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꼬마 도깨비는 시무룩한 채 뒷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도깨비 어머니가 “너는 왜 늘 앞서서 말썽만 부리니? 그러려면 차라리 중간에 서서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중간에 있으면 아무 탈이 없단다.” 하고 꾸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꼬마 도깨비는 어떻게 하면 중간에 서서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꼬마 도깨비는 늘 중간에 있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중간 자리에 있으려고 했습니다. 줄을 서도 중간, 식사를 해도 중간, 옷이나 신발을 사도 중간, 학교 성적도 중간, 친구도 중간(평범한 아이)만 사귀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꼬마 도깨비가 있는지 없는지, 학교에서도 꼬마 도깨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마 도깨비가 혼자 있을 때 어떤 수행자가 집 문 앞에 발우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꼬마 도깨비는 점심 때 먹으려고 놓아 둔 밥 중에서 절반을 수행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날 오후 꼬마 도깨비는 들판에서 뛰놀았습니다. 그때 대학생 몇 명이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꼬마 도깨비는 큰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서 대학생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형, 누나들. 어떻게 하면 너무 앞서지도 않고 너무 뒤처지지도 않게 중간에 설 수 있을까요?” 한 대학생이 말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단다. 예를 들어볼게. ①적이 나타났을 때 <비겁>하게 굴지도 말고 <만용>을 부려 무모하지도 말고 <<용기>>있게 행동하기. ②내가 돈을 벌었는데도 <인색>하여 옷도 안 사 입거나 밥을 굶지 말고 <낭비>하고 과소비하면서 버는 족족 다 잃어버리지도 말고 <<절약>>하기. 이렇게 하는 것이 중간에 서서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인터넷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검색하여 참고)
꼬마 도깨비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도 몰랐고, 대학생들이 들려주는 말도 금방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꼬마 도깨비는 중간치기로만 있었습니다. 그냥 중간에 서서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중간에 있으려면 그 상황에서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게 행동하는 윤리의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라고. 그래서 꼬마 도깨비는 집에 돌아가서 대학생이 들려준 중용을 연습했습니다. 예를 들면 맛있는 요리가 있을 때 단식하는 사람처럼 안 먹기도 아니고, 또 게걸스럽게 먹어 배탈 나게 하는 것도 아닌, 알맞게 맛있게 먹는 <절제>를 실천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양 극단을 피하고 윤리학에서 말하는 중용을 실천하자 자신보다 뛰어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다가왔습니다. 그들 중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여기를 한번 봐, 이 중용은 어떻니?” 꼬마 도깨비가 그 문장을 읽었습니다.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하지(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중용 1장 중에서)
꼬마 도깨비는 참으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 뿐만 아니라 중용 1장 전체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날부터 꼬마 도깨비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성품을 잘 간직하고 길러서 사람을 만날 때 알맞게 표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쁨을 한 없이 누리지도 않고 슬픔을 한 없이 겪지도 않고, 분함을 한 없이 풀지도 않고 즐거움을 한 없이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의 성품을 해치지 않도록 하고, 또 온전하게 보전하고 잘 기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꼬마 도깨비는 착하고 바르고 예의를 갖춘 점잖은 학생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마 도깨비는 들판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들이 큰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나서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모두 눈을 감고 조용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꼬마 도깨비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그쪽에서 한 사람이 다가와서 지금 자신들은 주먹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함께 먹자고 했습니다. 마침 꼬마 도깨비는 배가 고팠으므로 그를 따라가서 인사를 드리고 함께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꼬마 도깨비는 갑자기 퀴즈 놀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빙청 선인 일행에게 ‘중(中)’이나 ‘중도(中道)’나 ‘중용(中庸)’에 대해서 자신이 내는 문제를 맞히면 선물을 하나씩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깨비 방망이를 꺼내 ‘금나와라 뚝딱’하니까 정말로 금 한 덩이가 나왔습니다. 이에 빙청 선인이, 수행자는 문제를 맞힌 대가로 선물을 받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니, 그대는 우선 문제를 내고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꼬마 도깨비는 수행자께서 맞힌 문제만큼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꼬마 도깨비가 문제를 냈습니다. “중(中)이란 무엇입니까?”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중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끎’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꼬마 도깨비는 깜짝 놀랐습니다. 보통 중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거나 ‘이 끝과 저 끝의 중간’으로 이해하는데, 빙청 선인은 중을 ‘고멸(苦滅)로 이끎’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꼬마 도깨비가 예를 하나 들어달라고 하자 빙청 선인은 단견과 상견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지 못하지만 중에 의해서 설해진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발생 구조를 밝혀 주므로 우리가 그 고리를 끊어내면 괴로움의 소멸로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하도 □□□□의 글 참조)
꼬마 도깨비가 계속 물었습니다. “중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끎(고멸(苦滅)로 이끎)이고, 그런 중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 십이연기라면, 그럼 중도란 무엇입니까?”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중도란 소유적 사유를 잘 알아 여기에서 벗어나고 고행도 잘 알아 거기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팔정도)을 직접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꼬마 도깨비는 이번에도 매우 놀랐습니다. 중도는 보통 알고 있는 ‘이 길과 저 길의 중간 길’이 아니고, 두 가지 길(소유적 사유와 고행)의 끝을 충분히 잘 알아서 그것들이 틀렸기 때문에 고멸(苦滅)로 이끄는 올바른 길, 팔정도를 실천한다는 뜻이라고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꼬마 도깨비가 ‘중용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빙청 선인이, 중용은 유학에서 말하는 덕목인데,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라고 대답했습니다. 꼬마 도깨비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서 빙청 선인이 맞힌 문제만큼 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꼬마 도깨비는 오늘 들은 것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①중(中) - 괴로움의 소멸로 이끎(=고멸로 이끎)
②중(中)에 의해서 설해진 것 - 십이연기
③중(中)인 것 -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것(=고멸로 이끄는 것)
④중도(中道) -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팔정도)을 실천하는 것.