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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 수 나라 1---양견의 승리
26.jpg
1. 수의 남북통일
수문제 등장의 배경
양견의 출생 무렵
수문제, 즉 양견은 541년, 서위[西魏]때 태어났다. 유럽에서는 “로마법대전”의 편찬으로 유명한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해당된다. 이 때는 남북조시대의 말기로서 북조[북위]는 이미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고, 남조에서는 유교·불교·도교에 통달하였으며 영명하다고 평판이 높은 양 무제[梁武帝]의 말년으로, 양조[梁朝]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후경의 난’[侯景의 亂]이 그야말로 곧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북위는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 오호[五胡]의 하나인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중심이 되어 화북통일을 완수한 뒤, 효문제[孝文帝 : 재위 471~499] 때, 수도를 북쪽의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시]에서 남쪽 황하의 남안에 있는 낙양[洛陽 : 하남성]으로 옮기고[494년],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호한융합의 정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정책은 너무나도 성급한 개혁이었으므로 북쪽에 남은 선비계 부족민의 반감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524년, 옛 수도의 북쪽 옥야진[沃野鎭]에서 발발한 파육한발릉[破六汗拔陵]의 반란은 곧 부근의 여러 진으로 확대되어, 이 반란군이 남하함에 따라 북위는 수습을 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동쪽의 업[鄴: 하남성 임장현 臨漳縣]에 기반을 둔 고환[高歡: 496-547]과 서쪽의 장안[長安: 섬서성 서안시 陝西省 西安市]에 기반을 둔 우문태[宇文泰 : 505-56]에 의해 북조는 동위와 서위로 분립되게 되었다.
서위 우문태 정권을 형성한 것은 ‘북진[北鎭]의 난’ 때 무천진[武川鎭 : 내몽고 자치구 무천현]으로부터 남하한 선비계 부족민의 일부였는데, 그 수가 동위에 비하여 훨씬 적어서, 어떻게 해서든 관중지방의 토착 한인호족[漢人豪族]의 협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서위국가 확립의 기반이 된 것은 군사행정의 근간인 팔주국 십이대장군제[八柱國 十二大將軍制]였다. 그 아래 의동부[儀同府]를 두어 한인을 징병하였다. 또 팔주국 가운데 육주국은 서위가 채용한 고대의 주[周]의 관제에 의거한 육관[天官·地官·春官·夏官·秋官♀官] 제도와 연관되어 있다.
양충 : 양견의 아버지
양충[楊忠 : 507~560]은 콧수염, 턱수염이 아름답고, 키가 7척 8촌[2미터정도]이나 되는 대장부로, 무예가 뛰어나고 침착하여 장수의 재능이 있었다. 18세 때 여행을 하다가 남조 양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5년 간 양나라에 유폐된 적도 있었다. 북위 말년에 북진의 반란을 진압한 북족출신의 이주영[爾朱榮 : 493~530]은 매우 포악하여 그 결과, 북위의 효장제[孝莊帝]에 의해서 주살되었다. 그래서 그의 조카인 이주조[爾朱兆]는 복수를 위하여 거병하였다. 양충은 처음에는 이 이주조를 따랐지만, 마침내는 뒤에서 말할 독고신[獨孤信]을 따르고, 또 우문태의 부하로서 장안으로 들어가, 이 후 동위토벌 등에 무장[武將]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서위말에 대장군이 되었다. 대장군이란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하나이다. 팔주국 십이대장군이란 8인의 주국대장군과 그 밑의 12대장군으로 구성된 서위 상비군의 편성이다. 십이대장군의 밑에는 24군[軍]이 있으며, 또 그 아래에 징병의 모체로서 96개의 의동부가 있었다. 이는 수·당전기 통치체제 하에서의 부병제[府兵制]의 기원이 된다.
팔주국 대장군의 우두머리는 우문태이고, 그 다음이 위왕실[魏王室]의 광릉왕 원흔[廣陵王 元欣]이며, 나머지 육주국 대장군이 12대장군을 통솔하였다. 육주국에는 당 고조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와 앞에서 기술한 양충이 따랐던 독고신이 포함된다. 이 육주국은 고대의 주제[周制]에 기초한 육관 제도와도 연결되고, 동시에 팔주국 십이대장군은 당시의 최고문벌이기도 하였다.
주국[柱國]인 독고신의 세 딸 중에, 한 사람은 우문태의 아들인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가 되고, 한 사람은 당 고조의 어머니, 즉 고조의 아버지 이병[李昞]의 처가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이 양견의 처, 즉 훗날 수의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일가에서 세 왕조의 황후를 배출한 것은 중국사상 미증유의 일이다. 또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자손에서 북주·수·당의 세 왕조가 일어났다.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각[宇文覺]은 서위를 무너뜨리고 북주[北周]를 세웠다. 양충은 서위 말년에 주국대장군이 되고, 북주 때에는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졌다. 수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에 해당하고 수국공과 같은 작호는 반드시 지명을 붙이는 것이 원칙인데, 수의 왕조명은 여기에서 유래하여 그 “辶”를 없앤 것이다. 양충은 대사공[大司空]이라고 하는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북주초기는 우문태의 형의 아들인 우문호[宇文護]가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양충은 그와 이해가 상충된 채로 세상을 떠났다.
무천진 : 수당 창업자의 선조의 고향
북주·수·당의 세 왕조의 창업자 혹은 그 선조가 서위의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일원이였다는 것은 앞서 기술하였지만, 이 사람들은 그 선조 모두가 무천진[武川鎭 : 내몽고 자치구 무천현]의 출신이라고 하는 공통성이 있다. 무천진은 북위의 옛 수도 평성[산서성 대동시]의 서북, 음산산맥[陰山山脈] 안에 있던 수도를 방위하는 옛 육진의 하나이다. 북위말의 발란의 발화점이 된 옥야진도 이 육진의 하나이고, 동위를 일으킨 고환도 그 하나인 회삭진[懷朔鎭] 출신이다.
이들 육진의 군사는 원래는 북인·한인의 좋은 집안[良家]의 자제들로 면역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래 영달의 길도 열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의 낙양천도 후에는 북방의 방비도 그 중요성이 약해져 진병[鎭兵]에는 유형자[流刑者]가 많아졌다. 또 군사도 수도방면의 인사와는 신분상의 현격한 차이가 생겨나, 출세의 희망도 없어지고 겨우 이 방면에서 진병을 이끄는 군주가 됨에 그쳐 이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이 불만의 폭발이 파육한발릉의 반란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북위체제의 모순이 이 여섯북진에서 표출되고, 특히 무천진은 이후의 역사전개, 즉 수당제국성립의 원점이었던 것이다.
우문태는 선비족 우문부[鮮卑族 宇文部]의 출신으로, 그 4대조인 우문릉[宇文陵]이 무천진으로 옮겨왔다. 양견의 5대조인 양원수[楊元壽]는 무천진의 사마[司馬]였다. 사마는 진관[鎭官]으로 장사[長史] 다음의 관직이다. 또 당 고조의 사대조인 이희[李熙]도 호걸을 부하로 해서 무천진으로 옮겨왔다. 북주·수·당의 세왕조의 선조는 같은 무천진에 있었던 것이다.
수황실 양씨와 당황실 이씨는 선비족인가
수황실 양씨의 계보에 대해서 여러 사료에는 어느 곳에나 후한의 고위 관료이었던 양진[楊震]의 후예로 나오고 있다. 양진은 홍농 화음[섬서성 동한현 서쪽]의 사람으로 의엿한 한인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날 밤, 어떤 사람이 뇌물을 갖고 찾아와 밤시간이므로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하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 신이 안고, 내가 알며, 당신도 안다. 누가 모른다고 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즉 그는 “양진의 사지[四知]”로 유명한 청렴한 높은 관직의 관료였다.
그렇지만, 각 사료의 기사는 양진으로부터 양견에 이르는 세대를, 혹은 14대째 혹은 25대째라고 말하고, 또 모두 도중에 이름도 알지 못하는 많은 세대를 끼워넣고 있어서 신뢰 할 수 없다. 그러나, 양견의 가문은 아버지인 양충이 서위 말에 보육여성[普六茹姓]이라는 성을 받았고, 양견도 보육여견[普六茹堅]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보육은 노성[虜姓 : 北族의 성]이다. 이것은 북위 효문제 때 한화정책에 준하여 황실의 탁발씨[노성]를 원씨[漢姓]로 고치는 것과는 달리, 서위 말년 선비국수주의의 물결를 타고 한성을 노성으로 고치게 함[虜姓再行]과 동시에 한인에게도 노성을 수여한 결과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풍조에 따라 노성의 이씨〔漢姓〕라고 하는 당황실의 이씨도 대야성[大野姓 : 노성]을 받았다.
6. 北周·隋·唐 連姻圖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가문에서 당황실의 이씨·수말반란기의 영웅 이밀[李密]의 증조부인 이필[李弼], 수황실의 양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비계이다. 즉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집은 본래 모두 선비계지만 앞에서 말한 세 성씨, 특히 수황실 양씨·당황실 이씨는 한민족에 군림하는 황제가 되었으므로 후세에 본래는 한인이었던 것처럼 계보를 위작하지 않았나 의문시된다. 그 일은 수황실의 양진이래의 계보를 신뢰할 수가 없고, 또 당황실의 계보도 진인각[陳寅恪:1890~1969,중국의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해서 정사[正史]의 계보기재의 거짓이 증명되었다. 즉 수황실의 보육여성, 당황실의 대야성은 그들 본래의 선비성[鮮卑姓]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황실 양씨·당황실 이씨가 원래 선비계였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고 하기에는 약간의 주저함을 느낀다. 단지 이 두 성씨 모두의 선조가 무천진에 있었으며, 설령 거기로 옮겼던 한인이었다고 해도 특히 북위말의 북진은 수도의 한화 풍조의 반동으로서 선비 국수주의 부흥의 풍조가 강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선비화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수·당의 두 왕조가 발생한 것은 이 두 왕조가 선비족적인 색깔을 버리고 한인왕조를 부흥하였다고 하는 견해와는 상당히 취지가 다르다.
관롱집단의 지배
일찍이 나이또우 고우난[內藤湖南]이 “육조[위진 남북조 시대와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 때부터 당 중기까지는 귀족제 시대이다”라고 말한 이래, 일본에서는 이 설이 널리 신봉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앞서 수당사, 특히 초당사[初唐史]는 나이토우 코난의 설과 같은 틀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소론에서 발표하고 당 초기의 실권은 선비계 출신자와 그에 봉사하던 북조의 무인적 관료 출신자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다는 것을 논증하여 한인문벌을 중심으로 육조부터 당 중기까지를 귀족제 시대라고 하는 설에 반대하였다. 수대사도 당연히 이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또 전후에 있어서 중국의 귀족제는 삼국시대의 위나라 때 성립되고 서진을 거쳐 동진시대에도 남쪽으로 피난간 왕·사[王·謝]씨 문벌에의해 발전하고, 남조의 양무제의 말년, 후경의 반란에 의해서 쇠퇴한 것이 논증되었다. 즉 화북에 있어서의 귀족제는 호족정권에 봉사하는 한인과 북족 지배자층과의 결합에 의해서 특이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다니가와 미찌오[谷川道雄] 등의 연구에 의해서 심도 깊게 연구되어져 왔다. 다니가와 미찌오는 서위 북주의 지배집단을 “신귀족제”라고 부르고 있다.
또 진인각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우문태에게 통솔되어 서쪽으로 이동하여 장안부근을 중심으로 관롱[關隴 : 섬서성·감숙성] 일대에 자리잡은 선비족 및 그들과 결합한 토착의 지배층을 “관롱집단”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동일한 이해환경에 의한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동일집단의 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앞서 기술한 팔주국 십이대장군의 가문 등이 이 지배집단의 중핵이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는 나도 진인각의 말에 따라 관롱집단이라고 부르겠다. 이것도 귀족제라든가 혹은 신귀족제라고 말해 버려서는 오히려 귀족이라는 말에 혼돈되어 그 본질이 오인되어 버린다. 각각의 시대의 지배집단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가가 나의 이 책 서술의 하나의 동기이고, 당면의 수대사에 대해서는 수왕조와 그를 둘러싼 지배집단의 성격이 대상이 된다.
또 수로부터 당 중기까지는 “수당전기 통치체제[律令制]”의 시대이지만 이 “수당전기 통치체제”는 지배집단의 지도 원리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수당전기 통치체제는 오늘날 더욱 그 본질이 해명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수당전기 통치체제는 대당육전[大唐六典, 738년에 완성된 율·령·격·식 등의 법령을 관직을 기준으로 편집한 책]에 보이는 것과 같은 관료제적 지배가 그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분명하다. 수당전기 통치체제는 수대에 확립되어 당대에 이르러 더욱 계승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수당전기 통치체제 안에 내포되어 있는 지배이념을 탐구해 가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취지이다.
양견이 북주의 실권을 잡다.
양견은 15세가 되던 서위 때 아버지 양충의 훈공에 의하여 차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 임명되어 현공[縣公]으로 봉해졌다. 우문씨 정권이 확립하고[557], 북주의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관위는 올라가고 수국공의 작위도 세습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대부터 실권자였던 우문호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의 중추에는 오를 수 없었다.
572년, 우문호가 사거하고 북주 무제의 전제정치 시대가 되자 부각하기 시작하여, 그 다음해 양견의 장녀는 무제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황태자는 후의 선제로서 당시 15세였다. 575년, 35세의 양견은 수군 3만을 이끌고 황하를 타고 내려가 북제를 토벌하는데 활약하였고, 다음 다음해, 북제는 멸망하여 화북은 다시 북주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남조에서는 북주가 성립한 그 해, 후경의 토벌에 활약한 진패선[陳覇先 : 陳 武帝, 재위 557~559]이 진왕조를 일으켰지만 북조에 대항할 힘은 이미 없었다.
578년, 북주의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외척으로서 양견의 지위는 점점 올라서, 대전의[大前疑]라고 칭해지는 최고관이 되었다. 그러나 선제는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로, 황후는 한 명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견의 딸을 포함해서 다섯 명의 황후를 줄지워 내세웠다.
이와 같은 일은 중국사상 미증유의 일이다. 선제는 아버지 무제에 의해서 등용된 한인 신하인 정역[鄭譯]·유방[劉昉] 등을 신임하였다. 580년 5월, 양견은 지방관으로 좌천되는 일이 있었지만, 자기를 추방하려는 술수이라고 판단하였는지 발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 달에 선제는 사거했지만, 이미 그 전년에 황태자가 즉위[靜帝]해 있었다. 양황후가 생모가 아니었고, 당시 일곱살이었다. 선제는 생전 양견에게 정치의 실권을 주지 않으려고 생각했지만 양견의 강대한 무력을 이용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정역 등은 그 유조[遺詔]를 고쳐서 양견에게 실권을 잡게 하였다. 여기서 양견은 북주의 정계에 크게 등장하였다.
옛부터 양견은 외척의 지위에 있어서 쉽게 북주 정권을 탈취하였다고 말하여져 왔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도 아니어서 근위군을 장악안 노분[盧賁] 등을 배경으로하는 등의, 꽤 강대한 무력적 기반을 가지고 북주의 정계에 등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문제의 정치와 남북통일
수왕조의 창업
580년 5월,북주 선제가 사거하자 다음의 정제[靜帝] 때 양견은 승상부를 열어서 북주의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양견의 추대에 공적이 있던 정역은 승상부의 장사[長史]로, 마찬가지로 유방은 승상부의 사마[司馬]로 취임하여 보좌하는 참모들 가운데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치의 방침으로서는 선제의 가혹한 정치를 새로이 하여 가능한 한 정치를 베풀고, 법령을 간소하게 하고 절약을 실행하고, 인심을 가다듬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견이 무력을 배경으로 강제로 북주의 실권을 잡은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우선 위지형[尉遲逈]이 일어났다. 위지형은 북주 창업의 기틀을 마련한 우문태의 누이의 아들이고, 서위 문제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선비 탁발부와는 다른 위지부 출신으로 서위의 촉[사천성] 토벌에서 빛나는 무공을 세웠었다. 북주의 선제가 즉위하자 대전의라고 불리는 고관이 되었지만, 곧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상주총관이 되었다. 게다가 그 상주총관[相州總管]도 이윽고 양견의 일파인 위효관[韋孝寬]으로 바뀌었다. 위효관은 한인 명족인 경조[京兆] 두릉[杜陵 : 섬서성] 지역 출신으로 학문이 있는 무장이었다. 서위 때 동위의 침입을 격퇴하고, 또 북주 때 북제토벌은 그 헌책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양견은 이 위효관의 협력에 의해서 옛 북제가 다스리던 영토를 모두 들고 일어난 위지형의 수만대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또 남쪽에서는 같은 해 7월에 운주 총관[鄖州 總管]인 사마소난[司馬消難]이 위지형에 호응하여 양견에게 반항하였다. 사마소난은 처음에는 북제에 벼슬하여서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후에는 북주를 섬겨 북제와의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그의 딸은 북주 정제의 황후가 되었다.
또 왕겸[王謙]도 같은 해 8월에 촉[사천성]에서 대군을 일으켜 양견에게 저항하였다. 양견은 그 토벌을 위하여 대승상부 소속의 정역, 유방 등을 장군으로 출동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구실을 대어 출진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정역 등이 실각되는 원인이 되었다. 반기를 든 다음 달, 사마소난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남조 진으로 도망가 버렸고, 또 같은 달, 위지형은 업성[하남성, 옛 북제의 수도]에서 위효관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또 왕겸도 10월에 패하여 살해당하였다. 이들 장군들은 두려워할만한 적이었지만, 양견은 운좋게 이들을 배제할 수가 있었다. 이 성공은 위효관의 활약에 의한 것이 많았지만, 그 위효관도 개선 직후에 72세로 사거하여 양견의 정권 독점에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양견은 그 해[580] 12월 3일, 상국[相國]이 되어 모든 정치를 통솔하였고, 수왕[隨王]이 되어 20군[郡]을 수국으로 하였으며, 검을 차고 전[殿]에 오르는 것이 인정되고, 이 밖에 다음 대의 황제가 되는 예식을 모두 다 갖추었지만 두번 다 이를 사퇴하고 수국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양[禪讓 :평화혁명]의 형식을 취하기 전까지의 잠정적인 일이었다.
다음 해 581년, 2월 13일 북주의 정제는 제위를 양견에게 양보하였다. 양견은 왕조 이름을 수[隨]의 “辶”를 빼고 “隋”라고 고치고, 연호는 개황[開皇]으로 하고, 장안을 대흥성[大興城]이라고 고쳐서 그 수도로 하였다. 양견은 제호[帝號]로는 문제[文帝], 묘호[廟號]로는 고조[高祖]라고 한다[이후, 양견을 수문제라고 부른다]. 퇴위한 정제는 개공[介公]으로 봉하여져 1만호를 받았지만 그 해의 5월에 죽었다. 아마도 암살되었을 것이다. 또 수문제는 북주 황실의 일족도 모두 살해하여 북주 부활의 뿌리를 잘라버렸다.
수왕조 창업기의 공신들
문제 추대에 공이 큰 정역·유방이 앞서 기술하였듯이 실각한 뒤, 이에 대신하여 크게 등장한 것이 고경[高熲]이다. 그의 아버지 고빈[高賓]은 북제로부터 북주로 귀순하고, 앞서 말한 팔주국의 한사람인 수문제 황후의 아버지인 독고신의 부하가 되어 한때는 독고성[獨孤姓]을 사여받았다. 고경은 북주가 북제를 평정하였을 때의 활약으로 주목받아, 수문제는 일족 양혜[楊惠, 후의 觀德王. 이름을 雄이라고 고침]를 사이에 두고 설득하여 정역, 유방의 지위에 대신하게 하였다. 그는 이 두사람이 힘들다고 여겨 싫어하였던 위지형의 토벌에도 군사을 이끌어 무공을 세웠다. 그리고 수문제의 즉위와 함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납언[納言]의 직무을 겸하여 최고의 실권있는 지위에 취임하였다. 고경은 그 특징으로서 실무 관료적인 면과 지극히 공평한 입장이 지적되는데, 동시에 그는 그 경력으로 보면 진인각이 말하는 관롱[關隴]집단의 사람으로 봐도 좋다[다니가와 미찌오, “수당제국형성사론”, 350페이지 축마서쪽 1971].
고경과 버금가는 창업기의 공신에 소위[蘇威]가 있다. 소위는 서위의 관료로서 유명한 한인 소작[蘇綽]의 아들이다. 소작은 문무의 도에 능통하고 서위의 국가체제 정비에 공적이 있으며, 특히 그가 만든 “육조조서[六條詔書]”는 관리의 마음가짐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항목은 ⑴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 ⑵ 교화를 두텁게 하라. ⑶ 토지생산력을 높혀라. ⑷ 현량을 발탁하라. ⑸ 옥송[獄訟]을 불쌍히 여기라. ⑹ 부역을 균등히 하라 의 육조이다.
소위는 북주의 실권자였던 우문호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 연줄로 승진하는 것을 싫어하고 은거하여 독서에 빠져 있었으나, 고경의 추천으로 수문제를 섬기고 그 중신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서위의 국가체제의 정비에 애쓴 것과 마찬가지로 소위는 수왕조 제도 확립에 힘을 쏟았다. 수왕조 지배체제의 근본이 된, 뒤에서 말할 “개황률령”은 그가 입안한 것이 많다.
고경·소위로 대표되는 수왕조 창업기의 공신들은 서위·북주 이래의 지배집단인 관롱[關隴]집단 내의 사람, 혹은 그들에게 봉사한 한인관료 가문 출신자였고, 수왕조의 창업과 함께 특히 새로운 지배집단이 대두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고경·소위도 수문제의 장자인 태자 용[勇]이 물러나고, 뒤에서 말할 남조 진의 토멸에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한 수문제의 둘째아들 진왕 광[晋王 廣, 후 煬帝]이 대두하자 그의 배후가 된 양소[楊素 : 수말에 반란을 일으킨 楊玄感의 아버지]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서는 수문제가 시기심이 강하였던 것과 덧붙여 수문제의 독고황후의 개입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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