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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히12:1-13절) 예수만 바라보자
옛날에<마이웨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마라토너의 생애를 그린 영화였는데, 그 주인공은 마라톤을 자신의 천직으로 알고, 나이 들고 난 후에 아들과 함께 마라톤을 합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쓰러지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서 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이웨이*라는 그 영화의 주제곡이 굉장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때는 어디를 가든지 굵은 목소리의 남자 가수가 *I did it my way*라고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이 하나의 뜻을 정해놓고, 끝까지 달리는 것을 굉장히 멋있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중요한 경기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듭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축구 경기를 할 때, 온 경기장을 관중들이 꽉 채워서 열광하고, 미국에서는 미식축구 경기나, 야구 경기가 열리면, 수만 명 이상 몰려와서 열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월드컵축구 경기를 한다고 하면, 사거리에 대형 텔레비전을 설치한 곳에 수만 명씩 모여서 응원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축구에서 큰 붐을 일으켰던 나라는 베트남이었는데, 베트남 선수들이 축구를 잘하는 바람에 베트남 국민이 들썩들썩하고, 베트남 팀을 맡은 한국 감독은 아예 베트남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시시한 경기는 일단 관중이 거의 없지만, 유명한 경기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응원하고 열광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라톤이나 축구, 야구나 미식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믿음의 경주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 믿음으로 돌진하는 경기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경기할 때,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는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있고, 또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면, 손뼉치고, 기뻐하기도 하고, 우리가 쓰러지면, 안타까워하면서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리가 우리 귀에는 하나도 안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합니다. 경기장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관중이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선수들은 자기 경기에만 집중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Ⅰ.선수의 본색을 회복하라
운동선수 중에 경기하다가 지치게 되면, 자기가 선수인지, 관중인지, 잘 구별하지 못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지쳤다고 운동장에 드러눕기도 하고, 용변이 보고 싶다고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하고, 옆에 있는 선수와 싸우거나 농담을 하는 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일단 선수로서는 실격(失格)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1절)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는 사실 이 세상에서 늘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선수도 아니고, 관중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단지 수험생들은 좋은 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 일 년 내내 공부하느라고 고생하고, 기업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은 좋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회의하고, 사람들을 만나느라고 수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험생도 아니고, 기업의 책임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경주의 선수들입니다. 즉 우리는 모두 천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마귀(魔鬼)와 그 졸개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길에 구덩이를 파고, 올무를 만들어놓고, 세상에 좋은 구경거리들을 만들어서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천국 가는 길에서 탈락시키려고 힘을 씁니다.
더욱이 마귀는 아주 우락부락한 적들을 우리 앞에 내세워서 *계속 믿음 생활을 하면, 쇠몽둥이로 머리를 박살내겠다.*고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우리의 허리나, 발을 잡고 늘어져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이 너무 멋있게 보이고, 좋아서 넋을 잃고, 구경한다고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우리 길을 막고 서 있는 적(敵)들이 너무 무서워 숨어서 시간을 보낼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름같이 많은 관중이 지르는 환호성*입니다.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와!*하는 환호성이 들리므로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지금 경기를 하는 선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운동장에 누워 있거나, 혹은 선수와 싸우고 있거나, 농담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관중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는 환호성은 성경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神象)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겠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당당하게 그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갑니다. 그때 하늘에 있는 모든 천군 천사도 긴장을 하면서 *이들이 불에 타 죽을 것인지, 불을 이기고 살아서 나올 것인지* 뚫어지게 지켜봅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세 사람이 불을 이기고, 살아서 풀무 불에서 나왔을 때, 온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하게 됩니다.
그때 이 세상에 처져 있던 많은 성도도 그 환호성을 듣고 서는 *나도 이렇게 침체하여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기도하다가 결국 사자(獅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조금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사자들의 입을 모두 틀어막아버리셨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되어 왕이 사자 굴에 찾아갔을 때, 다니엘은 살아서 사자 굴에서 나오게 되었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신하들이 대신 모두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하늘에서는 환호성이 들리게 됩니다.
또
☆다윗이 소년일 때, 이스라엘은 거인족의 한 명이었던 골리앗 앞에서 용기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피하기에 바빴고, 숨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소년 다윗이 사울 왕에게 가서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설득해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이때 이 장면을 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 조마조마했지만, 하늘에 있는 천사나, 성도들도 가슴을 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다윗이 물맷돌을 주머니에서 꺼내어서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히고, 쓰러뜨렸을 때, 하늘의 모든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은 앗수르 군대에 포위되어서 굉장히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앗수르 왕 산헤림의 신하 랍사게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으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모욕했습니다.
이때 왕도 울고, 신하들도 울고,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이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끝까지 앗수르 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도 *이겨라! 이겨라!*고 하면서 응원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진 날. 천사 하나가 내려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때 또 다시 하늘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을 보면서 코로나 장기화로 어려운 때라고 계속 침체하고 낙심해 있으면, 안 됩니다.
*아, 이 사람들도 이렇게 이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데, 나도 선수로 뛰어야겠다!*라고 하면서 선수로 달리는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선수로 잘 달리려고 하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1절 하반 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라고 했습니다. 운동하는 선수가 외투같이 무거운 옷을 입고 있다면, 빨리 달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머니 안에 무엇인가 잔뜩 넣어 달린다든지, 스마트폰을 엉덩이에 꽂고 달린다든지 하면,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짐이 되는 것이나, 무거운 옷을 모두 다 벗어버려야 가볍게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罪)나, 죄의 습관(習慣)*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참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노는 것(향락)을 너무 좋아하거나, 죄(罪)에 얽매이는 바람에 사람들과 싸우느라고 아까운 시간을 모두 다 허비합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놀러 다니는데, 시간을 다 허비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정욕(情慾)에 빠져서 죄에 허우적거리느라고 인생을 모두 다 허비할 순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알고 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그 길을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산을 한걸음에 올라갈 수 없고,100km의 먼 거리를 단숨에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길을 찾고 난 후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푯대를 향하여 가다보면, 목표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빌3:14절)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Ⅱ.예수를 바라보라.
우리가 달리기 경주를 할 때, 무턱대고 달라는 것보다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달리면, 훨씬 마음이 안정됩니다. 특히 마라톤 경기를 할 때는 함께 달리는 그룹이 중요합니다.
마라톤 경기에는 페이스를 맞추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우승할 사람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뛰어 줍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쳐지면, 이 보조를 맞추는 사람이 속도를 내어서 우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달리기를 할 때, 언제까지나 결승점만 목표(目標)로 해서 달릴 수는 없습니다. 우선 일차로 *저기 나무까지* 달리고, 그다음에는 *강의 다리까지* 달리고, 그다음에는 *반환점까지* 달리고, 또 돌아올 때도 *목표(目標)를 나누어서 달리다*보면, 달리기가 쉬워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대한 목표(目標)를 가지고 혼자 전력 질주하는 것도 좋지만, 각 셀(cell)공동체가 목표(目標)를 나누어서 작은 것부터 성취해나가면, 나중에 큰 목표(目標)에 도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작은 목표(目標)를 생각하고, 달리기를 해야 합니다. 그 작은 목표(目標)가 곧 예수님입니다.
12: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무엇인가 처음으로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높은 산을 맨 처음 올라간다든지, 아니면 위험한 지역을 맨 처음으로 횡단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에 이 일을 한 사람이 없으므로 도전하는 사람은 굉장히 두렵고, 긴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앞에 누군가가 이 길을 개척(開拓)해 놓았고, 이미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안심하고, 여유를 가지고,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2018년 11월 15일 동탄에서 site / Kakao 선교회를 개설하고, 2020년 2월 1일 컴퓨터 카페 팬들을 모으는데, 거부반응과 악성댓글로 힘들었지만,코로나 재앙이 왔고. 아직은 동역자와 연구원 설립 등 미완성이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진행중입니다. 비-전의 말씀 욥8:7절)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아-멘
그래서 달리기를 할 때, 혼자서 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외롭고, 힘들지만, 잘 뛰는 사람 뒤에서 그 등을 보면서 달리면, 생각보다는 달리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이미 길을 개척(開拓)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웅(英雄)이나, 유명한 정치인(政治人)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갈릴리의 무식한 사람들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니까 결국 그 앞에 있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뺨을 맞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지만 꾹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 가장 높은 곳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모두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2:3절)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속이 상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알아듣지 못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꾹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믿음 생활하려고 하면, 속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즉 나의 믿음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할 때, 내 멋대로 행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야 상(賞)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쳐서 쓰러져도 일어서고, 채찍을 견디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피곤하여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각 셀(cell)공동체에서 이제 하는 일도 그만 하고,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세상에서 실컷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즉 쓰러져도 또 일어나고, 쓰러져도 또 일어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Ⅲ.하나님의 징계를 기뻐하자.
격투기 선수들을 보면, 상대방에게 맞아서 코피를 흘리고, 눈이 찢어져서 피를 흘려가면서도 계속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못 봐줄 경기가 격투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는 격투기 경기가 많았습니다. 로마시대 격투기는 주먹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칼과 창을 가지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잔인한 경기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죄와 싸우는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12:4절)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격투기를 하는데, 아직 피를 흘리지 않는 이유는 상대와 싸우는 것을 무서워해서 빙빙 링을 돌면서 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중은 야유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은 맥주 병이나 깡통 같은 것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현실에서 겉으로만, 빙빙 돌면서 침묵하고 비겁하게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붙어서 싸우다 보면, 주님이 힘을 주시며,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의 약점을 보완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죄(罪)*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죄(罪)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강요당할 때, 타협할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고, 힘이 센 사람에게 터져서 코피를 흘리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죄를 지으라*고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죄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징계(懲戒)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징계(懲戒)당한다는 표현을 할 때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징계를 받았다*고 하면, 무엇인가 잘못해서 처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주로 자녀가 아버지에게 종아리 맞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자녀가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고, 놀기만 한다든지, 외워야 할 것을 다 외우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워놓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아리를 맞은 아들은 창피하기도 하고, 또 깨달음이 생기고 해서 그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자기 자녀가 아닌 아이나, 종이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고, 장난만 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5-6절)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물론 자식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부모에게 종아리를 맞거나, 꾸지람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자녀의 처지에서는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없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공부하지 않고, 매일 놀기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부모님은 계셔야 하고, 나쁜 짓 할 때는 야단을 맞아야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많은 기독교인은 야단치는 설교는 좋아하지 않고, 무조건 칭찬하고, 잘했다고 하는 설교를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남의 자녀인 것입니다.
12:8절)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자기 부모는 자기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야단을 치고, 어떤 때는 매를 때려야 그 자식이 올바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상관하지 않는 부모는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으면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자식인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으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는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12:11절)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종아리를 맞을 때는 아파서 울지만, 맞고 나면, 시원하고, 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징계(懲戒)를 받을 때, 참아야 하고,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통하여 더 싱싱하게 되고, 더 바르게 됩니다.
12:I2-13절)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손도 피곤하고, 무릎도 약해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요즘 노인들은 넘어지면, 골절 뼈가 다치게 되는데, 건강에 매우 좋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걸으면서도 이상하게 발을 헛디뎌서 자꾸 발목을 삐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은 발을 항상 주의 깊게 디디는 재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즉 너무 성급하게 가려고 하거나, 엉뚱한 것을 보면, 넘어지게 됩니다. 요즘 길을 가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면, 큰 사고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 셀(cell)공동체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길에서 넘어지지 않고, 벧전5:8절)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덤벼드는 사자(獅子)에게 물리지 않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단단한 양식
☞ 소통과 합력의 달☜ ▣ 새벽 마다 합심하여 기도할 제목
요14:13절)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Ⅰ.주님! 열방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Ⅱ.주님! 동탄에 성경연구원 금년 내 설립할 동역자를 보내주소서.
Ⅲ.주님! 신실하고 충성된 후임자와 일꾼들을 보내 주옵소서. 아-멘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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