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1층 서관(西館)에는 각종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불교계의 저명한 스님들은 물론이고 기독교계의 유명한 목회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또 이슬람교의 지도자들과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그리고 세상에서 성자들이란 말을 들었던 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또 세상에서 신의 뜻이라며 몸에 악어모양의 문신을 한다면서 면도칼로 온 몸에 상처를 만든 자와 혀와 볼을 칼이나 송곳으로 찔러 흉한 모습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목회자들 가운데는 대교회의 목회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나도 대교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어 이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장이 내게 가만히 다가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주님의 모든 영광을 가로챘고, 교인들에게 축복해준다는 빌미로 그들에게서 많은 재물을 착취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호화롭게 살았고, 주변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했으며, 교인들에게 진정한 비전을 주지 않고 세상에서의 번영만을 설교했고, 그들의 행함의 근본 이유가 자신들의 탐욕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탐욕이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평소에 불교에 관해 관심이 많았고,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금강경을 비롯해서 대승불교에 대해 당시 불교의 대가들로부터 배우고 공부를 많이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의 창시자인 성자들의 죄는 인조(人造) 종교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삶을 헛되게 살도록 하며, 가장 큰 죄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또 다른 잘못은 많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가면 다 산 꼭대기에서 만난다는 소위 종교 평등주의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란 말인가? 이 얼마나 독선적인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자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된 것이 보였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내가 평상시에 궁금했던 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습니까? 다른 종교는 다 거짓이고요?”
그러자 주님은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제도적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니까.”
“예, 뭐라고요? 교회가 구원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나는 놀라서 아이처럼 부르짖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뿐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바로 그것이 해답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것을 제도화한 그리스도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오늘의 기독교는 내가 가르친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많이 변했다. 변질되었다는 말이다. 내 뜻과 달리 제도라는 것을 만들고, 목회자들이 제가끔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본질적인 것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
나는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또 어떻게 다시 돌아간다는 말인가?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이제는 늙고 병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나는 은퇴한 후 많은 교회를 숨어 다니면서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모자를 덮어쓰고 캐주얼 차림으로 가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목회자들이 처음에 성경 말씀을 몇 줄 읽을 뿐 내용은 전혀 말씀과 관계없는 설교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있었던 교회들처럼 목사들과 장로들이 교권 싸움을 하느라고 교회의 사명은 잊고 있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이 작은 교황이 되어 있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두려운 생각에 나는 떨면서 나왔다.
문화와 제도의 옷을 입은 오늘의 기독교가 초대 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지옥에서 앞으로 들어올 사람들의 사진 같은 영상들까지 희미하게 울렁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미 지옥에 와 있는 그들의 모습과 또 앞으로 지옥에 올 경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서 그동안 목회하며 괴로웠던 모든 아픔을 씻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지옥의 1층에 있는 사람들은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 목회자들, 주님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도적질한 자들, 세상에서는 실패하고 교회에 들어와 장로가 되었다고 목회자들을 괴롭힌 자들까지 다 있었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직분이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또 놀라운 것은 지옥 1층 북관(北館)에는 선하게 산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1-43).
나는 그 구절을 보면서 강양욱 목사에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교도소에 갇힌 사람이나 집 없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주님에 대한 충성이며 봉사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영상으로 나타난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이름이라도 적으려고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는 배터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앞으로 지옥에 올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마치 바람이 불 때 호수에 비친 얼굴들처럼 흐릿해서 유명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헝클어지는 모습이어서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좀더 자세히 그 얼굴들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으로 인해 바르르 떨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와 교회에서 함께 일했던 장로들의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세운 목사와 장로들 중 몇몇의 영상까지 있었다. 나는 강양욱 목사에게 부탁했다.
”이들의 이름을 적어 주시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고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강양욱 목사는 내게 말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오. 다 믿지 않고 이곳에 오도록 선택한 결과 때문이오.“
나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목사와 장로들이 믿음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나는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다 위선이었단 말인가?
아!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또 평생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구나.
지옥에 영상으로 흐릿하게 나오지만 아직 살아 있는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이름을 기록해서 이메일로라도 경고하고 싶었지만, 지옥에는 그것을 기록할 종이도 연필도 없었다. 할 수 없어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외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렇게 열심히 기억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다만 그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어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천둥 치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난 나는 깨달았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을 인간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지옥 1층 북관에서 보았던 모든 사실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지옥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지옥에는 형식적인 믿음과 죽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