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라안팎의 상황을 보고 들어면서 정말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치 문화 사회 경제에서 그래도 나름 질서도 있었고 그 안에서 그 시스템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질서가 존재했다. 아무리 힘든 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버티게 하는 기본 뼈대는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갈수록 사회와 시스템을 지탱하는 기본 틀이 사라져 가는 모습이다. 멀쩡하게 보이던 건물이 실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이 부실공사로 건설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특정 대규모 건설의 경우 특정 일가와 관련돼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그러면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증거와 증인이 버젓이 있는데도 혐의를 부인하고 무조건 공작정치라고 부르짖는 인물이 차기 세계 지도자가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런 양상을 지구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막무가내식 억지 주장이 먹혀든다는데 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는 내년 미국 대선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의 기밀 문건 유출 혐의를 뒷받침하는 정황과 증언이 잇따르고 있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높은 지지율을 견제하기 위한 상대 진영의 정치 공작이라는 주장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만든 SNS 트루스소셜에서 자신의 여론조사 숫자가 점점 더 높아지면서 공산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파시스트들도 점점 더 미쳐간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트럼프는 또 통제 불능이고 매우 부패한 법무부와 연방수사국은 우스꽝스러운 기소와 선거개입을 조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막무가내식 억지주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대선때도 부정선거때문에 자신이 패했다면서 선거 불복종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입장으로 인해 공화당 극렬세력이 미국 의사당을 점거하고 난동을 피우는 상황으로 연결하게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상 한때 세계의 민주주의는 미국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신봉할 정도로 미국은 세계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자리잡았었다. 그 난리도 아닌 엄청난 격정의 대선을 치르고도 패자는 승자에게 선거결과에 승복하고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는 바로 그 말한마디에 모든 것이 종료되는 그야말로 멋진 상황을 보이곤 했다. 그래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멋짐이요, 일부 부작용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민주주의만한 시스템을 넘어설 제도는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트럼프때부터 미국도 요상하게 바뀌고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SNS에서 뭔가 설파하면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그냥 그대로 믿는 요상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른바 트럼프교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 중부지역의 백인들을 중심으로 한 인종우월주의자들은 트럼프의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를 지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목청을 돋구곤 했다. 지금 트럼프가 이런 저런 사안으로 실상은 내년 대선에 나오지 말아야 하지만 오히려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억지주장이 미국 골수 백인들을 더욱 단합시키는 무기로 작용하는 사회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그들에게는 지식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현명한 판단력이라는 것은 그냥 만들어진 단어일 뿐이다. 그냥 트럼프는 신이며 반 트럼프는 악이요, 백인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행동을 펴는 세력은 모조리 척결해야할 세력이라고 판단하는 듯 하다. 트럼프 범죄행위에 대한 이런 저런 증언과 증거가 나오는데도 전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국민이라는 미국인들의 품위가 정말 말이 아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아냥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 아니겠는가.
요즘은 진실을 규명하자는 주장이 힘을 잘 쓰지 못하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그래도 얼마전까지는 지적에 대해 정말 심정적으로 불편하지만 나름 받아드리려는 분위기가 사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 열심히 운행중인 KTX의 경우 초기 건설때 갖은 문제점이 언론이 등장했다. 시속이 300KM를 내야하는 고속열차의 노선 공사는 그야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계에 당시 등장한 일부 공법과 구간에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공사를 맡았던 정부기관에서는 답답한 심정이었고 경비도 공사기간도 훨씬 더 늘어났지만 지적에 겸허하게 응했다. 일부 수긍하는 것도 있었고 수긍은 하지 않았지만 지적을 수용하는 그런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KTX는 출발했고 아직 공사로 인한 부작용은 제시되지 않는 상황이다. 당시 막무가내식 고집만을 내세우고 공사를 그냥 진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이런 저런 지적이 사회전반에서 이어진다. 지적이 존재하는 사회는 나름 건전한 사회이다. 공산주의와 독재주의속에서는 지적이란 없다. 하지만 지적에는 대전제가 필수적이다. 객관적인 단서와 정황이 반드시 뒤따라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토대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논리를 기초로 제시해야 한다. 만일에 대형 배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면 배의 운항을 일시 중단하고 문제점을 고치거나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지적에 반발해 그렇다면 아예 배 운항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한다면 지적이라는 의미가 근본적으로 필요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지적때문에 배가 운항을 못하니 승객들은 그런 지적을 한 부류들에게 문제를 삼으라고 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적인 주장이 아니겠는가. 막무가내 억지주장의 대표적인 상황 아니겠는가.
지금도 나라 안팎에서 막무가내식 억지주장이 먹히는 것은 그런 주장을 하는 세력을 믿고 추종하는 부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럼프교처럼 말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지적의 경우 그 지적을 한 부류는 사회로 부터 추방당해야 한다. 그것은 가짜 뉴스 차원을 넘어 사회를 파괴시키는 악의적 독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근거와 나름 신빙성이 있을 경우에도 그런 지적을 오히려 가짜 뉴스라고 폄하하는 것이야 말로 막무가내식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막무가내식 억지주장은 결국 진실과 제대로 된 검증앞에 그 실상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은 송곳같아서 아무리 호주머니 속에 감추고 숨기려 한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그 송곳은 반드시 밖으로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2023년 7월 7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