뤄진 뒤 관련 자료가 WHO에 즉각 제공돼야 하는데, 러시아 측이 필요한 조치를 미적거린 탓으로 보인다. 아니면, 러시아가 WHO 측의 GMP 규정에 대해 시비를 걸며 시간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WHO로서는 '평가 중단'이라는 최후통첩성 카드를 꺼내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같은 관측은 승인 신청자인 RDIF측의 태도에서 미뤄 짐작 가능하다. 키릴 드미트리예프 RDIF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푸트니크V의 실제 접종 효과를 제시하면서 WHO와 EMA가 백신 승인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댄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스푸트니크V에 대한 서방측 언론의 공격도 너무 잦다고 비판했다.
뉴잉글랜드 의학저널 10월호에 올라온 '백신 면역성 비교 분석' 기사/캡처
최근에는 세계적인 의학학술지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의 10월 호 기사도 비판의 명분이 됐다. 이 잡지는 지난 15일 온라인에 올린 백신 면역성 비교 분석 기사에서 "'스푸트니크 라이트'와 같은 인체 아데노바이러스 기반의 '벡터 백신'이 접종 8개월 후 항체와 T-세포의 면역성이 mRNA(메신저 리보핵산)계열의 백신(화이자와 모더나)보다 10배나 강했다"고 주장했다. '벡터 백신'이 mRNA 백신보다 훨씬 긴 면역 지속성을 지닌다는 뜻인데, 끊임없이 등장하는 변이 바이러스와 부스터샷(추가 백신 접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긴 면역력은 백신 경쟁력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스푸트니크V 백신은 현재 전체 인구 40억 명에 이르는 70개국에서 승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