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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은 어떤 책인가
우리 동방은 기자가 왕위를 받은 뒤로부터 세상에서 일컫기를, "문물제도가 중화와 서로 비슷하다"하였다. 고려 5백년간 문학하는 선비가 매우 많이 일어나서 遺稿로서 세상에 전한 것이 무려 수십여 명이었으니 인재가 성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세의 조정과 민간의 일과, 名臣, 賢士의 언행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한 사람은 드물었는데 홀로 이인로의 <<파한집>>과 최자의 <<보한집>>은 지금 시인의 논담하는 자료가 되었고 선비들의 사랑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다 글귀에 기교를 보인 것이요, 국가의 경세하는 법전에는 대개 그 취할 것이 없다.
...아, 기자로부터 지금까지가 거의 3천년인데, 史筆을 잡은 선비가 세상에 끊어지지 않았으나 언론을 세워 세상에 전한 이가 모두 몇 사람 되지 않음은 그 지은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오래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스승될 만하지 못하고 그 말이 법받을 만하지 못하면, 비록 남산의 대나무와 천마리의 토끼 털로 붓을 만들어서 날마다 수많은 말을 기록할지라도 능히 한 때에도 전할 수 없는데 하물며 후세에 전하기를 감히 바라리요. 그렇다면 공의 이 책은 사람의 스승될 만하고 말이 법이 될 만하니 무궁토록 전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일에 사가가 옛 사고를 찾아 상고할 때에 이 책에서 취할 것이 없을 것인가(조위의 서문)
<<대동야승>> 가운데 수록된 책 가운데 하나인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대해 조위라는 사람이 이처럼 칭송하여 서문을 썼습니다. 이를 보면 이른바 야사에 속하는 이런 책들이 단순히 잡서에 지나지 않는게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모아 후세의 역사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합니다.
<대동야승>은 조선조 성종조에서 인조조까지의 여러 사람들이 편술한 59종의 야사를 수집한 총서입니다.
누구의 손에서 편집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숙종말에서 영조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됩니다. 18세기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용은 역대 왕조들의 逸事, 명인들의 전기, 일화, 笑話 등 다채로운 사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책은 주로 저자들이 살던 시기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나 때로는 삼국, 고려까지 올라가는 것도 있습니다. 저자 가운데는 성현, 서거정, 남효온, 조신, 이이, 허봉, 김안로, 정철, 유성룡, 이덕형 등 조선조 학자 또는 정치가로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보입니다.
'야사'란 무엇인가
야사는 책 제목에서 끝에 소록, 일사, 쇄언, 잡기 등이 붙어 있습니다. <<대동야승>>의 '야승'이라는 말도 야사와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동야승>>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른바 野史 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야사라고 할 때는 별로 근거가 불확실한 역사의 뒷이야기를 모은 책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관찬 사서에 대칭하는 개념으로 개인 저술의 사서로 규정됩니다. 따라서 야사는 역사서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관찬사서보다도 시대상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래 야사류는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때 유지기라는 사람이 쓴 <<史通>>에 보면 잡술이라고 하여 여기에 해당되는 종류들을 분류해 놓았습니다. 중국의 야사도 고려중기 송나라와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그들의 서적이 들어왓는데 그 가운데 야사도 잇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이후 야사류가 역사서 발달에서 하나의 독립 부문으로 성행하였습니다.
물론 조선 이전에도 신라 김대문의 <계림잡전>과 <화랑세기>, 최치원의 <신라수이전>, 고려 박인량의 <고금록>, 이제현의 <역옹패설> ,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등이 야사에 속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의 야사류는 이름만 전하는 것이 많아 어떠한 형태로 발달해 왔는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조에 들면서 한동안 야사가 쓰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앙에 사관제도가 확립된 점도 있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그에 관한 뒷 이야기를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 서거정의 <필원잡기>, 성현의 <용재총화> 등이 발간되면서 야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16세기 사림으로서는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었으므로 개인적인 역사저술을 통하여 밝히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화를 거치면서 훈구 척신 계열의 비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던 사림계열은 이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사화의 수난을 거듭 받았지만 후세에 옳고 그른 것은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는 의식아래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와 목격담, 체험 등을 수록하여 남겼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여 야사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령 야사의 시원으로 꼽히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의 경우 이세좌가 발문을 썼는데 여기에는 "우리 동국의 일들을 널리 모아 조종의 업적에서부터 여항(민간)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사관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빠짐없이 갖추어 적었다." 고 하였으며, 성현의 <<용재총화>>의 발문에서도 "국사에서 갖추지 못한 것을 이 책이 실었다." 고 그 가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야사가 발전하면서 총서 형태로 편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대동야승>>이었습니다. 사실은 <<대동야승>>보다 더 규모가 큰 것으로는 <廣史> 143종, <稗林> 96종 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사>는 동경대학에 소장되었습니다가 19--년 동경대지진때 소실되었고, <패림>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편 또 하나의 정리 방식은 야사를 모아 통사로 엮는 것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뒤에 따로 이 책을 소개할 것입니다.
이 책 속의 다양한 책들
<<대동야승>>은 책의 권수가 많고 내용이 매우 다양합니다. 가령 짤막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룬 <용재총화>, <필원잡기>, <수문쇄록>, < 패관잡기>, <청파극담> 등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정치적 사건을 다룬 것으로는 사화에 관해서는 <기묘록보유>, < 기묘록속집>, <기묘록별집> 등이 있고, 그뒤 당파싸움에 관해서는 <기축록>, <기축속록>, <광해조일기>, < 혼정록>, <묵재일기> 등이 있습니다. 왜란, 호란에 관해서는 <난중잡록>, <속잡록>, <문소만록>, <갑진만록> 등이 있습니다.
특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잡설, 잡기 등의 책에서는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권수가 많고 다양하여 각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간략간략하게 정리할 수 밖에 없는데 제대로 이해될런지 모르겠지만 소개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중요한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용재총화>는 성현이 지었는데, 그는 성종대 문단의 영수로서 예문관과 성균관의 최고 관직들을 맡아왔습니다. 그의 아들 성세창은 재상에까지 올랐으며, 성현의 3형제와 조카들 가운데 글 잘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책에서도 자기 성씨 가문의 일도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명필, 화가, 음악인들에 관련된 일화와 우스운 이야기와, 역사에 있어서 각 도읍지, 서울의 지리 소개, 풍습, 생활상, 무용(처용무도 소개되었다.) 등이 정리되어있는데 이는 간략하면서도 매우 정치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아 오던 과부, 기녀, 승방 심지어는 탕녀 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들어 있어서 당시 풍속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영화)
<필원잡기>는 조선초기 뛰어난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서거정이 지었습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동문선>> <<동국통감>> <<여지승람>> 등 많은 책을 지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역대 사대부의 모범이 될만한 도덕 언행과, 특히 국가의 전고나 풍속 등을 모았습니다.
내용 가운데 <<宋史>> <왕안석전>에 관한 논의는 재미있습니다. 세종 때 <<송사>>가 아직 오지 않아 세종이 여러 차례 명나라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번은 집현전에서 <<송사>>를 짓는다면 왕안석이 어느 전기에 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하였습니다. 이때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가야 옳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성원(사육신의 한 사람)이 왕안석이 소인이지만 문장가이고 절의가 있는 사람이므로 마땅히 <열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뒤 <<송사>>가 들어와 본즉 유성원의 말이 적중한 것이지요. 이런 판단은 당시로 봐서는 역사에 대한 평가 기준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서거정도 그 자리에 참여하여 직접 보고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추강냉화>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성종, 연산군 때 직접 듣고 본 문인들의 일화를 적었는데, 연산군의 폐정에 대한 일화가 많습니다.
<사우명행록>도 남효온이 썼는데 그의 스승 김종직과 그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오던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등 50여 명에 대한 언행, 문장, 일화 등을 기술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김종직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수문쇄록>은 성종과 연산군 때 역관이었던 조신이 썼는데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가 야사체로 적혀 있습니다. 중국 남방으로 표류했던 최부의 표류일기 등도 간략하게 기술되었으며 일본 및 대마도의 풍속 지리를 소개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서 널리 채택되었습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는 필자가 역관이었던만큼 명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많이 기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명나라에서 이성계를 고려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했는데 이를 고치려는('종계변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차천로의 <오대설림초고>는 그가 개성인인만큼 개성 중심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화담 서경덕에 대한 일화도 자세히 나와있다. 그리고 성종이 대궐 밖으로 순행 나가서 일어난 일화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중 성종이 30여세로 일찍 죽은 것은 주색이 원인이라는 점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심광세의 <해동악부>는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칭찬 경계할만한 사실을 추려 노래와 시로 만들었습니다.
이륙의 <청파극담>은 주로 고려, 조선의 이름난 사람들의 일화와 우스개 이야기들입니다.
허봉의 <해동야언>은 <필원잡기>, <용재총화>, <패관잡기> 등의 책을 연대순으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대동야승>> 이전에 정리된 총서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는 자신이 귀양살이하면서 평소에 체험한 것이나 들은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교육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안로의 <기묘록보유>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기묘록속집>, <기묘록별집>은 '기묘'가 기묘사화를 말하고 있듯이 기묘사화에 관한 내용이며, 이중열의 <을사전문록>은 을사사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심수경의 <遣閑雜錄>에서는 비교적 기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수경 자신이 80에 아들을 얻었으므로 집에 있는 비첩을 자유롭게 하던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습니다. 노인에 관한 일사가 풍부합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저자가 벼슬에 나간 다음해부터 17년간 정치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습니다. 말하자면 관리로서 쓴 일기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 속에는 왕도정치의 시행, 과거제도의 쇄신, 인재 등용의 공정, 당쟁의 조정, 시폐의 개혁, 법규의 활용, 경제의 부흥, 국방, 향약 등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해동잡록>은 조선 전반기의 인물 열전인 셈인데 성씨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방대한 인물사 사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야승>>에 실린 것은 일부이고 원본에는 역대왕조사와 그에 대한 인물까지 수록되어 있으므로 역사서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계갑일록>은 선조 16,17년(계미, 갑신) 동안의 정치기사인데 동서 양당의 인물 상황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필자 우성전은 남인의 주장격입니다. 그의 집이 남산 밑이라고 해서 남인이라는 표현이 생겼다고 하니 그의 비중이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책들은 대략 임진란 이전에 고려의 遺風대로 학자들의 逸事를 기록한 야사가 많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란에 관해서는 <난중잡록>과 <재조번방지>가 있어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에도 <난중잡록>은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임진왜란 직전부터 광해군 시대의 이야기와 병자호란 이야기까지 일련의 난을 전부 기록하였습니다.(1582-1610) 이것은 거의 正史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썼습니다. 많은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각종 장계, 의병장의 보고, 격문 등 매우 풍부하여 '임진왜란' 전사를 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책입니다. 형식은 날짜별로 되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일기는 아니고 뒷날 자료를 모아서 편년체로 구성했습니다. 곧 편년체 역사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자신도 서문에서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자고 심심풀이로 읽는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고 할 정도로 일면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난중일기>가 개인 체험 중심의 중요한 임란 자료라고 한다면 이 책은 여러 자료를 모았으므로 전국적인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임진란에 관해 두 책을 소개한다면 <난중일기>와 <난중잡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서문도 최시옹, 기정진 등 유명한 학자들이 썼습니다.
<재조번방지>는 신경이 썼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구원한 사실을 적은 내용입니다.
<속잡록>은 앞의 <난중잡록>을 이은 책으로서 광해군과 인조대의 요동을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 정묘호란, 병자호란 및 청나라와의 관계 기사입니다.
조경남이 쓴 <역대요람>은 고려 공민왕에서 조선 선조대까지 우리나라와 명나라, 일본 등 외국과의 사대 교린 관계기사를 모았습니다.
박동량의 <기재잡기>에서는 중종 때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이 소상하게 적혀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중종 때 유명한 도적인 임꺽정의 이야기가 어디보다도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한 대목을 읽어봅시다.
큰아버지(박응천)가 마침 봉산군수로 있었는데 일처리에 두서가 있었으므로 도적들이 꺼려하였다. 젊은 아족 한 사람이 봉산에서 서울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성참 고개 아래에 도달하자 길가에 잠복하고 있던 도적이 침범하려 하였는데 뒤에서 말을 탄 어떤 사람이 달려오며 외치기를,
"그 사람은 봉산에서 오는 사람이니 범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음이 괴로워서 자기들의 도당의 하나를 금오랑으로가장하고 역마를 바꾸어 타고 급히 봉산군으로 달려가, 군수는 빨리 나와서 명을 받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큰아버지(박응천)께서 벌써 알아차리시고 몰래 군사들을 집결시키니, 도적이 또한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 이에 무신 윤지숙으로 대신케하였다.
윤지숙이 임진강에 이르러 배를 타는데 6-7명의 장사치들이 물건을 싣고 몰려와 밀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배에 올랐다. 윤지숙이 노하여 잡아다가 다스리려고 하자 그사람들이 짐을 푸는데 모두 활, 화살, 칼, 창이었다. 윤이 비로소 그들이 도적임을 알고 말을 채찍질하여 배에서 내려 달아나자 여러 도적들이 뒤쫓았으나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여기서 큰 아버지란 박동량의 큰아버지인 박응천을 말합니다. 아마도 큰아버지로부터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직접 관련이 있어서 자세히 적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은 왕이 보낸 지방관마저 능멸하려 들었으니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정형의 <동각잡기>는 국가의 정치와 명신의 행적만을 다룬 야사입니다. 태조의 창업으로부터 세종의 문치, 수양대군의 찬위, 사육신, 사화, 조선왕조의 역대왕의 일사와 명인들의 일화가 적혀 있어 비교적 호평을 받은 책이었습니다. 분량도 상당히 많고 사실을 직필한 곳이 많습니다. 단종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줍니다.
윤국형의 <문소만록>은 임진왜란을 전후헤서 일어난 국개의 사건과 저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저을 사실대로 썼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유연전'이라는 당시 사기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연이란 자가 형 유유를 죽이고 재산을 탐내었는데, 그러나 실제는 유유가 광증이 생겨 사방으로 다니며 거지가 된 뒤 가자 유유가 나타나 유연이 형을 쫓아냈다 하며 재산을 먹는 이야기입니다. 후일 유유가 정말 나타났을 때는 유연은 이미 처형된 뒤였습니다.
李기의 <송화잡설>에서도 유연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밖에 연산군 이후의 사회의 변화와 임진란 중에 일어난 사실 등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중에는 가령 연산군 이후 사회변화와 더불어 욕이 퍼져 나갔는데 남을 욕할 때 아내와 어머니를 들추어 낸다든가, 동물을 빌어 욕하는 악습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진만록>이라는 책은 <문소만록>의 속편으로 임진란 이후 명아라의 접대, 명사신의 예우, 과거, 분당 등을 기술하여 사회, 경제, 복식, 풍속 등의 변화를 자세히 엮었습니다.
<송와잡설>은 기자에서 조선 선조조 동안 저자가 보고 들은 점을 적었는데 임진왜란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고, 사림들에 관한 기록이 많습니다.
권응인의 <송계만록>에는 중종이후 재상으로서 오래 살면서 부귀가 겸한 사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송흠은 90여세, 이현보는 89세, 송순은 92세, 오겸은 89세, 정사룡은 81세, 洪진은 82세, 원혼은 92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중 홍진은 어머니 송씨는 정승의 딸로서 정승에게로 시집갔고 다시 정승의 어머니가 된 분으로 94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임진란 이전에 잠시 세상이 태평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고을마다 널려있는 수령들의 선정비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꼬집는 내용도 있습니다. 가령 각 지방의 수령들이 으례 떠난 때는 그 고을에 기념으로 비를 세웁니다. 이것이 송덕비로서 어떤 읍에든지 여러개 열립되어 있습니다. 중종 때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명의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반접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보니 파주에서부터 의주가지 각 고을에 비가 수없이 난립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만일 명나라 사신이 수령의 선정비를 질문하면 대답할 길이 없다 하여 일시 모두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이 지나간 뒤에는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월정만필>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고증, 시화, 설화, 풍수 등에 관한 것이니다.
<정무록>(황유첨)은 선조 40-14년 까지의 1년 동안의 기록으로 선조의 승하와 광해군 즉위에 관련 대,소북의 당쟁에 대해 각각 장단점을 논하여 공정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연평일기>나 <계해정사록>, <묵재일기> 등은 인조반정의 시말을 자세히 적었습니다.
<혼정편록>은 선조, 인조 년간에 걸쳐 이이 성혼에 대한 논쟁 등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유천차기>는 평소에 보고 들은대로 적은 것인데, 예설에 대한 논쟁, 왕가의 규범, 국상의 복제, 왕비 책봉 등의 논설로 되어 있습니다.
이덕형은 <죽창야화>를 써서 명사에 얽힌 일화와 우리나라 고사 등을 기술하고, 그 다음에 쓴 <송도기이>는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그 지방에 전하는 설화와 전문을 모은 것으로, 이 지방 출신 문인, 명기의 뒷이야기가 많습니다.
김시양은 <자해필당>, <하담파적록>, < 부계기문> 등을 썼는데 <자해필담>은 관인, 악인 등의 기담을 모은 것으로 권선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하담파적록>은 광해, 인조 동안의 야사를 모은 것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폐모 사건, 인조반정 등을 주로 엮었으며, <부계기문>은 그가 귀양살이하면서 쓴 것으로 인물평론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책마다 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제도 신변잡기에서, 흘러가는 이야기, 지방관으로 나가서 그곳의 실정이나 풍속, 사화 당쟁에 관한 자료(여기서도 당파에 관계없이), 전쟁 체험 등 다양하고, 서술 태도도 가볍게 쓴 글에서 자료를 모아 심혈을 기울인 책, 책의 형식도 가볍게 쓴 에세이부터 체계를 갖춘 역사서 등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가 내용에 대해 제대로 검토한다면 여기서 역사 사료로서 활용할 것이나 세태에 관한 우스개이야기를 가려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동야승>>은 조선조 초기의 사람으로부터 병자호란을 치른 사람들까지 수록하엿습니다. 그뒤 효종이후의 사람들은 간혹 있으나 함게 모은 야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가한 사람들이 문집을 만들기 위해 시나 문장을 지었을 뿐이지, 잡필류는 많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순조때 <<해동야사>>라는 책이 있으나 거기에도 역시 조선초기 사람의 일사가 많이 적혀 있을 정도 입니다.
이로써 볼 때 <<대동야승>> 이후는 큰 총서가 나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평가한다면?
조선일대를 통해 관찬사서가 편찬목적 뿐만 아니라 서술형식 면에서도 변화를 쉽게 일으키지 않은 사실과 비교하면 개인저술로서 야사의 다양한 발전상을 이 시대 역사학 발전의 주요한 부분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중국과 비교하여 조선에서 야사가 훨씬 더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붕당정치가 전개됨에 따라 특정한 정파의 입장 또는 정파간의 상호관계를 밝히려는 목적아래 많이 저술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 야사가 발전한 것은 조선의 특징적인 면모인 붕당정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근거없는 이야기도 꽤 포함되었는데,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가 보급되는 자체가 또한 당시 역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책들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나 자기가 있던 지역에서 사료를 널리 모은 것이 많아서 매우 다양하고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곧 왕을 중심으로 쓰여진 관찬사서와는 달리 당시 실상을 있은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역사 서술을 풍부하게 하는 귀중한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야사와 잡설은 전해들은 데서 얻은 자료가 많으며, 호사가들이 꾸민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사실 아닌 것이 많다."(용재수필)고 하자, 이수광은 "잡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사가들의 역사서술(기전)도 반드시 다 사실은 아니다."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이 책들을 상당히 귀중히 여겼습니다. 모두 뛰어난 학자들이 썼기 때문에 내용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령 위에서 보았던 김시양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관서에 사는 진가 성을 가진 사람이 자칭 과거 중국에서 왔던 진리라는 자의 자손이라 하고 군역을 면제해 달라고 하여 그 일을 병조에서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김시양은 "진리는 아들이 없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거짓말이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진리가 아들 없는 것은 우리들이 듣지 못한 일이다."고 우겨서 결국 그의 군역을 면제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김시양이 병이 나서 강촌에 가 있을 때에 우연히 <용재총화>를 보았는데 여기에 진리가 아들이 없다는 말이 있으므로 다시 소를 올렸습니다. 곧 '관서에 사는 진가 성 가진 자를 조사하여 거짓말로 조정을 속인 죄를 바로잡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변어전고) 아무튼 <용재총화>에 적힌 내용을 사실로 인정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대동야승>>은 모두 59종이나 되므로 책의 전체 분량은 매우 많습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고전국역총서로서 번역되었는데 모두 17권에 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방송대 도서관에도 전질이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요즘 서점에 가면 우리나라 옛이야기를 구성해서 나온 책들이 제법 있는데 대체로 이 <<대동야승>>에서 뽑아서 엮었습니다. 이런 편법이 아니라 이 책을 대중용으로 다시 편집하여 책을 만든다면 우리 문학이나 역사쪽 서가를 매우 풍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야사는 관찬사료가 아니면서 사료에 근거한 서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사는 결코 역사의 뒷이야기나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개설서가 상당히 정치사 중심이 많아서 딱딱한데 이는 실록과 같은 관찬사료에 많이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을 활용한다면 당시 양반이나 서민들의 생활상이나 풍속에 관한 역사도 많이 넣을 수 있어서 훨씬 풍부한 역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출처] 대동야승은 어떤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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