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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제3 수행편 제 6장 일기법(日記法) 3. 정기 일기법 1. 당일의 작업 시간 수를 기재시키는 뜻은 주야 24시 동안 가치 있게 보낸 시간과 허망하게 보낸 시간을 대조하여, 허송한 시간이 있고 보면 뒷날에는 그러지 않도록 주의하여 잠시라도 쓸데 없는 시간을 보내지 말자는 것이요, 2. 당일의 수입, 지출을 기재시키는 뜻은 수입이 없으면 수입의 방도를 준비하여 부지런히 수입을 장만하도록 하며 지출이 많을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지출을 줄여서 빈곤을 방지하고 안락을 얻게 함이며, 설사 유족한 사람이라도 놀고 먹는 폐풍을 없게 함이요, 3. 심신 작용의 처리건을 기재시키는 뜻은 당일의 시비를 감정하여 죄복을 결산을 알게 하며 시비 이해를 밝혀 모든 일을 작용할 때 취사의 능력을 얻게 함이요, 4. 감각이나 감상을 기재시키는 뜻은 그 대소 유무의 이치가 밝아지는 정도를 대조하게 함이니라. |
지난 시간에 일기법에 대한 기본 개요하고 상시 일기법에 대해서 공부하셨지요. 아주 재미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일기법은 일기를 하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삼학 수행을 하기 위한 삼학 수행의 한 과목입니다. 어디에서 나와 있었지요? 일기법이 어디에서 나와 있었지요? 이 앞에 한번 배웠던 적이 있는데. 정기 훈련법에 나와 있었습니다. 정전 56p를 보면 정기 훈련법이 나오고, 57p는 상시 훈련법이 나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대종사님은 삼학 훈련 중에 정기 훈련법 중에 정기일기 상시일기 두 과목을 두고 정기 일기는 사리 연구과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시 일기는 작업취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가면 정기일기와 상시 일기를 기재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공부했듯이 상시일기는 정기 훈련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 일기는 정기 훈련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시일기는 평상시에 하는 것입니다. 상시 일기에는 뭐가 있다고 했지요? 유무념, 학습상황, 계문 이렇게 3가지였지요? 이것은 결국 삼학(三學)을 평상시에 훈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기일기는 정기훈련 할 때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작업 시간 수, 그리고 수입 지출, 심신작용 처리건, 감각감상 네 가지를 기재하는 것이 정기 일기입니다. 상시일기는 삼학 병진을 상시에 대조하고 정기 일기는 작업 시간 수, 수입 지출, 심신 작용 처리건, 감각감상, 이사병행(理事竝行)이고 영육쌍전(靈肉雙全)입니다. 내 마음만 보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수입지출도 쓰고. 허송세월을 얼마나 보냈는가. 이런 생활을 다 아우를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정기 일기법입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살짝 요약해보면 일기는 누가 쓰는 것이지요? 교무님만 쓰고 신심 있는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일기도 재가, 출가 구분이 없습니다. 일기도 안 쓰면서 재가, 출가 구분 없다는 이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재가(在家), 출가 구분이 없는 것은 성품, 교단 활동, 법위, 사업에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기도 상관없습니다. 교무님은 써도 나는 재가니 안 쓰겠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유식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유식하지 않더라도 쓸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조사법, 대종사님 당시에는 점을 찍는 성계명시독. 화가 많이 났다, 붉은 점. 욕심이 너무 많이 났다 검정색 점입니다. 그래서 적색 황색, 청색 등 점을 찍어서 마음의 상태를 색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학벌, 유무식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진리를 깨치는 것도 유무식이 상관이 없습니다. 유식한 사람이 유리한 점도 있지만 불리한 점도 있습니다. 유식한 사람은 분별에 쉽게 덜어집니다. 그리고 그 학(學)에 갇힙니다. 그런데 무식한 분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분별이 적어서 불이법문, 분별이 없는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들어가면 양심은 유식, 무식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꼭 “법 조항에 맞냐?”에 상관없이 내 안에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 다 양심이 있고 공적영지가 다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기법은 훈련을 받은 우리 공부인들에게 상시와 정기로, 상시는 어디서나 정기는 훈련에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원불교 일기법의 특징은 글 잘 쓰는 사람이 수필, 소설 쓰듯이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안 빼고 썼다고 해서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인도 일기 많이 씁니다. 가계부, 연애일기, 사업일기 다 일기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의 일기는 바로 정기 상시(常時)로써 특징이 있습니다. 즉 삼학 공부와 연결이 되며 이사병행, 영육쌍전과 연결이 됩니다. 일기를 기재하는 것이 내 마음을 참회 반성하며 진리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일기입니다. 일기 기재하다보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일기는 write가 아닌 record입니다. 경동시장에 계신 일원님께서 내가 뭐 파를 팔았어요. 오늘 파를 몇 개 팔았는가 할 때, 예쁘게 적어야하나요? 아니면 이리 저리 상상해서 적나요? 아닙니다. 그대로 쓰면 됩니다. 그게 기재이고 record입니다. write라는 것은 수필 쓰듯이 소설 쓰듯이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불교의 일기는 기재하면 됩니다. 그래서 유, 무식이 상관이 없다. 일기 기재하라고 하면 ‘나는 무식하다, 나는 글을 모른다. 대학을 안 나왔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원불교는 특히 상시일기는 대종사님 당대부터 성계명시독(性戒明示讀)이라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일기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행사가 있고 일이 있으면 바쁜 데 그 일이 끝나고 다 집어쳐 버리는 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일을 실행을 했으면 반드시 그 실행에 대한 반조(反照),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시행착오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화여대, 성균관대, 시립대, 고려대 등 대학 동아리를 많이 맡아봤습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선배들이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그 기록한 것을 보지 않으니 실수가 반복 되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우리 개인도 어떤 것에 대한 실행의 시시비비를 가려서 거기에 대한 반성과 평가를 해서 잘하는 것은 이어가고 개선할 것은 개선해나가고 반성할 것은 반성과 평가를 해가지고 잘한 것은 이어가고 개선할 것은 개선해 나가고 반성 할 것은 반성해 나가고 마치 휴대폰은 예전 20년 전에 만들어 졌던 그대로 쓰나요? 계속 문제점을 발견하고 업그레이드 해나가잖아요. 계속 발전해가고 편안해지고 요새 할아버지 할머니도 잘 쓰시지요. 처음에는 되게 어려웠지만 어른들도 쓸 수 있도록 잘 개선했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듯이 우리 개인도 살다보면 이리저리 하는데 덮어 놓으면 실수가 반복되니 그 것을 수면위로 올려서 분석해서 발전, 개선시킬 것은 개선해 나가고 더 나아가서 문답 감정을 통해 깨친 것이나, 시비를 분별한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 감정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계부를 안 쓰는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가계부를 안 쓰는 사람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저는 아껴 씁니다. 그런데 인생이라 말이죠. 두루뭉술한 사람들 가계부를 정확하게 쓰지 않는 사람은 두루뭉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두루뭉술한 사람과 결혼하면 나도 두루뭉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일기를 정확하게 쓰는 사람은 깐깐한 사람인가요? 차가운 사람인가요? 진짜 법이라는 것은 도를 실행할 때에 거기에 나타나는 효과를 공덕이라고 하였지 유한 것이 두루뭉술한 것을 덕이라고 하는 것은 대종사님이 가소롭고 우습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상시일기의 유무념(有無念)대해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유무념. 챙기는 마음이 있었느냐? 먼저 챙겼다면 유념입니다. 그러나 최종의 유념은 아닙니다. 나중에는 그 일이 성공되도록, 나아가서 사은님의 박수 속에 성공하는 것이 최상의 유념입니다. 가능하면 사은님의 호렴 속에서 성공했을 때 그것인 진짜 유념입니다.
하나는 권장할 무념, 하나는 손해 보는 무념이 있습니다. 방심하는 무념과, 상을 내지 않는 진공자리에 합일하는 무념. 상이 났을 때 챙기는 무념 공부가 있습니다. 일기법에서 무념은 부정적인 뜻의 무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챙기지 못한 주의하지 못한 방심한 마음의 무념을 말합니다. 한때 아무리 잘 했어도. 좌산상사님께서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리 시에서 담배를 피다가 툭 던졌는데 무념 잠깐 했는데 그 기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서 반경 몇 km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던지는 그 잠깐의 무념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피해를 냈습니다. 운전했을 때 잠깐 무념해도 앞에 사람이 탁 끼어들어서 추월해서 브레이크를 밟으면 14중 추돌이 일어납니다. 순간의 감정에 무념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을 챙기지 못한 방심, 감정에 속아버린 그 무념이 자기는 감옥에 가게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유무념은 원불교 수행의 귀결점입니다. 유념(有念)을 하냐 무념을 하냐에 신용 있는 사람이 되냐, 주의 사람들로부터 실패하며 조롱 받는 사람이 되느냐는 유무념의 큰 차이입니다. 유무념에 학식이 필요한가요? 그런데 이왕이면 그 유념, 무념을 챙기는 마음으로만 하지 말고 기록 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인하고 당일의 유무념을 체크해야합니다.
무형의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고 하잖아요. 다리에 힘이 있는 사람은 산에서 내려오면 다리가 부들거립니다. 마음에 힘이 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일 대조했더니 달라집니다. 그래서 자동이 됩니다. 저는 신발 벗는 것은 자동적으로 됩니다. 저는 들어가는 방향으로 신발을 벗는 것이 천 번을 벗어도 한번 있을까 말까합니다.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생활 속에서 유무념의 반복 훈련을 통해 기질 변화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무념을 통해 습관이 바뀌고 기질이 바뀌어야 교화력이 있는 것이지. 뭐라고 해도 바뀌지 않으면 자괴감만 들고 “이 생에는 안 되는 가.”보다 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학식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학습상황. 수양과 연구에도 유무념은 있습니다. 내가 법회에 얼마나 참여했느냐. 여러분 정말 평등한 것은 시간입니다. 남녀평등, 유무념에 상관없이 시간은 똑같은데 어떤 사람은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퇴보하느냐. 그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썼느냐, 비생산적으로 썼느냐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신심 있는 사람은 대종사님 법대로 시간을 잘 쓴 사람입니다. 신심 있어보여도 리모콘이나 돌리는 사람이 신심 있는 것인가요?
계문을 우습게 알다가는 계문한테 당할 것입니다. 계문을 확실히 지키려 하다보면 계문의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계문을 해보면 31일까지 다 있는데 그 개수, 원불교는 수기법 수자를 기록하는 수기법입니다. 숫자를 적지요. 무슨 숫자에 몇 개, 몇 개 그래프를 그리면 범계(犯戒)의 수가 늘면 강급(降級), 줄면 진급인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사법으로도 해주셨습니다. 상시일기는 마음이 어떻게 진급했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이며 죄, 복 결산서입니다.
“신과 함께”에서 재판을 하지요? 자기가 자신을 재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니 스승에 대한 신(信)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누가 주고 누가 받냐,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습니다. 자기가 심판합니다. 그래서 일기는 죄복의 결산이요. 복과 혜의 그래프요, 수행의 정진표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일기를 기재하지 않는 교도는 원불교 교도로서 점수를 많이 줄 수 없습니다. 특히 상시일기는 삼학의 종합입니다. 일기를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삼학 공부의 무엇인가가 누락 되었습니다. 상시 일기 기재하는데 10시간 걸리나요? 밥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고 너무 오래 걸려서 일기를 못 쓰지요? 계문 그거 1,2 분이면 끝납니다. 늘 어기던 것 어기게 되어 있습니다. 뻔합니다. 그런 거 쭉쭉 체크하다보면 시간 금방입니다. 그 시간을 못 내서. 어려운 것 중에 어려운 것이 날마다 반복하는 정성같이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며칠간 선방 가서 훈련할 수도 있지만 특히 지속적으로 원불교에서 정기훈련 잘해서 상시훈련을 잘하자는 것이지요. 정기 일기는 일 년 중에 이만큼 밖에 안 되고 실제는 상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이 상시 훈련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기훈련입니다. 실제로는 많은 시간은 상시에서 보냅니다. 짓고 받는 것은 교당 아닙니다. 교당 일생 중에 얼마나 오나요. 겁나게 온 것처럼 해도 일주일 중에 몇 시간 안 됩니다. 거의 95%는 상시, 학교, 직장,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당 훈련은 5%도 안 됩니다.
95%이상의 내 시간을 대종사님의 삼학 공부로 마음을 챙기고 살 것이냐는 것이지요. 교당 올 때만 마음공부하고 영혼 좀 털어내고 하면 대종사님의 일원대도(一圓大道)의 세상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당에서 배워다가 상시에서 제대로 써 먹을 것이냐는 것이지요. 상시에는 수양, 낮에는 보은봉공, 밤에는 참회의 시간을 보내니 기질이 바뀌고 지혜도 밝아지고 자기가 거울을 봐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거울 볼 때마다 하나도 안 바뀝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양심적으로 하면 자기가 하면 지가 예쁩니다. 그런데 아니면 누구에게 사랑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내 스스로가 예쁘고 안 예쁘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잘 살고 오면 일원상 보고 즐겁고 대종사님 보고 기쁩니다. 그런데 잘 못 살고 오면 교무님, 일원상, 대종사님 보면 부끄럽습니다. 결국 자기가 압니다.
1. 당일의 작업 시간 수를 기재시키는 뜻은 주야 24시간 동안 가치 있게 보낸 시간과 허망하게 보낸 시간을 대조하여, 허송한 시간이 있고 보면 뒷날에는 그렇지 않도록 주의하여 잠시라도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지 말자는 것이요. |
우리 정산종사님은 촌음(寸音)이라고 했습니다. 빛의 속도는 지구를 1초에 7바퀴 반을 돕니다. 음속은 1초에 300m갑니다. 초음, 그 소리의 마디라는 뜻입니다. 원남 교당에 있을 때 심타원 박순정 교무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 분은 제가 만난 여자 교무님 중에 이분처럼 일 잘 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이분은 쓱 지나가면 일이 되어있습니다. 지금 중도훈련원 건물 스케치를 이분이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여러 일이 있으면 한 일을 하고 방심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쓱 지나가면 뭐가 돼있습니다. 제가 일로 혼나 본 적이 없는데 그 분한테 혼났습니다. 그분은 이 내용으로 보면 허송세월이 없습니다. 일을 미뤄놓지 않습니다. 일 못하는 사람을 보면 마지못해 합니다. 그리고 쟁여놓습니다. 여러분 양말 바로 빠시나요? 설거지, 청소는 얼마나 하시나요? 그것은 그 사람의 시간을 쓰는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아니 밥 먹고 설거지 놔두면 들러붙고 시간 가면 더 하기 싫지요? 특히 저는 밥 차리기 전에 나오는 그릇들은 밥을 내놓을 때 밥을 다 먹고 나면 싱크대에 그릇들이 치워져 있느냐 아니면, 그릇이 그대로 있느냐? 설거지 시간이 다릅니다. 하면서 바로 해야지. 조금 쌓여있는 게 일하기 편해요? 많이 쌓인 게 편해요? 보면 정말로 고생을 안 하고 내 시간을 많이 가지고 편하게 사시려면 바로 하는 것이 편합니다. 물도 덜 쓰고 시간도 덜 쓰고 짜증도 덜 나고 냄새도 덜 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허송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하셨다고 했는데 저는 똑같은 시간을 써도 효율적으로 쓰는 유무념이 플러스가 돼야 합니다. 똑같은 시간을 써도 어떤 사람은 한 시간을 해도 남들 십 분이면 일하는 만큼하고 나는 허송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요?
옛날에 시간을 재테크에 접목하여 시테크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에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A란 사람은 많은 일을 해도 여유가 있지만, B라는 사람은 조금만 일을 하고도 바쁘다고 합니다. 남들이 보면 B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일의 양의 차이가 10~20%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차이 납니다.
얼마나 삼학으로 미리연마하고 순서를 잡고 효과적으로 했느냐에 따라서 그 허송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잘 놉니다. 일을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잘 놀러 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허송시간을 안 쓰는 것을 넘어 시간을 알뜰하게 잘 써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의 아주 싫어하는 문화가 번개 문화입니다. 대종사님 교법에 제일 반하는 사고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큰 코를 다칠 것입니다. 번개 문화는 미리 일정을 안 잡고 “지금 모여라.” 하는 것이지요. 감정적이고 합니다. 젊은 사람은 왜 이리 시간이 안 가나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가며 인생의 자동차가 속도가 붙는데 얼마 안 있으면 곧 갈 날이 다가옵니다. 분명 시간은 똑같이 줬는데 젊을 때에는 시간이 안가니 게임이나 하고 쇼핑이나 하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표가 있고 할당량이 있고 서원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허송세월 보낼 수 있는가. 자기 목표가 명확하다면 허송 시간 별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젊으면 젊은 대로 바쁘고 나이 먹으면 먹은 대로 바쁩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어디 가서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고. 피해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했잖아요. 그 것은 남녀노소 상관이 없습니다. 원불교 생활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실생활에 쓰는 사람이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잘 쓰는 사람이지. 도움이 안 되고, 사람 피곤하게 하고, 귀찮게 하면 대종사님의 법에 반대 아니냐는 것이지요.
저는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했습니다. 저는 인생을 수학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요즘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데 그러면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몇 시간 남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재수한 사람이 똑같은 걸 두 번해도 왜 점수가 떨어지는지 착각하는데. 놀고 여자 만나고 게임하고 했는데 말이 1년 재수지. 시간 계산을 못했다고 봐요. 진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과연 재수생의 1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바쁘다.” 스님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마음은 걸림 없는 마음이니 한가한 사람이지만 수족이 한가한 사람은 원불교 교도 아닙니다. 출가든 재가든 손발이 널널하고 한가한 사람은 초기교단의 대종사님의 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생각합니다.
신심이 있어도 이 허송세월은 줄어들 것이고, 서원이 있어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드린 적 있는데, 인생은 어떻게 살라고 했죠? 인생을 연역적으로 살라고 했죠? 그래서 처음에 견성, 성불하고, 삼대력을 갖춘 후에 마음을 정해서 제중사업을 해야합니다. 음악 기호에 보면 < 크레센도가 있고 > 디크레센도가 있습니다. 인생을 서서히 소리가 커지게 살아야겠지요? 이게 바로 어리석은 사랍니다. 국어로 말하면 연역적으로 살아야합니다. 누가 강연을 해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나중에 이해하게 하면 짜증이 납니다. 처음에 두괄식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고 탁 정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위해서 어떻게 시간을 쓸 것인가. 건축을 해도 백 원짜리를 지으려면 116원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내가 계획 세웠던 것과는 달리 더 돈이 듭니다. 처음에는 설계를 대충했다던가. 사기를 당했다던가 하면 30~40원 더 듭니다. 철저하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앞에 열심히 해도 나중에 사고가 날지 어떻게 아나요. 내가 빨리 견성 성불해서 그 마음으로 내가 제중(濟衆) 사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지금 놀다가 갈 때 되니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 진작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며 죽는 것입니다.
소시(小時)에 대각하고 중년에 제중(濟衆)사업하고 말년은 내생 준비해라는 법문을 좋아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것이 이 육신이 자신의 것인 줄 아는 사람. 불과 100년도 넘게 사는 사람 몇 없는데 천 년 만 년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허송시간을 보내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법문에 나태하지 말고 주색낭유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진리를 연구해야합니다.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해야합니다. 여유가 있는 대로 염불, 좌선해야 합니다. 계문과 상시응용주의사항과 여기저기 법문을 내놓으셨습니다.
시간을 알뜰히 쓴 사람은 마음이 성실하고 습관이 되어갑니다. 나태한 사람은 마음이 나태합니다. 기준이 낮습니다. 그래서 뭐 조금하면 쉬려하고 자기 것 챙기려합니다. 살다보면 일이 내 뜻대로 되나요? 몰려올 때도 있고 늦게 까지 할 때도 있지요. 그러면 평상시에 단련 시켜놓지 않으면 이것은 어렵습니다.
-2부-
상시는 유무념, 학습상황, 계문을 했고 정기 일기법의 첫째는 작업시간입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 허송세월 보내냐? 마냐? “그 시간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보내느냐?”와 같이 연결 되어 있습니다. 가치 있게 보내는 시간과 허망하게 보내는 시간 계산하면 얼마나 나오나요?
2. 당일의 수입, 지출을 기재시키는 뜻은 수입이 없으면 방도를 준비하여 부지런히 수입을 장만하도록 하며 지출이 많을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지출을 줄여서 빈곤을 방지하고 안락을 얻게 함이며, 설사 유족한 사람이라도 놀고 먹는 폐풍을 없게 함이요, |
당일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특이합니다. 당일이 지나서 기재하면 대종사님은 점수를 줄입니다. 당일에 기재하면 점수를 후하게 줍니다. 계문 범과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당일 날 저녁에라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일의 수입 지출을 기재시키는 뜻을 세 가지로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첫째 수입이 없는 경우, 지출이 많은 경우, 유족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이냐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수입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나요? 이 사람은 수입을 늘려야 합니다. 요새 젊은 사람은 마이너스 통장 만들고 카드 긁고 하니 신용불량자가 되지요. 회사에 첫 월급 탈 때 노후를 준비해야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멀리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노인 빈곤 문제가 상당히 심각합니다. 이것은 대종사님 말씀대로 수입 지출에 대해서 지혜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입이 없으면 수입의 방도를 준비하여 부지런히 수입을 장만해야합니다.
직업상에 이런 말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급여가 적습니다. 일은 두 배 이상 하게 됩니다. 수입의 방도를 준비해서 수입을 올리려면 더 멀리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것이 그런 이유지요. 공부를 안했다 하더라도. 요새 국가가 여성들 재취업에 많은 도움을 주고 교육을 해 줍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일 년, 육 개월이라도 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서 하면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생은 두 배로하고 급여는 두 배로 적고 이런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지출이 많은 사람은 지출을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수입과 지출에서 수입이 더 많게 해라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을 가고 싶은데 차비가 없으면 못 가는 것이지요. 갚을 능력이 있으면 빌려서라도 가면 됩니다. 그런데 갚을 능력도 없는데 미국 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우리 인생도 똑같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기부하기 편할까요? 돈이 적은 사람이 희사하기 편할까요? 인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희사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의 가치를 알고 놀러갈 때도 많이 쓰고 쓸 데가 많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안 써서 모릅니다. 시계도 일 억짜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시계가 일 억짜리인지 아는데.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이 기부하기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99원 가진 사람이 1원 가진 사람 돈을 뺏어가기도 합니다. 수입이 많아도 지출을 더 할 수도 있고 수입이 적어도 저축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교무님 월급 알고 나면 교무님은 어떻게 사시냐고 질문 많이 하시는 데 교무님 월급은 최저 시급도 안 됩니다. 물론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지출을 줄이면 제가 술도 안마시고 담배를 피지도 않고, 벌금을 물지 않으니 지출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지요. 옷을 몇 벌을 사겠습니까. 수입이 많다고 하더라도 지출이 더 많으면 돈이 더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출이 많으면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입이 많을 때 보면 부동산이나 보험 같은 거 해야지요. 사업이란 흥망성쇠가 있는데 그러면 보험이나 재산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지출이 많을 때에는 조절해서 그 것을 진리적으로 복을 짓거나 아니면 저축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진리적으로 희사도 하고 저축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놀기만 해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대종사님의 삼학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유족한 사람은 어떻게 하지요? 여행사에서 관광 상품 해서 유럽도 가고 미국도 가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것. 수입은 지출보다 늘리는 것이 맞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지출인데 수입인 경우가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수입인데 수입이 아니라 지출인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손자 돌 기념으로 기도비를 냈습니다. 그건 지출이지요. 그런데 그 것이 지출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지출이지만 진리적으로는 수입입니다.
대종사님이 놀고먹는 폐풍(弊風)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물론 여행 얼마나 필요하고 재미있습니까. 새로운 환경, 먹거리 일을 놓고 가까운 사람과 여유 있게 즐기는 것. 그런데 이것이 자기 형편을 넘어서면 업이 되어버립니다. 대종사님은 서울서 이리까지 비행기 타보셨는데 정산종사님은 안타보신 것 같아요. 대산종사님은 하와이 훈련원에 갈 때 한번 타보셨습니다. 그 분들은 자기의 취미 생활은 없습니다. 물론 대종사님도 제자들 데리고 산에 가서 찍은 사진도 있지요. 그러나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것으로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요.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 분들은 왜 어릴 적부터 기도를 하고, 스승을 찾고, 일생을 기쁜 얼굴로 사실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과, 낙은 같은가 다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을 씀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여기 쓰고 어떤 사람은 저기 씁니다. 무슨 차이이지요? 자기 형편 따라 쓰지만 자기 관심 따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정산종사님께 천만 원 드리면 다 공적으로 쓰시겠지요. 그런데 하은 교우한테 천만 원을 주면 걱정이 되지요. 수입과 지출 경제적인 면에 대해서 인과의 원리가 있고 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면 마음대로 쓰면 될 것 같지만 그 것이 과연 내 돈인가요?
기업 회장이 돈이 많이 있는데 내가 이 돈을 이 회사 소속의 노동자 직원들의 노력으로 번 것이고 국가 사회의 많은 도움을 받아서 이 수입이 있었고 천지자연의 많은 호렴(護念) 속에서 생긴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쓰겠습니까. 어떤 것도 내 것이 없습니다. 돈도 알고 보면 변하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입 지출을 기재할 때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좋지 않을 까합니다. 그래서 수입 지출을 볼 때 현실적 수입 지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적, 영생적 수입 지출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요. 받는 자가 주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은 돈 이야기 하면 도인 아니었는데 대종사님은 아니었습니다. 차별의 세계에서는 정확한 것이 중요합니다. 무차별의 세계는 분별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입 지출을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이 답입니다. 정기 훈련에서 수입 지출도 없는데 왜 하라고 하셨나요.. 대종사님의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제가 원남 교당에 있을 때 교보 신회장님 부인이신 보타원 유보명원님이 계셨습니다. 이분 교향이 강진인가 그럴 겁니다. 강진에 자신이 태어나셨던 곳에 교당을 희사 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굴비를 싸게 팔고, 그 수입금을 봉공회에 씁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 쓸 자리는 쓰고 아낄 자리는 아낍니다. 또 교보에 가면, 프랑스 요리하는 곳에서 대접합니다. 서울대 부총장이셨던 보산 고문국 이 분은 변기에 벽돌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물이 깨끗하면 다시 화단에 버리시던가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복지관 관장, 미국 선학대학 총장하실 때 당신 급여 100% 다 희사 하였습니다. 그러니 출가위시지요. 당신 양복이 20년 입은 양복입니다. 아흔이 넘으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청렴하신지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이 두 가지를 중도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근검할 자리와 활용할 자리를 중도 있게 조절해서 써야합니다.
수입을 늘리는 방법은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미래사회는 직업이 10번이 바뀔 수 있다. 대종사님은 심법을 하라고 했습니다. 장관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전문가들을 차관, 국장이 더 전문분야 잘 압니다. 그러나 장관은 그 세세한 분야는 모르지만 전체를 보고 사람을 다룰 줄 알고 예산을 잘 끌어올 수 있고 전체를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의 마인드가 어떻느냐? 그 사람의 인격, 삼대력(三大力)의 종합적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엊그저께 청년 회장이 전 대통령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능력에 마이너스가 붙어버리니, 더 많은 죄업을 짓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 뛰어난 능력에 도덕성이 없으니 그 뛰어난 능력만큼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이 안에 복과 혜, 영(靈)과 육(肉), 이(理)와 사(事) 이 문제를 사실 복혜를 쌍전하고 영육을 쌍전하고 이사를 병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생각할 것은 한쪽만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유리한 것만 가져오니 도학과 과학을 빗대면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과학을 병진해라고 했지 하니 도학을 적게 하고 과학을 합리화하는 데 대종사님의 병진을 이야기면서 아전인수로 끌어들이더라. 건강 관련으로 한 사람이 영육쌍전(靈肉雙全)이라고 하면서 수양은 안하더라. 쌍전을 하는 데 도학이 주(主)이고 지혜가 주(主)이고 영이 주이고 이치가 주입니다. 원래는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더 근간은 그 중에서 주종은, 본말은 뭐냐고 한다면 근본은 도학이요 지혜이고 영이 근본이고 이치가 근본인 것입니다.
3. 심신 작용의 처리건을 기재시키는 뜻은 당일의 시비를 감정하여 죄복의 결산을 알게 하며 시비 이해를 밝혀 모든 일을 작용할 때 취사의 능력을 얻게 함이요. |
당일의 시비를 감정하여 죄복의 결산하는데 그 시비가 죄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신작용의 처리건 심신작용을 불교에서는 신구의 삼업이라고 합니다.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킨다고 하였지요.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심신작용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법신불 사은이시지만 자기의 심신작용이지요. 즉 어떤 경계가 왔을 때 어떤 심신 작용의 처리를 이리 할지 저리 할지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누가하나요. 자기가 해야 합니다. 결국은 모든 선택은 자신이 합니다.
이 심신 작용 처리는 결국 시비이해입니다. 시는 이가 되고 비는 해가 되는 것이 인과 과입니다. 옳은 것은 이익이 되고 틀린 것은 해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득이 되냐 손해가 되냐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시가 있기에 이가 되고 그 이는 복이 되고 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가 되는 것은 그 것은 손해가 되고 죄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 들어가면 이 시비이해는 바로 마음이 들어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이치의 마음이고 대소유무의 마음입니다. 감각 감상과 심신작용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대소유무의 마음에 근간해 시가 비가 되고 비가 시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노인이 아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그러니 저 자식은 불효자라 하는데 그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럽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도 해주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이 발을 내준 것이지요. 보는 마음에 따라서 시가 되고 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뢰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에 따라서 시가 되고 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가계부 좀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인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요? 가계부를 보자고 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여기에 신뢰와 사랑이 있으면 보자고 해도 괜찮고 안 봐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보자면 열 받고 안 보자니 불안한 것이지요.
과거의 도인은 대소유무(大小有無)의 이치만 알고 견성하면 도인(道人)이라고 했는데 현대의 도인은 대소유무를 통해 일을 얼마나 잘하냐는 것입니다. 원불교 도인은 일 잘하고 실적이 있고 맡으면 발전시키는 사람이 도인이고 삼학의 능력을 갖춘 것입니다. 맡겨놔도 실적이 없고 회사가 마이너스면 그러면 무엇인가 한쪽에 치우친 것입니다. 공부이고 사업입니다. 공부해서 사업 잘하자는 것입니다. 유지비 많이 내시라는 말입니다. 신심 있는 것 같은데 막상 헌공은 안하지요. 그것은 공부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가 되고 복이 됩니다. 도가 되고 덕이 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잘 쓰자는 것이지요. 원불교에 들어와서도 도가 근간이 되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신 작용을 잘하고 시비이해를 잘 운전하자는 것입니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가지고 심신 작용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철저한 변의 세계이고 차별의 세계입니다. 이는 불변의 세계, 무차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어떤 상대성도 다 절대성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통 자기 편한 것만 취합니다. 그러니 원불교에서는 공부성적 사업 성적을 합쳐서 원성적으로 치지요. 대종사님은 도학에 치우칠 수 있는 것을 과학 쪽에도 써서 균형을 이루는 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은 감각 감상이 많습니다. 여자 분들은 심신작용 처리 건이 많습니다. 설사 그 사람이 이치를 봐서 하더라도 실지 경계에서 감정과 생각과 그 것을 어떻게 쓸 것이냐는 것이지요. 견성(見性)한 것처럼 보여도 감정이 상하면 다 던져버리지요. 교당 안 온지 오래된 사람에게 한번 문자를 했지요. 지 혼자 오해해서 안 나옵니다. 아직도 그 감정이 안 놓였습니다. 한 때 지가 신심 있는 것처럼 했지만 아무리 그 사람이 견성한 것 같고 해도 그 감정하나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 집착하고 원망심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감정이 상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그 고통만 생각하지 말고 그 원인을 생각해보아라. 그 인과의 과만 생각 말고 인을 생각해보아라. 그 원인의 이면에 대소유무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신작용을 처리 건을 기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 연구부 사업보고서(원기13년)와 육대요령(원기17년)에 나타난 중요문구 변화
처리건 공부순서
내 용 | ① | ② | ③ | ④ | ⑤ |
경계를 당하여 | 심신작용처리의 공부표준으로 처리 | 그 처리한 실경을 기재 | 제 출 | 감 정 | |
원문 (원기 13년 연구부 사업보고서) | 순역간의모든 경계를 당하야 |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를 몬저 한 후에 그 일을 처리하고 | 그 처리한 실경을 별지에 등서하여 | 교무부에제출하면 | 교무부에서난 종사주의 감정을 마쳐 시비이해와 선후경위를 밝혀 준다. |
원문 (원기 17년 육대요령) | 생 략 (심신작용처리건의 동기유발적인 측면 강조 문구 삽입) | 작용처리건을 기재시켜서 | 생 략 | 당일내의 시비를 감정하야 죄복의 결산을 알게 하며
또는 시비이해를 알려서 ---취사의 권능을 얻게 함. | |
중요 변화 |
| 실경을 별지에 등서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기재라는 용어 등장(의미는 동일) |
| 당일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 일기는 당일에 기재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음.
처리건의 기재 목적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짐. |
심신작용 처리건의 기재방법 ① 주제를 결정한 후 기재한다. ② 당일에 일어난 심신작용 처리건을 기재한다. ③ 경계를 당해 심신 처리한 상황(온전한 마음을 챙겨 시비이해를 정확히 분석해 시(是)는 취하고 비(非)는 버리는 심신작용 처리의 공부를 표준하여 일을 처리한 상황)을 주관성은 빼고 제3자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기재한다. ④ 시비이해를 밝히는 내용이 나타나도록 기재한다. ⑤ 기재 도중 주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기재한다. |
주제를 쓰라는 것은 그 건에 대해서만 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 복잡해집니다. 그 건에 대해서만 하면 그 주제는 명료해집니다. 당일에 일어난 심신작용처리건. 경계를 당해 처리한 상황을 그대로 기재하면 됩니다. 어떻게 시를 취하고 비를 버렸는가. 자기의 주관을 빼고 제 3자가 되어 기재해야합니다. 물건을 3개 팔았다 할까 4개 팔았다 할까가 아니라 판대로 쓰면 됩니다. 그래서 일기는 한 줄 두 줄이어도 더 좋은 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에 대한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거기에 대한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인의 일기와 다른 것입니다. 기재(記載) 도중에 주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미사여구를 쓰지 않는 것입니다.
날짜 | ① 주제 결정 | ② 당일 기재 | ③ 객관성 | ④ 주제 유지 | 감정 |
7월 8일 | ○ | ○ | ○ | ○ | 5甲 |
⑤ 온전하게 시비이해를 밝혀 취사 | |||||
상시응용주의사항을 놓지 않고 공부했을 때(是)의 이로움(利)과 머리 아픈 경계를 당하여 며칠 동안 상시응용주의사항 공부를 놓고 지냈을 때(非)의 해로움(害), 즉 시비이해를 분석해보면서 주의사항 공부를 떠나서는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을 알아 절대로 이행하리라 맹세한 처리건이다. - 박길선 일기 - |
대종사님이 답을 주실 때 정도가 있었습니다. 대종사님 따님 박길선 일기를 보니 대종사님이 점수를 준게 있어요. 대학원에서 분석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상황을 쓰고 그 상황에 대한 작용을 쓰고 그 처리를 어떻게 됐는지 쓰면 됩니다. 대종사님은 주제를 보고 당일 썼는지 보고 객관적으로 썼는가? 그리고 유지했는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취사했는가 보면 됩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상황, 감정과 처리 이 세 개만 쓰면돼요. 박길선 일기를 보시고 당일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교법과 연결하면 5갑을 주셨습니다.
4. 감각이나 감상을 기재시키는 뜻은 그 대소 유무의 이치가 밝아지는 정도를 대조하게 함이니라. |
전체를 볼 때는 대(大)고, 각각이 소(小)지요. 이것이 유무로 변화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산을 봐도 자연을 봐도 어떤 모든 것을 봐도 대소유무로 가려내고 묶을 줄도 알아야합니다. 어떻게 대소유무를 보통급, 특신급부터 쓰나요. 미리 쓰면서 그 세계를 단련해라는 이야기입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훈련에서 오늘 일기를 어떻게 쓸까 하고 다녔습니다.
어찌 보면 대종경을 보면 대종사님의 감각감상과 심신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심신작용과 감각감상이 있는데 여러분도 법문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재보험을 보시고, 돼지 암수가 노는 것을 보고 이청춘이 인생의 무상을 느끼는 것도 감각감상이지요. 먼저 경계를 볼 때 이치에 대한 생각 깨침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기재 후에 스스로 감정을 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바자회 끝나고 보면 밥 먹고 나면 소득을 이야기 해보라고 합니다. 일 속에서 이치가 연마되고 그 속에서 공부가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기재해서 단장이나 지도인에게 제출해서 그 지도인은 감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잘했으면 잘했다 이것을 이리 해봐라 지도인과 피 지도인의 관계가 순환되게 되어있습니다.
주제를 정하고 당일 쓰고 진리성이 있고 이치에 밝아지는 정도를 대조하는 것입니다. 대소유무에 대해서 이것을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특히 볼 때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를 대로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까지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는 떠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갑을병정의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3갑을 받은 박길선 일기
날짜 | ① 주제결정 | ② 당일기재 | ③ 진리성 | ④ 주제유지 | 감정 |
5월 23일 | ○ | ○ | ○ | ○ | 3甲 |
⑤ 대소유무의 밝아지는 정도 | |||||
등불보고 벌레들이 모여들어 뜨거운 훈기에 혹은 불에 타서 죽기도 하고, 또는 등불 가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불이 벌레들을 오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제 성질을 나타내고 있건마는 벌레들이 불을 탐함으로 가서 자취멸망하게 되니, 이는 저 벌레들이 정신이 혼미하여 죽을 것을 알지 못하고 탐심으로 저지른 연고입니다. 그러나 최령하다는 사람도 역시 이러한 벌레들처럼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십계문을 오욕에 침몰되어 가지고 지내는 불량자를 보십시오. 창기의 방에 가 술과 가무로써 지내고 또는 잡기와 도적질, 간통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뒤에 잡혀가고 끌려가며 집안을 망하게 하고 제 몸이 죽게 되어도 그 원인이 어디서 난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경계를 원망하니, 어찌 어리석지 않으며 미물과 마찬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계가 사람을 끌어간 것이 아니라, 그 재물과 색과 먹는 것이 천연으로 제 성질을 나타내고 있는데 정신이 혼미한 자들이 탐심으로 자취멸망을 하고 나서 그 경계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 배우지 못한 소치라. 우리는 어서 속히 삼십계문을 다 떼어 인생으로서 최령한 가치를 찾아냅시다. |
그리고 제가 쓴 일기
감각감상 김제원 범죄자와 일반인의 차이
어느날 신문을 읽다가 이수정· 김경옥이 공동으로 지은 책 <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의 내용에 범죄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순간적인 자제력'의 유무일 뿐이다. 순간적인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는 자존감이 키워드다. 자존감은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는 글이다.
이 글은 우리의 교법을 그대로 증명한 책의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자와 일반인은 차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듯이 우리의 법에 중생과 부처가 본래 둘이 아닌데 심신작용 처리 여부에 있다는 것과 상통한다. 원불교에서 밝힌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 먼저 내가 부처라는 믿음과 성불제중 · 제생의세의 서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책에 나온 바와 같이 자존감은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믿음이다‘는 내용과 거의 같다. 우리 교법에는 믿음과 서원에 바탕하여 정신수양이 필요하고 사리연구 작업취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 나온 순간 자제력은 STOP(멈춤)의 수양력 취사력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우리의 존재는 평등하고 소중한 부처님인데 자존감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은 순간 자제력이 더 약하다는 것을 데이터가 증명하고 있다. 대종사님께서 일상수행의 요법을 설명하시다가 ‘먹기만 먹으면 선약인데’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더 다가오는 행복한 하루였다. 먹기만 하면 참 좋은데..... |
그래서 일기를 잘 쓰면 ,상시에 연결이 되고, 복과 혜를 아우르는 영육쌍전(靈肉雙全), 이사병행(理事竝行)의 길이 열린다. 일기는 사리연구입니다. 이 일기를 잘 기재하다보면 제가 법회를 세 개 이상 보는데 무엇이 나서 하나요. 제가 대종사님 법을 전달하지만 제가 받은 경계 속에 얻은 것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정기일기를 잘 기재하다보면 일과 이치에도 밝아질 뿐만 아니라 무량 교화의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일기를 쓰다보면 처음에는 문장에 대한 두려움이 많지만 “나도 자서전 하나 써 볼까?, 일기로 하나 내볼까?” 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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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벽하게 초벌 타이핑하신 현승교우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완성하기 좋았습니다.
은혜롭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멋져요. 현승, 밀운교우님!
댓글 감사합니다.부장님
현승 밀운 교우님 감사드려요!
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