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여인천하가 두번째로 쓴 글이었네요 ㅋ
이번이 세번째 글인데, 아시는 분들 꽤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올려볼께요 ^^
1. 불운의 비, 소혜왕후 한씨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王과 妃)"에서 채시라씨가 열연하셨죠.
소혜왕후 한씨는 1437년(세종 19)에 서원 부원군 한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455년(세조 1)에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그녀의 아버지 한확은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확은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곧이어 서원 부원군에 봉해집니다. 그러나 심약했던 세자(덕종)가 즉위하기 직전인 1457년 20세의 나이로 죽어버리고 맙니다.
남편이 일찍 죽어 시동생인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죽자, 그녀의 아들인 잘산군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1469년 성종 즉위). 1년후인 1470년에 성종이 죽은 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소혜왕후에 봉해졌고, 곧 인수대비에 책봉되었습니다. 성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어야 했으나, 세조의 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대신, 인수대비는 내명부의 일을 다스렸습니다.
성종은 첫번째 비로 한명회의 딸 공혜 왕후를 맞이하였으나 곧 죽고, 계비로 윤기견의 딸을 맞이하였다. 윤씨는 세자(뒤의 연산군)를 낳았으나, 다른 후궁들을 시기한다는 이유로 인수대비에게 미움을 받다가, 성종의 용안(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우를 범하여 인수대비에 의해 폐비되었습니다. 훗날, 연산군이 생모 윤씨 사건으로 인해 사화를 일으키자, 인수대비가 병석에 있던 몸으로 직접 훈계하다가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 쓰러진 뒤, 곧 승하합니다. 인수대비가 승하한 후, 연산군은 며느리를 죽인 여자에게 대비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며 인수대비 칭호를 빼앗고, 소혜왕후로 호를 복귀시킵니다.
소혜왕후 한씨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지었습니다.
2. 조선시대에 코끼리가 있었다!
KBS 프로그램 스펀지 8회에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아래 내용은 제가 아는 사실을 쓴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코끼리가 있었습니다.
태종 1년, 1401년에 일본 국왕이 조선에 선물로 준 것이 바로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는 특별한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끼리가 사람을 밟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피해자(?)는 관료 이우로, 코끼리의 모습이 추하다며 코끼리 앞에서 놀리다 밟혀 죽게됩니다. 이일로 조정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벌어집니다. 살인자는 국법에 맞게 처벌해야 하지만, 이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지 동물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마침내 태종은 코끼리를 한번 봐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훗날, 코끼리가 먹이를 주던 사육사를 또다시 밟아 죽이고 맙니다. 결국 코끼리는 전라도의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합니다.
3. 백제....그리고 남부여?
백제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SBS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성유리씨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에서 의혹을 품고 계시는
분(주로 제 친구들;;)들이 많을 것입니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남부여의 공주? 백제의 공주가 아니라?
(극중 성유리씨는 성이 부여, 이름이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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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의 공주 소서노와 결혼을 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고주몽은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둘중 한명은 고주몽의 뒤를 이을
태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고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칠 당시, 고주몽에게는 부인이 있었고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고주몽은 반 잘린 칼을 그녀에게 주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칼을 찾아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그 아들(유리)이 그녀와 함께 나타나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임명합니다.
눈을 똑바로 뜬채 태자자리를 빼앗긴 비류와 온조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물론 소서노 역시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소서노는 두 아들을 설득하여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리하여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한강유역에 나라를 세웁니다. 온조는 국호를 "십제(十濟)"라 칭합니다. 그러나 바닷가에 건국된 비류의 국가는 점점 기울어간 반면에, 기름진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은 십제는 점점 번성해갑니다. 비류는 온조에게 자신의 나라를 맏기고 세상을 떠나고, 온조는 미추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게 됩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십제에서 백제로 국호를 바꾸었을때, 고구려에서는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 동명왕이 죽고 2대왕 유리가 즉위하였습니다. 소서노는 온조에게 "그래도 동명성왕은 너희들의 아버지이다. 동명성왕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너희들도 제를 지내 효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여 온조는 해마다 아버지 동명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어쨌든, "십제>백제" 이렇게 바뀐 것이죠. 훗날, 고구려에 의해서 한강유역의 도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합니다. 개로왕을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즉위초에 웅진(지금의 공주)로 천도하지만 귀족들의 반란으로 내정은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동성왕과 무령왕을 거치며 국세를 차츰 회복했고, 고구려를 먼저 공격하기도 합니다. 성왕은 538년에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습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백제의 국호는 "십제>백제>남부여"로 바뀐게 맞습니다. 하지만, 국사책에서는 "백제"만을 명시하고 있고, 일반인들도 "백제"라는 이름을 더 많이 듣습니다. 원래대로 하자면, 국사책에도 "남부여"라고 불러야하고, 일반인들도 남부여라고 하는게 맞는데도 말이죠. 그러나, "남부여"라는 이름에 대해 밝혀진 것 보다 "백제"라고 배워왔던게 더 오래 되었으므로 편의상 "백제"라고 부른답니다.
(저희 국사 선생님께서 말씀 해주신 것을 토대로 썼습니다)
4. 주초위왕과 기묘사화
<사진은 여인천하의 한장면으로, 홍경주가 딸인 희빈에게 귓속말을 하는 모습입니다.>
1515년(중종 10)에 문과에 급제한 조광조의 개혁정치 추진으로 훈구파들이 정치적인 세력을 점차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훈구파들은 이러한 조광조가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었고 그를 몰아내기 위한 술책을 마련해 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초위왕(走肖爲王)"입니다.
조광조가 훈구파의 인내심을 건드렸던 개혁은 바로 공신들의 훈작을 삭탈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은 중종반정 공신들이 너무 과한 훈작을 받고있으며, 이를 이용해 재산을 불리는 등 악한일을 자행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막기위해서는 훈작을 삭탈해야한다고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훈구파들은 반대를 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중종도 "이 것은 지나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꿋꿋이 중종을 설득시켰습니다. 그리고 훈구파는 뒤에서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마침내 1519년(중종 14)에 훈구파는 조광조에게 대역죄를 뒤집어 씌우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훈구파의 중심격이었던 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남양군 홍경주가 자신의 딸인 희빈 홍씨에게 그들의 계획을 말하자, 희빈 홍씨는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게됩니다. 얼마 후, 희빈 홍씨는 자신의 상궁과 나인들에게 밀명을 내려 궁의 후원의 모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레들이 꿀로 글이 써진 부분만 갉아먹자, 나뭇잎 위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한편, 훈구파는 궁궐내에 조광조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린다. 정치세력과 연결된 희빈이나 경빈이 퍼뜨렸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궁중에는 조광조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마침내 중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중종은 원래 조광조의 지나친 개혁정치로 인해, 조광조가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을 아닐지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게 되자, 불안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후궁들을 통해 중종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 "주(走)"자와 "초(肖)"자가 합쳐지면 "조(趙)"자가 되므로 이는 필시 조씨가 왕이 된다는 하늘의 계시라면서 훈구파는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조광조의 역심을 임금께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중종의 의심이 또한 폭발하면서 기묘사화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로인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대거 귀양을 가거나 사사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서 선비들이 <소학>을 읽지않는 등 부작용도 생길 정도였다.
제 짧은 생각이지만, 기묘사화의 숨겨진 일등공신은 바로 희빈 홍씨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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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번 끄적여 봤는데,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네요;;
참 조잡하고 공통점도 없는 -_ -;;
죄송합니다 (__)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복받을거에요~
http://www.cyworld.com/ehdwns1024
저희 국사선생님께서 저에게 우리 역사 속의 야사(野史)를 많이 알려주시거든요 ^^
혹시 궁금한거 있으시면 방명록에 남겨주셔두 돼구요, 메일 보내주셔두 돼요~
구경 많이많이 해주시길 ^^
참! 반지의 제왕에 대해서 서술하려면
예술/문학 게시판에 쓰는거 맞아요?
아니면 리플로 좀 알려주세요 ㅠ ㅋ
첫댓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열심히 공부하셔서 바른 역사학자가 되시길... ~~
1번글에서 소혜왕후는 왕과비라는 대하사극에서 나왔었죠..연산군은 다른 왕들이 붙이는 칭호가아닌 그보다 낮은군으로 칭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죽습니다..윤시비가 죽을때 사약의 마시며 장차 세자가 왕이에 오르면 이걸 전해주라면서 피가묻은 자신의 손수건의 어머니에게 건내줍니다.
그 당시는 몰랐으나 홀로 외롭게 자랐던 연산군은 왕이 되어서 그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 윤씨의 피묻은손수건 등의 보면서 급도로 노하여 할머니인 소혜왕후의 원망이 하늘의 찌릅니다. 연산군의 업적은 지금 현재 흉악한 폭군으로 생각합니다.하지만 자신의 아버지 성종같이 과거에 어머니의 사랑의 받으며 자랐으면
성군이 될수 잇던 자질의 갖춘 왕이지 않았을까
2번 코끼리는 제일 처음 궁에서 길렀는데 거기에 관료(꾀 높은 계급인거 같아요)가 코끼리 보고 놀리자 코끼리가 갑자기 돌변하여 죽였다는군요..그것이 코끼리 사건의 시초입니다.
연산군이 윤비의 일로 대신들을 숙청한건 모후의 복수보다는 그걸 빌미로 삼아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려고한 측면이 강합니다. 연산군의 패위되는 이유는 연산군의 폭정보다는 신료들과 왕의 대립와중에 왕이 밀려났다고 보는게 옳을듯합니다.
첫번째 글의 중심은 연산군이 아니라 소혜왕후의 삶이에요 ^^
연산군의 폐위된 큰원인이라 할수 잇는 명분은 소혜왕후에대한 불효와 궁에서의 불도덕적 행동등이 주원인입니다..가만히 있는 왕의 그당시 명분없이 대립으로 폐위시키는건 좀 어려운일이었습니다.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는 조선조에서 가장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조광조는 그 당시 계급없이 선비 평민 차별없이 모두 평등 해야한다고 주장하였죠.그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였고 사대부들로서는 굉장히 싫어했겠죠.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만들떄 처럼..
조광조의 일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시간만 흘렀지 같은것 같아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세력......
같으면 나쁜거는 고칠줄알고 좋은것은 어느선에서싸우고해야하는데 우리정치보면 무도의 고수분들 대반수죠..
남부여는 백제입니다.
글 내용은 읽고 꼬릿말을 다셨나요? -_ -;;
본문내용보고 한말이 아닌데요^^;; 광해군도 그렇고 연산군도 마찬가지지만. 반정세력이 내세운건 어디까지나 명분일뿐 실제로는 왕과 신료들과의 주도권싸움 혹은 두세력의 세력대결에서 왕쪽세력이 패배한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아하아하! 그렇군요 ㅎㅎ 좋은정보 감솨!
글 추천기능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어요~ 좋은 글 감사^^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펌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