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지방에서 근무하시다가 몇 주일 만에 한 번 집을 찾으시면 맨 먼저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셨다. 그러고 나서 안부를 여쭌 다음에 몇 시간이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셨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를 찾아와 식사를 하셨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이미 기력이 쇠하셨어도 집안의 중심이었다. 또한 지혜의 산실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한 번에 집안 공기가 정돈됐다. 그런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할아버지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린 나도 하게 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곧 가풍이자 교육 지침이었던 시절이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절대적인 권위자이자 동시에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을 베푸는 가문의 뿌리였다.
시대가 변해 산업화가 되고 정보화 시대가 됐다. 나의 아버지가 집안의 할아버지가 됐다. 아버지는 중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저 설날이자 추석 때 제사의 주체일 뿐이었다. 집안의 명절 놀이에서도 비껴 계셨다. 그런 아버지는 장손부터 불러서 한 명씩 세대에서 세대로 가치를 전승하는 '세대 전승'에 집착했다. 아이들은 그런 풍경에 익숙했지만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더 이상 집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그렇게 또 한 세대가 지나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 60이 넘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었다. 시대도 바뀌어 인공지능의 시대가 되었다. 손주들은 요람에서 취업까지 바쁘다. 맞벌이하는 부모가 어쩌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오거나, 보육이 힘들 경우 등하교와 학원 '뺑뺑이' 도우미 역할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위탁한다.
핵가족은 완전히 정착되었다. 나아가 모계 사회, 가부장제에서 가모장제로의 전환 같은 가정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가족의 중심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이의 부모에게 있다. 양육 주권은 아이 엄마에게 넘어가 있다. 젊은 부모들은 자신들만의 확고한 교육 철학과 육아 원칙을 가지고 있다. 유기농 간식부터 텔레비전 시청 시간 제한까지, 그들이 세운 촘촘한 성벽 안에서 조부모의 옛날식 조언은 지혜가 아니라 영역 침범으로 간주되곤 한다.
시대의 문법이 바뀌었다. 조손 관계에서 지나친 역할을 하려다가는 집안의 평화 대신 갈등이 생긴다. 손주와의 입술 뽀뽀는 보건상의 이유 등으로 제한되고 볼 뽀뽀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조부모의 보육·양육 지혜는 인정받지 못한다. 아이 엄마가 정해놓은 지침(매뉴얼)을 따라야 한다.
반면에 조부모의 마음은 허전하다. 특별한 역할이 없는 할아버지는 이 점이 더욱 서럽다. 할아버지는 평생 직장 생활을 했다. 자존감이 강하며 본인이 기여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는 갈수록 축소된다. 은퇴 증후군과 자녀가 출가한 후 겪는 ‘빈 집 증후군’까지 겪게 된다. 그래서 집안에서 역할을 찾고 싶어 하고, 이것이 과도해져 손주의 교육에 영향을 많이 끼치려고 하면 불편해진다.
얼마 전에 만난 어느 출판사 사장에게 역대급 베스트셀러가 꼭 심혈을 기울인 노작이거나, 엄청난 사상과 정보를 다룬 역작은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시대의 트렌드를 잘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한 권이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사자성어 같은 책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자기 시대에서 얻은 지혜를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이 부모 입장에서 사자성어 서적이면 아이의 한자 공부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지식도 쌓일 수 있다고 본다. 부모들도 동의가 되는 관여인 셈이다.
옛날이야기를 하더라도 가르칠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하루 한 개의 사자성어를 흥미 삼아 읽어보게 하는 것이어서 세대 간에 타협이 된 것이다. 이 사자성어 이야기는 오늘날의 조손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장성한 자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손주와 깊은 유대를 맺는 ‘적정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첫째, 초대받지 않은 조언은 금물이다. 자녀가 먼저 묻기 전까지는 양육 방식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설령 내 눈에 아이의 옷차림이 가벼워 보이고 밥을 적게 먹이는 것 같아도 참아야 한다. 그것이 젊은 부모의 양육 주권을 존중하는 첫 번째 예의다.
둘째, 규칙의 집행자가 아닌 '예외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부모가 엄격한 규율로 아이를 가르친다면, 조부모는 그 규율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정서적 완충지대가 되어주면 족하다. 부모의 원칙을 깨뜨리라는 것이 아니라, 가끔 안전가옥 역할을 해주면 된다.
셋째, 도움을 주되 지배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경제적 지원이나 황혼 육아라는 헌신이 발언권으로 이어지는 순간, 불협화음이 생긴다. 도움은 기꺼이 주되, 결정은 자녀의 몫으로 남겨두는 쿨한 조연의 역할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똑똑한 훈육관이 아니라 정서적 지지이다. 과거 친가가 아닌 외가에서 주로 느꼈던 따스한 정서적 지지가 오늘날 조부모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다. 손주 육아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느냐는 각각의 사정에 달려있다.
다만 일반론적으로는 새로운 ‘약한 연결’, 즉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와의 관계 형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손주 보육과 육아 도우미 역할도 10년이 지나면 끝나기 때문이다. 더 나이 들어서는 새로운 무엇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조손이라는 아주 특별하고 정서적인 가족적 유대가 갖는 가치가 중하기 때문에,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은 손주 세대가 경험하는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이다. 아주 큰 기억과 인상을 오랜 기간 남긴다. 그 자체가 가르침이자 전승 가치이다. 그래서 곱게 늙어가고, 병을 다스려 나가며,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손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 될 수 있다. <민병두>
나이 60, 장성한 자녀와의 관계 재정립
한 세대 전, 우리들 부모 세대만 해도 그들의 나이 50대에는 자녀들을 거의 출가시켰다. 지금 우리 세대에는 60대에 자녀들이 대부분 결혼한다. 60대는 자녀와 한 집 살이가 종료되는 인생의 시기이다.
지금 베이비부머들은 ‘마처세대’라고 불린다.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처음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치관의 혼돈이 생긴다. 여전히 부모 세대에게서 받았던 교육에 대한 영향이 남아있고 향수도 있다.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세태에 적응하려고 한다.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르다. 가장 진보적인 태도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간섭하고 관여하거나 나아가서 지배하는 관계까지 다양하다. 가장 보수적인 관계는 갈등 소지가 높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동양적 윤리인 효에 기반했다. 부모는 가르치려고 했고, 무조건 베풀었고 자녀는 그만큼의 효로 보상을 해야 했다. 동양,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자녀는 오랫동안 ‘내 삶의 연장’으로 이해되어 왔다. 자녀는 독립된 존재라기보다 부모의 희생의 결과물이었고,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부모의 미래에 대한 노후보험이었다. 이를 이데올로기화 한 것이 충과 효다. 유교 사상에서 충과 효는 각각 국가와 가정을 지탱하는 중심 사상이다. 가정의 효가 축적되어 국가의 충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거의 부모 자녀의 관계가 서구적이 되었다. 자녀를 보는 관점도 완전히 달라졌다. 서양 사회에서 자녀는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분리될 존재’로 인식됐다. 자녀는 부모의 보호를 거쳐 자기 삶으로 떠나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독립하기까지 지원하는 것이다. 부모는 삶의 관리자도, 판단자도 아니다. 조언을 해도 선택은 자녀의 몫이다.
나이 60이 되면 서른을 넘긴 자녀와의 관계다.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자식이지만, 자녀는 이미 오래전에 독립했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함께 살든 떨어져 살든,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자녀는 자기 삶의 중심을 이미 확보했다.
서른이 넘은 자녀에게 부모는 더 이상 인생의 안내자가 아니다. 선의로 던진 조언은 잔소리로 들리고, 걱정은 간섭으로 오해받는다. 부모는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는 “아직도 내 인생을 검토받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부터 갈등이 커지기보다는 대화가 얕아진다. 싸움은 없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도 사라진다.
부모 자녀는 이제 특별한 친구 관계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부모'라는 낡은 옷을 벗고, '인생의 동료'로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적당한 거리가 좋은 사랑이다. 서로의 삶이 겹치지 않는 빈 공간이 있어야 그 사이에 존중이 깃든다. 섣부른 관여 대신 묵묵한 응원을 보낼 때, 자녀는 부모를 '간섭자'가 아닌 '안식처'로 인식한다. 노후의 부부관계처럼 '따로 또 같이'의 자세가 필요하다.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고, 보고 싶을 때 자주 찾아주는 관계이면 충분하다.
둘째, 효도에 대한 기대를 우정으로 치환해야 한다. 자녀에게 쏟은 정성을 되돌려 받으려 하면 서운함만 쌓인다. 이제 자녀는 내 노후를 책임질 보험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 걷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친구가 된다. 친구 사이에 상하관계가 없듯, 자녀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가 관계의 품격을 결정한다.
셋째, 부모 자신의 독립이 먼저다. 자녀의 성취를 내 삶의 훈장으로 삼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녀를 잘 키운다고 해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외국 나가서 성공하면 해외 교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한다. 자식 자랑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부모가 자녀의 성공에 의존하는 행복은 공허하다. 자신의 삶을 즐기고 스스로 행복해야 한다. 그럴 때 자녀도 부모를 향한 부채감에서 자유로워진다. 자녀의 삶에서 시선을 거두어 나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60대 부모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숙한 뒷모습이다.
■ [나이만 먹는다고 절대 어른이 되지 않는다]
외국인이 등장하는 방송을 보면 '한국인은 유독 나이를 많이 묻는다.'라는 증언이 자주 나온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연공서열, 호봉제, 장유유서 같은 사회적 관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충돌이 일어났을 때 논리와 근거가 떨어져 밑바닥이 드러나면 바로 '너 몇 살이야?'가 나오는 사람이 꽤 있다.
세상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다.그래서 나이 중심 문화에도 당연히 장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장점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성숙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성숙해진 다는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다음 3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어른스럽다'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가치관의 정립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다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다름을 존중할 수는 없다.
우선 합리적인 근거가 기준을 뒷받침해야 하고, 그 기준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서도 각자의 가치관이 존중받는 정도가 달라진다.
나이가 많아도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로 인해 판단 기준이 모호하고 즉흥적 기분에 따라서 행동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가치관은 마음먹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스스로 의미 있는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충분한 공부와 고민을 수반하지 않은 가치관은 없다는 뜻이다.
과연 입시를 제외하고 자신을 위해 제대로 꾸준히 공부하는 성인이 얼마나 있을까?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이에 걸맞은 연륜 있는 어른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리더라도 확실한 가치관이 정립된 사람은 훨씬 어른스러운 경우가 많다.
2. 운에 대한 인지
나이가 많다는 것의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 옛날 같으면 '지식의 축적'을 들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수많은 정보를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 '노인은 불타는 도서관과 같다.'라는 표현은 조금 진부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진짜 강점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직접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간접 경험은 체감을 통해 깨닫는 정도에서 직접 경험에 상대가 안 된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처럼, 오래 살았다면 몸소 겪으면서 지켜본 사건이 정량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깨우쳐야 하는 진리가 바로 '운'이다.
세상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 2가지 측면에서 유리해진다. 첫 번째는 겸손해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운과 관련된 일에 소모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명확하게 인지하면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세상에 대해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다. 어른스럽게 말이다.
3. 맥락에 대한 이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이 말은 얼핏 말장난 같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모든 상황에는 맥락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결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 따라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나잇값 못하는 사람에게는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그때와 지금은 모든 상황이 다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 이렇게 보급되지 않았고, 소셜 미디어도 이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위협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따라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른이 아니라 '꼰대'에 불과하다.
크게 인상 깊었던 명언이 있다. 칠리 데이비스는 '나이 드는 것은 경제적이다. 하지만 성장하는 것은 선택적이다.'라고 뼈를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부러뜨리는 촌철살인을 남겼다. 많은 사람이 정말 중요한 선택을 외면하고 있다. 대신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돈 것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한다. 지구가 태양을 수십 바퀴 돌 때 지구를 밀어 준 것도 아니고 떠받쳐준 것도 아니라면, 절대 나이를 벼슬로 착각하지 말자.
'인생은 실전이다' 중에서 (P-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