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왜 보느냐? 하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회자하는 말이다.
달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진심(眞心), 불성(佛性) 등을 의미하고
손가락은 경전이나 고승들의 어록 내지 일체의 명자상(名字相)을 상징한다.
불교의 수행은 교(敎)에 의지하든 선(禪)에 의지하든 간에
그 목적은 성불(成佛)하는 데 있다.
선사들에 의하면 성불은 원증(圓證)하여 견성(見性)하는 데 있고,
원증견성(圓證見性)은 망념을 없애 진여를 깨달아 얻는
구경무심(究竟無心)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원증견성에 최대 장애는 다문(多聞)과
지혜 즉 해오(解悟)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부질없이
경전이나 조사들의 어록을 탐구하고
계행(戒行)을 닦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내 마음의 진심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전이나 어록과 같은 명자상은
뒤 닦은 휴지나 다름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심지어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경전이나 조사 어록 등이
정말 이처럼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인가?
옛 고승들도 선(禪) 수행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조사 어록이나 경전에서도 이를 강조한 것들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경전의 한 예를 보자.
아난존자가 부처님 열반 뒤 경전 결집 시
존자 가섭으로부터 아라한이 아니라서
가섭이 머무는 석실(石室)에서 추방당하자
7일간 교저공부(翹佇工夫)로 아라한이 되고
신통을 얻어 가섭이 제시한 닫힌 석문을 뚫고 들어갔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하고 있던
다문 제일의 아난존자를 배척한 이유는 경전이 아니라
오로지 견성(見性)을 향한 선(禪)을 강조한 것이다.
교저공부(翹佇工夫)란 한쪽 발을 들고
합장하고 절벽에 서서 참선 공부를 하는 것으로
만약 졸게 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는
아찔한 참선 공부를 말한다.
역대 조사는 물로 보조국사의 지눌도 또한
「슬프다, 무릇 요즘 사람들 미혹된 지 오래여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모르고,
자기 성품이 참 진리인 줄 몰라서,
진리를 구하려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붓다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수심결>
성불을 바라면서 왜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지 않고
밖을 향해 달려가느냐 하는 의미다.
모든 선사 또한 이렇게 선을 강조한다.
사실 메뉴판을 수천 번 보고 음식 이야기를 들어도 배는 부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령 대장경을 수천 번 읽고
조사 어록을 읽고 또 읽어 이해한다고 해도
불성(佛性)을 실제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널리 배워 알음알이가 늘수록
정신이 어두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무구한 마음의 거울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도 오히려 먼지가 된다.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이 도를 깨닫는 데는
제일 큰 장애가 되므로 이를 배척하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말을 음미해 보자.
<가리키는 달을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하는 이 말은
중생들에게는 성불에 관한 질문보다 해답에 관심을 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깨친 자라야 비로소 할 수 있기 때문이다)(淸凉澄觀 전등록30)
이는 옛 고승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대사도 모든 학문을 달통하였고,
그를 이은 역대 조사(祖師)와 고승(高僧)들 또한
모든 학문과 경전에 해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 경지에 오른 후 즉 깨달음을 얻고 보니
경전과 일체의 명자상이 의미가 없다는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본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을 보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글이나 언어를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지 않음.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과 같은 문자적 가르침을 초월한
직접적 체험과 깨달음을 중시함을 의미.
경전이나 조사 어록은 <말>이다. 그 말이란 것은 분명 실제가 아니다.
그런데 성불(成佛)을 바라면서 왜 실제가 아닌
그런 말들을 중생들은 탐닉하게 되는가?
이는 말이 의미하는 상징이 실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듭거듭 반복되면 반복을 통해 자동으로 최면에 걸리게 된다.
계속된 반복으로 관념이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성불을 바라지만 성불하고자 하는 바램은 미래다.
말에 의지하든 선에 의지하던
하루아침에 바로 성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램은 하나의 욕망이 되고, 향상하려는 노력이 되고,
<좀 더>라는 탐욕이 되고, 불만이 되기 쉬운 것도 사살이다.
그때 거기서 좌절이 뒤따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의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말과 글과 소리가 없다면 무엇으로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을까?
말과 글과 소리가 자성이 없는, 즉 실체가 없다고 버려야 할까?
고기가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물을 먼저 던져버릴 수 있는가?
강을 아직 건너지도 못했는데 뗏목을 버려야 하겠는가?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해되기 전까지는 말이 필요하다.
버려야 하는가, 잊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달은 안 보고 왜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느냐?」라는 말은
성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보다
그 해답에 쉬운 답을 구하는 자들을 위한 말이다.
질문은 어렵고 힘들다.
그저 빌어온 답을 완전하다고 믿기는 쉬운 일이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자리 잡고 결가부좌(結跏趺坐)만 한다고
성불(成佛)이 되는 것은 아니다.
퀴즈 문제처럼 화두를 든다고 해서 성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질문을 위해서는 괴로워해야 한다. 질문을 위해서는 방황해야 한다.
교에 의지하든 선에 의지하든 성불을 위한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성불한다는 것은 분명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듯
저 언덕에 닿기까지는 필요한 것이다.
뗏목을 버리는 것은 강은 건너고 난 다음의 문제다.
부처와 조사의 정법(正法)은 견성(見性)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갖가지 배움과 모든 인연을 물리쳐 버리고
결정코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매우 깊은 법을 들어도 맑은 바람이 잠시 귓가를 스쳐 가듯
다시는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고 선사들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 것으로 알지만
햇빛을 빌어 녹이듯, 범부가 곧 부처인 것으로 알지만
진리(법)의 힘 빌어 익히고 닦아야 (붓다가) 된다.>라고 또한 말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 적셔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공로가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되어
진심의 작용이 나타난다.”고 한다.
불성은 하루아침에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익혀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의 힘 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깨치기 전에도, 깨친 후에도 수행이 필요하고 보임(保任)도 따른다.
그를 돕는 방편의 하나가 경전이요, 조사 어록 등이 아니겠는가.
부처와 조사의 정법(正法)이 견성(見性)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방편이 필요하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목적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일러준다.
지도는 목적지가 아니지만 가는 위치와 방향을 알려준다.
그것이 경전이요 조사의 어록들이다.
이를 버리는 것은 견성(見性)을 성취한 그다음의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등대 불빛도, 지도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어두운 밤 바다를 무작정 항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은 견성을 한 자들의 말이다.
경전과 조사의 어록 등 일체 명자상은 방편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지만
달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경전과 조사의 어록 등 일체 명자상이 백해무익한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학(敎學)은 교학을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는 교(敎)를 놓아버리는 말이 아니라
배우면서 집착되지 말고 이를 반문공부(反聞工夫) 하라는 의미다.
보고 듣는 소리에 의존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공부를 하라는 의미다.
부처를 알려면 부처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불을 바라는 구도자라면 달을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왜 보느냐? 하는 이 말의 속뜻은
경전과 조사 어록 등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를 통하여 반문공부(反聞工夫) 하라는
의미임을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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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 둘이 송장 하나를 매고 가니
송장이 산사람 둘을 매고 온다
~性徹스님의 法語集 本地風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