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을 수반하는 행위를 할 때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은 특정 대상, 분야에 대한 정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수학 공식에 대한 정의를,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 단어에 대한 정의를 알아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전문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 단어에 대한 정의를 세밀히 분석하고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이에 대해 사전은 그 훌륭한 등대지기 역할을 해준다. 사전은 수많은 정의들로 이루어지는데, 국어사전은 우리말에서 사용하는 낱말들의 정의를 수록하고 있으며, 백과사전은 학문과 시사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의 정의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매우 엄청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전은 무수한 의미들을 정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수한 의미들을 누락시킨다.
정의의 배후에는 배제가 있다.
예를 들어 국어사전에서 '행복'의 정의를 찾아보면 "생활의 만족과 삶을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되어 있는데, 이 정의에 의거하면 민족을 위한 희생이나 종교적 순교는 행복에서 배제된다고 볼 수도 있다.
백과사전에서 '예술'이라는 용어를 찾아보면 "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의해 정신의 충실한 체험을 추구하는 문화 활동"이라는 정의가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정치는 수백반 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도의 예술"이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떠한 대상, 개념이나 용어를 그 특유의 의미로 고정시키면 그 의미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내용은 어쩔 수 없이 배제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선택된 것은 동일자가 되고 배제된 것은 타자가 된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지식 체계다. 지식의 주요 기능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대상에 관해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정보를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의 차이를 규정하고 서로 구분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식은 대상에 관한 정의를 내리며, 그 정의가 가져오는 구분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낳는다.
문제는 지식 체계가 누적됨에 따라 배제도 점점 쌓인다는 점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듯이 지식의 봉우리가 높아질수록 지식에서 배제되는 것도 지식의 그림자처럼 길어지고 짙어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들리는 것은 항상 동일자의 목소리뿐이고 타자의 목소리는 감춰지게 된다.
동일자는 드러나 있기 때문에 알기 쉽지만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는 숨겨져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동일자는 늘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타자는 너무나 익숙해서 배제됨이 당연시된다.
그래서 역사는 동일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서술된다. 더구나 그것은 역사의 반쪽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역사의 전체인 양 포장된다.
이러한 동일자 중심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로 삼국지를 들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촉나라의 유비가 그렇게 칭송받고, 관우와 장비가 그 시대 최고의 명장이라고 사람들은 치켜 세운다. 하지만 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진나라(사마소-사마의의 둘째 아들-가 위나라를 찬탈하였다)이며, 그 기반을 다진 조조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위인이다(물론 관우, 장비, 유비가 못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포장하는 진행 단계를 거부하고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숨은 것의 역사, 즉 침묵한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야 한다. 그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과거를 찾아내는 방법이라면 우선 역사학을 생각할 수 있다. 역사학은 전해지는 문헌과 자료를 통해 과거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논거가 확실하다는 장점이 있고 문헌과 자료만 풍부하다면 해당 시대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조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된다. 문헌과 자료는 지식의 산물이므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배제되고 누락되는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필요해지는데, 푸코는 고고학적 방법을 제안한다. 사실 타자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동일자의 역사에서 타자는 연속적인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무의식처럼 묻혀있으며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이러한 흔적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학문은 어떻게 보면 역사학보다 고고학이다. 역사학이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문헌과 자료로써 과거를 복원한다면 고고학은 이미 버려진 유적과 유물, 그 흔적과 자취에서 과거를 캐내는 학문이다.
숨겨져 있다고 해서 모두 보물인 것은 아니듯이 타자의 목소리라고 해서 무조건 진실을 담도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캐낼 가치가 없는 타자의 흔적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는 데 불과한 게 아니라 그동안 동일자의 목소리로 일관되어온 현실의 역사에 엄중한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배경으로 한(그들이 주장하기에)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뜨거운 감자인 뉴라이트식 교과서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동일자 중심의 역사 서술은 동시에 암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보다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에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동일자에 대한 그들의 포용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그들이 기존의 동일자를 부정하고 새로운 동일자로서 올라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는 동일자-타자의 관계가 아닌 스스로 동일자가 됨으로써 애초에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어도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즉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는다는 것이 그저 역사학자, 고고학자들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