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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법회 인각 큰스님 법문 최종 수정본(2012.1.14)
1부
여러분들은 자기생각(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생각이라는 도둑에게 뺏길 수도 있다. 그 도둑에게 다시 내 마음이 뺏기는 순간 우리는 당달(눈뜬)봉사가 된다. 잠을 자도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있으면 어떻게 사나? 육신은 수면을 취해도 정신세계는 살아있다. 정신과 육체를 이원화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도둑과 놀 때 우리는 육신과 정신이 모두 다 뺏긴다. 이제 여러분들은 마음의 눈, 새로운 것을 얻었기 때문에 육신과 마음의 세계가 이원화로 될 수가 있다. 수면 중에도 내 정신세계가 깨어 있어야 하고, 잠자면서도 그 망념을 보아야한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엄청난 마음의 눈을 얻었다. 잠을 안자도 피곤한 것을 모른다. 마음만은 누워 잠자지 않아도 쉴 수 있다. 육신은 깨어 활동하고 있으나 마음은 잘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다. 더 진보해야 될 것은 보는 눈에 형체(몸)를 만들어야 한다. 눈만 반짝이어서는 안 된다. 그 눈을 내 몸과 똑같은 크기의 형체를 구성해야 된다.
15년 전에 이 스님이 그 세계에 들어갈 때 내가 내 마음이 주먹 만한 것이 온 세계를 다 돌아다녔다. 극락, 지옥 등 마음이 빠져나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삼매이다. 좌선에 들어서 마음을 빼내어 몸은 가만히 앉아있고 마음이 움직인다. 이것이 마음(무형)세계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와 가까워진다. 부처는 분별이 끊어지는 자리 망념이 끊어지는 자리 그 자리(중도)가 부처의 자리이다. 중생이 살아가는 방법은, 죄를 짓는 것이나, 분노를 일으키거나, 자기 이익에 치우쳐 배려 없는 게 중생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가는 방법에는 배려가 없다. 지금 우리세계가 그렇다. 배려가 없고 이기적으로 자기위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도 그랬다. 그래서 육바라밀, 보시바라밀음.. 이것은 그 시대에도 남에게 배플 줄 모르기 때문에 주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설하신 것이며 주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스님은 육바라밀 자체를 무시한다. 바라밀이 중요하지 않다. 팔정도를 제일 중요시해야 한다. 바른 눈을 얻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첨단의 길이다. 바른 눈이 없으면 절대 바른 사고(생각)를 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이 열려야 바른 판단의 마음이 열린다. 옳고 그름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완벽한 구분(판단)할 수 있는 게 눈이다.
이번에 대구에서 중학생이 왕따를 당하고 폭력에 못 견디어 자살한 사건은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다.
지식도 이 바른 눈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해야 하는데 성적에 집착하고, 인성과 바른 눈이 없는 교육과 점수에 치중하여 아이들에게 경쟁을 시켜놓은 것이 교육 정책인 것이다.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빵점 받아도 좋다. 바른 눈으로 보고 바르게 배워 알고 있다면 백지를 낸들 그 지식이 없어지는 것인가?
지금 이 사회가 출세하기 위해 지식이란 교육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맹점이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망치는 것이고, 부모의 이상과 꿈의 욕심을 자식에게 집착으로 공부시켜 재앙을 부를 수밖에 없다. 도덕에는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양보하지 않고 학원가에 난무하는 폭력과 이기는 도덕이 없는 가르침이 불러오는 결과인 것이다.
힘 약한 자를 왕따를 시키고 폭행을 한 그 아이들의 가정이 불우하고 결손 되어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밖에 모르는 지식층과 물질이 풍족한 부자의 자식들이 그 주동 인물이다. 왜 그런가? 자랄 때부터 부모가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성품과 모든 것은 보고 듣고 받아들인 습성과 물질로 해결해 가는 것을 가르치고 키웠기 때문이다. 부모가 그러는데 자식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식을 깡패로 키운 게 부모이다.
심지어 학부모가 학교 교단에 찾아가서 자기 자식을 두둔하고 교사를 징계하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키워 놓은 아이들은 안하무인이 되어 남을 괴롭히고 그 고통을 즐기며 그것도 만연화가 되어 정작 착하고 힘 약한 아이들이 그들의 놀이 게가 되고 시달림 받아 자살까지 하는 것이다. 한해 그렇게 자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나? 모두가 잘못 가르친 결과이다.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물질로 탐욕과 교만과 욕심으로만 가르쳤기 때문에 아이들의 성품이 거꾸로 바꿔가는 원인이 된 것이다.
어떤 생각이든 다 도적이다. 착하다, 옳다, 나쁘다. 잘했다 못했다. 맞다 틀리다. 이런 기준을 가진 분별의 마음(생각)이 바로 도둑이다. 착한 마음도 없고 나쁜 마음이란 것도 없다. 모두 다 내 기준에 세워둔 도적마음이다.
<1품 해설>
문수보살은 과거 오래전에 깨달음의 길을 가고 수행하고 무애지를 얻었사오매, 저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땅히 믿고 받아 지닐 수 있사오나 소과인 성문이나 천룡팔부 신중과 미래세상의 모든 중생들은 비록 부처님의 성실한 말씀을 들을 지라도 반드시 의혹을 품을 것이오니>...
문수는 부처님 말씀과 진리를 모두 인정하고 믿을 수 있으나, 일반중생들과 아직 깨닫지 못한 수행자들은 설사 부처님말씀이 옳다고 하여도 믿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질타하셨다.
<지장보살은 과거에 어떠한 행동을 하였고 어떠한 원을 세웠기에 능히 이처럼 불가사의 한 일을 성취하여 사온지 자세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비유하자면, 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초목ㆍ총림과 벼ㆍ삼ㆍ갈대와 산석미진의 그 갖가지 물건을 하나하나 세어서 “그 수만큼의 항하(갠지스 강)가 있다”고 하고, “그 많은 항하의 모든 모래 수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치더라도 지장보살이 십지의 과위(果位)를 증득한 이래 교화한 자의 수효는 “위에 든 비유보다도 천배”나 많으리라..>
이는 지구상만의 얘기가 아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숫자개념이 증폭되는 대목이다. 우주를 통칭해서 하는 말이다. 왜 헷갈리게 만들었나? 우주의 모든 물체를 먼지로 계산하자. 그 먼지만큼의 항하사가 있다. 착각하는 것이다. 그 항하의 모래 수는 역시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 있는데 왜 그 항하의 모래수를 거론하느냐? 이것이 또 하나의 걸림이다. 지구에 모래가 가장 많은 곳이 중국의 항하강 이다. 전세계 4대강중에 유독 모래가 많은 곳이 항하이다. 먼지 하나하나까지의 세계가 있고.. 숫자의 개념은 정말 엄청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겁의 단위가 얼마냐?> 일 겁(劫)이란 하늘의 천녀가 100년 만에 한번 내려와서 사방 16Km되는 바위를 옷자락으로 다 닳아 없애는 기간이 한 겁이다. 결국 헤아릴 수가 없으니 우주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우리가 착각하는 부분이다. 간단히 지금 지구의 흙모래, 먼지와 물체를 갈아서 모두 똑같은 크기의 먼지로 만든다면 그 수효가 얼마이겠느냐? 상상할 수 없는 수효이다. 단어 한개 한 개가 모두 숫자이다. 산석미진과 초목, 총림, 벼, 삼, 갈대...>항하사 나유타 아승지 무량무변 구원겁 등 여기까지만 생각해보자. 그것만 해도 무량무수이다.
수행도중 여러분이 가는 그 자리가 벽지불자리에 올라가 있다.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 권선하면 해탈의 길을 갈 수 있다.
<이 사람은 마땅히 백번을 삼십삼천에 태어나 영영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느니라.> 지금 사찰이나 절에 가면 기도라는 말은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제도라는 말을 쓰는 곳은 이 지구상에서 석불사 밖에 없다.
제도(濟度)라는 말을 왜 쓰느냐? 제도란 미혹한 세계에서 생사만을 되풀이하는 중생들을 건져 내어 생사 없는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함을 의미하며 숙명에 업을 녹여내고 잘라 없애며 또 내가 가야하는 자리를 잘라 없애주는 것이다.
< 문수사리야! 이 지장보살마하살은 저 머나먼 과거의 말로는 말할 수 없는 겁전에 큰 장자의 아들이었느니라. 그때 세상에 부처님이 계셔서 호를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라 하셨으니, 한 장자의 아들이 부처님의 상호가 천복(千福)으로 장엄하심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어 묻기를,>
내 몸과 얼굴모양을 부처님과 같은 좋은 상호와 장엄한 몸을 얻고자하는 욕심의 발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신이다.
<또 과거 불가사의 아승지겁 전에 그때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어 호를 각화정자재왕여래(覺華定自在王如來)라 하셨으니, 그 부처님의 수명은 사백천만억 아승지겁 이었느니라. 그 부처님의 상법(像法)동안에 한 바라문의 딸이 있었으니, 그는 숙세에서 깊고도 두터운 복을 심어 여러 사람들로부터 흠모와 존경을 받았으며,>
자식이 내 몸을 빌렸을 뿐 내 자식이 아니다.
어머니 마음은 “내가 너를 놓았는데, 내가 너를 키웠는데, 내가 너를 가르쳤는데 내가 너보다 많이 살았고 배웠는데 네가 알면 얼마나 아나, 하고 그 자식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도 여러분들의 측근 즉 가족들에게 이것이 좋으니 한번 공부해 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이유다. 자랄 때 보고 온 평소에 나로 생각하기(고정관념) 때문에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딸을 전생의 선각자로 보지 못하고 자식의 깨달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애틋한 마음과 안타까움으로 부모가 고통을 받는 것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상시 아무리 어머니를 가르쳐 줘도 탐욕과 사도에 빠져 부처를 비방했다. 그 죄가 더 크고 무겁다. 법을 훼방하고 부처를 비방한 죄가 제일 크다. 살인, 도둑보다 악도중의 악도이다.
어머니를 구출해주기 위해 바라문의 딸은 지장이 되어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나 그 역시 화신일 뿐이다.
<「원하오니 부처님이시여! 인자하신 마음으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을 속히 일러주시옵소서. 저는 이제 몸과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곧 죽을 것만 같나이다.」하늘에서 장엄한 부처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대목도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불러 보아라. 부처님이 눈이나 깜박일 것 같나, 우리가 또 미혹으로 빠뜨리는 부분이다. 부처님께서 소리나 모습으로 보고 들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여러분들을 혼돈스럽게 만든 부분이다.
像法시대의 상은 모양상인데 이는 무엇입니까?
상법시대라는 것은 법의 모양이 변해가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바른법(정법)이 퇴색되고 변형되어 상법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여래가 머문 기간이 본래 3천년이라면 정법천년 상법천년 말법천년이라 하더라도 지장보살은 지금부터 56억 7천만년을 중생들과 함께 존재하고 계신다면, 석가여래가 온 그 자리는 지장보살이 잠시 휴가 떠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2부
< 효순한 자식이 있어 어머니를 위하여 공양을 베풀어 복을 닦아 각화정자재왕여래의 탑사에 보시를 한 연고로 보살의 어머니만 지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이날 이 무간지옥에 있던 죄인은 모두 함께 천상에 태어나 낙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옥재판관이 49재 지내는 이유: 49일 이내에 망인이 생전에 지은죄상을 분류하고 상중하 형량을 결정하여 어떤 몸을 받을 것인가? 를 결정하는 기간이며 죄의 경중에 따라 죄업 식에 의해 감옥이 정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함께라고 하였는데 천상에 올라가도 3일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상시의 집착과 욕심이 발동하여 극락에 올라가면 산해칠보가 길에 깔려 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 보물을 잡아서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도 되거나 미래에 제도시킬 중생이라고 나누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그가 걸어가는 길목에 수많은 유혹과 더불어 살아생전의 욕심과 집착과 분노를 일으킨 그 업식 대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포장한 누각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다. 평소의 망념이 나를 인도하고 그 곳으로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 누각의 문이 구렁이, 토끼, 개, 소, 돼지, 물고기, 지렁이, 사자, 호랑이, 개미, 초목, 총림과 벼ㆍ삼ㆍ갈대와 산 석 미진 등 이 세상에 형체가 있는 모든 형상은 모두 다 포함되고 그 자궁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스님이 7 ~ 8년전에 이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설해 주었다. 그리고 최근 2년전에 우리 남처사가 직접 죽어서 그곳을 다녀왔다. 남처사가 지옥세계에서 체험한 지옥 속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발가벗고 남처사의 성기를 잡고 자기에게 좋은 종자를 넣어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라고 했다. 그 수많은 여자들이 개,말, 소, 돼지 등 등 육도를 윤회하게 하는 악녀들이다.
여자의 모습으로 자기 자궁속으로 들어오도록 바라며 유혹하는 것이다.
남처사가 살아나온 이유는 그 유혹을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빠져들어 갔으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남처사의 법문>
몸이 아파서 가봤는데 너무 아름다운 그런 저승세계를 다 보고 왔다.
연못 속에 연꽃이 피는 곳에 목만 내어놓고 있기도 했고, 사람을 방앗간에 넣어 볶는 곳에도 갔고, 상가 집에 음식을 얻어먹기도 해봤고. 방앗간, 믹서기로 갈아 돌리는 곳에도 들어가 보았고, 사람을 국수기계처럼 생긴 곳에 끌어넣어 토막토막 잘려 나오는 곳에도 들어가 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기도 하였고, 친구가 부르며 나를 유혹하며 수도 없이 다가 왔다. 상상도 못한다. 그 곳의 경치는 말할 수 없이 좋았고 바다, 물, 한복 입은 예쁜 여자들이 술상차려 놓고 돈 주고도 못 구한다고 하며 둘이서 부르며 유혹하였다.
뇌출혈로 카톨릭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 내가 그 집 사위였다. 수많은 여자들이 벌거벗고 아들 하나 놓아달라고 통사정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주겠다 그 권한을 내가 모두가지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니 저승길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설마 그런 게 있을까 했는데 나를 불러올리는 것이었다. 올라가는 계단의 끝이 안보였다. 그 곳을 반 이상 올라가니 위에서 다시 내려 가라고하여 살아 돌아왔다. 내가 세 번 죽을 뻔했고 지옥을 세 번 갔다 왔다.
<스님 법문>
“7~8년전에 해준 얘기가 우리 남처사가 증인이 되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부처님을 낳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꽃다운 나이에 단명하였다. 왜 그 지옥에 떨어졌나? 우린 죄를 안 짓고 바르게 살수 없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이라는 먹이 굴레에서 생존해 가기 때문에 살생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우리는 생각으로 끝없는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법 불멸시대를 대비해 원래 지장의 자리를 부처님께서 돌려주는 과정과 또 이 지장경을 만천하에 다시 알리는 수순을 마야부인을 제도로 의식화 하였으며. 또 부처님의 법을 본원인 지장보살에게 이관하는 절차 의식이다.
이 지구의 70억의 인구와 똑같은 숫자로 지장보살의 분신을 만들어 나누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다가온다. 자기 옆에 항상 지장보살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이와 같이 억세고 거치른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의 마음을 조복시켜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그중 열 가운데 하나 둘은 아직도 나쁜 버릇에 빠져 있습니다.>
오탁악세란 안(眼),이(耳),비(鼻), 설(舌),신(身) 뜻으로 받아드리는 감정을 말한다. 즉 우리의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몸으로 받아드리는 감정으로 탐진치 삼독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세상을 두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거꾸로 배우고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태어나 알음알이로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육식이라고 한다.
오탁악세는 재물, 권력, 명예, 질투, 분노 등 이것이 물질만능시대를 추구하고 자기가 안이비설신의로 받아들인 알음알이(지식)을 내 감정으로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맞고 맞지 않는 것을 두고 옳고 나쁘다. 좋다 실타 맞다 틀리다. 라는 분별이 일어나서 다툼이 시작된다.
생각은 식이다. 지식을 잘못 배워 바른 눈을 멀게 하고 거꾸로 살아가면 죄업을 만들어 가고 그 지식을 바르게 배워 거름으로 삼는다면 바로 부처가 된다.
그 지식을 배울 때 나쁜 의도와 나쁜 생각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배웠기 때문에 먼 길 돌아간다. 내 생각하나를 잡아감으로 한순간에 극락이 만들어진다.
<혹은 남자의 몸으로 나투고,
혹은 여자의 몸으로 나투며,
혹은 천룡의 몸으로 나투고,
혹은 귀신의 몸을 나투며,
혹은 산이나 숲ㆍ내ㆍ강ㆍ못ㆍ샘ㆍ우물 등으로 나타내어 사람에게 이롭게 하면서 모두 제도 해탈시키며>
지장보살의 몸이 안가는 곳이 없다. 먹고 있는 음식이 지장보살의 몸이다. 나아가 나를 낳아준 부모, 가족 측근이 나와 연을 다시 짓기 위해 우리주변에 상존한다.
우리가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갈 때 내가 고른 고추, 파, 배, 사과, 배추 등 살 것을 생각을 그리고 간다. 앞에 가서 눈에 보이는 배추를 사지 않고 열심히 이것저것 골라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산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사면되는데 왜 그리 헤메고 돌아다닐까? 그것이 나와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인연이 눈을 가려버렸다. 장바구니를 들고 내 눈에 이쁘게 보이는 것을 찾아다니다. 마음에 들어 싸고 나면 그 때야 내가 산 것보다 훨씬 좋고 가격도 싸고 좋은 것이 보인다. 나와 인연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눈을 가려 좋게 보이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도 내가 선택하여 인연을 찾아가는 것이다
또 마트에서 사들고 나오다가 계산대에서 반품하기도 한다.
공덕을 적게 지었다. 나와 연이 있었는데 가져오기는 했으나 계산대에서 빼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연(緣)에 의해 만들어지고 너는 더 돌아라. 나와 인연이 되려면 멀었다”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이 지구상에 안가는 곳이 없다. 이 우주에 안가는 곳이 없다. 지장보살 본원경에 이 대목이 나온다. 관세음, 문수, 보현, 미륵보살 모두 뛰어나다.
그게 바로 권기에 맞춰 그 그물에 매달려서 8만4천 그물코에 그 욕심 따라 자기 이상에 맞는 그물자락을 잡아라. 는 뜻이다.
만약 남의 돈을 20-30년 전에 어려울 때 친척이나 형제들에게 500만원을 빌렸다고 하자. 그것을 갚지 않고 30년 뒤에 현실이 바꿔 잘 살던 사람이 못살고 못살던 사람이 잘산다고 하면, 그 빚을 갚아야 될까? 갚지 않아도 될까?
지금 복리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 이것이 바로 이자계산 법이다. 금생에 청산하지 못하면 다음 생에 다시 그 이자까지 복리로 갚아야 한다. 이것이 전생 빚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는 못할 지언정 자기 힘들 때를 생각하면 원금이라도 돌려 줘야 한다. 그게 양심이다. 착한 도둑놈이 아니다. 빚을 갚고 은혜를 갚는 길이다. 욕심 많은 자는 배 째라 나는 모른다고 한다. 지불각서, 현금보관증 차용증 등을 써준다. 이것은 모두전생의 빚이다. 죽어서도 갚아야 한다. 다음 생에 와서도 갚아야 한다. 받기만 하면 빚쟁이가 된다.
노래도 지어 놓았다.
<행복의 발전>
1.바라지 말고 바라지마세 그 누구에게 바라지 마세
구하지 말고 구하지 마세 누가주기를 구하지 마세
주고받으려 하지 않으면 분노불만이 없어지네
분한마음 일어 날 땐 이런저런 그런 일도 있는거라
생각하나를 바꾸게 되면 모든 가정 행복 해지리
2.주기만하고 주기만하세 주기만하면 즐거워 지네
받지를 말고 받지를 마세 받게 되면은 빚쟁이 되네
이럴 수 있나 저럴 수 있나 분한생각이 괴롭힐 때는
이럴 수 있고 저럴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
마음하나를 바꾸고 나면 세상만사가 해결이 되리
주기만 하면 다음 생에는 떵떵거리고 산다. 이렇게 욕심은 이기적으로 가고 있다. 그 돈 빨리 갚을 때 그 만큼 빨리 채워진다. 안 갚으면 지가 낭떠러지에 떨어질 때는 끝이다. 그런 놈에게 밥 주고, 구호해주면 착한 도둑놈의 분별심이다. 도둑질 또 하라고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실 되게 욕심을 버리고 산다면 어려움이 없다.
<행복전도사 질문>
스님 인간이 살아가면서 굴곡이 있게 마련인데 한때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은 마치 지게꾼이 나무를 한 짐 하여서 일어나려고 할 때 지게 작대기가 큰 도움을 주듯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그 지게 작대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큰스님 답변>
과도한 욕심은 재앙을 부르고 과욕을 부리는 그 자리가 깨지는 자리이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짐을 작대기 힘을 빌려 일어났다고 하자 그 짐을 얼마나 멀리지고 갈 것인가. 내가 지탱할 힘이 없으면서 많은 짐을 질머 진 것이 화를 불러 온다.
그릇이 다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보태주면 일어설 것 같다하지만 절대 못 일어선다. 산꼭대기에 바위가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겠나. 맨 밑바닥으로 떨어져야만 멈춘다.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 그릇이 다 차면 망념이 올라오는 시점이다. “이것도 감사합니다. 저것도 감사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면 될 것을 자기 그릇을 모르고 남의 그릇이 크게 보인다. 욕심이 올라붙는 순간 그릇이 깨지는 쪽박 차는 자리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때 또 다른 망념이 일어나고 원래 하든 그 일이 권태를 느끼고 다른 편한 것을 돌아보게 되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잘살던 사람이 왜 망하나? 다른 그림을 그려서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럼 혼자 망하고 무너졌나? 아니다 줄줄이 망하고 무너지게 된다.
어떤 유혹의 망념이 올라 올 때 바로 잘라 내어야 한다.
내 사업을 키우려면 간단하다. 항상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고맙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저절로 커진다. 남의 그릇을 보고 좋다 크다 탐내고 넘보는 망념이 생기는 순간 내 그릇은 깨어지고 쪽박을 찬다.
<우리 국민성>
우리나라 국민성은 조상의 뿌리에 문제가 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해 내분의 분열과 권력다툼이 외부세력을 불러들인 원인이고 그 후대역시 노력 없이 쉽게 누리고 얻으려 하고 있다. 지금의 국가 지도자들이 역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순진한 국민을 도박자로 만들고 있다. 경기, 시합, 빠징코, 주택, 로또복권 등등을 만들어 사행성을 장려하고 도박판이 시작 되었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어 놓은 가장 큰 도적을 만들어 탐심을 부채질하고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성실하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패가망신을 하게하는 것이다.
노력 없이 한 순간의 일확천금을 꿈꾸라고 망념으로 유도하는 과정이다.
전부 도박이다. 발길에 채이는 것이 사행성이다. 이런 사행성을 유도하는 것이 현 정부 정책이다. 이것은 인성을 말살시켜 사행심을 조장하고 욕심을 추구해 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일에 동참하면 동업 죄를 짓는다.
천재지변이라는 것은 없다. 지금은 전부 인재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재의 재앙은 무서워지고, 피해갈 수 없으며, 우리가 만들어 우리가 바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현생 과보라고 한다.
<마음향기대도심 언니 사례 >
벼락이다. 사람과 그 대상(물체)와 감정의 주파수가 연결되어 끌어당기는 힘이 일어난다. 그 때 혼자만 걸어갔나? 세 사람이 나란히 앞을 보고 걸어갔는데 경사 길에 7일전에 세워둔 차가 왜 하필 갑자기 굴러 내려와 셋이서 얘기를 하며 인도로 가는데 그놈의 차가 뒤를 덮쳤으며, 왜 그 순간 본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나. 돌아보자마자 그 차가 세 사람을 덮쳤다. 두 사람은 타박상만 입었고 뒤 돌아본 사람은 뇌진탕(뇌파열)이 되었다. 이게 벼락이다. 그 차와 맺어진 전생업연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향기대도심: “언니를 보냈지만 얻은 게 많습니다.”
마음에 분별이 없고 기준이 없어야 그게 바로 보인다. 우리는 옳고 나쁘다라는 분별의 마음이 드는 순간 세상은 거꾸로 간다. 옳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야 한다. 그 분별이 없어야 평등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고 중도의 마음으로 바른 판단할 수 있고 바른 말과 바른 행을 할 수 있다. 이것이 팔정도의 기본이다.
지장보살님은 우리가 절실히 요구하고 필요한 형태로 변해 다가온다.
일상생활에 필요할 때 지장의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끝없는 욕심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요구하고 이렇게 욕심을 채우다보니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 필요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쌓아두기를 원한다.
욕심에 발전을 돌아보면 60년 전에는 이웃 간에 담벼락이 없고 그냥 마당을 지나다녔다. 욕심이 생기고 비밀이 생기니 차차로 그 경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담벼락이 만들어지고 그것도 차차 재물을 많이 축척하는 비중에 따라 그 담 높이도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재산 분쟁과 이웃과 다툼의 분쟁은 날로 증가하고 담벼락은 다리 허리 키 한배 두 배 세배 유리 철망 전기 CCTV로 24시간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고 재물과 부정이 많을수록 담장이 더욱 높아진다. 왜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같이 가진 것이 없고 아까운 것이 없으니 대문이 필요 없다. 울타리가 필요 없다. 누구든지 필요하면 가져가라. 하고 활짝 열어 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 처음 경주석불사 올 때 다 부서져가는 대문을 없앨려고 하니 부산의 유병태 처사가 그래도 허상이라도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며 대문을 재대로 고쳐 놓았다.
내 마음에 악이 없으면 내가 상대방을 의심하지 않으면 괜찮다.
내가 상대를 의심하고 불안해하면 그 상대가 그런 마을을 일으켜 그렇게 행동한다. 내가 길을 갈 때 긴장을 하면 뒤에 오는 사람이 그것을 느끼게 된다.
나의 나쁜 기운을 상대방에게 전달해서 그 상대의 마음이 그대로 충동을 일으킨다. 남에게 의심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죄다. 불행을 내가 불러들여 만든 것이다. 지금 우리 미숙(마음향기대도심)이는 밤12시가 넘어도 공동묘지에 올라갈 수 있다.
어떤 소굴에 빠지더라도 당황만 하지 않으면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안 줄려니 당하는 것이다. 몸이라는 옷은 부처가 되어도 몸은 필요하다. 내 법을 전하려면 법당이란 육신이 꼭 필요하다. 육신이 없으면 법당이 없는 데 무엇으로 법을 전할 것이며 어떻게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 수행이란 육신을 버려야 할 시점과 또 다시 챙겨야 할 시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나(아상)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근본이다. 나란 존재, 물질과 육신과 성격 등을 다 버리면 자연히 평온해지고 부처로 만들어진다.
버린다는 것은 모든 물질과 형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물질과 형상은 버려도 때에 맞추어 우리에게 다가 오기 때문에 버린다 버리지 않는다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생각 즉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근본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을 버린다는 것이고 머릿속에 번뇌가 다 없어지고 고요하고 아무런 생각의 파장이 없어진 것을 버렸다고 한다.
부처님은 버려도 주지 않는다. 스님은 버리면 준다. 얼마나 버렸느냐에 따라 그 대가를 가져다준다. 여러분이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탈피하게 된다.
부처님법과 지장법의 한 가지 다른 점은 부처님은 지켜야 할 법이고 계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장법에는 지키라는 계율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서 지키고 수행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는 이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석가의 법에는 승복을 입은 사문조차도 그 계율을 지키는 자가 많지 않고 지켜가기 힘 든다.
지장의 법은 계율이 없고 스스로 죄의 근본을 닦아 그 자리에 바로 오기 때문에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할 것이 없다.
우린 순간 아이고 이건 내 죄인데. 하고 자기가 스스로를 보고 있으니 걱정할게 없다. 모두 편안하게 극락으로 간다. 아주 미약한 죄도 용납하지 않는다.
3부
< 여러 겁을 두고 근고(勤苦)하여 이와 같은 교화하기 어려운 억세고 거치런 죄고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 아직 조복 받지 못한 자도 있어서 업을 따라 지옥에 떨어져서 큰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거든,>
억세고 거친 중생들이란,.. 우리 중생의 마음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 행동은 거칠어 아무리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그 이유는 자기 관념의 기준틀을 깨지 않았기 때문에 그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안 바꿔지는 것을 억세고 거칠다라고 하였다.
교활하고 아둔하여 자기 식(識) 육식(六識) 외부에서 여섯 개 입으로 받아들여 지식으로 배운 것을 알음알이라고 한다.
내가 받아들여 세워둔 내 기준으로 정리해놓은 그 생각의 자리가 알음알이이다. 그 알음알이가 너무 깊어 남을 의심해 믿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제가 구원(久遠)겁에서 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가히 생각할 수 없는 신력을 얻고 갖추었나이다.
저는 저의 분신으로 하여금 백천만억 항하세계에 두루 하여서 한 세계마다 백천만억의 몸을 나투고, 한 화신이 백천만억 중생을 제도하여서 삼보께 귀의하도록 하며, 영원히 생사를 여의고 열반 낙에 이르도록 하오리다.>
지장보살님이 수많은 부처를 만들어 놓았다.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한분 한분 부처를 만들 때 마다 법이 커지는 것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 나투실 때는 반드시 지장보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석가부처 수기 받고 싯달다라는 이름의 중생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수행을 받을 때 지장보살의 인도로서 부처님으로 제도하고 나서 지장보살 자신도 그 부처님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를 옹호하고 머물고 있었다.
모든 제불부처, 재상, 왕, 신하의 몸을 받아온다. 석가부처의 몸으로 지장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영원히 성불하지 않노라고 하셨지만 그는 벌써 성불의 자리를 초월하였기 때문에 부처가 되고 안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유정세계 무정세계, 유정세계는 형상이 있는 세계이고 무정세계는 형상이 없는 영가세계이다. 마음의 세계를 무형세계라 하는데 유.무로 나누어볼 때 형체가 있거나 없거나 반드시 악이 존재한다.
태생(胎生), 난생(卵生), 화생(化生), 습생(濕生)>의 생존에는 사생이 먹이 사슬이다. 태생은 난생을 잡아먹고 난생은 습생을 잡아먹고 하나씩 내려갈 때 마다 범주가 좁아진다. 화생은 습생을 먹고살고 습생은 화생, 태생, 난생을 먹는다. 습생이 제일 무서운 존재이다. 병이 나는 것도 습생에 의한 것이다. 그 세균이 습생이다. 잡아먹고 먹히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
이 스님을 볼 때 배가 고파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에 있는 박테리아가 먹이를 달라고 요구하여 먹는 것이다.
내 몸속의 8만4천 마리의 박테리아가 생존하고 있다. 그 놈들을 잘 보살피고 그것들이 요구하는 필요한 것을 보충시키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세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먹는 것이다. 어리석다. 그놈이 편안하면 내 몸도 편안 하다. 그놈이 아플 땐 내 몸도 아프다. 이것을 잘못 알고 살아가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우리는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생각하나 비우면 화를 내지마라, 깨워줄 때 일어나라, 생각은 없다 이세가지만 지키면 불괴의 몸으로 변해간다. 만병이 침범하지 못한다.
<원효대사관련 법문>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로 수행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길에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 한잔을 먹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설하셨다.
부처님에 의해 불법을 접해 깨달은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10년 동안 수행했다. 의상이 10년간 배운 것은 지식을 배웠다. 정신세계 정립이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였다.
원효와 의상을 보면 답이 나온다.
원효대사는 만법을 다 성찰하였다.
의상은 한부분만 지식을 배우고 돌아왔다. 의상대사가 10년 후 귀국하여 그 동료 원효를 알아주는 사람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만법(8만4천경)을 다 깨달은 원효를 무시하였고 1/84,000을 얄팍한 지식을 배운 의상은 대접을 받았다.
석가부처는 6년 동안 수행을 통해 깨달았지만 원효는 한순간 물 한 모금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부처를 부처로 못 알아보는 그 중생이 불상하다.
지금도 한가지다. 1400년이 흘러간 지금도 그 원효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우리 관념, 생각이 부서지지 않는 한 바로 볼 수 없다.
만약 원효대사가 망나니 행세를 하지 않았다면, 걸인으로 깡통을 두드리고 요석공주를 달라고 아이에게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그것을 알아들은 왕은 원효를 불러 요석공주와 합방을 시켜 설총을 낳음으로서 원효를 인정받게 되었다. 수행법을 많이 편찬했는데 그 후계자가 없어 그것이 전수되어 내려오지 않았든 것이다.
또 단절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석가의 법이 존속하는 시기에 원효대사가 나왔기 때문에 그 법이 실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석가의 법이 부처의 법이 살아있고 8만4천대장경이 전부 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인정해 주었더라면 일파만파로 달라졌을 것이다.
의상이 10년 후 돌아와서 원효대사와 회동한 자리가 금강산 영혈사이다. 10년 동안 만법을 깨닫고 증득 했는데도 친구인 의상조차도 그 원효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효대사 설화
관음의 화신을 내려 보낸 것도 원효대사이다.
잘난척하는 의상을 시험에 올려 쫓아 보낸 것도 원효대사이다. 그 영혈사에서 두 도반이 만나서 얘기하고 2-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서로의 헤어져 있었던 지난이야기를 하며 지내다가 원효가 관음 출현을 알고 이제 자네가 떠날 때가 되었으니 내일은 하산하시게라고 하였다. 법(말)이 안 통하니 쫓아 보낸 것이다.
관음과 만날 수 있는 그 시간을 계산해 내려 보내니 의상이 해거름이 되어서 낙산사 주변에 도착하였다.
의상은 먼 길을 걸어오니 배도 고프고 탈진하여 목이 말라 둘러보니 멀리서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곳으로 찾아간 의상은 여보게 지나가는 객승인데 “물 한모금만 주시게” 하고 정중히 청하였다. 그런데 기다려도 아낙은 들은 체 만체하고 있어 다시“여보게 목이 마르니 물 한잔 주게”라고 재청하니, 그 아낙은 그래도 검은 물이 빠지는 광목옷 빨래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참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이 더 길다. 다시 큰 소리로 “여보게 지나가는 스님이 목마르니 물 한 모금 주게” 그래도 안돌아보니 화가 나서 이 아낙이 귀가 먹었나. 불러도 대답이 없구나. “스님이 목이 말라”.... 고함을 치니 그때서야 휙 돌아보는데 형용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얼굴이 히힉 하고 웃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여자가 맑은 물을 받아주지 않고 바가지로 흙탕물을 일으켜 퍼주니 이것을 먹으라고 주나, 하고 주장자(지팡이)로 바가지를 탈쳤다. 그 순간 그 아낙은 파랑새가 되어 웃으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차! 내가 시험에 들었구나,” 관세음의 시험이었구나, 하고 후회를 해도 때는 늦었고, 그 파랑새를 뒤따라간 곳이 낙산사 뒤 바위 절벽 밑 굴속으로 날아들어 갔고 의상은 그 동굴이 바라보이는 자리 앉자 파랑새가 다시 나오길 발원하고 기도하였다. 지금 홍련암은 그 바위굴위에 지어놓았고. 의상이 수행한 자리가 의상대이다.
의상은 그곳에서 3년 수행을 하고도 관음을 친견 하지 못했다. 결국자기 마음을 찾지 못했다.
원효대사는 영혈사 토방에서 의상을 보니 가관이었다. 원효가 내려와 자네 여기서 무엇을 하나? 내가 관세음에게 시험 받았네. 공양은 무엇으로 해결하나? 하늘의 천녀가 주고 간다.
관세음도 몰라보는데 천녀가 가져다주는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나? 자네 스스로 탁발을 하여 해결하게 하니 물도 없고 변명을 늘어놓아 그 물은 내가 해결해 주겠네 하고... 너와 내가 몇 년 동안 같이 물 받아먹은 그 도량의 물이니 밥을 지어먹으시게? 하고 주장대로 콕 찍으니 물이 졸졸 흘러내리니 자네가 무슨 재주로 금강산의 물을 여기까지 내려 보낸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의상의 마음을 원효가 읽었다.
내일 미시에 내가 쌀 씻은 물을 내려 보낼 테니 졸지 말고 확인해보시게 “지가 무슨 재주로...”라고 비웃었다. 그 물이 여기까지 오려면 한나절이 걸리는데 하고 의심을 하였다.
그것이 알음알이다. 잠을 자지 않고 의상이 기다려보니 미시에 부옇게 흐린 뜨물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물맛을 보니 뜨물이 맞는 것이었다.
아차! 또 도인을 옆에 두고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를 했구나, 그것이 원효와 의상의 마지막 회동한 자리이다.
우리는 이런 숨어버린 미화의 내용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마음의 문이 열리면 보인다.
이렇게 우리가 거꾸로만 가는 게 망념이고 생각이다.
험한 가시밭길로 가는 것이 생각이다. 내 생각이 끊어지면 내 인생도 바뀌어 진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 빼고는 거의 다 체험하였을 것이다. 극락이 우주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버림으로 극락에 간다.
생각을 버리면 천재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끊어지면 바로 천재가 되고 세상과 모든 이치를 알게 된다.
석가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이기고 온 장수에게 승전의 포상을 줄때 땅과 노비와 재물과 산해칠보와 보석으로 상을 줄 수는 있으나, 나의 왕관 많은 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자기 왕관까지도 다 준다. 이게 바로 지장보살이다. 모든 것을 다 주겠다 해도 받는 자들이 많지 않다.
법화경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은 화엄세계, 장엄세계 - 사생의 몸으로 변화되어 가는 세계를 설명한 것이 법화경이다. 하나의 고정된 형상이 아닌 변화를 일으키는 세계이고, 지장경의 첫 서품처럼 음성으로, 빛으로 음악소리 등으로 사생의 세계로 알리고 소집하는 과정을 장엄(포장)시켜나가는 것은 화음세계라고 한다.
부처가 없는 시대 두 나라 왕이 서로 이웃에 살며 같이 십선을 행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원을 세우기를... 최초의 부처가(일체지성취여래) 되기를 발원하고 최초의 보살(지장보살)이 되기를 발원하였다. 한분은 부처가 되고 또 한분은 지옥이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고 지장보살이 되기를 발원하므로 영원히 이 지구의 주인이 되어 악업중생들과 함께 살겠노라고 하셨다.
이 분이야 말로 지장보살의 본신이며 영원한 주인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부처님이 오실 때마다 보살 2명씩 대동한다. 그러면 실제 그 보살이 존재하고 있었는가? 석가부처님 옆에 관세음이 있었고 문수가 있었는가? 보현보살이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이 스님이 말하는 착한도둑놈, 나쁜 도둑놈의 이름으로 지어서 법을 설하셨다.
아미타부처님도 관세음보살과 보장보살
석가여래부처님은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등등...
한 부처님 오실 때마다 자기 두 도적놈의 이름을 하나씩 지어서 올려놓았다. 천명의 부처님들이 2명의 보살 이름을 올린다면 2000명의 보살이 생겨난다. 본원경과 십륜경 불교성전에 너희들이 문수 보현 미륵 관음 백천생을 지극정성 섬기고 받들어 매달려도 지장보살 부르기를 밥 한끼 먹는 동안 부른 것 보다 못하다고 하시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머무는 기간이 3천년 인데 비해 지장보살은 앞으로 56억 7천만년동안을 비교하면 하루살이밖에 안 된다. 지장보살이 잠시 휴가 다녀온 것이다. 사바세계 부처님은 내 자리는 못준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석가를 부처로 만들어놓고 자기 자리를 내어주고 신하로 살았다. 권력과 권위의 차이이다. 여러분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문제이다. 분별이 끊어져야 보인다.
즉문즉설 : 박처사
<아침에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한다는 생각도 버리고. 수행해야 된다는 생각도 버려라. 밥 먹으로 가야지 라는 것도 망념이다. 그 모든 것에 내 생각을 올려붙이니 망념이 일어난다. 생각 없이 자다가 눈이 떠지면 바로 예 알겠습니다. 하고 법공양을 먹으면 된다. 해야 된다. 안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생각이다. 그때부터 힘이 든다.
안 일어나져... 이게 나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식(識)을 부숴야 한다. 그냥 할 뿐이다. 아무생각 없이 눈 떠면 그냥 하면 된다.
이 틀이 부셔지면, 내 마음은 구름위에 논다. 박처사가 그 관념을 안 깨면 몸도 마음도 얼굴의 형태가 안 바뀐다. 이곳은 절이 아니다. 수행하는 곳이다. 석불사는 절이라는 개념을 버렸다.
오욕락(五慾樂): 다섯 가지 감정은 어디에서 일어나나
육식 여섯 가지 입으로 인해 탐심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추구하고 좋은 냄새에 빠지고 미각을 즐기고 촉각을 즐기는 것에서 탐욕을 일으키고 추구해 가는 지점, 이러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즐기는 것을 오욕락이라고 하며 죄의 근본은 희.노.애.락은 4폭류로 지옥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즐거움, 분노, 애정, 안락함 (남녀간, 부모 자식간)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희노애락을 끊으면 그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
지금 우리는 나를 버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즐거움인지 모른다. 처음 공부할 때는 모두 버릴 수가 없으니 어떤 즐거움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버리는 수행을 지속하면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환희지)을 얻게 된다. 이 환희지를 다시 잃어버리는 것도 한 순간이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두 백치가 되고 잃어버린다. 이 환희지는 보살 십지의 제일 첫 번째로 지장보살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것을 영원히 (스님이 지키라는 세가지 규칙)을 잘 지켜 수행해 간다면 바로 보살 부처가 될 것이고,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4폭류에 빠지면 이구지로 떨어진다. 환희지의 즐거움을 다 날아가 버렸지만 바로 내 잘못을 찾아내어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 다시 돌아온다.
<세속에서 절대 안된다? 처, 자식, 남편 손주 누구누구 모두 애욕이다. 다 같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버릴 수 있나?>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나와 결부시키지 마라. 자식을 내가 낳았는데, 내가 자식을 키웠는데... 내 자식으로 보지 말고 남과 같이 보아라. 각자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대신해 줄 수 있나. 자식을 내 눈으로 바라보지마라.
화내고 칼 들고 목 치려고 오는 그 사람이 바로 부처이다. 예.. 내목 가져가십시오. 하면 시험을 통과 하는 것이고 감히 누굴 치려하느냐. 라고 받아치는 순간 시험에 걸리는 것이다.>
<손자들이 돈을 안주니 할아버지 취급을 안한다.>
주는 것도 악습이 된다. 받아먹는 습성은 계속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박처사가 손자에게 바라는 것은 물질로 그 마음을 환심을 살려니까 거꾸로 간다. 물질이 앞서니... 과잉으로 이뻐하고 좋아하면 망치게 된다. 손자를 망치는 것은 왜 안보이나? 나라는 개념, 내가 할아버지라는 것을 버려라. 손자와 똑같은 마음자리로 놀아주면 손자와 격이 없어진다.
할아버지 위용으로 대하니 격이 생기고 그 아이와 나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냥 돈이나 물질로 좋은 것을 주니 할아버지를 좋은 척 할 뿐이다. 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살과 놀 때는 세살 친구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나고 내가 상대와 같다는 이 생각으로 그 누구에게라도 내가 없어지고 동등한 지점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아버지라는 모든(아상)것을 버려야 한다.
방치하고 무심은 다르다. 안 되는 이유가 손자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것이지, 저 한강물에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손자는 그 자리에 있고 박처사 머릿속에 있는 손자의 그림자를 버리라는 것이다.
[출처] 대구법회 큰스님 법문_ 최종수정본(120121) (경주석불사) |작성자 행복전도사진각
^^^궁금 한 것은 불교 티비 법문하는 스님들 은 맨날 하는 분만 하시나요?
첫댓글 南 無 阿 彌 陀 佛 _()
불보살님들을 차별의 눈으로 보시다니...???
법우님 눈에는 차별로 보이시나요?
미륵 보살도,관음도, 문수도 지장보살님의 공덕을 인정하고
더우기 부처님도 지장보살의 공덕은 항하사모래의 수많큼이나
크다고 하였더이다.
저도 지장경을 수없이 읽어보아 지장보살님의 깊고 크신 서원을 잘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끝없는 세월동안 부처를 이루지 않고 보살로 계시면서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시고 계시는 일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으신지는 수없이 오랜세월 이전이라는 말씀과 함께
때에 따라 방편으로 열반이라는 모습도 보여주시지만 끝없이 항상 계신다는 말씀도 해 주십니다.
불보살님들의 공덕과 신통력은 중생의 안목으로는 미처 헤아리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문수,보현보살님도 마찬가지구요...
경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화엄경,법화경,금강경등 대부분의 경전에서 이 경전이야말로 제일 뛰어난 경전이라는 말씀을 해놓으셨기에
잘못 받아들이다보면 내가 읽고 있는 경전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들어 다른 경전들을 하열하게
생각할 수도 있게 되기에 항상 그 뜻을 먼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에 대한 비교도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두 도인 스님네들의 도력을 비교해서 누가 더 낫다 하는것은 후학들이 할 일은 아닌것 같습니다.
두 스님들의 공부방식이 달랐을 뿐 그 분들이 가르치시는 것에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최근 어느 분께서 카페에 올려주신 걸 보더라도 두분의 성향과 개성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본문에 인용된 내용들은 자칫 두분 스님들을 욕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기에 의견을 적어 보는겁니다.
법우님 께서 원효 대사 와 의상대사에 관해 저의 큰 스님이신 인각스님보다 더 밝은 견해를 가지셨습니까? 언제 누구를 비교하여 그르다 그르지 않다하였습니까?
단지 저희 큰 스님께선 자신의 수행만을 믿고 시험에들어자기 마음자리 하나 찾지 못하는 의상을 들어 보였을 뿐입니다."아차, 내가 관세음의 시험에 들었구나"그러나 파랑새는 3년이 지나도 다시는 의상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법우님께서 의문이 일고 알고자 하신다면 석불사를 노크하세요. 언제든지 그 알음알이로 나를 버릴수는 없다는것을 알게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