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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재개시] 대하(송은 서하라 부름)와 송의 전쟁 --이원호의 독립전쟁에서 송의 신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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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의 하(夏)에 대한 토벌과 하(夏)의 확장
북송(北宋)은 요(遙)를 북정(北征)하는 동시에 병사를 일으켜 서하(西夏)-본인들은 大夏라고 국명을 정함-를 토벌하였다. 하(夏)는 요(遙)와 손잡고 송(宋)에 대항하였고 국세가 날로 강성해짐에 따라 끊임없이 북송(北宋)으로 대거 진공하였다. 쌍방은 화전(和戰)을 백여 년간 하였는데 즉 북송이 금(金)에게 망(亡)할 때까지였다. 이처럼 긴 시간은 역사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서하(西夏)는 당항족(棠項族)을 위주로 한 나라로서 당시에 하투(河套)이남의 은(銀)[섬서미지(陝西米脂)의 서북], 하(夏)[횡산북(橫山北)], 수(綏)[수덕(綏德)], 유(宥)[정변(靖邊)], 정(靜)[미지현(米脂縣) 서쪽]등 다섯 주(州)의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송태종(宋太宗)은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수령(首領) 이계봉(李繼捧)에게 령을 내려 가족을 거느리고 입조(入朝)하므로서 이 할거세력을 소멸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계봉(李繼捧)의 족제(族弟)인 이계천(李繼遷)이 명을 어기고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은주(銀州)에서 지근택(地斤澤)[이극소맹파언뇨이(伊克昭盟巴彦淖爾)으로 빠져나가고 서북 여러 부족들은 이씨(李氏) 세저은덕(世著恩德)들이 많이 돌아오며 따라서 세력이 날로 강해졌다. 또한 거란귀족(契丹貴族)과 청혼하여 요(遙)와 의각지세(犄角之勢)를 맺고 동서(東西)가 서로 호응하여 북송을 공격하였다.
1002년 3월, 이계천(李繼遷)은 영주(靈州)를 함락하고 그곳에 수도를 세웠다. 6월 또 2만기병을 통솔하여 린주(麟州)를 진공함으로써 북송의 하서(河西)지역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패병 후 방향을 돌려서 서의(西凉)[감숙무위(甘肅武威)]을 공격하였는데 송군(宋軍)과 토번족(吐蕃族) 및 회골족(回鶻族)의 연합공격으로 크게 패하고 몸에 화살을 맞고 철퇴하였다. 이듬해 1월 부상으로 죽게되어 그 아들 이명덕(李明德)이 계위했다.
북송(北宋)은 이명덕(李明德)을 서평왕(西平王)으로 책봉하고 하(夏)의 서북 여러 주군(州郡)에서의 통치권을 승인하고 매년 은 만냥, 명주 만 필, 전(錢) 10만 관(貫)을 줄뿐만 아니라 청백염(靑白塩)의 금령을 취소하고 호시각장(互市榷場)을 개설하였다. 이때부터 쌍방은 평화조약을 30년간 유지하였다.
1031년 10월, 이명덕(李明德)의 아들 원호(元昊)가 계위한 후 선후하여 과주(瓜州)[감숙안서(甘肅安西)], 사주(沙州)[돈황(敦惶)], 숙주(肅州)[주천(酒泉)]등을 점령하였다. 국경 관할구역은 강 내외의 22개 주(州)로 “동으로는 황하에 미치고 서로는 옥문(玉門), 남으로는 숙관(肅關)과 접하고 북으로는 대막(大漠)에 닿는다”고 하였는데 계속하여 연요항송(聯遙抗宋)방침을 실시하였고 전력으로 북송(北宋)에 대하여 군사공세를 취하였다.
1038년 10월 원호(元昊)는 정식으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國號)를 대하(大夏)라 하고 원천수예법 연조(元天授礼法延祚)을 세웠다. 이듬해 북송(北宋)에게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송정(宋廷)은 허용하지 않고 또 조서를 내리어 호시(互市)를 정지하게 하였으며 상을 내걸어 원호(元昊)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1040년 봄, 원호(元昊)는 10여만 병사를 거느리고 북송(北宋)으로 진공하여 연주(延州)를 탈취하려 시도하였다. 병사를 일으키기 전 송군(宋軍)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사신를 연주(延州)에 파견하여 화친하게 하였다.
송(宋)의 부연(鄜延), 환경로(環慶路)는 약안무(略安撫)를 통하여 범옹(范雍)더러 경솔히 믿게 하여 경계심을 늦추게 하였다. 하군(夏軍)은 곧 이틈을 타서 돌연히 토문(土門)[섬서안색서북(陝西安塞西北)]으로부터 돌진하여 성동격서(聲東擊西)하여 공공연히 보안군(保安軍)[지단현(志丹懸))을 공격하고 암암리에는 금명채(金明寨)를 습격하여 연주(延州)로 직통(直通)하였다.
1월 23일, 삼천구(三川口)[西安西北)에서 부연(鄜延), 환경부도부서(環慶副都部署) 유평(劉平), 부연도감 황득화(鄜延都監黃德和)가 거느린 송나라 증원군 만여 명을 저격하였다. 황혼 무렵에 또 겹겹이 포위 공격하여 송군(宋軍)을 격파시켰다.
이튿날 아침, 서남산(西南山) 아래까지 추격하여 후퇴하는 송군(宋軍)의 영채(營寨)를 짓밟고 유평(劉平), 석원손(石元孫)을 포로로 잡았다. 계속 7일간 연주(延州)를 공격하였지만 함락하지 못하였고 마침 큰 눈이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오래 싸우기 어려워 군사를 돌렸다. 이번 연주(延州) 전쟁에서 하군(夏軍)은 위장 화친이 성사되어 갑자기 습격함으로서 책반(策反)으로 교묘하게 금명(金明)을 점령하였다. 연주(延州)를 포위공격하고 거험타원(据險打援), 이중격과(以衆擊寡)하여 송군(宋軍)의 주력을 섬멸하였다.
연주지전(延州之戰)후 서하군(西夏軍)의 북송(北宋) 서북변경에 대한 진요(進擾)는 더욱 빈번해졌다. 이듬해 초 송조(宋朝)는 섬서경약안무부사(陝西經略安撫副使) 한기(韓琦)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경원(經源), 부연(鄜延) 양로군(兩路軍)을 파견하여 반격함으로서 하군(夏軍)을 제약할 방안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북송(北宋)이 아직 진병미결(進兵未決)시에 하경종(夏景宗) 원호(元昊)는 곧 병사를 일으켜 재차 송(宋)을 공격하였다.
2월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절강(折姜)[동심현예왕동(同心懸預旺東)]에서 출발하여 천도채(天都寨)[해원(海源)]를 거쳐 와정천(瓦亭川)[호로하(葫蘆河)]을 따라 남하하여 곧 호수천(好水川)(령하융덕(寧夏隆德)에서 서길(西吉) 두 현(縣)사이]지역에 닿았다.
그는 기병의 우세를 이용하여 매복하고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범을 채용하였는데 주력군을 호수천(好水川) 어구에 매복시키고 일부 병력을 회원성(懷遠城)[서길현편성(西吉懸偏城)]일대에 파견하여 송군(宋軍)을 유인하여 매복에 걸리게 하였다.
13일 하군(夏軍) 일부병력이 회원성(懷遠城)에 들이 닥쳐 송(宋)의 진융군서로도순검상정(鎭戎軍西路都巡檢常鼎)등의 군과 장의보(長義堡)(고원현지장역(高原懸之張易)]의 남에서 싸우다가 송(宋)의 환경로부도부서(環慶路副都部署) 임복(任福)이 수만 병사를 거느리고 도착한다는 소문을 듣고 패한 척 하면서 송군(宋軍)을 유혹하여 추격하게 하였다.
이튿날 임복(任福)과 경원주박도감상역(涇原駐泊都監桑懌)는 군사를 이끌고 천(川)서쪽을 따라 진군하여 양목융성(羊牧隆城)의 동쪽 5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길가 가옥에 여러 개의 은니합(銀泥盒)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열어 보려하자 백여 마리의 호루라기를 지닌 집비둘기들이 날아 나왔다.
뒤이어 하군(夏軍)의 경기(輕騎)군은 송군(宋軍)이 열(列)을 짓기도 전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이어 하군(夏軍)의 진(陳)에서는 두 장(二丈)남짓한 높이의 기발이 갑자기 세워지고 왼쪽으로 휘드르면 왼쪽이 복기(伏起)하고 오른쪽으로 내저으면 오른쪽이 복기(伏起)하여 거거임하(居高臨下)하고 좌우로 협격하여 송군(宋軍)은 사상(死傷)이 심하였고 임복(任福), 상역(桑懌)등은 전사하였다.
이날 금할주관(金轄朱觀), 도감무영(都監武英)이 거느린 송군(宋軍)도 롱낙천(籠洛川)[융덕서북십자로하(隆德西北十字路河)]에서 요가천(姚家川)[십자로하구(什字路河口)까지 진군했다가 하군(夏軍)의 겹겹한 포위에 빠졌다.
행영도감왕규(行營都監王圭)가 4500명을 거느리고 양목융성(羊牧隆城)에서 증원하러 오다가 역시 하군(夏軍)에게 격패되었고 무영(武英), 왕규(王圭) 등은 전사하였으며 유독 주관(朱觀)이 천여 명을 이끌고 돌아갔다. 하군(夏軍)이 기병의 우세를 발휘하여 갑자기 습격하여 일거에 승리를 얻은 것은 한차례의 성공적인 복격전(伏擊戰)이었다. 나중에 송(宋)의 환경(環慶), 진봉로(秦鳳路)가 병사를 파견하여 증원하러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돌렸다.
하군(夏軍)은 호수천(好水川)에서 전례 없는 대 승전을 거두었고 원호(元昊)는 곧 동쪽으로 북송(北宋)의 강 밖으로 외로이 떨어져 있는 풍(豊)[섬서부곡현북(陝西府谷縣北)], 부(鄜), 부(府)[부곡현(府谷懸)] 세 주(州)를 공격 점령하여 북송(北宋)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다스리려고 계획하였다.
이해 7월 병사를 파견하여 동진(東進)하여 부(鄜), 부(府)를 공격하였지만 모두 함락하지 못하였다. 8월, 풍주(豊州)를 함락하였다.
1042년 9월 북송(北宋)의 진융군(鎭戎軍)을 공점하였고 정천(定川)[고원현서북(固原縣西北)]일대에서 송군(宋軍)을 크게 격패시켰다. 송(宋)의 경원부도부서(涇原副都部署) 갈회민(葛懷敏) 등 16명 장병들이 살해되고 군졸 9400여명, 말 600여 필이 모두 하군(夏軍)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북송(北宋)과 원호(元昊)는 9년 동안이나 전쟁에 시달렸고 연주(延州) 삼천채(三天寨), 호수천(好水川), 풍주(豊州), 진융군(鎭戎軍)등 중대한 전역을 거쳤다.
송군(宋軍)은 비록 여러 차례 북에 패하였고 군세도 날로 쇠약해졌지만 부연로(鄜延路), 환경로(環慶路), 경원로(涇原路), 진봉로(秦鳳路)에 의연히 20여만 군사가 주둔해 있어 그래도 하군(夏軍)을 견제할 수 있었다.
하(夏)는 비록 군세를 크게 떨치었지만 오래도록 병사를 써서 역시 곤핍해졌다. 동시에 요(遙)는 이해 초에 북송(北宋)과 화약(和約)을 맺고 군사를 일으켜 하(夏)를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감지한 원호(元昊)는 급히 북송(北宋)과 화친할 것을 계획했다.
1044년 5월, 송(宋)과 하(夏)는 화의(和議)를 맺었다. 서하(西夏)는 제호(帝號)를 취소하고 원호(元昊)는 북송(北宋)의 대신으로 칭한다. 송(宋)은 원호(元昊)를 하국왕(夏國王)으로 책봉하고 매년 은 7만냥, 명주 15만 필, 차(茶)3만근을 보내어 연변각장시역(沿邊榷場市易)을 다시 열고 민간 장사꾼들의 왕래을 회복하였다.
이해 10월 원호(元昊)가 주력을 집중하여 하란산(賀蘭山)북쪽 지역에서 요흥종(遙興宗), 야율종(耶律宗)이 거느린 10만 기병을 진공한 후로 송(宋), 요(遙), 하(夏)는 비로소 삼국정치지세(三國鼎峙之勢)를 이루었다. 20년 후 송(宋), 하(夏)는 전란(戰端)이 복기(復起)하여 쌍방은 서로 공벌(攻伐)하였다.
1070년 8월 하군(夏軍)은 크게 환경로(環慶路 (감숙금현(甘肅今縣))에 침입하고 대순성(大順城), 유원채(柔元砦), 여원보(荔原堡), 회안진(懷安鎭), 동곡(東谷), 업낙진(業洛鎭)등을 진공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곧 물러났다.
이해 초 송(宋)의 부연검할(鄜延鈐轄) 종악(種諤)도 군사를 거느리고 무녕(撫寧)(수덕현(綏德懸)서북]제채(諸寨)를 공점하고 나올성(囉兀城)(무녕신성(撫寧新城))에서 하군(夏軍)을 크게 격파하였다.
송신종(宋神宗)이 즉위한 후 요(遙), 하(夏)가 호시탐탐하고, 국력이 위미부진(萎靡不振)한 형세에 감지하여 왕안석(王安石)을 고용하여 정치, 경제와 재정을 개혁하고 정군경무(整軍經武)하여 국방을 공고히 하였다. 근본적으로 서북변경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왕소(王韶)의 건의를 채납하여 제강(諸姜)과 연결하여 서하(西夏)를 제약할 것을 결정하였다.
1072년 2월 왕소(王韶)는 통원군(通遠軍)[롱서현(隴西懸) 사(使)로서 연달아 도하(逃河)서쪽의 하(河)[임하(臨夏)] 민(岷)(岷縣) 탕(宕)(岷縣南), 도(逃) (임담(臨潭)), 첩(疊)[청해중인서남(靑海中仁西南)등 5주(州)를 함락하여 하인(夏人)의 오른팔을 끊어 놓았다.
1081년 7월 송신종(宋神宗)은 하왕(夏王) 병상모량(秉常母梁)씨가 탈정했다는 것을 벌한다는 구실로 크게 하(夏)의 군사를 토벌하였다.
왕중정(王中正)에게 령을 내려 6만 군사를 거느리고 하동(河東)(太原)에서 서진(西進)하게 하고 종악(種諤)은 9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7군으로 나누어 서북으로 진군하여 고준유(高遵裕)는 경주반한(慶州潘漢)의 보기(步騎)8, 7만을 통솔하여 북진(北進)하고 유창작(劉昌作)는 경원(經原)병5만을 거느리고 고준유(高遵裕)의 절제를 받으면서 환경(環慶)병과 합세하여 북진하며 이헌(李憲)은 희하(熙河), 진봉(秦鳳)병을 거느리고 희하(熙河)에서 동북으로 진군하게 했다.
동시에 토반수령(吐潘首領), 동전(董氈)에게 조서를 내리어 3만 병사를 집결하여 부대가 합류하도록 하였다.
5일 각로대군(各路大軍)은 서하(西夏)의 흥주(興州)[은천시(銀川市), 매주(買州)를 향하여 진벌(進伐)하였다. 전초(戰初), 여러 로군(路軍)은 먼길을 빨리 달리면서 진군하였다.
종악(種諤)은 선후 은(銀), 하(夏), 유(宥) 삼주(三州)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하(夏)병을 흑수(黑水)[횡산현북(橫山懸北), 홍하지류(紅河支流))에서 격파시켰다.
이헌(李憲)은 난주고성(蘭州古城)[감숙조란현(甘肅皁蘭懸)]과 회주(會州)[정원현동북(靖遠懸東北)]을 연이어 공점하였다.
환경(環慶) 경원(涇原) 양로군(兩路軍)은 영주성(靈州城) 아래에 닿았다.
그러나 11월 중순에 이르러 총병시금(總兵侍禁) 노복(魯福), 팽손(彭孫)이 궤향(饋餉)을 호송하던 중 명사천(鳴沙川)에 이르러 하군(夏軍)의 습격을 받아 세 차례 싸움이 모두 패하였다.
송정(宋廷)은 전국(戰局)이 위급함을 보고 곧 반사(班師)에게 명을 내리어 령주(靈州)를 연합 공격하였는데 실패하였다.
종악(種諤)이 수복한 은(銀), 하(夏), 유(宥) 세 주(州)도 역시 지킬 수 없으므로 영락첩(永樂堞)에서 장성령(長城岭)[은천(銀川)서북에서 정변현(靖邊懸)까지]사이에 6채(寨)를 설치하고 배강천(背岡川)에서 포낭보(布娘堡)(정변현(靖邊縣)서쪽에서 동심현(同心縣)까지)사이에 6보(堡)를 만들어 하군(夏軍)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이듬해 9월 서하(西夏) 경국지병(傾國之兵) 30만이 영락(永樂)을 향해 대거로 반격하였다. 20밤낮을 비를 맞으며 성을 에워싸며 맹공격하여 성을 함락했다.
수군(守軍) 반한관(潘漢官)230여명 병졸 1,2만여명이 사살되었다. 1083년 봄, 재차 대거로 반격을 하였다. 2월 수 만 병사를 이동하여 란주(蘭州)를 습격하였는데 3전3패하였다.
5월 또다시 란주(蘭州)를 포위하고 9일 성을 지키고 그 주력은 여전히 하외(河外)에서 진입하지 못했다. 11월 하주병상(夏主秉常)은 누차 진공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니 비로서 송정(宋廷)에 알려 구강(舊疆)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승낙 받지 못했다. 이듬해 초 송정(宋廷)이 침략한 토지를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재차 보기(步騎)80만(하인(夏人)이 스스로 병세를 자랑함)발동하여 란주(蘭州)를 진공하였는데 열흘 밤낮을 성을 포위했지만 여전히 공점하지 못했다. 뒤이어 신종(神宗)이 무너지고 병상(秉常)이 죽어 송하(宋夏)는 다시 몇년 휴전하게 되였다.
송하(宋夏)의 싸움은 줄곧 북송(北宋)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100여 년의 전사(戰事)과정에서 서하(西夏)는 시종 송(宋)에 대하여 화전(和戰)정책을 겸하여 실시하였는데 화(和)하면 송(宋)은 화백(貨帛)을 수송하고 전(戰)하면 송(宋)은 꼭 손병절장(損兵折將)하였다. 이처럼 순환상인(循環相因)으로 하(夏)는 주동이 되어 누차 승전하여 날로 강해지고 송(宋)은 피동이 되어 평안한 날이 전혀 없었고 누차 패전하여 갈수록 궁해져 국세가 날로 쇠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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