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07
1월16일 [연중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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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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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fweEHXzANc (이청준 프란치스코 하이에르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212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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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시계바늘까지 앞당겨버리신 성모님!>
아직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 떨어진 카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누군가가 정말 난감해하고 있었습니다. 혼인잔치의 혼주, 다시 말해서 신랑의 부모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일주일간 계속되는 혼인 잔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즉시 분위기 파악을 하신 성모님의 측은지심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혼주가 처해있는 딱한 상황을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본격적인 공생활을 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은 나자렛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지! 하실 때까지 조용히 지내셔야 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주 처지가 하도 딱하다 보니 성모님께서 그냥 한번 내질러버리셨습니다. 사고 한번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딱 한 마디?
“포도주가 없구나!”
당시 예수님 입장에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님께서 기적을 하라고 몰아붙이시니, 살짝 빈정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말투는 분위기를 긴장 구도로 몰고 갑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복음 2장 4절)
예수님께서 좀 생뚱맞게도 어머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여인이라는 호칭을 쓰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완곡하게 기적을 거절한다는 의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혼주의 딱한 사정을 보면서 다시 한번 밀어붙이십니다. 지혜로우신 성모님이셨기에, 이번에는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막무가내 성모님 앞에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모님의 놀라운 파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 때문에 그냥 밀어붙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연민의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시계 바늘까지 앞당겨버리셨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성모님의 힘입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결핍과, 우리의 상처와, 우리의 눈물을 바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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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uX_8ddgZ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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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사랑받는 법: 어머니는 자녀에게 물을 줄 수도 있고 포도주를 줄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여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을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성모님의 말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하시게 만드십니다.
감히 저를 성모 마리아라 비유하자면 여러분은 누구이실까요? 바로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퍼서 날라주는 봉사자들입니다. 사랑은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것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포도주를 얻어내야 할까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한 없이 좋은 남편’으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대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부인’이란 의미의 “여인이시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성모님이 어머니셨지만 이제 아버지의 아드님 위치에 선다면 성모님은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받는 신부로서 신부가 신랑에게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낼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왜 우리에게 공경을 받으실까요? 성모님이 예수님께 포도주를 얻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물만 마셔야 합니다. 물은 사랑이 빠진 음식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음식에 사랑이 더해지면 양식이 됩니다. 자녀는 양식을 먹어야 온전히 성장합니다. 음식만 먹으면 여전히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이것을 알기에 사랑의 주인이신 신랑에게 당신의 ‘피’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징이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야곱의 축복을 얻어내는 장면입니다. 레베카는 사실 이사악의 모든 축복을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의 축복을 야곱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도 에사우가 레베카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야곱도 사랑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원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의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은 하느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자녀들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얻어서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에덴동산의 그 많은 은총을 보며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l 성모님은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대하시는데도 레베카처럼 우리 교회를 위해 은총의 중재를 감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교회에서 공경받는 이유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불완전했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 물만 마실 것이고 우리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렇게 해주지 못한 어머니인 성모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의 마리아는 사제이고, 가정에서의 마리아는 어머니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평소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신자들에게 사랑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주는 것들은 양식이 되지 못하고 음식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기대한 것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사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자녀에게 잘하려 해도 자녀에게 원망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자녀가 그냥 어머니이니까 억지로 존중하는 척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어머니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녀 앞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믿지 못하게 하여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무시하는 아내는 자녀에게도 절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물은 줄 수 있지만, 포도주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미움을 받는 어머니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4회에 이유 없이 엄마를 싫어하는 딸 한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는데 딸은 핸드폰에 엄마 전화번호도 없습니다. 딸의 가장 큰 위로자는 할머니입니다. 엄마가 밥해주는 것은 맛이 없다고 하고 엄마만 나가면 할머니와 아빠 편을 들면서 엄마를 이유 없이 미워합니다. 이유라도 알면 좋겠지만 이유가 없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이가 지금 힘이 강한 할머니와 아버지 쪽에 붙은 것이라고 해석해줍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엄마가 주는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딸이 엄마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레스토랑에 가서 포도주를 시키고 기다렸는데 물만 나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화가 날 것입니다. 한별이는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남편이 나와서 지금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자신은 무시만 당한다고 말해도 전문가는 아내도 힘들다고만 할 뿐입니다. 물론 아내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남편의 말도 귀담아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핵심은 뭐냐면 (아내가 나에게) 공감을 못 해줘서 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14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함께하며 감정 교류가 안 된다는 게 생각보다 매우 힘들더라고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건 당연한 건데, 같이 있는데도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제가 많이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전혀 공감을 안 해주고 나는 죽겠는데 옆에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남 이야기처럼 말합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어서 집에서 함께 기뻐하고 싶은데 대답한 한결같은 무덤덤함이었습니다. 이걸 한별이가 똑같이 엄마에게 하거든요. 한별이도 ‘엄마 나 좀 사랑해줘’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전문가는 엄마 또한 남편이 감정을 나누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남편의 감정을 무시하는 듯한 엄마의 문제는 실제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항상 실패하기 때문에 아내도 남편에게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내는 항상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해주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의 피땀과 엄마의 피땀이 다 섞인 ‘포도주’의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아내도 이 노력을 해야만 자녀에게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위해 하는 노력은 포도주를 기대하는 손님에게 물만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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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1: 카나의 혼인잔치: 첫 번째 기적
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키루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례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즉 그 표징은 혼인에 대한 축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열려 있다. 원문에 보면 ‘그 때에’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이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카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그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그 가나 혼인 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그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가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아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 하였다.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이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 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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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카나의 혼인 잔치>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1-5)
“포도주가 없구나.”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기적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원래 ‘기도’는 이렇게 하는 법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때, 자기의 어려운 사정만 말씀드리고, 그 상황을 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뒤의 11장을 보면,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라는 말만 전했습니다.(요한 11,1-3)>
‘여인이시여’ 라는 말은,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존칭입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에서 ‘저의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계시되는 때입니다. 그 ‘때’는 십자가 수난 때입니다.(요한 17,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고 말한 어떤 백인대장은(마르 15,39),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공적 계시를 첫 번째로 받아들여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요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으로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로 해석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라는 성모님 말씀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무엇을 시키든지 아무것도 안 시키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잔치를 그만 끝냅시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웃집에 가서 포도주를 얻어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것인지,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실 일입니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요한 2,6-8)
이 이야기에는 기적의 과정은 나오지 않고 기적의 결과만 나옵니다. ‘빵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언제 어떻게 많아졌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수천 명의 군중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만 나옵니다.(요한 6,9-12) ‘기적’이란,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복음서 저자의 입장에서는 과정과 방법을 세세하게 기록할 수도 없었고, 기록할 필요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때’를 앞당기셨는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인간의 사정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가? 그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은 ‘사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그 ‘때’를 앞당기신 것은 아니고,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이웃의 딱한 사정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자비’로 응답하신 일입니다. ‘사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성모님과 제자들과 일꾼들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9절-10절). (예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원칙대로만 해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욱’ 깊이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꾼들은 원래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적을 보았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적은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은 성모님의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보더라도 믿음으로 곧바로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입니다. 물론 신랑 입장에서는 대단히 난처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이 위독한 일도 아니고, 집안이 망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성모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성모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도 내용에 대해서, “당신은 왜 그런 하찮은 일까지 기도해서 주님을 귀찮게 하는가?”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찮은 일은 있어도 하찮은 기도는 없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말씀드리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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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청년 도배사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도배를 하는 과정에서 발판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선배는 “누가 발판을 잘못 폈어!”라고 말했습니다. 현장 소장은 “발판을 잘못 펴면 위험하니까 앞으로는 잘 주의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듯 다른 말입니다. 선배는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소장은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선배는 책임과 평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소장은 예방과 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을 보면 선배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그 평가와 비판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늘 회색의 흐린 날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을 보면 소장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대안과 희망을 들으면 먹구름 뒤에 태양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18번이 있습니다. 늘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수들도 18번 노래가 있습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아 옛날이여!’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무명의 시대를 벗어나 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노래입니다. 아 옛날이여는 제가 군대에서 듣던 노래입니다. 군대에서 기상음악으로 선임들이 ‘아 옛날이여’를 틀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알 수 있게 해 준 노래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잘 될 거야!”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책임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고, 넘어야 할 산도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의 18번은 무엇인가요?
2000년 전입니다. 가나에는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들은 많이 왔는데 잔치에 준비한 포도주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혼인잔치의 주인을 탓하였습니다. 그런 비난과 평가는 혼인잔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주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주가 부족합니다.’ 마리아는 지난 과거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은 포도주로 만들었습니다. 혼인잔치는 성대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혼인잔치에 대해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는구나!” 정말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저의 큰 형은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음악도 잘해서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형의 예술적인 재능이 부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작은 형은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체격도 좋았고 양복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형과 다니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30분을 통화하는 가족은 동생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동생에게 이야기하시고 좋아하십니다. 큰 형처럼 예술적인 재능이 없었기에, 작은 형처럼 좋은 체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미운오리새끼’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도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꽃밭을 꾸미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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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첫 번째 표징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카나의 어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잔치에 쓰던 포도주가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이 상황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전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어머니의 말씀에는 아들 예수님께서 이 위기를 잘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모호합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하느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십자가 위의 죽음의 때, 곧 예수님의 영광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마리아께서 일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한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에 가득 채운 물을 모두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물독 하나가 두세 동이들이고 동이가 40리터 가량이니, 모두 합치면 적어도 480리터가 넘는 ‘많은’ 양입니다. 게다가 과방장의 표현대로 ‘좋은’ 포도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이와 같이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이 예수님의 현존과 함께 새로운 포도주로 태어납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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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기원 미카엘 신부님]
<카나의 2차 주회(酒會)>
신부로서 살아가다보면 신자들로부터 가끔 선물을 받습니다. 제일 많 이 받는 선물이 술입니다. 우리나라가 술 천국이듯이 신자들도 저도 본당 행사와 모임에서 자주 술을 마시고 가끔 선물로 받은 양주를 내놓고 목에 힘을 주기도 합니다.
“절제 있게 마시면 술은 사람에게 생기를 준다.” (집회 31,27) “악마가 사람 을 방문하기에 너무나 바쁠 때에는 그 대리로서 술을 보낸다.” 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신자들과의 자리에서 술을 거부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그렇다고 권하는 대로 마시다 보면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교구설정 80주년 설문조사에 의하면 신자들은 “양 냄새나는 겸손한 사목자” 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적당한 술 냄새와 양 냄새가 나는 사목자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 (마태 11,19)이라는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죄인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리셨던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으셨고 성모님께서 “포도주가 없구나.” (요한 2,4 참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도 제자들도 꽤 많이 마셨고 성모님께서도 분위기상 한두 잔 정도는 마시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술 좋아하시는 당신 아들이 아직 때가 오지도 않았다(요한 2,4)고 이유를 말해도 그냥 밀고 나가시는 뚝심을 발휘하는 성모님. 그리고 물을 술로 변하게 한 첫 기적으로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2차 주회를 하셨을 거라고 엉뚱한 상상을 해 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긍심을 심어준다고 엉뚱한 변명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우리 신자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많은 해야 할 일과 걱정거리로 마음이 산란합니다. 몇 년 전 “최고 경영자 예수 그리스도” 라는 책이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경영자셨으며,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도 최고의 경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하나의 경영자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 안에서…….
또한 성모님께서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녀들이 인생의 온갖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도록 가르치십니다. 우리 모두 올 한 해 멋진 경영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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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태완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 무지개가 보이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무지개가 걸릴 때면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야! 무지개다!’라고 말하며 넋을 놓고 바라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무지개가 어떤 상황에서 생기는지, 어떤 환경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 현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무지개의 원인을 알지 못하던 때, 사람들은 무지개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그때는 무지개가 뜨면 ‘야! 무지개다!’라고 얘기하며 그저 신비로운 현상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현상을 일상과 엮으며 ‘야, 무지개가 뜬 걸 보니 하늘에서 좋은 일을 내려 주시려나 보다’, ‘저 아름다운 것을 타고 하늘에서 누가 나를 만나러 오려나?’와 같은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사실 무지개에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기적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모습도 이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이나 신비로운 현상을 접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신앙을 바라볼까요?
어떤 신앙인은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 신비로운 현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가?’, ‘하느님께서 이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깨닫길 바라실까?’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고민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려 합니다. 반면 어떤 신앙인은 그 현상 자체만을 바라봅니다. “야! 기적이 일어났다.”, “누구에게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대.”, “나에게도 저런 기적이 일어났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시작 후 처음 행하신 표징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물이 술로 변하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죠.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야!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구나.”, “나도 성모님처럼 간절히 기도드리면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기적에만 시선을 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심자를 벗어난 신앙인이라면 ‘카나의 첫 표징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신앙적 질문과 나에게 있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겠죠.
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일으키셨을까요? 물이 술로 변하는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신학적으로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많은 것을 묵상해 볼 수 있는 오늘 복음을 천천히 읽어보며, 기적을 바라보기보다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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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제2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아들의 “때”가 왔음을 알려줍니다. 그 “때”는 천상잔치를 암시하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때입니다. 그 날은 부활의 날을 상기시켜주는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 “때”를 미리 알려줍니다. 그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라.”(이사 62,4)
그리고 <제2독서>는 그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말해주며, 오늘 <복음>은 그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풍부한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의미 중의 하나는 ‘때’, 곧 “그리스도의 때”입니다.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의 한 명인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 과목 시험을 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열심히 답지를 쓰는데, 바이런만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주의를 주었지만 시험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계속 멍 때리기를 계속하자 화가 난 감독 교수가 백지로 제출하면 영점처리 되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되니 뭐든 써 라고 하니, 그때서야 그는 단 한 줄만 써놓고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달랑 한 줄 답안지는 이 대학 신학과 창립이후 모든 교수들을 감동시킨 전설의 만점 답안지가 되었습니다. 그 한 줄은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이 이야기는 바로 물이 그 주인을 만난 때 벌어진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때”는 우선 혼인잔치가 벌어진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당신의 신부라 칭합니다. 그러니 혼인잔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하나로 결합되는 “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마지막 결정적 때가 벌어지는 십자가 아래에서도 아들과 함께 하셨듯이, 지금 공생활의 첫 시작에 함께 계십니다. 단지 함께 계실뿐만 아니라, 바로 이 아들의 ‘때’를 열어 가십니다. 성모님께서 먼저 이 ‘때’를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말씀하신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옛 계약이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결핍을 나타내는 숫자인 ‘여섯 개의 빈 항아리’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더구나 모두 비어 있어서 더 이상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늑방에서 흘리신 새 포도주, 새 사랑이 퍼내줄 ‘일곱 번째의 항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곧 새 계약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잔치 주관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예수님께 알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포도주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바로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때”가 왔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때”를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이는 “예수님 자신의 때”, 곧 “그리스도의 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시며, 당신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의 원문을 직역은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들에게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때’가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때”를 구실 삼아 아들에게 거절당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조금도 무안해 하시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성모님께서는 요청하는 자세에서 순종하는 자세로 태도를 바꾸십니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아들의 원의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순명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이미 잉태하고 계셨듯이, 믿음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순명하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기적을 보고서 믿었지만, 마리아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권능을 믿으신 까닭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명인가? 이 아름다운 일은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순명을 불러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로 번져갑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의 때’를 불러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의 3중주곡입니다.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순명과 그 순명이 불러온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순명,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님께 대한 시중꾼의 순명입니다.
그리하여 과방장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계셨군요.” 라고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이 혼인잔치에서는 단지 과방장이 새 포도주를 맛보았을 뿐, 아직 그 누구도 아직은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지금이 그 ‘때’ 입니다. 과연, 지금이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 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할 ‘때’입니다. 그래서 카나의 이 혼인잔치에는 신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빈자리’로 초대받은 까닭입니다. 곧 우리가 신부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오늘이 신부로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셔야 할 ‘때’ 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찬례를 통해서 이 은혜로운 사랑의 포도주, 새 계약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몸을 영함으로서 예수님과 결합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건네주신 생명으로 혼인을 맺고 합혼주를 마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혼배 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혼인축일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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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주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제 안에 당신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당신이 나의 님, 나의 신랑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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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기적을 만들자!>
오늘 복음(요한2,1-11)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표징(기적)을 일으키신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서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성모님께서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2,3)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이시고 일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2,7.8)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은총(기적)의 전구자요 협조자이신 성모님,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성모님의 신뢰와 믿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성모님의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인 참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성모님의 무조건적 신뢰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이 신뢰와 믿음이 기적의 원천이라는 메시지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 보이는 너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지금 여기에서 기적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 하느님의 은사가 실현되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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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독에 물을 채워 나르듯>
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물독에 물을 채워 나르듯>
믿는
나의 사람아
그대 안에
믿음을 채워
불신 한가운데
힘차게 솟아오르렴
바라는
나의 사람아
그대 안에
희망을 채워
절망 한가운데
거세게 타오르렴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안에
사랑을 채워
미움 한가운데
아낌없이 쏟아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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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마야 안젤루는 40대 초반이었던 1970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 후, 201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시나 소설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수, 배우, 작곡가, 극작가, 프로듀서,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변함없이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2001년에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3년은 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매일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창의력도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20년 넘게 쓰고 있습니다. 창의력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쓰면 쓸수록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맞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좋은 것을 더 많이 쓸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야 좋은 것들이 더 새롭게 생성되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집니다. 평화도 쓰면 쓸수록 더 넓어집니다. 믿음은 쓰면 쓸수록 더 깊어집니다.
좋은 것, 필요한 것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쓸수록 새롭게 생성됩니다.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해주십니다.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여드레 동안 열린다고 합니다.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서 축제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종종 잔치에서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카나에서도 이런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남의 곤경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자 간의 대화는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로 비칩니다.
성모님은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시지요. 그러자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깊은 신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더군다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여인이란 ‘교회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이런 모습에 ‘기도의 전달자, 곤경에 빠진 모든 사람의 해결사인 어머니, 그에게 달려드는 모든 사람의 인자하신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어서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간청으로 그 일이 앞당겨졌습니다. 사랑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 마음의 크기가 더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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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판단을 하는 방법>
우리가 남을 평가하는 것은 은연중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등산을 좋아한다면 “등산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등산하는 사람을 치켜세우지요. 결국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등산을 싫어한다면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라면서 자신의 등산 싫어함을 등산 자체를 평가절하해서 드러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모두 자기 입장에 따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기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기준을 옳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준을 사랑에서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기준만이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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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보아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원의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통해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기도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바람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주님과 늘 옆에 계시는 성모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갈릴래아의 카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혼인잔치를 아주 장엄하게 치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그런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 중에 필수품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큰 망신입니다. 요즘 같으면 시장에서 금방 사서 대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미리 예측하여 술을 담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술이 떨어졌음을 눈치채고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알리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지 않고 “포도주가 없구나!” 한 것은 성모님의 시선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신혼부부에게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려 깊고 섬세한 어머니이십니다. 문제가 발생 되었을 때 사랑이 있으면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핑계를 찾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문제만 더 커지고 시끄러워집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모님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처지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지를 어머님께 있는 그대로 알려주십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시며 아들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보이며 주님의 뜻에 순명하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처지를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주도권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시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잔칫집의 곤란함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의 처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말씀 드리는 어머니의 배려, 당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사려 깊은 모습에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이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나의 모든 것, 모든 움직임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사물, 모든 행위 속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관심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마음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기에 아들에게 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어떤 기도든지 생명력이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온 삶이 되어야 하고, 삶이 또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당신 혼자서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을 바라시며 우리를 도구 삼아 이루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시는 기적을 이루실 때 물독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를 위한 은총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의 협력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갈증도 점검해야 합니다. 일꾼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항아리에 물을 붓자 비로소 기적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삶의 무기력과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려 애쓸 때 틀림없이 새로운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상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한다. 그리스도는 발이 없다. 하지만 우리 발로 사람들을 그분이 계신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목소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목소리로 그분이 죽으신 까닭을 말한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풍요로움은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 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 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요한 2,10) 하고 말한 과방장의 말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양에 있어서 풍부할 뿐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최고입니다. 차고 넘치도록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
포도주의 기적은 단순한 기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표징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께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표징을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전해 주고자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표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그 기적이 전달하려는 핵심메시지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쳐다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면 낭패입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서 잊지 말 것은 6개의 물 항아리를 가득 채우시는 완성된 구원을 갖고 오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잔치의 풍성함을 유지 시킨 것은 성체성사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 풍요로움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삶을 꾸준히 엮어 나갈 때(갈라 2,5) 우리의 삶은 또 하나의 표징이 되어 세상을 풍성한 잔치 장소로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진리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깨닫고 그분이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의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초대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어머니께서 그 자리에 계셨기에 그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도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겠습니다. 기도하되 성모님의 모범으로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담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처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모님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특별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말로 청하십시오. 무엇인가 다른 것을 청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을 찾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단순하게 바라는 것을 청하고 “다만 내 뜻대로” 가 아니고 “당신 뜻대로” 라고 말하십시오.”(샤를로 푸코)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포도주가 없구나” 하신 것이 다입니다. 사랑이 담긴 그 한마디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결국, 기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한 주간 사랑하는 삶의 기도를 통해 기적을 많이 낳으시길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과목 시험문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내포하는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 였습니다.
한 학생의 답입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이 학생은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된 바이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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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삶-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참 마음에 드는, 재미있는 강론제목입니다. 오늘 새벽 바람은 봄바람처럼 훈훈했습니다. 겨울속의 봄, 겨울이 변하여 봄인가 싶었습니다. 폭풍이 변하여 미풍으로, 겨울이 변하여 봄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 주님과 일치된 성령의 사람이 일으키는 주님 영광의 표징, 기적의 표징입니다.
2022년 새해 들어 자주 인용했던,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2022년 새해 소원’의 장시 기도문 역시 한마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해달라는 존재론적 변화를 소망하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영국의 바이런 시인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시절 기말고사때 “카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을 때 일입니다. 시험 시간 내내 쓰지 않던 바이런이 마지막에 쓴 답안은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였고, 이 답안은 교수님께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실화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여러 차례 인용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마디입니다. 나이 30까지 살고 나머지 40년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구별이 안되는 존재감 없는 삶을 풍자하는 말마디입니다. 정말 참으로 살았다면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참으로 하루하루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연중 제2주일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오늘 복음이 주는 답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참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포도주 같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탄력 좋은 기쁨의 삶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참으로 무미건조한 물같은 삶에서 기쁨 넘치는 포도주같은 신바람나는 삶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꿔 말해 슬픔을 기쁨으로, 불안을 평화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불평불만의 삶을 찬미감사의 삶으로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부정적 소극적 비관적 삶에서 긍정적 적극적 낙관적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을 뜻합니다. 방금 우리는 흥겹게 화답송 후렴을 노래했습니다.
“당신의 기적을 만 백성에게 두루 알리라.”
우리 몸소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삶을 통해, 주님의 기적을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 주님의 기적이자 영광의 표징입니다. 바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가 제시하는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새 예루살렘 비전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너는 주님의 손에 있는 화려한 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과 하나된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파스카 예수님이자 주님과 하나된 우리들입니다. 바야흐로 주님과 함께 물이 포도주로 변한 영광의 표징을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인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첫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배웁니다. 카나 혼인잔치가 상징하는 바, 바로 오늘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 곁에는 늘 성모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포도주가 바닥 난 곤경의 사정을 아신 어머니는 아드님께 알립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우리를 대신한 얼마나 위로가 되는 성모님의 말씀인지요! 이처럼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아드님 곁에서 아드님께 전구하고 계십니다. 아드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수수께께 같은 반응이지만, 이심전심, 성모님은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셨고, 그대로 아드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함축된 말씀이요, 우리 모두 철석같은 믿음으로 묵묵히 한결같이 주님께 순종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셨고 순종의 기적이 발생합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일꾼들이 순종하여 물을 채우자,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시자 일꾼들은 곧 그것을 옮겨 갔고,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본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모두가 과방장과 같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표징의 기적을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와 순종했던 일꾼들만이 그 영광의 표징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믿음으로 묵묵히 순종의 삶을 살 때 물같은 무미건조한 삶에서 포도주같은 흥겨운 삶으로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과방장처럼 믿음의 눈이 없으면 일상에서 펼쳐지는 표징의 기적을 도저히 알아챌 수가 없다는 진리입니다.
일련의 기적의 과정을 체험하지 못한 과방장이나 손님들은 이런 표징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눈’에만 계시되는 표징의 기적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제자들은 달랐으니 바로 주님께서 드러내신 표징의 영광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다음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리하여 제자들은 믿게 되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믿음과 순종의 삶 역시 주님 영광의 빛나는 표징이 됨을 깨닫습니다.
둘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에 충실할 때 공동체란 항아리의 물같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분위기는 활력 넘치는 기쁨의 포도주가 가득 담긴 분위기로 바뀌니 이 또한 그대로 주님 영광의 표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를 명백히 밝힙니다. 말그대로 성령에 의한 영광의 기적이자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모든 은사가 성령의 선물임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등 도대체 은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받은 모든 갖가지 재능들 모두가 성령의 은사임을 알 때 참으로 겸손한 삶이요 자랑할 것은 성령이신 주님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고 신비롭고 고마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전에 가끔 인용했던 부패인생과 발효인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부패할시에는 악취가 나지만 발효시에는 향기가 납니다. 바로 성령의 효소가 물같은 인생을 포도주같은 기쁘고 흥겨운 인생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무슨 식물의 잎이나 열매나 뿌리든 효소만 넣으면 참 신비롭게도 모두를 발효시켜 술로 변하게 하는 이치와 똑같은 역할의 영적 효소가 성령입니다. 주님 성령의 효소가 들어가지 않을 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도 변질되어 십중팔구 부패인생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과연 성령의 효소로 각자 받은 은사에 충실한, 잘 익어가고 있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인생은 ‘잘 늙어가는’ 인생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효소로 ‘잘 익어가는’ 발효인생이라 함이 맞습니다. 세상에 성령의 영적 효소가 없어 부패인생으로 변질되어 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우리를 믿게 하는 것도, 회개를 부추기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따른 삶 역시 주님 영광 빛나는 표징의 삶입니다.
셋째,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로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입니다. 이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의 물같은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포도주 같은 기쁨과 평화 넘치는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부단히 부패인생을 향기 은은한 아름다운 발효인생으로 바꿔줍니다. 간혹 예전 신자분들과 주고 받은 문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수사님, 하루 이틀도 아닌 평생을 이 무미건조한 물같은 분위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갑니까?”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찬미의 재미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물맛이 아니라 기쁨의 포도주 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맛으로, 하느님 재미로, 하느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하고 만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느님 찬미의 영적 효소가 우리 물같은 마음을 기쁨 은은한 포도주 마음의 영적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새삼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 역시 주님 영광으로 빛나는 표징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시편 화답송이 우리를 고무시킵니다, 우리 갈망에 불을 붙이고 물같은 무미건조한 마음을 기쁨 은은한 포도주맛 같은 분위기로 바꿔줍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이사야의 입을 빌어 주님은 또 새 예루살렘인 우리 하나하나를 격려하시며 찬미의 기쁨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니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종말론적 기쁨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혈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패인생을 부단히 향기 은은한 발효인생으로 바꿔 주시고, 물같이 재미없고 맛없는 삶을 포도주 같은 새롭고 재미있고 맛있는 기쁨의 삶으로 바꿔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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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HjcLQQu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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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
혼인은
잔치중의
잔치이다.
만남과
결합의
잔치이다.
혼인잔치에
포도주는
마음과 마음
사람과 사람을
기쁨으로
이어준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기쁨의
포도주가
다시
필요하다.
좋은 포도주는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채워지고
일어난다.
무엇이든지
변화시키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포도주의
주님이시다.
다시 카나의
혼인잔치가
기쁨의 맛으로
흥겨워진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맛나게
살길 바라시는
분이시다.
채워야할 것은
우리 마음의
물독이다.
삶이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도
기쁠 수 없다.
떨어진 것은
혼인잔치의
좋은
포도주이듯
우리 삶의
좋은 마음이다.
좋은 마음을
다시
채워주시고
살게하시는
마음의
주님이시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을 만나는
첫번째 마음은
변화의 기쁨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는
다시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변화된다.
삶의 변화는
함께하시는
주님의
기쁨이다.
기쁘게 청하고
기쁘게 내려놓고
기쁘게 맡기는
이 믿음의 여정을
카나의 첫기적에서
다시 배운다.
믿음이란
두 개의 가치가
아프게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포도주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선택
그 시작과 끝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요한 2, 7)
삶의 자리에
물을 채웠을
뿐인데
물독마다
가득 차는
좋은 포도주의
기쁜 행복이다.
좋은 포도주가
되고 좋은
삶이 되는
믿음의 잔치이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른다.
좋은 포도주의
향기와 맛처럼
다시
흥겨워지는
삶의 잔치이다.
삶의 잔치에
함께하시는
가장 큰
기쁨을 맛보는
기쁨의 주일이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씀과 삶을
다시 만나는
기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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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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